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가 그린 <풀밭에서의 오찬>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865년 살롱에서 모네와 마네, 바지유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었습니다. 모네의 바다풍경 두 점이 입선했고 마네가 2년 전에 그린 <올랭피아>가 그해 살롱에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유명한 화가로 모네와는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해서 마네는 오히려 모네를 만나기 꺼려했는데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조각가이자 화가 자차리 아스트뤽이 1866년 살롱 이후 마네와 모네를 한 쌍으로 묶어서 언급하기 시작했으므로 두 사람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프랑스 회화에는 놀라운 발전이 있었습니다. 1855년에 쿠르베가 <화가의 화실>을 그린 이후 마네의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1862)를 거쳐 1866년 모네가 <정원의 여인들>을 그리기까지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세 점을 놓고 1855년 이전의 프랑스 회화와 이후 11년 동안 달라지는 회화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화가들은 눈으로 본 적이 있거나 현재 볼 수 있는 세계를 재현하거나 상상력에 의존해서 눈으로 볼 수 있을 듯한 세계를 표현했는데 세 화가는 자기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계를 그리면서 그러한 세계로 관람자가 직접 들어올 것을 요구했습니다.

보수주의 평론가 폴 망츠Paul Mantz는 그해 7월 영향력 있는 잡지 『가제트 데 보자르 Gazette des Beaux-Arts』에 기고한 글에서 모네의 그림을 호평하면서 진지함, 관망의 우수함, 적절한 색의 사용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망츠는 모네가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겼다면서 이러한 점이 보완되기까지 오랜 기간의 훈련과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1863년의 낙선전에서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을 본 모네는 동일한 제목으로 그와 대적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마네의 유명한 그림과 같은 제목으로 그린 사실은 자신을 대가와 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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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폴텐블로 숲속에 있는 샤이의 길 Le Pave de Chailly dans la Foret de Fontainebleau>, 1865, 유화, 97-130.5cm.



1865년 봄 마네와 나란히 작품을 선보인 살롱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모네는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에 버금가는 작품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 다시 샤이로 갔습니다. 그곳을 <풀밭에서의 오찬>을 위한 배경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네의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더라도 당시 마네의 위상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모네는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풀밭에서의 오찬 Le Dejeuner sur l'herbe>이란 제목으로 방대한 크기(370×550cm)의 유화를 그릴 계획을 밝히고 “자네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네. 인물들 뒤에 깔 배경을 선정하려고 하는데 자네 조언이 필요하네”라고 적었습니다. 여름에는 “내 작업을 돕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꼭 와서 몇몇 인물들의 포즈를 잡아주어야겠어. 자네 도움이 없다면 이 작품은 실패하고 말 걸세. 그러니 약속을 지키기 바라네”라고 바지유를 재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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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풀밭에서의 오찬 Le Dejeuner sur l'herbe>을 위한 습작, 1865,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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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풀밭에서의 오찬 Le Dejeuner sur l'herbe>을 위한 습작, 1865, 유화, 93.5-69.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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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는 예비 스케치에 들어갔습니다. 습작들에 1866년이라고 적었지만 186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샤이에서 한 예비 스케치를 가을에 파리의 화실에서 채색했습니다. 55년 후 트레비소 공작에게 보낸 편지에 모네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그 무렵 모두들 그러했듯이 저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자연에서 스케치한 걸 화실에서 총체적으로 조합하는 작업에 들어간 것입니다.” 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것 같은데 열두 명이 등장하는 피크닉 장면입니다. 모네는 사람 하나하나를 습작으로 연구하면서 화면 전체에 대한 구성을 시도했는데, 중앙에 왼팔을 내밀어 접시를 권하는 여인의 모습만이 예외로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포즈를 취하는 것도 아니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것도 아닙니다. 피크닉을 위해 마련한 음식이 화면 중앙에 펼쳐진 것이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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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풀밭에서의 오찬 Le Dejeuner sur l'herbe>, 1865-66, 유화, 418-367cm.

