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치료사는 아이를 존중하고 따뜻하게 대응해야 한다



아이가 미술 재료를 이용해 무엇인가 그리거나 만들기 시작하면,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습니다.

즉, 아이가 조용히 작업한다면 굳이 말참견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반면 아이가 먼저 말을 꺼낸다면 적극적으로 경청해주어야 합니다.


미술치료사로서 해야 할 일은 아이가 재료를 가지고 미술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표현하는 반응을 존중해주고, 그때그때 민감하고 따뜻하게 대응해주는 것입니다.

『아동 미술치료 Child Art Therapy』(2010, 출판사 知와 사랑)의 저자 주디스 아론 루빈은 40여 년 동안 미술치료 분야에서 일해 오면서 깨달은 사실이 어떤 아이들은 하나 이상의 표현 통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아이들은 동시에 두 통로 이상을 통해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한 번에 하나의 통로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러한 선천적인 경향은 고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디스 아론 루빈은 이것이 타고난 신경 배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일 통로를 타고난 예술가에게 누군가 질문을 던져 작업을 방해하면, 그들은 답을 하기 위해 작업을 멈추거나 질문을 듣지 못한 채 작업에만 열중할 것입니다.

반대로 점토 반죽을 주무르고 두드리다 보면 혀가 풀어져 말이 더 많아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창의적인 미술 활동이 자연스러운 언어 표현을 촉진하느냐 저해하느냐는 아이들이 타고난 성향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비간섭적인 태도로 아이의 활동에 흥미를 보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가 미술 활동을 하는 동안 꼭 질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아이에게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지 먼저 물어보아야 합니다.

아이가 작품을 만들면서 자연스레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아이가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이 항상 가장 좋습니다.

이는 치료사가 던지는 질문이나 진술이 아이에게 가치 판단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료사의 말이 최종 결과물에 영향을 끼쳐, 아이는 치료사가 중간에 개입하지 않았을 때와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언어 외에도 다양한 수단으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이가 치료사를 한 번 흘긋 보는 단순한 행동에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치료사에게 허락이나 승인을 구하는 것일 수도, 치료사를 탓하거나 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치료사와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자리하는지,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동작을 하는지도 마찬가지로 많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아이가 성인인 치료사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하고, 치료사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관찰하면, 그 아이의 일반적인 태도와 기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치료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당당하고 자신 있는 태도로 도움을 청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주눅 들거나 겁에 질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소심하건, 친화적이건, 억압적이건, 무기력하건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소망과 근심을 미술작품에 투사하듯이, 자신들과 관련된 중요인물들에 대한 감정과 기대를 치료사에게 투사합니다.

따라서 미술치료사는 아이가 치료사를 신뢰하는지 아니면 의심쩍어하는지,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지 아니면 외향적이고 활달한 모습을 보이는지, 편안해하는지 아니면 두려워하는지, 적대적인지 아니면 우호적인지, 의존적인지 아니면 독립적인지 잘 관찰해야 합니다.

또한 미술치료를 받으면서 그러한 태도가 변화하는지도 주목해야 합니다.


아이가 창의적인 과업을 앞에 두고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를 관찰하면, 새롭고 모호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아이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미술 재료로 무엇을 할지 결정하라고 청했을 때, 아이들이 보이는 반응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매우 충동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아이가 어떤 재료를 고르느냐 못지않게, 재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에도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이들이 미술 도구와 재료에 보이는 반응 또한 매우 다양합니다.

아이들은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신중한 반응을 보이기도, 때로는 접근-회피approach-avoidance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 중 접근-회피 반응을 자주 유발하는 재료로 손가락 그림물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촉각형feeler’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촉각형 아이들은 갓난아이들이 감각기관을 통해 학습하듯 만지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는 등의 행동을 주로 합니다.

그런 아이들은 재료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재료를 누가, 어디에서 샀는지 낱낱이 캐묻는 행동은 호기심과 감각적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재료들을 몽땅 제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무엇인가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불안간과 충동 조절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개중에는 심지어 미술 재료를 집으로 가져가도 되는지 묻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욕구는 식을 줄 모릅니다.


