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파리로 가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아돌프는 화가가 되려는 모네가 못마땅했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신청서가 기각되자 그는 다시 신청했고 이번에는 파리로 가서 한동안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돈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스승 부댕은 자신도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처지라 모네를 직접 도울 수 없어 아돌프에게 아들의 유학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라고 설득해봤지만 아돌프는 거절했습니다. 모네는 결국 고모의 도움으로 1859년 4월 파리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고모와 부댕은 그에게 유명한 풍경화가 콩스탕 트루아용Constant Troyon(1810-85)을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주었습니다.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다 살롱에 입선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회화수업을 시작한 트루아용은 한때 바르비종파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네덜란드 여행에서 네덜란드의 동물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풍경화 속에 소, 양, 농부 등의 모습을 삽입하여 독자적 화풍을 완성했습니다. 트루아용이 모네에게 귀중한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우선 조형작업만을 가르치는 화실로 가서 누드를 익도록 하게. 데생을 집중적으로 하고 … 유화를 소홀히 하지 말게. 그런 뒤 루브르 뮤지엄으로 가서 몇 점을 모사하게. 그런 후 내게 들러 자네의 작품을 보여주도록 하게.”
그해 모네는 살롱에서 콩스탕 트루아용,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Charles François Daubigny(1817-78), 장-밥티스트-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1796-1875), 외젠 들라크루아,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1812-67) 등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르비종파 화가를 알고 난 후 자연주의적인 화풍으로 전환한 도비니는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포착하여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는 하늘과 물의 묘사에 뛰어났습니다. 풍경화에서 프랑스의 신고전주의를 계승하고 인상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코로는 80년의 긴 인생에서 3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풍경화뿐 아니라 인물화, 종교화, 신화화 등 다양한 작업을 했습니다. 코로의 풍경화에는 시간과 계절에 따른 빛의 효과를 중심으로 한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바르비종에서 근대 외광파(外光派)의 기초를 닦은 루소는 자연에서 모티프를 구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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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프랑수아 도비니의 <수확기 Harvest Time>, 1851, 유화.
모네는 트루아용과 도비니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모네는 살롱과 루브르 뮤지엄을 두루 돌아본 후 부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바다 풍경화를 그릴 화가가 될 것임이 시사했습니다.
“쓸 만한 바다 풍경화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사실 바다를 그리는 화가가 전무한 상태이니 선생님께서는 이 분야에서 큰 성과를 올리신 것입니다.”(1859. 6. 3)
그해 겨울 모네는 쉬스 아카데미Academie Suisse에 나갔는데 그곳은 모델을 직접 그릴 수 있어 가난한 화가들이 선호하던 곳이었습니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문을 연 쉬스 아카데미는 모델로 활동하던 쉬스라는 사람이 문을 연 곳으로 기교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약간의 돈을 받고 모델을 그릴 수 있게 하던 곳으로 마네가 그곳에서 수학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네는 쉬스 아카데미에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30-1903)를 만났는데 피사로는 모네보다 열 살 많았습니다. 서인도제도의 섬 세인트토머스에서 태어나 1855년 파리로 온 피사로는 살롱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동을 받아 주로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살롱에 여러 번 출품했지만 번번이 낙선했습니다.
1861년 봄 모네의 나이는 군에 징집될 적령기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징집방법은 특이했는데 복권을 추천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운이 나쁜 번호를 추첨하게 되면 7년이나 복무해야 했습니다. 모네는 운이 나쁜 번호를 뽑았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사업에 종사할 것을 약속해준다면 돈을 들여서라도 징집이 면제되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모네는 거절하고 입대했습니다. 돈을 내고 징집을 면제받는 건 당시 관행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징집을 면제시켜 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입대한 건 자원해서 입대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모네는 1861년 6월 알제리의 경비병대 연대에서 1년 복무했는데 훗날 5년 복무했다고 우겼습니다. 왜 그가 아프리카에서의 복무를 자원했을까? 모네가 살롱을 관람한 후 부댕에게 보낸 편지에서 단서가 될 만한 구절이 발견됩니다.
“동방의 뛰어난 그림들을 보았습니다. 그 작품들에는 한결같이 장엄하고 따사로운 빛이 서려 있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을 익힌 모네는 동방의 자연을 동경했습니다. 훗날 그의 회상에서 아프리카의 자연에서 받은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일(군복무)로 나의 비전이 얼마나 풍부해졌던가. 그곳에서 받은 빛과 색의 인상이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은 후의 일이지만 장래에 대한 관심이 싹튼 것은 알제리에서였다네.”
모네는 장티푸스에 걸려 1862년 후송되어 왔습니다. 고모는 3천 프랑을 내고 조카의 잔여 복무기간을 면제받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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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의 <생타드레스의 해안가 Sur la Plage de Sainte-Adresse>, 1862, 유화, 27-4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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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해안가 Sur la Plage de Sainte-Adresse>, 1864, 유화, 40-73cm.
용킨트와 모네는 같은 곳에서 해안의 장면을 그렸지만, 용킨트는 육지를 주로 묘사하고 먼 바다를 dfl부만 나타낸 데 비해 모네는 바다를 주로 묘사하고 육지를 일부만 그렸습니다. 모네는 해안의 장면을 많이 그렸는데, 대부분 바다를 묘사한 것들이어서 육지보다는 물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해 여름 르아브르와 북쪽 생타드레스에서 요양하던 모네는 이웃에서 작업하던 마흔두 살의 네덜란드 화가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1819-91)를 만나 우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로테르담에 가까운 라트로프에서 태오난 용킨트는 1846년 파리로 와서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교류했으며, 주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재빠른 붓질에 의한 수채화와 에칭에 뛰어났습니다. 키가 크고 수염을 길렀으며 맑고 파란 눈을 가진 용킨트는 프랑스 북쪽에서 주로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모네는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으며 그의 초대로 함께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그의 수채화를 좋아했으며 그를 “진정한 대가”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훗날 평론가들은 용킨트를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꼽았습니다. 모네는 그에 대해 술회했습니다.
“그때 이후 용킨트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었네. 화가의 안목을 키우는 마지막 발전단계에서 그분이 큰 힘이 되어주셨지.”
모네는 용킨트를 부댕에게 소개했으며 세 사람이 야외에서 함께 작업한 적도 있었습니다. 모네가 용킨트를 만났을 때 용킨트는 이미 알코올중독 상태였습니다. 그는 1875년부터 정신질환 증세를 나타냈고, 귀신같은 몰골로 친구들이 모인 곳에 나타난 적도 있으며, 코로의 장례식에 나타나서는 횡설수설하여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1891년 그레노블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