스물다섯 살의 모네의 야심이 담긴 작품입니다. 모네의 의도는 1863년 낙선전을 통해 유명해진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보다 자연스러운 장면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네의 그림도 화실에서 그린 모델들을 풍경 속에 삽입한 것이고 모네의 그림도 풍경 속에 모델들을 배치한 것이었습니다. 1863년 부활절 기간에 샤이에 온 모네는 1865년 봄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 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빛을 묘사했으며, 인물들을 배치했는데, 마네에 비하면 좀 더 자연주의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모네는 이 그림의 손상된 부분을 잘라내고 지베르니 집에 보관하고 있었으며, 마침내 1957년 인상파 미술관에 소장되었습니다.


그림에는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빛이 그림을 과격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빛이 나무 아래로 쏟아졌고, 따라서 명암이 분명하게 그림 전체에 나타났습니다. 모네의 관심은 모델들이 아니라 빛이 사람과 자연에 작용하는 데 있었습니다. 빛은 나뭇잎에 닿아 푸른색과 금빛으로 아롱졌습니다. 그는 빛이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닿아 눈부시게 나타나는 걸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미완성으로 그쳤습니다.

쿠르베가 그림을 비평하고 돌아간 뒤 모네는 1866년 살롱 출품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쿠르베는 너무 크게 구도를 잡은 그림이라서 야외풍경화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림의 남자들 대부분은 바지유를 모델로 한 것이며 중앙에 앉아 있는 수염 난 남자는 쿠르베처럼 보입니다. <풀밭에서의 오찬>에 여인이 여러 명 등장하지만 이는 모두 카미유 한 사람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열여덟 살의 카미유는 모네의 애인입니다. 훗날 왜 단 두 명의 모델로 여러 사람을 묘사했느냐는 질문에 모네는 두 사람밖에 모델을 구할 수 없었고 돈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개개인의 인물에 대한 성격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족했던 것 같았습니다. 부분 습작들을 보면 바지유의 수염 난 모습과 수염을 깎은 모습 모두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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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모네가 자신의 화실에 있는 <풀밭에서의 오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920년 모네의 화실을 찍은 사진을 보면 <풀밭에서의 오찬>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방치했으므로 왼쪽과 오른쪽 부분이 손상되어 그 부분들을 잘라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모네가 1926년 타계할 때 지베르니의 화실에 있었으며 크기가 248×244cm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1920년 80회 생일을 맞아 자신을 방문한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마네의 그림을 따라서 그렸네.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러했듯 난 야외에서 그림을 구성한 후 화실에서 완성했다네. 난 이 작품을 아주 좋아하는데 미완성이며 많이 상해 있네. 난 세 얻은 방의 보증금 대신 이 그림을 집주인에게 준 적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캔버스를 둘둘 말아 지하실에 처박아 두었다네. 돈이 생겼을 때 난 이 작품을 도로 찾아 왔지만 그림이 조금 상한 상태였네.

1866년에 모네가 동일한 주제로 다시 그린 그림을 보면 원래 그림 중앙 부분을 그대로 보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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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가 르누아르, 프레데리크 바지유, 알프레드 시슬레를 만나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의 고모는 1861년 살롱 수상자 오귀스트 툴무슈Auguste Toulmouche(1829-90)에게 모네를 돌봐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모네는 툴무슈의 추천을 받아 1862년 가을 유능한 교사 화가 마르크 가브리엘 샤를 글레이르Marc Gabriel Charles Gleyre(1808-74)의 화실에 입학했습니다. 스위스의 보 지방 쉬뷔에서 태어난 글레이르는 오랫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다 근동지방을 여행한 후 파리로 와서 서서히 명성과 사회적 지위를 높였습니다. 그는 1843년 살롱에서 <저녁>을 선보인 후 상당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글레이르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그의 제자들 중에는 풍경화로 로마 상을 수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로마 상이란 프랑스에서 매년 회화, 조각, 판화, 건축, 음악콩쿠르를 아카데미가 주최하여 각 부분에서 최우수 학생을 선발, 그 학생으로 하여금 정부의 장학금으로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가 설치된 빌라 메디치에 4년 동안 유학하게 하는 상입니다. 1666년에 제정된 이 상은 처음에는 회화, 조각, 판화부문이 대상이었으나 1723년에 건축, 1803년에 작곡 부문이 추가되었습니다. 루이 14세(재위 1643~1715) 말의 재정위기 때와 혁명, 전쟁 때에 중지 혹은 연기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부댕과 마찬가지로 글레이르가 풍경화를 강조했기 때문에 모네가 그로부터 수학한 것 같으며 또한 글레이르가 수강료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을 거부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글레이르는 권위를 찾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모네는 스승의 지도에 순순히 따르는 타입이었습니다. 글레이르는 제자들의 장점을 파악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가르쳤는데, 휘슬러,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보불전쟁에서 전사한 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 Bazille(1841-70),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1839-99)가 그로부터 수학하고 있었습니다. 바지유와 르누아르는 그의 가르침에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글레이르는 아카데미즘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미술학교)의 교사들과는 달리 자신의 독특한 방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남자 누드모델을 그리게 한 후 제자의 등 뒤에 서서 말했습니다. “아주 나쁘지는 않군! 하지만 너무 모델처럼 그렸어. 자네가 보고 있는 저 사람은 작고 뚱뚱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작고 뚱뚱하게 그려야지. 저 사람 발이 크군. 그러니까 그렇게 그려야지. 저 발은 참으로 못생겼군!

