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신장론과 인본주의의 결론

3장에서는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았다. 대조를 이루는 두 가지 입장을 살펴보았는데, 그중 하나는 피터 싱어 같은 사람들이 세계적 빈곤의 문제에 관해 제시한 것이고, 또 하나는 낙태문제에 관하여 주디스 자비스 톰슨이 제시한 것이다. 두 가지 주장이 내세우는 주제는 표면상 아주 달라 보이지만, 실상은 같은 문제를 다룬다. 싱어는 다른 이들을 도와야 할 우리의 의무는 포괄적이며 해악을 예방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의 능력으로 그러한 해악을 예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전면적인 부정적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톰슨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타고난 자유와 자율의 권리를 유효하게 보전하려면 부정적 책임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 여태껏 살펴보지 않은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은 이들 두 주장이 각각의 문제 영역에서는 모두 급진주의적인 것으로 비친다는 점이다. 낙태에 관한 톰슨의 주장은 급진주의적 여권신장론의 의제를 내놓았고, 싱어는 급진주의적 인본주의의 의제를 내놓았다. 그렇지만 원칙의 실제적 적용에서 두 입장이 대립적이다. 낙태와 세계적 빈곤의 문제를 놓고 급진주의 주장을 제기하거나 지지하려고 두 사람의 입장을 한꺼번에 채택할 수는 없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잘 다듬어진 몇 가지 도덕이론의 사례를 살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기본 의문을 제기한 다음 그에 관하여 개략적인 토의를 진행해왔는데, 후반부에서는 도덕철학의 주요 이론들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독자들은 아마 각각의 이론에 관한 설명을 읽고 난 뒤에도 확실하게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의 목적은 본래 몇 가지 주요 문제들을 둘러싸고 나타난 여러 이론이 어떤 답을 제시하고 있으며 각각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설령 도덕적 이론화의 출발점으로 제시된 다양한 이론들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 흡족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이 책의 후반부를 다 읽고 나면 좋은 이론은 어떤 것이며 그 이론이 왜 중요한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 토의사항
1.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세계적 빈곤과 굶주림의 문제를 완화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 세 가지를 생각해보라. 그중 어느 한 가지라도 실행한다면 물론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반드시 실행해야 할까? 실행하지 않으면 나쁜 일일까? 제삼세계 사람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도우려고 어떤 일을 하리라고 기대할 권리가 있을까?
2. 피터 싱어는 ‘어떤 나쁜 일을 예방할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나쁜 일을 예방하기 위해 도움을 주었을 때 도덕적으로 중요하면서 상당한 비중을 지닌 어떤 가치를 잃는 일이 없다면, 도덕적으로 그것을 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이 원칙을 따르기로 한다면, 예컨대, 부모가 자녀에게 성탄 선물을 사줘서는 안 되는 것일까?
3. 앞의 사례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를 도울 의무가 전혀 없다는 톰슨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그를 돕는 시간이 아홉 달이나 아홉 해가 아니고 단 9분에 지나지 않는다면 얘기는 달라질까? 하나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실행해야 옳은지의 여부는 그 행위가 얼마나 부담스런 것인지에 따라 정해질까?
4. 부정적 책임을 내세우는 주장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우리의 적극적 행위로 빚어지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듯이, 어떤 결과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 도움이 될 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 일어날 결과에 대해서까지 똑같이 책임져야 할까? 아니면 우리의 부정적 책임에 한계가 있을까? 다음 한 쌍의 사례를 생각해보라.
(가) 스미스는 여섯 살배기 사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어느 날 저녁 그 아이가 목욕할 때, 스미스가 몰래 숨어들어와 아이를 물에 잠기게 하여 죽인 뒤 우연한 사고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나) 존도 여섯 살배기 사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얻을 것이 있다. 스미스처럼 존 역시 아이를 물에 잠기게 하여 죽일 계획으로 욕실에 몰래 숨어든다. 그렇지만 존이 욕실에 들어섰을 때 아이가 미끄러져 넘어지고 머리를 다치면서 얼굴이 물에 빠진다. 존은 좋아라 하며 옆에 서서 필요하다면 아이의 머리를 다시 물에 담그려고 지켜보는데 그럴 필요조차 없어진다. 아이가 두어 번 첨벙거리더니 ‘우연하게도’ 숨이 막혀 죽어버린 것이다. 존은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자, 위의 두 사례에 대한 반응을 비교해보라. 그리고 다음의 두 경우와도 비교하라.
(다) 모든 환자를 고루 돌보기에는 병원의 자원이 부족할 때가 있다. 대량 투약으로 연명하게 할 환자가 있어서 투약하려는데, 때마침 같은 약을 조금씩만 써도 살릴 수 있는 다섯 환자가 새로 들어온다. 앞선 환자 한 사람에게 그 약을 다 쓰고 나면, 새로 들어온 다섯 환자는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다섯 환자에게 약을 나눠주고 나면 앞선 환자를 살릴 길이 없다. 어찌할까?
(라) 모든 환자를 고루 돌보기에는 병원의 자원이 부족할 때가 있다. 이번에는 이식할 장기가 부족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장기이식으로 온전히 살아날 수 있는 환자 다섯이 있다. 장기를 구하지 못하면 모두 죽을 것이 뻔하다. 때마침 증세가 심각하지 않은 건강한 환자가 들어온다. 이 한 사람을 죽이면 환자 다섯을 살릴 수 있을 것이
다. 어찌할까?) 이들 두 쌍의 사례는 둘 다 죽이느냐 아니면 죽게 내버려 두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다. 두 쌍의 사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른 반응을 나타낼 것이다. 첫 번째 한 쌍의 사례에서는 스미스의 죽이는 행위와 존의 죽게 내버려두는 행위에 별 차이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한 쌍의 사례에서는 건강한 환자를 적극죽이는 것은 분명 나쁜 일인 반면, 다수의 환자들을 살리려고 한 사람의 환자를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참으로 하기 어려운 결정이긴 해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들 두 쌍의 사례에 대한 다양한 반응에 동의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