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는 한독寒毒과 습독濕毒을 다스린다

 

 

 

발암물질로 알려진 타르(tar)도 한 개비에 20~30㎎이 들어 있기 때문인지 흡연자에게는 폐암이 많다고 보고된다. 특히 담배 중에서도 독한 담배를 젊어서부터 폐 속까지 깊숙이 흡입하며 꽁초가 될 때까지 피워대는 사람일수록 폐암의 발병률이 높다고 한다.

담배는 아주 해롭기만 할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과다하게만 피우지 않는다면 흡연은 뇌의 활동과 혈류량을 높여서 뇌를 산뜻하게 만드는 한 모금의 청량제 구실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화가 났을 때의 흡연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비즈니스 때의 흡연은 대화를 부드럽게 하며, 잊고 싶은 게 있을 때의 흡연은 담배연기 속에 생각을 담아 훌훌 날려 보내게 만든다. 최근에는 노인성 치매라는 숙명적인 질병의 예방 목적으로 담배가 적극 권장될 정도이다.

한의학에서 연초煙草라 일컫는 담배는 성性은 열熱하고 매운맛辛味을 갖고 있어서 한독寒毒과 습독濕毒을 다스린다고 했다. 또 담배는 선행선산善行善散하고 다조다화多燥多火하므로 음체陰滯에 쓰면 신효神效하지만 원기가 부족해 땀이 나는 사람氣虛多汗者이나 마른 사람瘦人에게는 좋지 않다고 했다.

차갑고 축축한 습기濕氣로 가득찬 방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창문을 열어 바람을 통해도 습기가 제거되고, 방바닥 밑에 불을 때도 차가운 공기는 따뜻해지니, 담배는 바로 이런 작용을 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차가운 물은 자꾸 응축하려 하고 뜨거운 불은 자꾸 타오르면서 퍼지려고 하니, 신열辛熱한 성미性味를 가진 담배는 어떤 작용을 하겠는가? 당연히 무엇인가 발산시키는 작용, 습기를 쫙 말리는 작용을 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담배는 비쩍 마른 건조한 사람보다는 쥐어짜면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한 뚱뚱한 사람에게 적합하다.

이는 비인습다 수인화다肥人濕多 瘦人火多(뚱뚱한 사람은 습기가 많고 마른 사람은 화기가 많다)라는 한의학의 가장 기초적인 병리관病理觀과도 일치한다. 여기까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슬과 안개가 자욱해서 축축하고 차디찬, 소위 한습寒濕한 기운이 넘쳐흐르는 산길을 지날 때는 담배가 이롭다는 생각도 가능할 것이다. 또 담배를 많이 피워 가슴이 답답할 때는 반대로 물을 마시는 게 가장 좋을 거란 추측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학에서도 금연 시 나타나는 금단증상禁斷症狀을 이기려면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다고 하니, 니코틴 등의 화학물질을 거론하지 않아서 그렇지 한의학에서는 담배의 성미性味를 가지고 이미 설명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오성五性과 육미六味가 우리의 심신心身을 길러주기도 하지만 과복過服하면 유해하므로 절제節制할 것을 주장했는데, 특히 신미辛味를 너무 많이 섭취하면 몸의 근맥筋脈이 무너져 늘어지고 정신마저도 황폐화된다味過於辛(미과어신) 筋脈沮弛(근맥저이) 精神乃央(정신내앙고)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담배도 술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어떻게 피우느냐가 중요하다. 의사들은 성기능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흡연을 즐기기 위한 방편으로 흡연을 하루 20개비 이하로 줄이고, 연기를 깊숙이 흡입하지 않으며, 길이는 3분의1까지만 태우되 필터를 사용할 것 등의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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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키는 닌후르사그의 저주를 받아 죽을 운명이 되었다

 

 

 

 

 

