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
가장 오래된 판본인 『곽점초묘죽간본郭店楚墓竹簡本 노자老子』에 대한 풀이, 최재목
『곽점초묘죽간본郭店楚墓竹簡本 노자老子』는 중국 초楚나라 때의 무덤(약 2300년 전)에서 출토된 죽간竹簡의 형태이다.
『노자老子』(혹은 『도덕경道德經』)는 노자老子라는 인물 혹은 그 동조자나 후계자의 격언집 그대로가 아니라 여러 인물들의 개작 작업을 거쳐서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판본으로 틀이 잡힌 뒤 다시 시간이 지나면서 정비 작업이 가해져 완비된 형태의 현재의 판본이 이뤄진 것이다.
노자老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사마천司馬遷(BC. 145?-86?)이 쓴 『사기史記』 속의 「노자신한열전老子申韓列傳, 노자老子, 신불해申不害(BC. ?-337?), 한비韓非(BC. 280?-233)에 관한 열전」(약칭 「노자열전」)에 나온다. 『사기史記』는 후대에 원본을 보완, 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기史記』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노자老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의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를 담聃이라 했으며, 주周(東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관리史였다. 공자孔子가 주나라로 (그를) 찾아가서 예禮에 대해서 묻자 노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옛날 사람(유명인들)은 이미 그 육신과 뼈가 썩어 없어져버렸고 오직 말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오. 또 군자라는 사람도 때를 잘 만나면 수레를 타고 다닐 수 있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쑥대밭을 걸어다니는 것이오. 나는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한 곳에 보관하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물건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덕을 많이 쌓은 군자의 태도도 겉보기에는 어수룩하게 보인다’고 들었소.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그대는 교만함과 욕심을 버려야 하며, 잘난 체하거나 뽐내지 말아야 하고, 쾌락을 멀리 하길 바라오. 그런 것들은 그대에게 무익한 것들이오. 내가 그대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오.”
공자는 돌아가서 제자에게 말했다.
“새는 날 수 있고, 고기는 헤엄칠 수 있으며, 짐승은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달리는 놈은 그물을 쳐서 잡고, 헤엄치는 놈은 낚시로 잡으며, 나는 놈은 활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용龍은 잡는 방법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오늘 노자를 뵈었는데 마치 용과 같더라!”
노자는 도道와 덕德을 닦았는데, 그 학문은 자신을 숨기고 이름 없이 사는 이른바 자은무명自隱無名을 추구했다. 그는 주나라에 오래 머물렀는데, 주나라가 쇠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떠나 관소關(하남河南 섬서陝西에 있는 함곡관函谷關으로 추정)에 이르렀다. 관문을 지키는 우두머리關令인 윤희尹喜가 “선생님께서 은둔하려 하시니, 어려우시더라도 저에게 저서를 남겨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노자는 도道와 덕德에 관한 5천여 자의 상, 하편 저서를 남기고 관소를 떠났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의 행적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공자가 예를 물었다는 노담老聃은 『곽점초묘죽간본郭店楚墓竹簡本 노자老子』(초간본)을 쓴 사람으로 공자보다 나이가 많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의 인물로 도가의 선구자이다. 뒤에 『노자老子』를 저술한 태사담太史儋은 공자 사후 129년(실제로는 106년)인 ‘진秦 헌공獻公 11년(BC 374)조’에 언급되는 전국시대 중엽의 인물이다. 태사담은 초간본을 다시 정리하면서 새로운 문자와 학설을 첨가하여 『노자老子』를 썼다. 노담과 태사담의 연대 차이는 적어도 100여 년이다. 『노자老子』는 저자, 내용이 다른 두 가지, 즉 노담의 초간본과 태사담이 초간본을 개작한 『노자老子』가 이어서 나왔다. 전자는 춘추시대 말기나 전국시대 초기의 것이며, 후자는 전자보다 100여 년 뒤인 전국시대 중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초간본 『곽점초묘죽간본郭店楚墓竹簡本 노자老子』는 공자의 선배였던 노담의 원본을 개작한 것으로 보이고, 이 책은 늦어도 전국 초에는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으며, 100여 년 뒤 태사담이 『곽점초묘죽간본郭店楚墓竹簡本 노자老子』을 근거로 당시 상황에 부합하는 학설을 첨가해서 개증改增(1차 개작본)했다. 장자莊子(BC 369-286)와 한비韓非는 태사담이 개작한 『노자老子』를 본 사람들이다.
태사담이 개작한 『노자老子』를 다시 개작改作한 것이 1973년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본帛書本(백서란 비단에 글을 쓴 책이란 뜻이다) 『노자老子』(갑본, 을본, 2차 개작본=今本)이다. 백서본 『노자老子』에는 갑본, 을본이 있는데, 전자는 진대秦代의 판본이고, 후자는 한대漢代의 판본으로 보인다. 현재 통행되는 왕필본王弼本 『노자老子』와 같은 것은 백서본 『노자老子』 등 앞선 판본들을 반유가적反儒家的인 이념에 서서 또다시 개작,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진대秦代, 한대漢代의 백서본 『노자老子』, 기원 후 진대晉代의 왕필본 『노자老子』와 같은 개작본은 태사담이 개작한 『노자老子』를 근거로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왕필본王弼本 『노자老子』(왕본王本이라고 한다)는 위魏나라 천재 사상가로 위진현학魏晉玄學을 대표하며 24세로 요절한 왕필王弼(226-249)이란 인물이 19세에 주석을 단 책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현행본 『노자老子』 혹은 『도덕경道德經』은 이것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왕필본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송대宋代 이후의 일이다. 이 책은 문인文人들에 의해 점차 수용되다가 청대 이후에는 기본 교재로 정착되었다.