함께 수학한 알프레드 시슬레는 파리에서 영국인 부자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영국으로 보내져 언어와 상업을 공부했는데 아버지가 사업가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업보다는 회화에 더 관심이 많은 시슬레는 곧 파리로 돌아왔고, 글레이르의 화실에서 아마추어 화가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르누아르의 말로 그는 “유쾌한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르누아르가 <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아내 Alfred Sisley and His Wife>를 그릴 때 아내가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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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아내 Alfred Sisley and His Wife>, 1868년경,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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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시슬레의 <퐁텐블로 근처의 마리오네트 길 Une rue a Mariotte: Environs de Fontainebleau>, 1866, 유화, 64.8-91.4cm.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모네보다 한 살 아래로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짝 마르고 늘 병색이 있는 그는 카페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때 모네와 마찬가지로 별 말 없이 친구들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파리 시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면서 동네사람들을 모델로 그렸습니다. 몽마르트르에는 상점 종업원, 식당 종업원, 잡부, 모델, 연예인들이 대거 거주했고 카페가 많았으며 그곳은 밤이면 더욱 붐볐습니다. 그는 어려서 중국 도자기를 제작하는 일을 했습니다. 모네와 이들은 글레이르가 1863년 화실을 그만둘 때까지 함께 수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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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프레데리크 바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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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바지유의 <샤이의 풍경 Paysage a Chailly>, 1865, 유화, 81-10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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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샤이로부터 퐁텐블로 가는 길 La Route de Chailly a Fontainebleau>, 1864, 유화, 98-130cm.

바지유와 모네가 함께 샤이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회화적 구도 면에서 모네의 작품이 훨씬 정돈된 자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년에 그린 포플러 시리즈를 보면 모네가 자연을 미적으로 정돈하려고 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네는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우정이 두터웠는데 키가 유난히 크고 잘생긴 바지유는 남쪽 몽펠리에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습니다. 모네보다 한 살 어린 바지유는 1862년 파리로 와서 그림을 배우면서 의학도 공부했는데 부모가 의사가 되라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파리의 상류층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모네는 그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바지유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를 가리켜 “가장 절친한 환쟁이 친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퐁텐블로 숲 근처 샤이의 작은 집에서 르아브르 출신의 모네와 여드레를 함께 지냈습니다. 풍경화에 뛰어난 그 친구가 제게 몇 가지 충고해준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퐁텐블로는 바르비종 화가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모네도 이곳이 좋아 바지유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바지유가 떠난 뒤에도 모네는 계속 샤이에 머물면서 마을과 퐁텐블로 샤이의 길을 주제로 몇 차례 그렸습니다. 그는 “나는 여기서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매력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1863년 5월 모네는 파리로 돌아와 살롱과 낙선전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낙선전에서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을 보았고 이 작품이 파리 화단에 큰 물의를 일으켰음을 알았습니다. 이 무렵 글레이르는 화실을 닫아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이듬해 5월 모네와 바지유는 노르망디의 루앙, 생타드레스, 옹플뢰르를 거쳐 오베르그 생 시메옹의 농장에서 함께 작업했습니다. 이 농장은 화가들이 먹고 마시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지유가 떠난 후에도 모네는 계속 옹플뢰르에 머물면서 바지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기는 너무 멋지네. 날이면 날마다 한결같이 아름다운 걸 발견하게 되네. 날 미치도록 흥분시키는 모든 것들을 근사하게 그리고 싶네. … 멋진 계획을 구상하고 있네.”(1864. 7. 15)