서아시아 국가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크레타 섬에서는 뱀을 손에 들고 있는 여신이나 사제들의 상이 발견된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페니키아의 항구도시 티레의 왕 아게노르는 자신의 다섯 아들을 보내 딸 에우로페를 되찾으려 한다. 황소로 변장한 제우스가 그의 딸을 납치해갔기 때문이다. 수치도 모르는 희대의 정력가 제우스는 에우로페에게서 세 명의 아들을 얻는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가 크노소스의 왕 미노스다. 미노스에게는 황소의 머리를 한 사내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놓은 미로가 있다. 미노타우로스에게 매년 일곱 명의 소년과 일곱 명의 소녀를 바쳐야 했다. 투우시합에서 영감을 받아 멋대로 지어낸 내용인지, 아니면 서아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이 황소 머리를 한 사내란 존재를 오해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죽음을 면치 못할 사악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 의미가 너무나 정반대라서 당혹스러울지 몰라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 황소 머리를 한 사내는 악마에 대적하는 인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리스에서만 유독 황소 머리를 한 사내가 악명을 떨치게 된 건 황소 머리를 한 사내의 모습을 하고 에우로페를 납치한 제우스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 에우로페가 팔레스타인인이 섬기는 밤의 여신일 수도 있다는 가설에 대해 오랜 논란이 있었다. 에우로페의 이름은 셈어의 동사 ‘지다’에 어원을 두고 있다. 해가지는 방향인 서쪽에 위치한 대륙이 ‘유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같은 원리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건 신의 박식함을 훔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추방은 이 부부가 성에 눈을 뜨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선악’은 전지전능한 신만 알 수 있는, 그리고 오로지 신만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구약성경』 「에스겔」에는 두 번째 에덴이라 할 수 있는 성산聖山에서 살다가 쫓겨난 두로 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두로 왕은 마음이 교만하여 자신을 신이라 여겼다. 이 왕은 하느님의 성산에 살며 “화광석 사이에서 왕래했고,”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의 영화를 누리다가 “슬기와 지혜”를 쏟아버렸다.(「에스겔」 28: 14~17) 수메르인의 천국 이야기에는 엔키와 닌후르사그가 등장한다. 닌후르사그는 물의 신 엔키가 그녀의 딸・손녀・증손녀까지 모조리 임신시켜버리자 격노한다. 마지막 잠자리에서 모든 힘을 소진한 엔키는 사경을 헤매게 된다. 여신의 음부는 물의 신 엔키의 정액으로 넘쳐흐른다. 지칠 대로 지친 엔키는 닌후르사그가 흘러넘친 그의 정액으로 만든 여덟 개의 식물을 먹어치운다. 그의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다른 신들은 엔키의 죽음을 예감한다. 금지된 식물을 먹은 것 때문에 엔키는 닌후르사그의 저주를 받아 죽을 운명이 되었다. 여우가 명계의 신들에게 엔키를 위해 닌후르사그와 엔키의 중재에 나설 것을 부탁할 때까지 엔키는 이승으로 살아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수메르식 ‘추방’ 이야기는 유대의 ‘추방’ 이야기와 사뭇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금지된 식물을 먹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게 된 건 유대 역사상 유례없는 종교적 해석 때문이다. 유대인은 이후 서아시아를 물들인 ‘유일신’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고안해냈다. “우리 하느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는 「신명기」 6장 4절로 대변되는 개념 말이다. 이러한 개념의 발전을 설명해내기 위해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유대인 관념의 연속적인 변화 속에서 특정 시점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유일신론자였을까? 아브라함은 우르Ur(현재의 텔 엘 무카이야르)에 살았다. 우르에서는 모든 사람이 운명의 예언자 난나를 최고신으로 신봉했다. 아니면 모세의 경험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일까? 이집트에서 성장한 모세는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아톤Aton(혹은 아텐Aten)을 신으로 모시고자 하는 파라오 아크나톤(아멘호테프 4세)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신이 안배해놓은 이스라엘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예언한 예언자들, 아시리아의 잔혹한 군사들을 마주해야 했던 예언자들이 유일신론자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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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에서 마르두크가 ‘최고신’으로 자리매김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는 테티스 여신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바빌로니아판 창세 신화에서 이 바다의 여신은 교활한 악마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가공할 괴물로 묘사된다. 근동에서 바다의 신을 사악한 존재로 표현한 것과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물을 관장하는 용을 고귀하고 신성한 존재로 섬겼다. 고래로 중국에서 용은 비를 내리게 하는 물의 신, 구름・습지・강・바다를 관장하는 신으로여겨졌다. 하지만 아시아 대륙의 서쪽 변방에서는 용을 사악하고 불길한 동물로 간주했다. 동굴에 사는 용이건 바다에 사는 용이건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돌돌 감긴’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이름을 가진 괴물 레비아탄은 티아마트의 직계 후손이라 할 수 있다. 레비아탄은 『구약성경』과 우가리트(시리아 북쪽 고대 페니키아의 도시) 문서, 후대 유대 문학에서 언급되는 바다를 혼돈에 빠뜨리는 신화적인 바다 뱀 또는 용을 일컫는 괴물이다.
바빌론에서 마르두크가 ‘최고신’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다음의 세 가지 현상으로 이어졌다. 마르두크는 이제 바빌로니아라는 국가 전체를 수호하는 수호신이 되었다. 바빌로니아의 국력을 회복한 네부카드네자르 1세의 명실상부한 수호신이 된 것이다. 바빌로니아가 엘람 왕국을 무릎 꿇린 후 바빌론에 마르두크 신상이 다시 건립되었고, 바빌론인은 마르두크의 가호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도시를 지켜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부카드네자르 1세가 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마르두크 숭배에 더욱 열을 올렸던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한층 더 깊은 신심을 품게 된 건 이러한 정치적 선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마르두크가 『에누마 엘리시』 서사시에서 전 우주를 수호했다는 이유로 마르두크를 숭배했다.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수호하는 지방 신에 불과했던 마르두크는 이제 만백성이 우러러 보는 신 중의 신이 되었다. 그는 이제 특정한 곳에서만 통하는 신이 아니었다. 마르두크를 전지전능한 최고신으로 모시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신이라는 존재를 더 가깝게 느끼기 시작했다. 신자들이 “마르두크는 제가 모시는 신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의탁하고 언제나 신에게 조언을 구하는 개인적인 종교를 처음 갖게 된 것이다. 드디어 바빌론 시민이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시편」 25: 4~5)라고 말하는 기독교인과 비슷한 태도로 신을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두크를 모시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들을 원죄를 지은 죄인이라 여기지 않았다. 고대 서아시아인에게 ‘원죄’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다. 죄를 짓는 것은 온전히 도시 법의 규제를 받는 문제였을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반면에 순결과 타락은 유대인의 신앙에서 중추적 개념이었다. 그들은 죄라는 개념을 통해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을 만들어냈다. 뱀의 사악한 속삭임에 속아 넘어간 아담과 그의 아내 이브는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다. 불복종의 쓰라린 대가였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뱀은 후에 사탄과 연관된다. 인간에게서 에덴동산을
빼앗아버린 뱀이라는 존재는 팔레스타인인의 신앙을 비하하기 위한 의도에서 등장한 것일 수도 있다. 뱀을 숭배하는 건 비의 신 바알 숭배사상의 일환이었다. 바알은 팔레스타인인이 숭배하던 풍요와 폭풍우의 남성 신이었다. 그리고 뱀은 모신의 상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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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 민주정치의 환상