일단 재료를 선택한 후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점토를 손으로 꾹꾹 쥐어짜는지, 쾅쾅 내리치는지, 부드럽게 만지는지, 꼬집는지, 가볍게 토닥거리는지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줍니다.

아이가 작은 점토 덩어리를 힘차게 쥐어짠다든가, 크레용을 꾹 눌러 부러뜨리는 등의 행동에서 공격적인 충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재료와 친숙해지는 과정은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주위를 빙빙 돌며 탐색하다가, 서로를 응시하고, 한동안 직접적인 접촉 없이 관찰만을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시험 삼아 손을 뻗어 살짝 만져봅니다.

모험적인 시도의 결과는 두 가지일 수 있습니다.

서로 더 멀어지거나 가까워집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첫 만남을 다분히 충동적인 방식으로 시작하기도 합니다.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익숙한 재료나, 새로운 재료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재료와의 첫 접촉은 아이마다 다양합니다.

재료를 무심코 집든, 신중하게 고르든, 충동적으로 잡아들든,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하든 그 행동은 아이의 내면 상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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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인, 철학자. 화가, 조각가 2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530년경까지의 첫 번째 시기에 나타난 미켈란젤로의 예술관은 성기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성 베드로 성당의 <로마 피에타> 그리고 초기에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은 그의 예술관을 잘 말해주는 전형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미켈란젤로 역시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피렌체 회화의 과학적 전통을 고수했지만, 신플라톤주의를 접하면서부터 그 영향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건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바로 미 자체였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묘사된 인물상들의 웅대함은 자연현상의 단순한 모방 그 이상이며 인체에 대한 이상화 작업은 자연현상을 면밀히 연구한 끝에 얻은 지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인체미에 대한 숭배가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로마의 성기 르네상스는 사상적 측면에서는 기독교와 이교라는 상반된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융합되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프레스코는 도상의 측면에서 보면 가장 박식한 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인물들의 외양은 이교 신들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에게는 기독교와 이교 모두 소중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말년의 신앙생활을 물들인 열정적인 자기포기의 정신을 가졌던 건 아닙니다. 그는 순교한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1452-98)의 영향을 받아 아주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이자 종교개혁가인 사보나롤라는 1491년에 피렌체의 성 마르코 수도원 원장이 된 후 교회혁신을 위한 설교와 예언자적 언사를 구사하여 시민들의 정신적 지도자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사보나롤라가 ‘하느님의 노여움’이라고 예언한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Charles VII(1470-98)의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원정이 이탈리아인에게 신의 벌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프랑스인은 이와 결탁해 민주정치와 신정정치를 혼용한 법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려고 했습니다. 브르타뉴와 정략적으로 결혼하여 그 영토를 확보한 뒤 루이 11세의 부르고뉴와의 결혼정책 파기로 빚은 오스트리아와의 불화를 해결한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원정 시 도시문화와 르네상스 문명에 매료되어 프랑스 인문주의 운동의 소지를 만들었습니다. 한편 사보나롤라의 교회 개혁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지만, 1497년의 사육제에서 시민들의 사치품과 이교도적 미술품 및 서적을 불태운 이른바 ‘허영의 소각’을 비롯해 과격한 방법을 취하자 시민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 반대세력이 우세해지고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의 불화, 프란체스코회와의 대립 등으로 지지 기반을 잃어 사보나롤라는 다른 두 명의 도미니크회 성직자와 함께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물질계의 미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믿음은 대단했는데, 사랑을 주제로 쓴 초기의 시에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신미와 가시적 미를 향한 진한 열정이 종종 육체적 정열과 어우러진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는 그의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됩니다. 바사리와 콘디비 두 사람 모두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인체를 해부해가면서 열심히 해부학을 공부했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연의 정확한 모방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를 모델로 연필소묘를 한 번 했을 뿐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한 살아 있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초상화라는 걸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홀란다는 미켈란젤로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플랑드르 회화를 결명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내 영혼이 눈을 통해 처음 접한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동안

정신적인 영상은 커지지만 물질적인 영상은 움츠러든다.