모네는 그곳에서 8월에 부댕, 용킨트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해 말 파리로 돌아왔는데 돈이 떨어져서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네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그림을 사줄 사람을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마침 사업가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가 모네에게 두 점을 의뢰했습니다. 고디베르는 모네의 첫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모네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줄 안 바지유는 그에게 푸르스탕베르 6번지에 마련한 자신의 화실을 함께 사용하자고 권했습니다. 그의 화실은 두 사람이 사용해도 충분할 만큼 컸습니다. 그곳에서 들라크루아가 사망하기 2년 전까지 사용했던 화실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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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이야기: WMAP 위성


우주론의 창시자 데이비드 윌킨스David Wilkinson(1959~)의 이름을 딴 정밀한 계측기를 탑재한 WMAP 위성이 2001년에 발사되었습니다. 우주배경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 관측을 위해 발사된 이 위성이 2003년 2월 빅뱅 후 38만 년이 지난 초기우주에 관한 데이터를 전송했습니다. 별과 은하를 생성시키고 남은 원시우주의 에너지가 그 후 지금까지 수십억 년 동안 우주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WMAP 위성이 전송한 에너지 분포 데이터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자료로부터 재현된 빅뱅의 잔해로 전 우주공간에 퍼져있는 복사에너지인 우주배경복사의 지도가 학자들의 넋을 빼앗아갔습니다. 미국 뉴저지주에 프린스턴에 소재하는 1930년에 설립된 프린스턴 고등과학원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의 존 노리스 바콜John Norris Bahcall(1934~2005)은 WMAP 위성의 관측결과를 “우주론을 사색이론에서 정밀한 과학의 장으로 끌어올린 쾌거”로 평가했습니다. WMAP 위성의 자료가 정확했던 이유는 거기에 탑재된 망원경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천체를 관측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주공간은 일종의 타임머신time machine입니다. 달 표면에서 반사된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약 2초가 걸리므로 우리는 항상 달의 2초 전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약 8분 20초가 걸립니다. 이와 같이 밤하늘에 빛나는 모든 별은 각기 다른 시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망원경이 지구로부터 100광년 떨어진 별을 포착했다면 관측자는 100년 전의 별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1광년light year은 약 9조5천억km입니다. 멀리 있는 은하로부터 방출된 빛은 수억 년 내지 수십억 년 동안 우주공간을 달려와야 지구의 망원경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빛들은 은하에서 생성된 ‘빛의 화석’인 셈입니다.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천제들 중 가장 멀리 있는 것은 강력한 전파원電波源이며, 항성상恒星狀 천체 혹은 항성상 전파원라고 하는 퀘이사quasar로 지구로부터 120억 내지 130억 광년 떨어진 우주의 변방에서 현재도 외롭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WMAP 위성이 복사를 관측하는 데 성공한 것은 그보다 먼 곳에서 날아온 빛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우주의 나이가 약 137억 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137억 년이란 값에 대한 오차는 1%라서 의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WMAP(Wilkinson Microwave Anisotropy Probe) 프로젝트는 1995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The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에서 처음 제안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 정식 승인되었습니다. WMAP 위성은 델타 II호 로켓에 실려 2001년 6월 30일에 태양과 지구 사이의 궤도를 향해 발사되었으며, 목적지는 라그랑주Lagrange 제2지점(지구 근처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점으로 흔히 L2라고 한다)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WMAP 위성은 태양・지구・달의 반대편을 향하도록 설계되었으므로 광활한 우주공간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위성의 본체는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고 가로 3.8m, 세로 5m의 크기에 무게는 840kg에 불과합니다. 보통 크기의 전구 5개에 불과한 419와트의 전력으로 작동되는 천체망원경은 마이크로복사파의 관측데이터를 지구로 꾸준히 전송합니다. WMAP 위성의 임무는 6개월을 주기로 우주배경복사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지구로부터 약 160만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지표에 붙어있는 천체망원경과는 달리 대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위성입니다. 우주 저편에서 날아오는 희미한 신호도 감지할 수 있는 WMAP 위성이 보내온 배경복사에 의하면 그것의 절대온도absolute temperature는 2.7249K~2.7251K(섭씨 영하 270도) 정도입니다. 물질을 이루는 분자들이 취할 수 있는 최저온도인 절대온도를 기준점(영도)으로 합니다. 눈금간격을 섭씨온도와 같게 한 눈금단위를 켈빈이라 하며 K(Kelvin)로 표기합니다. 켈빈 온도는 모든 과학적 온도 측정의 기본단위로 쓰이며 섭씨온도에 273.16을 더한 값을 갖습니다.