 

 

 

 

 

 

이제 이슬람주의가 민주정치 분야의 공로자가 아니라는 점과, 기존의 독재정권에 반대했다고 해서 친민주주의 조직의 자격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이슬람교를 정치와 샤리아로 승화시킨들 민주정치와는 양립할 수 없으나, 이슬람교는— 개혁을 감안해볼 때— 합법적 민주정치의 원천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 내가 정치적 이슬람교와 샤리아에 근거한 이슬람국가 아젠다를 비판하는 것은 이슬람교 자체에 대한 판단은 아니다.
시민 사회에서 법치주의는 민주정치의 핵심이나, 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에서는 이데올로기와 문명이 각각 다르다. 때문에 다원 민주정치 사상이 다원적 근대화와 함께 부상하게 되었다. 샤리아는 민주정치 질서의 근간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러면 이슬람교, 특히 샤리아에 이견을 보이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잠시 접어두고,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슬람국가의 토대로 여기는 샤리아의 개념을 추상적으로나마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샤리아국가의 이데올로기는 문화의 차이를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없는 문명의 이데올로기인가? 서방세계에서는 이같은 물음을 두고, 보편주의자와 문화의 상대주의자 진영이 팽팽히 대립했다. 그러나 어느 편도 비서양 문화에는 동정을 표하지 않았다.

