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 민주정치의 환상

이제 이슬람주의가 민주정치 분야의 공로자가 아니라는 점과, 기존의 독재정권에 반대했다고 해서 친민주주의 조직의 자격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이슬람교를 정치와 샤리아로 승화시킨들 민주정치와는 양립할 수 없으나, 이슬람교는— 개혁을 감안해볼 때— 합법적 민주정치의 원천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 내가 정치적 이슬람교와 샤리아에 근거한 이슬람국가 아젠다를 비판하는 것은 이슬람교 자체에 대한 판단은 아니다.
시민 사회에서 법치주의는 민주정치의 핵심이나, 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에서는 이데올로기와 문명이 각각 다르다. 때문에 다원 민주정치 사상이 다원적 근대화와 함께 부상하게 되었다. 샤리아는 민주정치 질서의 근간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러면 이슬람교, 특히 샤리아에 이견을 보이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잠시 접어두고,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슬람국가의 토대로 여기는 샤리아의 개념을 추상적으로나마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샤리아국가의 이데올로기는 문화의 차이를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없는 문명의 이데올로기인가? 서방세계에서는 이같은 물음을 두고, 보편주의자와 문화의 상대주의자 진영이 팽팽히 대립했다. 그러나 어느 편도 비서양 문화에는 동정을 표하지 않았다.
중동의 삶과 문화의 특징은 현지 문화에 배어 있는 이슬람교가 일부 결정한다. 여기서 민주정치의 걸림돌이 생기기도 하는데, 혹자는 문화의 차이도 진지하게 감안해야겠지만 이 같은 특성에 제약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차이는 먼저 밝히고 자유롭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개혁을 단행하면 이슬람교는 어느 정도까지는 민주화될 수 있으며, 민주정치는 이슬람 환경에 얼마나 적응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는 양자택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다. 수니파 이슬람
교가 장악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같은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이슬람세계에서 채택할 민주정치의 모양새를 결정하고, 샤리아가 위헌은 아닌지 판정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랍 사회에서는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이해하려면 이데올로기 논쟁과 착취를 보는 태도 및 서방세계에 대한 상습적 비방을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약 25년 전에 벌어졌던 논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80년 10월, 아랍의 지성인 그룹은 튀니스에 소집되어 민주정치의 대안을 비롯한 종교의 미래를 논의했다. 그들은 이 회의를 미래에 직면한 아랍Les Arabes face a leur destin이라고 불렸다. 주된 문제는 아랍이 책임감을 갖고 움직일지, 남의 잘못은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내심 만족해야 할지와 관계가 깊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동양주의” 는 후자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참가자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한 사안은 첫째, 아랍국가에서는 대부분 정치적 자유가 없고, 둘째, 자유를 보장하려면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20년 후인 2002년, 자아비판적인 분석은 유엔의 개발 원조 계획을 조정하는 기관인 유엔개발계획의 아랍 전문가가 작성한 보고서에 좀 더 완곡하게 기록되었다.63 자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랍 지식층이 자유에 대한 의지를 표현할 수도 없거니와, 고국에서 민주정치의 건실한 토대를 구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친민주정치 성향을 드러내면 투옥될까 두려워했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적 및 정치적 표현수단이 거부되기 십상이었다. 국가의 감시제도로 고용된 지식인만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중동은 각국의 신가부장제 내에서 존재하나,64 2009년 7월,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리카인에게 “식민주의 유산은… 민주정치 사회를 건설하지 못한 핑계거리가 될 수 없다” 고 주장한 것이 아랍인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부친의 고향인 케냐와 한국을 비교하던 그는 둘 다 식민지 시절을 감내했음에도 천양지차의 공적을 기록했음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