20세기의 과학자들은 우주의 구성성분을 수소로부터 시작해 약 100종의 원소가 등장하는 주기율표periodic table of the elements로 요약했습니다. 주기율표는 현대 화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WMAP 위성이 이 확고한 믿음을 일순간에 날려버렸습니다. WMAP 위성이 관측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은 우주의 총 물질과 에너지의 4%에 불과합니다. 이 4% 중 대부분이 수소hydrogen(우주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 질량의 약 75%를 차지함)와 수소 다음으로 가벼운 헬륨helium(우주에서 수소 다음으로 풍부하며 별에 집중되어 있는데 핵융합에 의해 수소로부터 합성됨)으로 되어 있으며 무거운 원소는 0.03%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우주 대부분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물질로 채워졌음을 의미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관측 자료에 의하면 우주의 23%는 암흑물질dark matter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암흑물질은 은하의 주변을 에워싼 것으로 추정되지만 망원경으로 보이지 않으므로 직접적인 관측 자료는 없습니다. 우리의 태양계에 속하는 은하수Milky Way galaxy의 도처에 골고루 퍼져있는 암흑물질은 은하수 안에 있는 모든 별들의 질량을 합한 것보다 10배나 큰 것으로 추정됩니다. 암흑물질은 빛의 궤적locus에 변형을 일으키므로 광학적 방법을 이용해 그 존재를 간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습니다.


WMAP 위성이 전송한 관측자료 중 놀라운 것은 우주의 73%가 미지의 암흑에너지dark energy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암흑에너지의 개념은 1917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가 곧 폐기처분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일을 가리켜 자신이 저지른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최근 들어 암흑에너지가 천문학계에 다시 등장하면서 우주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급부상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암흑에너지를 은하들을 서로 멀어지게 만드는 반중력antigravity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중력에 반대되는 물질로 모든 것을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의 궁극적인 운명이 암흑에너지에 의해 좌우될 것입니다. 진공 속에 숨어있는 암흑에너지의 정체는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최신 버전의 입자이론을 근거로 암흑에너지를 계산하면 10120(1 다음에 0이 120개 붙는다)의 큰 값이 얻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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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파리로 가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아돌프는 화가가 되려는 모네가 못마땅했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신청서가 기각되자 그는 다시 신청했고 이번에는 파리로 가서 한동안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돈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스승 부댕은 자신도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처지라 모네를 직접 도울 수 없어 아돌프에게 아들의 유학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라고 설득해봤지만 아돌프는 거절했습니다. 모네는 결국 고모의 도움으로 1859년 4월 파리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고모와 부댕은 그에게 유명한 풍경화가 콩스탕 트루아용Constant Troyon(1810-85)을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주었습니다.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다 살롱에 입선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회화수업을 시작한 트루아용은 한때 바르비종파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네덜란드 여행에서 네덜란드의 동물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풍경화 속에 소, 양, 농부 등의 모습을 삽입하여 독자적 화풍을 완성했습니다. 트루아용이 모네에게 귀중한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우선 조형작업만을 가르치는 화실로 가서 누드를 익도록 하게. 데생을 집중적으로 하고 … 유화를 소홀히 하지 말게. 그런 뒤 루브르 뮤지엄으로 가서 몇 점을 모사하게. 그런 후 내게 들러 자네의 작품을 보여주도록 하게.