천하고 별 가치 없는 사물인양.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예술가란 자연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지만 지안 안에서 보는 것들을 자신의 이상적인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세계의 거시적인 미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대표적인 작품이 그가 1534-41년 사이 클레멘스 7세와 바오로 3세를 위해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위에 있는 프레스코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가 이 예배당 천당에 아담의 형상을 그릴 때만 해도 실재보다 훨씬 더 이상화시켰지만, 아름다운 인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형상을 묘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최후의 심판>에서 그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여기서의 인체는 무겁고 무기력해보이며 사지는 두텁고 우아함이 결여된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것처럼 그가 손을 떨기 시작해서 그렇게밖에 그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물질적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기를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관념을 전달하는, 정신적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물질적인 미를 이용한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실재 세계의 공간이나 원근법, 비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봐서 성기르네상스의 기본원리가 무시된 듯합니다. 물질적인 데서 멀어지고 정신적인 것으로 향한 데는 늙어간다는 것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당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교황의 위치는 매우 약화되었으며, 더욱이 경제적 혼란까지 가중되었습니다. 1527년 로마가 약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더욱 무력해졌습니다. 가톨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 전체의 존폐가 위협당하는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은 동요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신비주의 사상을 이렇게 이탈리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확인하기가 두려운 나머지 선택한 하나의 강구책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종교적 화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는데, 종교적 화가는 예술에 잇어서도 능숙할뿐더러 매우 경건한 인생을 살아감에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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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의 부분

프란시스코 데 홀란다는 『고대 회화에 관한 대화편』(1548)에서 적었습니다.

하느님의 장엄한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화가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위대하고 능숙한 거장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인생은 성령으로 그에 대한 이해가 증가될 수 있도록, 성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흠이 없어야 한다. 잘못 그려진 하느님의 모습은 신자의 마음을 분산시키며, 신앙심 없는 사람들의 신앙마저 잃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하느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은 신앙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 동요하게 만들어 신앙심을 일게 하여 명상에 잠기게 하며 눈물 흘리게 만든다. 그 모습에서 나오는 참된 아름다움으로 인해 신에 대한 외경심과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대단한 상상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음속에 품은 간념들을 손이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면서 늘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않고 낮게 평가했다”고 적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추구한 아름다움은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이었으므로 눈으로는 감지되지 않고 정신으로서만 감지될 뿐입니다. 그에게 모든 미의 근원은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살고 있는 이 신적 존재는

다른 존재들을 아름답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더욱 아름다워진다.


미켈란젤로는 예술을 예술가가 하늘로부터 받은 축복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물질인 돌 자체는 상상력이 작용하지 않는 한 쓸모없는 상태입니다.


펜과 잉크에서

숭고한 양식, 하찮은 양식, 평범한 양식이 나오듯이

대리석에서도 조각가의 재능 여하에 따라

훌륭한 형상과 보잘 것 없는 형상이 생겨난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상을 만드는 데 있어 자연이 제공해줄 수 없는 전체로서의 조화, 우아함이 깃든 조화만을 추구한 결과 9등신, 10등신 심지어는 12등신까지의 비례법을 적용하곤 한다”고 적었습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미의 어떤 기준에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상상력과 개별적인 영감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입증해줍니다. 건축에 관한 그의 사고 또한 이와 같았는데,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에 적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비트루비우스와 고대인들이 해놓은 일에 따라, 그리고 내려오는 관례에 따라 사람들이 그동안 완성시킨 척도, 규칙이 좌우하는 일로부터 박차고 나왔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그에게 무한히 감사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가 장인들이 일할 때 늘 따라야만 했던 상도의 굴레와 속박을 내팽개쳐주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생애 후반의 약 20여 년 동안은 그의 예술과 사상적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러 측면에서 관찰할 때 이는 1530년 후반과 1540년 초반에 보여준 예술과 사상ㅇ의 특징들이 좀 더 강화된 양상으로 나나탄 것 뿐입니다.


