생애를 통한 키슬러의 활동을 살펴보면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생애를 통한 키슬러의 활동을 살펴보면 지난 동안 우리들이 취해온 전문화의 경향이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의 활동을 구속해왔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여기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우리는 20세기가 시작되고 20여 년 간 유럽 각지에서 열병과도 같이 행해진 예술혁명의 동향에 관해서 다시 한 번 ‘역사박물관’의 정리함을 해체하여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만큼 실험적인 목적을 지닌 예술가가 국가나 도시를 초월해 나름의 주장을 펼치면서 유럽 대륙을 누빈 시대는 없었다.
물론 다양한 영역에 걸친 조형 활동을 전개했던 예술가들도 결국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말았으나, 그 이전의 그들은 다양한 영역에 걸친 실험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탐구했었다.
키슬러도 빈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을 자유롭게 왕래했던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소비에트 공화국의 체제강화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로 유럽의 지적 환경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 때문에 예술혁명의 범주를 넘어서 문화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운동들이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예술에 대한 진보적인 사상의 소유자들 중 어떤 이는 전사했고, 어떤 이는 전향했으며, 어떤 이는 추방당했고, 어떤 이는 숙청당했으며, 어떤 이는 망명했고, 심지어는 자살한 이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어렵사리 살아남은 예술가들 중 몇 명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의 자유로움과 풍요 속에서 1920년대 그들이 추구했던 사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실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문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완성’시키고자 노력했다. 전후의 상황은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들의 활동을 어떤 전문영역에 집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좋든 싫든 그들이 ‘인사이더’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술가가 스스로의 세계를 일정분야에 한정시킨다는 것은 인사이더가 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4)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키슬러는 마지막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친 활동과 실험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키슬러야말로 1920년대의 실험정신과 혁명의 실천이라는 20세기 미술 고유의 목적을 고수한 진정한 생존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와 같이 작가가 남긴 작업의 결과만 가지고는 충분한 평가가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따라서 키슬러의 활동과 20세기 초 유럽의 지적 영역 사이에 중복된 부분을 가능한 한 생생하게 파악하는 것이 그의 평전을 적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나치의 유태인 말살계획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갈등과 이에 따른 지식인의 미국망명,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관해서는 미국의 20세기 건축에 대한 바우하우스 지도자들의 공헌에 대하여 적고 있는 윌리엄 H. 조디의 『미국에서의 바우하우스의 여파/그로피우스, 미스, 브로이어 The Aftermath of the Bauhaus in America: Gropius, Mies, and Breuer』가 상세하다.
유럽에서 망명한 현대건축의 거장들은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키슬러는 미국에서도 여전히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고수한 인물이다.
앞의 책에서 조디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므로 인용해둔다.
다음에 거론해야 할 인물로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레데릭 키슬러를 들 수 있다.
그는 건축, 무대디자인, 조각, 회화를 포함하는 시각예술의 전 영역에 걸쳐 활동했으나, 그가 미친 영향은 생전에는 아직 결정적이지 못했으며 마치 갓 싹튼 새싹과도 같이 한정된 범위에 그쳤다.”1 (볼드체에 의한 강조는 저자에 의함)
키슬러가 미국에서도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후에 논하겠으나, 그것은 기계기술문명 하의 예술에 관한 자성의 결과 취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