그해 모네는 살롱에서 콩스탕 트루아용,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Charles François Daubigny(1817-78), 장-밥티스트-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1796-1875), 외젠 들라크루아,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1812-67) 등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르비종파 화가를 알고 난 후 자연주의적인 화풍으로 전환한 도비니는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포착하여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는 하늘과 물의 묘사에 뛰어났습니다. 풍경화에서 프랑스의 신고전주의를 계승하고 인상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코로는 80년의 긴 인생에서 3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풍경화뿐 아니라 인물화, 종교화, 신화화 등 다양한 작업을 했습니다. 코로의 풍경화에는 시간과 계절에 따른 빛의 효과를 중심으로 한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바르비종에서 근대 외광파(外光派)의 기초를 닦은 루소는 자연에서 모티프를 구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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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프랑수아 도비니의 <수확기 Harvest Time>, 1851, 유화.


모네는 트루아용과 도비니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모네는 살롱과 루브르 뮤지엄을 두루 돌아본 후 부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바다 풍경화를 그릴 화가가 될 것임이 시사했습니다.

쓸 만한 바다 풍경화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사실 바다를 그리는 화가가 전무한 상태이니 선생님께서는 이 분야에서 큰 성과를 올리신 것입니다.”(1859. 6. 3)

그해 겨울 모네는 쉬스 아카데미Academie Suisse에 나갔는데 그곳은 모델을 직접 그릴 수 있어 가난한 화가들이 선호하던 곳이었습니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문을 연 쉬스 아카데미는 모델로 활동하던 쉬스라는 사람이 문을 연 곳으로 기교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약간의 돈을 받고 모델을 그릴 수 있게 하던 곳으로 마네가 그곳에서 수학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네는 쉬스 아카데미에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30-1903)를 만났는데 피사로는 모네보다 열 살 많았습니다. 서인도제도의 섬 세인트토머스에서 태어나 1855년 파리로 온 피사로는 살롱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동을 받아 주로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살롱에 여러 번 출품했지만 번번이 낙선했습니다.

1861년 봄 모네의 나이는 군에 징집될 적령기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징집방법은 특이했는데 복권을 추천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운이 나쁜 번호를 추첨하게 되면 7년이나 복무해야 했습니다. 모네는 운이 나쁜 번호를 뽑았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사업에 종사할 것을 약속해준다면 돈을 들여서라도 징집이 면제되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모네는 거절하고 입대했습니다. 돈을 내고 징집을 면제받는 건 당시 관행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징집을 면제시켜 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입대한 건 자원해서 입대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모네는 1861년 6월 알제리의 경비병대 연대에서 1년 복무했는데 훗날 5년 복무했다고 우겼습니다. 왜 그가 아프리카에서의 복무를 자원했을까? 모네가 살롱을 관람한 후 부댕에게 보낸 편지에서 단서가 될 만한 구절이 발견됩니다.

동방의 뛰어난 그림들을 보았습니다. 그 작품들에는 한결같이 장엄하고 따사로운 빛이 서려 있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을 익힌 모네는 동방의 자연을 동경했습니다. 훗날 그의 회상에서 아프리카의 자연에서 받은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일(군복무)로 나의 비전이 얼마나 풍부해졌던가. 그곳에서 받은 빛과 색의 인상이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은 후의 일이지만 장래에 대한 관심이 싹튼 것은 알제리에서였다네.

모네는 장티푸스에 걸려 1862년 후송되어 왔습니다. 고모는 3천 프랑을 내고 조카의 잔여 복무기간을 면제받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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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의 <생타드레스의 해안가 Sur la Plage de Sainte-Adresse>, 1862, 유화, 27-4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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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해안가 Sur la Plage de Sainte-Adresse>, 1864, 유화, 40-73cm.