1545년경 이후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이 극에 달해 라티스 본회의 이후부터는 타협이란 말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교황권의 위치에 변화가 생겼으며, 미켈란젤로가 속한 온건파는 점차 그 힘이 약해지면서 내성적으로 변했습니다. 이 격동기에 나온 것이 마지막이자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오나성하지 못한 <론다니니 피에타>입니다. 그는 이 조각을 통해 육체적 특성을 나타내는 인체의 상징적 요소들을 모두 박탈하여 순수한 정신적인 관념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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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인, 철학자. 화가, 조각가 1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를 지칭하는 콰트로첸토Quatrocento, 즉 1400년대와 성기르네상스를 지칭하는 친퀘첸토Cinquecento, 즉 1500년대 미술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를 따른 것이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BC 428/427-348/347)과 고대 후기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누스Plotinus(204-70)의 저술에 대한 이탈리아의 플라톤주의 철학자 피치노Marsillio Ficino(1433-99)의 주석이 규범이 되었습니다. 관조를 통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에 대한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될 수 있다는 피치노의 주장은 플라톤이 가까스로 인정한 광기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예술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피치노의 주장이었습니다.


메디치가의 후원 하에 다양한 프레스코와 우피치 궁전 설계 등을 맡은 바 있는 화가이며 건축가 그리고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예술을 “모방에 대한 모방”이라고 한 플라톤의 모방론을 받아들였으며, 플리니우스와 더불어 개화, 몰락, 재출발이라는 세 가지 시대의 학설을 미술 발전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이 학설을 적용하여 그는 고대 미술을 하나의 정점으로 보고 암흑의 중세를 몰락으로 대비시켰지만, 14세기의 예술부흥으로 말미암아 중세의 몰락이 극복되는 것입니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고대가 극복되었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에 대한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할 수 있었던 사람은 몇 되지 않았는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이탈리아의 시인 프란체스코 베르니Francesco Berni(1497/98-1520)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몇 점 보았는데, 배운 바는 없으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픞라톤의 저작에서 그것들 전부를 읽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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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밤>, 1526-31년경


미켈란젤로는 작품 <밤>을 예로 들어 그것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돌 속에 이니 내재한 형상을 자신이 자유롭게 한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정신에 내재한 추상적 형상을 질료로 탁월하게 구현시킬 줄 알았고, 관람자로 하여금 플라톤이 말한 순수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는 주로 피치노의 영향을 받았는데, 피치노는 예술이 “자연보다 지혜롭다”고 주장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자연을 더욱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공언했습니다.


프랑스어 르네상스Renaissance(1300-1600년)는 이탈리아어 리나쉬타Rinascita의 번역으로 재탄생rebirth, 혹은 새로운 탄생을 뜻하며, 이 말은 순수미술에서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약진을 특징지은 말입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미켈란젤로에게 있었다면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에게 자신의 호화로운 무덤제작을 맡기면서 면죄부의 판매량을 지나치게 늘렸기 때문에 루터와 그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분리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바로크의 이버지로 불립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에 나타난 뒤틀리고 긴장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바로크를 예고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 예술가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바로크와 관련해서 언급하는 건 미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영예입니다.


회화와 조각, 그리고 드로잉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할 만한 미켈란젤로는 뒤늦게 시인으로도 알려졌습니다. 그의 편지 495편이 1623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대부분 가족이나 후원자에게 보낸 개인적 내용이거나 작업에 관한 것들로 예술론을 유추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쓴 시들은 예술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더라도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것들이므로 미에 대한 그의 사고를 추론하게 해줍니다.