백서본帛書本의 시기는 기원전 168년경이다. 백서본 『노자老子』에는 갑본, 을본이 있는데, 여기에는 가차자假借字(빌린 글자)가 많다. 이는 선진 및 한 대 초기만 해도 널리 쓰인 글자가 많지 않았던 탓인데, 당시 학습, 상요하던 글자가 3,300자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백서본 『노자老子』의 갑본은 진대秦代의 판본이고, 을본은 한대漢代의 판본으로 보인다. 을본은 갑본을 토대로 다듬어진 것이다. 갑본에 쓰인 많은 가차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표준 글자 속으로 흡수되어 갔고, 그 결과가 을본에 반영되었다. 즉 진秦나라 시황始皇은 천하를 통일한 뒤, 전국 6국의 하나인 진秦의 표준적인 서체를 개혁하여 소전小篆(대전大篆체를 소전체로 개혁하여 진전秦篆으로 만듦)으로 통일하는데, 서동문자書同文字(수레바퀴 간격의 규격 통일, 문자 통일)가 그것이다. 을본은 진의 문자 통일로 많은 문자가 생긴 뒤이며, 또 통일되지 않은 글자가 어떤 표준 글자 속으로 활발히 통일되어 가던 시기에 필사된 것이므로 글자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글자의 면에서 볼 때 갑본보다 을본이 훨씬 통행본에 가까운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선진 및 한 대 초기의 3,300자에 불과했던 문자는 기원후 20년경에 이르러 6,100여 자로 확충되었으며, 동한 때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10,639자가 실려 있을 정도로 글자가 풍부해지게 되었다.
백서본 『노자老子』 갑본, 을본은 두 종류 모두 지금의 체제와 달리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어 『덕도경德道經』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덕도경德道經』의 형태는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도경道經에서는 도만 논하고 덕경德經에서는 덕만 논한 것은 아니며 양자의 내용이 뒤섞여 있다. 백서본帛書本 『노자老子』를 왕필본王弼本 『노자老子』와 비교하면 80% 이상 일치한다. 따라서 거의 같은 판본의 계통에 속한다. 전국 말기의 사상가이자 『노자老子』의 최초 주석가인 한비韓非가 처음 보았다는 『노자老子』는 백서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태사담의 1차 개작본을 다시 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백서본 『노자老子』가 출토되고 20년 뒤인 1993년 8월 중국 호북성湖北省 곽점촌郭店村의 초楚나라 무덤에서 죽간竹簡으로 된 『노자老子』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노자老子』가 출토되보다 2세기 가까이 연대를 소급할 수 있는 것이다. 초간본 『노자老子』는 통행본과 비교할 때 저자 및 저작 시기가 다를 뿐 아니라 사상 내용 또한 큰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노자라는 인물과 『노자老子』에 대한 종래의 주장을 흔들어놓았다. 초간본은 문자 통일정책에 의한 표준 자형字形이 아닌 가차자 등으로 되어 있어 읽기가 쉽지 않다. 1993년 곽점 초묘에서 나온 자료는 그 분량이 이전 것에 비해 적었지만, 춘추 말기에서 전국 초기 사이에 쓰인 도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자료 그리고 공자로부터 맹자로 이어지는 근 150년 동안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초간본은 기원전 4세기 중엽이나 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자사子思(BC 482-402), 자상子上(BC 429-383, 자사의 아들), 맹자孟子(BC 390-305), 장자莊子(BC 380?-300?) 등이 생존했던 시기이다. 이때는 원시 유가와 원시 도가 사이에 현격한 학설이나 사상의 차이가 없이 각각 그 원형이 보장되어 있을 시기라서 그 자료는 더욱 절박한 형태이며, 매우 귀중한 것이다.
초묘에서 출토된 죽간은 모두 804매이며, 이 가운데 글자 기록이 있는 것들은 730매로 보존 상태가 좋고 문자도 선명하여 판독에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804매의 초묘 죽간 가운데 『노자老子』의 분량은 71매이며, 글자 수는 대략 2,046자이다. 이는 통행본 5천여 자의 약 5분의 2에 해당한다. 적은 분량이지만 그 자체로 내용이 온전한 것으로 밝혀졌다. 출토 죽간은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세 묶음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갑甲(39매, 1170자), 을乙(18매, 510자), 병丙(14매, 322자)이라 이름 붙여 세 편으로 나눠 연구했다.
노자의 사상 혹은 그것이 담긴 『노자老子』의 비조鼻祖는 노담老聃이며, 그는 실존인물로 보아야 한다. 노자老子의 노老는 성姓이 아니고 존칭이며, 노자老子는 우리가 흔히 쓰는 늙은 선생old master를 의미한다. 노담은 기원전 571년 이전에 하남성 녹읍현 출생이며, 기원전 535년에서 522년 사이 공자孔子(17-30세)가 방문했을 때, 그에게서 예禮 등에 대한 조언을 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원전 384년에 함곡관에서 윤희에게 도, 덕에 대한 상, 하권 두 권의 5천여 언으로 된 책을 주었고, 기원전 374년에 진 헌공을 만나러 떠난 태사담은 노담과는 다른 인물이며, 백서본 『노자老子』, 왕필본 『노자老子』와 같은 개작본은 태사담이 개작한 『노자老子』를 근거로 이뤄진 것이다.
곽점에서 출토된 초간본 『노자老子』는 통행본의 성립과정에 잇는 것으로 노담, 그 사람의 사상이 기록된 혹은 그의 직계나 그의 뜻에 동조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