용킨트와 모네는 같은 곳에서 해안의 장면을 그렸지만, 용킨트는 육지를 주로 묘사하고 먼 바다를 dfl부만 나타낸 데 비해 모네는 바다를 주로 묘사하고 육지를 일부만 그렸습니다. 모네는 해안의 장면을 많이 그렸는데, 대부분 바다를 묘사한 것들이어서 육지보다는 물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해 여름 르아브르와 북쪽 생타드레스에서 요양하던 모네는 이웃에서 작업하던 마흔두 살의 네덜란드 화가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1819-91)를 만나 우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로테르담에 가까운 라트로프에서 태오난 용킨트는 1846년 파리로 와서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교류했으며, 주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재빠른 붓질에 의한 수채화와 에칭에 뛰어났습니다. 키가 크고 수염을 길렀으며 맑고 파란 눈을 가진 용킨트는 프랑스 북쪽에서 주로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모네는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으며 그의 초대로 함께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그의 수채화를 좋아했으며 그를 “진정한 대가”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훗날 평론가들은 용킨트를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꼽았습니다. 모네는 그에 대해 술회했습니다.

그때 이후 용킨트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었네. 화가의 안목을 키우는 마지막 발전단계에서 그분이 큰 힘이 되어주셨지.

모네는 용킨트를 부댕에게 소개했으며 세 사람이 야외에서 함께 작업한 적도 있었습니다. 모네가 용킨트를 만났을 때 용킨트는 이미 알코올중독 상태였습니다. 그는 1875년부터 정신질환 증세를 나타냈고, 귀신같은 몰골로 친구들이 모인 곳에 나타난 적도 있으며, 코로의 장례식에 나타나서는 횡설수설하여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1891년 그레노블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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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이야기: 우주론cosmology

 