미켈란젤로 자신이 직접 쓴 글 외에도 세 명의 당대인이 그에 관해 쓴 자료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데 홀란다Francisco Hollanda는 포르투갈 화가로서 1538년에 로마로 와서 미켈란젤로 주변에서 한동안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1548년 『고대 회화에 관한 대화편 Tractato de Pintura Antigua』을 썼는데, 자신이 미켈란젤로라는 대가와 밀찰되어 있었음을 은근히 과시하여 자신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의 저서는 자만심의 결과물이지만, 미켈란젤로의 생애 중 전기 작가들이 소흘히 다룬 시기에 관련된 내용이라서 소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대에 출간된 두 번째 저술로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기록한 미켈란젤로의 전기입니다. 이 책은 1550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1568년의 두 번째 판에서는 거의 다시 썼다 싶을 정도로 수정 증보되었습니다. 이 책은 자료제공 측면에서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제작방법을 기술했으며, 아울러 약간이나마 그의 견해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540년대 말부터 조수로 활동한 미켈란젤로의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1525-74)가 쓴 『미켈란젤로 전기』는 1553년에 출간되었으며, 셋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힙니다.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다룬 이 책은 바사리가 잘못 서술한 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쓰인 듯합니다. 콘디비는 다소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말과 사고를 기록하는 데 있어 바사리나 홀란다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콘디비가 『미켈란젤로 전기』를 출간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일흔여든 살이었고, 미켈란젤로의 조상, 출생, 그리고 어린 시절에 관한 콘디비의 전기는 당시의 기록과 늙은 미켈란젤로의 어렴풋한 기억에 근거했을 것입니다.


033

다니엘레 다 볼테르라의 <미켈란젤로의 초상>, 1565, 청동.


미켈란젤로는 장수했으므로 그의 사고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했으므로 이를 체계적이고 명확한 한 줄기로 정리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로마에서 제작한 초기 작품들은 성기르네상스의 만개한 양식을 보여주지만, 1564년 타계하기 전에는 매너리즘 양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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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생명, 즉 이 유기체에 DNA나 RNA의 기원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저자 레오킴Leo Kim은 연구개발 책임자로서 미래의 성과를 위한 전략을 세우면서 신약 개발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회사는 암 및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 같은 질병 치료를 위한 자연적 방어분자와 같은 계열인 유전자공학 인간 인터페론interferon을 두고 다른 회사들과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다발성 경화증은 신경세포의 축삭을 둘러싸고 있는 절연물질인 수초myelin sheath가 탈락되는 질병, 즉 중추신경계의 탈수초성 질환demyelinating disease 가운데 가장 흔한 유형이며, 주로 젊은 연령층에서 발생하는 만성 염증성 질환입니다. 수초란 신경세포의 축삭axon을 둘러싸고 있는 절연물질로 수초가 벗겨져 탈락되면 신경신호의 전도에 이상이 생기고, 해당 신경세포가 죽게 됩니다. 인터페론은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은 세포에서 분비되는 단백질로 바이러스의 침입에 저항하도록 생체내의 세포들을 자극하는 물질로서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지 않은 세포들의 표면에 붙어 그들을 보호합니다.


레오킴은 최고 연구책임자와 함께 탐방한 몇몇 생명공학 회사들 가운데 한 회사와 5천만 달러에 매매계약을 해야 한다고 임원들을 설득했습니다. 이 특별한 회사가 인터페론을 생산하는 박테리아를 설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임상실험을 위한 인터페론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거대한 발효시설 건립에 추가자금을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인터페론은 질병, 심지어 암과도 싸우는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생산됩니다. 그는 박테리아에서 생산된 화합물을 인체에 투여하여 암과 다발성 경화증 같은 질병 대부분이 화학약품의 부작용 없이 억제되기를 바랐습니다.


