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가 르누아르, 프레데리크 바지유, 알프레드 시슬레를 만나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의 고모는 1861년 살롱 수상자 오귀스트 툴무슈Auguste Toulmouche(1829-90)에게 모네를 돌봐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모네는 툴무슈의 추천을 받아 1862년 가을 유능한 교사 화가 마르크 가브리엘 샤를 글레이르Marc Gabriel Charles Gleyre(1808-74)의 화실에 입학했습니다. 스위스의 보 지방 쉬뷔에서 태어난 글레이르는 오랫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다 근동지방을 여행한 후 파리로 와서 서서히 명성과 사회적 지위를 높였습니다. 그는 1843년 살롱에서 <저녁>을 선보인 후 상당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글레이르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그의 제자들 중에는 풍경화로 로마 상을 수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로마 상이란 프랑스에서 매년 회화, 조각, 판화, 건축, 음악콩쿠르를 아카데미가 주최하여 각 부분에서 최우수 학생을 선발, 그 학생으로 하여금 정부의 장학금으로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가 설치된 빌라 메디치에 4년 동안 유학하게 하는 상입니다. 1666년에 제정된 이 상은 처음에는 회화, 조각, 판화부문이 대상이었으나 1723년에 건축, 1803년에 작곡 부문이 추가되었습니다. 루이 14세(재위 1643~1715) 말의 재정위기 때와 혁명, 전쟁 때에 중지 혹은 연기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부댕과 마찬가지로 글레이르가 풍경화를 강조했기 때문에 모네가 그로부터 수학한 것 같으며 또한 글레이르가 수강료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을 거부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글레이르는 권위를 찾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모네는 스승의 지도에 순순히 따르는 타입이었습니다. 글레이르는 제자들의 장점을 파악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가르쳤는데, 휘슬러,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보불전쟁에서 전사한 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 Bazille(1841-70),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1839-99)가 그로부터 수학하고 있었습니다. 바지유와 르누아르는 그의 가르침에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글레이르는 아카데미즘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미술학교)의 교사들과는 달리 자신의 독특한 방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남자 누드모델을 그리게 한 후 제자의 등 뒤에 서서 말했습니다. “아주 나쁘지는 않군! 하지만 너무 모델처럼 그렸어. 자네가 보고 있는 저 사람은 작고 뚱뚱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작고 뚱뚱하게 그려야지. 저 사람 발이 크군. 그러니까 그렇게 그려야지. 저 발은 참으로 못생겼군!

함께 수학한 알프레드 시슬레는 파리에서 영국인 부자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영국으로 보내져 언어와 상업을 공부했는데 아버지가 사업가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업보다는 회화에 더 관심이 많은 시슬레는 곧 파리로 돌아왔고, 글레이르의 화실에서 아마추어 화가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르누아르의 말로 그는 “유쾌한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르누아르가 <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아내 Alfred Sisley and His Wife>를 그릴 때 아내가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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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아내 Alfred Sisley and His Wife>, 1868년경,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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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시슬레의 <퐁텐블로 근처의 마리오네트 길 Une rue a Mariotte: Environs de Fontainebleau>, 1866, 유화, 64.8-91.4cm.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모네보다 한 살 아래로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짝 마르고 늘 병색이 있는 그는 카페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때 모네와 마찬가지로 별 말 없이 친구들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파리 시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면서 동네사람들을 모델로 그렸습니다. 몽마르트르에는 상점 종업원, 식당 종업원, 잡부, 모델, 연예인들이 대거 거주했고 카페가 많았으며 그곳은 밤이면 더욱 붐볐습니다. 그는 어려서 중국 도자기를 제작하는 일을 했습니다. 모네와 이들은 글레이르가 1863년 화실을 그만둘 때까지 함께 수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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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프레데리크 바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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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바지유의 <샤이의 풍경 Paysage a Chailly>, 1865, 유화, 81-10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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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샤이로부터 퐁텐블로 가는 길 La Route de Chailly a Fontainebleau>, 1864, 유화, 98-130cm.

바지유와 모네가 함께 샤이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회화적 구도 면에서 모네의 작품이 훨씬 정돈된 자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년에 그린 포플러 시리즈를 보면 모네가 자연을 미적으로 정돈하려고 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네는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우정이 두터웠는데 키가 유난히 크고 잘생긴 바지유는 남쪽 몽펠리에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습니다. 모네보다 한 살 어린 바지유는 1862년 파리로 와서 그림을 배우면서 의학도 공부했는데 부모가 의사가 되라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파리의 상류층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모네는 그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바지유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를 가리켜 “가장 절친한 환쟁이 친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퐁텐블로 숲 근처 샤이의 작은 집에서 르아브르 출신의 모네와 여드레를 함께 지냈습니다. 풍경화에 뛰어난 그 친구가 제게 몇 가지 충고해준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퐁텐블로는 바르비종 화가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모네도 이곳이 좋아 바지유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바지유가 떠난 뒤에도 모네는 계속 샤이에 머물면서 마을과 퐁텐블로 샤이의 길을 주제로 몇 차례 그렸습니다. 그는 “나는 여기서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매력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1863년 5월 모네는 파리로 돌아와 살롱과 낙선전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낙선전에서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을 보았고 이 작품이 파리 화단에 큰 물의를 일으켰음을 알았습니다. 이 무렵 글레이르는 화실을 닫아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이듬해 5월 모네와 바지유는 노르망디의 루앙, 생타드레스, 옹플뢰르를 거쳐 오베르그 생 시메옹의 농장에서 함께 작업했습니다. 이 농장은 화가들이 먹고 마시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지유가 떠난 후에도 모네는 계속 옹플뢰르에 머물면서 바지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기는 너무 멋지네. 날이면 날마다 한결같이 아름다운 걸 발견하게 되네. 날 미치도록 흥분시키는 모든 것들을 근사하게 그리고 싶네. … 멋진 계획을 구상하고 있네.”(1864. 7. 15)

모네는 그곳에서 8월에 부댕, 용킨트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해 말 파리로 돌아왔는데 돈이 떨어져서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네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그림을 사줄 사람을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마침 사업가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가 모네에게 두 점을 의뢰했습니다. 고디베르는 모네의 첫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모네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줄 안 바지유는 그에게 푸르스탕베르 6번지에 마련한 자신의 화실을 함께 사용하자고 권했습니다. 그의 화실은 두 사람이 사용해도 충분할 만큼 컸습니다. 그곳에서 들라크루아가 사망하기 2년 전까지 사용했던 화실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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