(오늘부터 또 한 명의 과학자 미치오 카쿠Michio Kaku(加來道雄 1947~)의 우주론을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하려고 합니다. 카쿠는 일본계 미국 이론물리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 석좌교수로서 저서 『Parallel worlds 평행우주』(2005)로 우리에게 잘 알려졌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여러 과학자들의 다양한 우주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오늘날의 과학이 어디에까지 와있는지 우리는 가늠할 수 있으며, 무엇을 향해 그들이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주론cosmology의 영역이 순수한 사색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길을 연 건 1600년대 망원경telescope이 발명되면서부터였습니다. 망원경으로 인해 정밀한 관측 자료가 부쩍 는 것입니다. 폴란드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와 독일의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1571~1630) 등 위대한 천문학자들이 남긴 업적에 자신이 망원경 관측으로 얻은 자료를 보태 우주를 과학적 탐구대상으로 전환시킨 인물이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1564~1642)입니다. 그리고 갈릴레오가 사망하던 해에 태어난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1642~1727)이 우주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영국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철학자 뉴턴은 자신이 발견한 운동법칙을 우주에 적용하여 천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한 최초의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인해 사람들은 천체들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우주가 그런 법칙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20세기에 제작된 초대형 천체망원경astronomical telescope들이 우주론의 제2혁명기를 초래했습니다. 천체망원경은 볼록렌즈나 거울(반사경)을 이용하여 별빛을 모아 상을 만들고, 이 상을 확대해 관측하는 도구입니다.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1889~1953)은 192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패서디나의 북동쪽 약 16km 떨어진 윌슨 산 정산에 소재하는 윌슨산천문대Mount Wilson Observatory(1904년에 건립)에서 직경이 100인치나 되는 망원경으로 관측한 끝에 모든 은하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서로 멀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은 시공간이 선형적으로 평탄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휘어져있다는 1916년에 발표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의 일반상대성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을 재확인한 결과였습니다. 중력장의 방정식을 출발점으로 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은 우주의 기원을 최초로 설명한 이론입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해解로 표현된 우주의 모델은 시간적으로 임의의 두 점 사이의 거리가 증가하는 팽창우주를 제시합니다. 팽창의 속도는 우주를 이루는 물질들의 만류인력으로 인하여 차츰 감소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팽창은 물질 평균밀도의 크기에 따라 영원히 계속되거나, 혹은 유한한 시간이 지나면 팽창속도가 제로가 되며 그 후에는 수축하는 우주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은 또 우주공간이 공의 표면처럼 스스로 닫힌 유한한 경우(즉 닫힌 우주), 평면처럼 평탄한 우주, 안장의 곡면처럼 멀리 갈수록 더욱 더 벌어지는 열린 우주의 세 가지 가능성에 대응합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주가 대폭발에서 생성되었다는 빅뱅이론big bang theory가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빅뱅이론에 따르면 모든 천체는 탄생초기에 있었던 대폭발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외부를 향해 흩어지고 있습니다. 빅뱅이론은 조지 앤소니 가모브George Anthony Gamow(1904~68, 러시아식 본명은 Georgy Antonovich Gamov)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로 확고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며, 여기에 원소의 기원에 관한 영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Fred Hoyle(1915~2001)의 연구가 가해지면서 우주의 진화과정은 그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태어나 1934년 미국의 조지워싱턴 대학의 교수가 되고 1940년에 시민권을 받고 미국으로 귀화한 조지 앤소니 가모브는 원자핵이론 특히 붕괴이론에 처음으로 양자이론을 적용하여 가이거-누탈의 법칙Geiger-Nuttall's law을 도출했습니다. 또한 핵반응론의 지식을 기초로 천체의 구조와 원소의 기원을 풀이한 항성진화론을 발표했습니다. 영국 요크셔 주에서 태어난 프레드 호일은 정상우주론의 대표적인 학자로 정상우주론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빅뱅이론과 함께 우주 생성론의 두 축을 이루며 서로 경쟁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정상우주론은 완전한 우주론 논리라는 철학적 입장을 바탕에 깔고 우주는 항상 현재와 같은 모양으로 존재하고, 우주가 팽창해 우주의 밀도가 작아지면 이를 보충하기 위해 우주공간에 새로운 물질이 생성되기 때문에 항상 일정한 밀도를 유지한다는 이론입니다. 그에 의하면 우주는 출발점도 없고 소멸도 없이 어떤 장소와 시점에서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빅뱅이론은 뜨겁고 밀도가 높은 하나의 점이 폭발함으로써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이론으로 조지 앤소니 가모브가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호일은 1950년 ‘우주의 본질’이라는 방송 강의를 하면서 가모의 대폭발이론을 빗대어 “그럼 태초에 빅뱅big bang이 있었단 말인가” 하고 그를 조롱했으며 빅뱅이란 말이 이때 생겼습니다. 1965년 우주배경복사가 밝혀지면서 정상우주론은 쇠퇴하고 빅뱅이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지만, 호일은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1942~)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천문학자였습니다.

2000년부터 우주론의 제3혁명은 신형 위성the latest satellite, 레이저laser, 중력파감지기gravity wave sensor, X-선 망원경X-ray telescope, 고성능 슈퍼컴퓨터ultra high supercomputer 등 최신장비들을 갖추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우주와 관련해 가장 신뢰할 만한 관측 자료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것들로부터 우주의 나이, 구성성분, 우주의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점점 빠르게 팽창하면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팽창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면 결국 우주전체가 암흑과 냉기로 가득 차서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는 거대한 동결big freeze의 시점에 이르게 될 것이 뻔합니다.

일본계 미국 이론물리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 석좌교수인 미치오 카쿠(加來道雄 1947~)는 저서 『Parallel worlds 평행우주』(2005)에서 우리의 생명체를 거대한 바다 속을 표류하는 물방울에 비유하면서 우주는 끓는 물에서 생성된 작은 물방울이며, 이런 물방울은 11차원 초공간으로 서술되는 열반의 세계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생성되어 사방을 표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빅뱅으로 탄생했으며 영원의 바다 속에서 여러 개의 다른 우주들parallel worlds 혹은 평행우주와 더불어 표류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리학자와 천문학자들은 빅뱅 후 38만 년이 지난 시점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무렵에 빅뱅의 잔광이 처음 온 우주를 가득 메웠기 때문입니다. 최근 WMAP(Wilkinson Microwave Anisotropy Probe, 초단파 비등방성 탐사선, 더블유맵이라고도 함) 위성은 빅뱅의 잔해에 해당되는 복사radiation를 생생하게 관측해 학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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