중동의 삶과 문화의 특징은 현지 문화에 배어 있는 이슬람교가 일부 결정한다. 여기서 민주정치의 걸림돌이 생기기도 하는데, 혹자는 문화의 차이도 진지하게 감안해야겠지만 이 같은 특성에 제약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차이는 먼저 밝히고 자유롭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개혁을 단행하면 이슬람교는 어느 정도까지는 민주화될 수 있으며, 민주정치는 이슬람 환경에 얼마나 적응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는 양자택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다. 수니파 이슬람
교가 장악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같은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이슬람세계에서 채택할 민주정치의 모양새를 결정하고, 샤리아가 위헌은 아닌지 판정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랍 사회에서는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이해하려면 이데올로기 논쟁과 착취를 보는 태도 및 서방세계에 대한 상습적 비방을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약 25년 전에 벌어졌던 논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80년 10월, 아랍의 지성인 그룹은 튀니스에 소집되어 민주정치의 대안을 비롯한 종교의 미래를 논의했다. 그들은 이 회의를 미래에 직면한 아랍Les Arabes face a leur destin이라고 불렸다. 주된 문제는 아랍이 책임감을 갖고 움직일지, 남의 잘못은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내심 만족해야 할지와 관계가 깊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동양주의” 는 후자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참가자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한 사안은 첫째, 아랍국가에서는 대부분 정치적 자유가 없고, 둘째, 자유를 보장하려면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20년 후인 2002년, 자아비판적인 분석은 유엔의 개발 원조 계획을 조정하는 기관인 유엔개발계획의 아랍 전문가가 작성한 보고서에 좀 더 완곡하게 기록되었다.63 자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랍 지식층이 자유에 대한 의지를 표현할 수도 없거니와, 고국에서 민주정치의 건실한 토대를 구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친민주정치 성향을 드러내면 투옥될까 두려워했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적 및 정치적 표현수단이 거부되기 십상이었다. 국가의 감시제도로 고용된 지식인만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중동은 각국의 신가부장제 내에서 존재하나,64 2009년 7월,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리카인에게 “식민주의 유산은… 민주정치 사회를 건설하지 못한 핑계거리가 될 수 없다” 고 주장한 것이 아랍인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부친의 고향인 케냐와 한국을 비교하던 그는 둘 다 식민지 시절을 감내했음에도 천양지차의 공적을 기록했음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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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자들은 민주정치의 다원주의 문화는 배척한다

 

 

 

 

 

신규 이라크 헌법에는 샤리아가 언급되진 않았지만, (『월스트리트 저널』지의 기사를 바꾸어 말하자면) “이슬람교의 고정된 원칙에 대립되는 법은 없으며… 이슬람법(샤리아)의 전문가로 구성되어 법의 위헌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 대법원이 설립될 것” 이라는 법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흡사한 조항은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조언으로 기록된 아프간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이 헌법에는 권리와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많지만, 그것이 이슬람법에 대립된다면 어떤 조항을 채택해야 할지 법정에서 판결하게 될 것이다. 이는 민주정치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샤리아로 다스리기 위한 모델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하여 많은 이슬람 국가들, 무엇보다도 무슬림 형제단이 집권한 이집트를 위협하리라 추정된다. 1967년의 전쟁 이후, “아랍이 곤경에 빠지자” 정치적 이슬람교가 부상하게 된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서방세계에서 도입된 것에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종교와는 무관한 민주정치는 외부에서 “도입된 것”들 가운데1순 위를 차지하나,— 터키의 AKP를 비롯한— 모든 이슬람주의 당은 민주정치를 권력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제이노 바란이 밝혔듯이, “민주정치 선거는… 권력에 이르는 가장 쉽고도 합법적인 방편으로 입증되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합법적 통치의 일환으로 절차는 수용하나 민주정치의 다원주의 문화는 배척한다. 비폭력 이슬람주의자들은 선전을 통해 민주정치를 지지하지만, 혹자는 민주정치가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이 배격해야 할 외부에서 도입된 해결책임을 주장하고 대안으로 이슬람교가 해결책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라 신의 통치(하키미야트 알라)는 원칙에 근거한 이슬람식 샤리아국가가 이슬람교라는 점은 밝히지 않는다. 이슬람교는 민주정치가 아닌 것이다.
서방세계의 사상에 참여해온 이슬람교의 장구한 역사를 감안해볼 때 선조들은 헬레니즘의 공적을 받아들였는데, 현대를 사는 무슬림이라고 민주정치 유산을 문화적 근대화의 결과로 수용하지 못할 까닭이 있을까? 민간 이슬람을 지향하는 무슬림에게는 민주정치의 보편성이 일리가 있겠지만, 민주정치의 정신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려면 이슬람주의 아젠다에 대립하는 문화의 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이 민주정치를 두고 말뿐인 호감을 표시하는 것은 최근의 일인 데다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즉 그들의 사상이 전환되었다는 것을 반영하진 않는다는 이야기다. 하마스는 선거에서는 승리를 차지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대변하는 정치제도는 민주정치나 아랍을 이해하는 바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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