몇몇 종류의 인간 인터페론들이 개발되었습니다. 이 흥미로운 기술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그는 실험실에서 몇 가지 인터페론 유전자를 분리하도록 했습니다. 십 년이 걸려서야 다발성 경화증 치료를 위한 인터페론이 시장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인터페론은 재발을 줄이고 다발성 경화증 환자들의 삶의 질과 지적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터페론 연구가 끝난 뒤 레오킴은 과학자이자 회사의 부사장으로서 박테리아 진화 연구에 관여했습니다. 이 단순한 유기체에서 그가 발견한 변화는 엄청났으며, 많은 간행물과 특허권들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질병을 이해하고 치료하는 분자생물학을 이용하는 생명공학 혁명은 또한 유전적 수준에서 다양한 생명 형태들의 차이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인간으로의 진화론적 진로는 서로 의존하는 공진화가 관여되는 복잡한 과정이므로 진화를 이해하면 우리의 존재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우주의 창조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과학과 종교 사이의 충돌 너머에는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또 다른 논쟁적인 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창조나 최초의 생명과 달리, 진화는 과학자들이 받아들였으며 그들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쟁점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가 다룰 거의 모든 주제와 관련해서는 미스터리, 수수께끼, 모순들이 있습니다. 진화의 수수께끼와 역설은 과학의 다른 영역에서 발견된 것에 비하면 아직도 미미한 편입니다. 그리고 진화는 생명과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최초의 생명이 어떤 형태였는지,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는 창조주가 관여되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생명의 특징을 다양하게 갖춘 생물들이 지구상에 나타난 대략의 시기를 밝혔으며,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최초의 생명, 즉기원을 알 수 없는 이 유기체에 DNA나 RNA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19억~39억 년 전, 화학에서 탄소 원자와 질소 원자 사이에 삼중결합으로 이루어진 작용기인 시안기를 함유한 박테리아 같은 유기체는 이산화탄소를 사용하여 산소를 만들어내고 이는 마침내 우리가 숨 쉬는 대기가 되었습니다. 7억 2,000만 년 전,초기 두뇌의 기원인 대합조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5억 4,400~5억 4,300백만 년 전, 새로운 형태의 눈eyes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그렇지만 2억 5,100만 년 전에 대부분의 종 가운데 80~95%가 멸종했습니다. 그리고 2억 2,000만 년 전, 사회적 곤충인 벌bees이 등장했습니다.


일부 화석들이 가리키는 대로 일부 과학자들은 일찍이 39억 년 전에 생명이 처음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이는 지구가 형성된 지 불과 5억 년 이후이므로 과학자들은 생명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형성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곤혹스러워합니다. 생명이 우주에서 왔다면 이 시기는 논리적일 수 있으나 일부 사람들은 생명이 나타나기까지의 자연과정에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이 “생명의 이른 출현”을 창조주의 증거로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유일한 증거는 약 19억 년 전의 화석으로 지구가 형성된 지 대략 25억 년 후의 것입니다. 최초 생명의 가장 이른 예로는 다양한 출처에서 나온 35억 년 전 화석들이 새로운 증거로서 유력합니다.


진화론에서는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하고, 돌연변이를 통해 좀 더 적응할 수 있는 후손을 진화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초기 생명에서는 유전자들이 어떻게든 자유롭게 교환되었으며, 따라서 유전자를 교환하는 다양한 유기체들의 공동체가 진화했습니다. 이는 박테리아가 빠르게 유전자를 교환한 이래 지금까지도 여전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정보가 왜 중요할까? 그것은 모든 생명이 연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하는 정도를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초기 지구는 말 그대로 딴 세상이었습니다. 산소가 없었고, 바다는 뜨거웠으며, 대기 압력과 혜성 및 운석들의 끊임없는 충돌로 숨 막히는 곳이었습니다. 최초의 생명이 우주에서 왔든 지구상의 성분에서 출현했든 우리가 아는 건 이렇습니다.


첫째, 39억 년과 19억 년 전 사이에 ‘시안기를 함유한 박테리아cyanobacteria’가 출현하여 우리의 행성을 변화시켰습니다. 이 박테리아가 빛과 물, 이산화탄소를 산소와 유기물질로 전환시켰습니다. 대기 중의 산소는 6억 년 전까지만 해도 현재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최초의 생명을 어떻게 규정하든 그것은 고도의 적응력을 갖춘 미생물을 생산하도록 진화되었습니다. 최초의 생명과 유기체들은 화학물질 ‘주머니’로서 재생과 같은 생명의 단순한 기능만 했을 뿐입니다.


