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키는 닌후르사그의 저주를 받아 죽을 운명이 되었다

서아시아 국가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크레타 섬에서는 뱀을 손에 들고 있는 여신이나 사제들의 상이 발견된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페니키아의 항구도시 티레의 왕 아게노르는 자신의 다섯 아들을 보내 딸 에우로페를 되찾으려 한다. 황소로 변장한 제우스가 그의 딸을 납치해갔기 때문이다. 수치도 모르는 희대의 정력가 제우스는 에우로페에게서 세 명의 아들을 얻는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가 크노소스의 왕 미노스다. 미노스에게는 황소의 머리를 한 사내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놓은 미로가 있다. 미노타우로스에게 매년 일곱 명의 소년과 일곱 명의 소녀를 바쳐야 했다. 투우시합에서 영감을 받아 멋대로 지어낸 내용인지, 아니면 서아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이 황소 머리를 한 사내란 존재를 오해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죽음을 면치 못할 사악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 의미가 너무나 정반대라서 당혹스러울지 몰라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 황소 머리를 한 사내는 악마에 대적하는 인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리스에서만 유독 황소 머리를 한 사내가 악명을 떨치게 된 건 황소 머리를 한 사내의 모습을 하고 에우로페를 납치한 제우스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 에우로페가 팔레스타인인이 섬기는 밤의 여신일 수도 있다는 가설에 대해 오랜 논란이 있었다. 에우로페의 이름은 셈어의 동사 ‘지다’에 어원을 두고 있다. 해가지는 방향인 서쪽에 위치한 대륙이 ‘유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같은 원리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건 신의 박식함을 훔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추방은 이 부부가 성에 눈을 뜨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선악’은 전지전능한 신만 알 수 있는, 그리고 오로지 신만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구약성경』 「에스겔」에는 두 번째 에덴이라 할 수 있는 성산聖山에서 살다가 쫓겨난 두로 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두로 왕은 마음이 교만하여 자신을 신이라 여겼다. 이 왕은 하느님의 성산에 살며 “화광석 사이에서 왕래했고,”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의 영화를 누리다가 “슬기와 지혜”를 쏟아버렸다.(「에스겔」 28: 14~17) 수메르인의 천국 이야기에는 엔키와 닌후르사그가 등장한다. 닌후르사그는 물의 신 엔키가 그녀의 딸・손녀・증손녀까지 모조리 임신시켜버리자 격노한다. 마지막 잠자리에서 모든 힘을 소진한 엔키는 사경을 헤매게 된다. 여신의 음부는 물의 신 엔키의 정액으로 넘쳐흐른다. 지칠 대로 지친 엔키는 닌후르사그가 흘러넘친 그의 정액으로 만든 여덟 개의 식물을 먹어치운다. 그의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다른 신들은 엔키의 죽음을 예감한다. 금지된 식물을 먹은 것 때문에 엔키는 닌후르사그의 저주를 받아 죽을 운명이 되었다. 여우가 명계의 신들에게 엔키를 위해 닌후르사그와 엔키의 중재에 나설 것을 부탁할 때까지 엔키는 이승으로 살아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수메르식 ‘추방’ 이야기는 유대의 ‘추방’ 이야기와 사뭇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금지된 식물을 먹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게 된 건 유대 역사상 유례없는 종교적 해석 때문이다. 유대인은 이후 서아시아를 물들인 ‘유일신’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고안해냈다. “우리 하느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는 「신명기」 6장 4절로 대변되는 개념 말이다. 이러한 개념의 발전을 설명해내기 위해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유대인 관념의 연속적인 변화 속에서 특정 시점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유일신론자였을까? 아브라함은 우르Ur(현재의 텔 엘 무카이야르)에 살았다. 우르에서는 모든 사람이 운명의 예언자 난나를 최고신으로 신봉했다. 아니면 모세의 경험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일까? 이집트에서 성장한 모세는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아톤Aton(혹은 아텐Aten)을 신으로 모시고자 하는 파라오 아크나톤(아멘호테프 4세)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신이 안배해놓은 이스라엘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예언한 예언자들, 아시리아의 잔혹한 군사들을 마주해야 했던 예언자들이 유일신론자였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