초기의 모든 생명은 단세포, 즉 전기화학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화학물질 ‘주머니’로 구성된 미생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박테리아는 좀 더 커다란 박테리아 내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약 15억 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실마리로서, 단세포들이 주머니 안에 주머니를 지닌 유기체로 진화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주머니인 세포핵은 미생물의 DNA를 둘러싼 세포막입니다.


그 외의 세포막 같은 구조들도 나타났습니다. 세포 내에 있는 이런 상이한 종류의 주머니들은 분리될 수 있었습니다. 재생조직을 수용한 세포핵 에너지를 생산하는 성분을 가진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세포 소기관의 하나로 세포호흡에 관여하며, 호흡이 활발한 세포일수록 많은 미토콘드리아를 함유하고 있음], 햇빛과 이산화탄소, 물을 당糖과 산소로 전환하는 분화된 화학물질들을 품은 엽록체가 그것입니다. 세포 내에 있는 이런 주머니들의 결과로 생명은 좀 더 복잡해졌습니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들은 포획된 미생물들에서 생겨났습니다. 현대 DNA 분석이 가리키는 대로 미토콘드리아가 되는 본래의 박테리아는 대부분의 유전자들을 숙주인 세포핵에게 기증까지 합니다. 박테리아는 진화하면서 복합적인 유기체가 되었습니다. 그 같은 내부의 주머니들과 함께 유기체들은 수백 수천의 미토콘드리아가 양성자 펌프를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기 때문에 박테리아보다 수천 배나 커질 수 있었습니다.


진화된 ‘주머니’들을 가진 단세포 유기체들이 지속적으로 밀집하여 군체群體를 이루었습니다. 현대의 아메바들은 여전히 이런 특징, 즉 점균류slime mold로 밀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포 안에 있는 기능이 분화되면서 주머니들은 좀 더 복잡한 유기체가 되었으며, 세포다발은 좀 더 정교한 생물이 되었습니다. 레오킴은 이런 다발을 ‘자루sack’라고 부릅니다.


최초의 자루는 약 10억 년 전에 발달했습니다. 그것은 세포다발을 감싸는 줄기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많은 세포들을 가진 좀 더 복잡한 유기체로 진화했으며, 이 유기체의 세포는 박테리아보다 수천 배나 큽니다. 이 유기체들은 특화된 다양한 세포자루들을 가졌으며, 각 자루들은 특화된 기능들을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 장기organ들과 몸체의 여러 부분들이 생겨났습니다. 단순한 몸체의 윤곽이 입과 창자, 젤라틴 모양의 몸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한 예가 대합조개인데 이것은 일찍이 7억 2,000만 년 전에 생겨났습니다. 대합조개는 뇌의 초기 형태까지 갖고 있습니다.



5억 4,400만 년 전까지만 해도 동물들의 진화는 서서히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 지구에는 오직 세 과divisions(혹은 유형types)의 동물만 있었으며, 이 과를 필라phyla[동물 분류상의 문門phylum의 복수. 계界kingdom와 종류class/kind 사이의 분류군을 말함]라고 합니다. 이런 속도로는 인간과 같은 복잡한 유기체로의 진화를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5억 4,400만 년 전부터 백만 년 동안에 필라의 수가 3에서 38로 급증했습니다. 이는 고고학자들이 캐나다와 세계 각지에서 새로운 동물이 급증한 것을 보여주는 화석의 발견으로 알아낸 사실입니다. 찰스 다윈은 이런 급증이 자신의 진화론을 거스르는 잠재적 증거를 보여주는 것임을 알고 당황해했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이 미스터리는 과학자들을 계속 난처하게 만들었으며, 만족할 만한 이론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 후 21세기가 시작될 무렵 매우 그럴 듯한 하나의 이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자 앤드루 파커Andrew Parker(1967-)는 저서 『눈 깜빡할 사이에 In the Blink of an Eye』(2003)에서 생명 형태가 급증한 건 가장 최근에 분화된 세포자루인 눈을 가진 생물들에서 비롯되었음을 이론화했습니다. 동물들은 환경을 분별하는 데 단지 감각과 화학적 수용체에 의존하기보다 제한적이지만 시각을 가졌습니다. 시각은 먹이를 쉽게 포획하고 포식자들을 미리 경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눈은 또 생명체들이 시각적으로 배우고 서로 모방하게 해주었습니다. 5억 4,300만 년 전에 발생한 가장 유용한 감각, 시각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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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도시설계가, 건축가, 물리학자, 의학자, 화가 2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은필, 목탄, 초크, 펜과 잉크 등을 사용하여 드로잉하면서 물질적, 정신적 요소를 두루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자연에 관심이 많은 그는 풍경을 드로잉 했으며, 인물을 그릴 때에도 나무, 강, 바위, 산, 구름, 바다 등을 삽입해 자연을 회화적으로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그에게 있어 회화의 확실성은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첫째, 사물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눈에 의존하고, 둘째,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은 실제 척도를 따라 판단을 검증하며, 셋째, 기하의 원리를 이용하는 것 등입니다. 시를 옹호하는 사람과의 논쟁에서 그는 “회화가 자연의 모습을 시보다 솔직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회화가 시보다 더 낫다”고 주장했으며, 회화와 시의 관계를 실재와 그림자에 비유했습니다. 또 회화가 조각보다 우수함을 역설하면서 조각은 색채나 대기의 원근을 나타낼 수 없으며 발광체나 투명체를 비롯하여 구름과 폭풍우, 그 밖의 많은 것들을 묘사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회화를 일종의 과학으로 보고, 예술적 모방은 과학적 행위이지만 단순히 기계적 행위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으며, 이론에 근거하는 실천을 역설했습니다.


학문적 바탕이 없이 실제 작업에만 힘을 쏟는 사람들은 키나 나침반을 갖지 않고 바다로 나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선원들과 같다. 실천은 늘 확고한 이론에 근거해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뛰어난 공학가였습니다. 그가 발명한 것들을 보면 나사를 자르는 기계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롤러-베어링 브레이크, 최초의 연발총, 톱니바퀴가 부착된 기어로 끌어올리는 절구, 여러 개의 벨트는 사용하는 방법과 세 가지 속력을 내는 변속기어,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나사를 조일 수 있는 조절 가능한 렌치 등 그 밖에도 그가 고안한 기계들이 아주 많습니다. 물속을 탐험하는 계획도 세웠지만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증기기관차에 관해서도 연구했으며, 낙하산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작방법을 기록했습니다. 생애의 절반을 인간이 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연구한 그는 새를 여러 면에서 인간보다 우수한 종으로 생각했습니다. 새 날개와 꼬리의 기능에 관해 구체적으로 연구하면서 상승하고 하강하며 방향을 전환시키는 비행물체를 고안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의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고, 기하학적 형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그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기하에 대한 그의 관점을 파악하면서 감상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체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은 그는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지도 않다”, “달에는 겨울과 여름만 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고 했으며, 물로 덮여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땅속에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다면서 이를 인체의 혈관에 비유했습니다. 고지에서 발견되는 조개껍질과 물고기 뼈 화석을 보고 물이 한때 고지에까지 찼었다고 추측했는데, 보키치오 역시 1338년 『필로코포 Filocopo』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사하라 사막도 한때 바닷물에 잠겨 있었던 것으로 보았으며 성서가 말하는 대홍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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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수역학 장치>, 15-10.5cm.


운동과 중량에 관해 100페이지 분량으로 적었고, 또한 그만큼의 분량으로 열, 음향, 광학, 색채, 수리학, 자석에 관해 적었습니다. 그는 “기계학은 수학적 과학의 천국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은 수학의 열매를 맛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대단했으며 전화의 원리, 즉 소리의 전달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배를 멈추고서 가늘고 긴 튜브를 바닷물 속에 담그고 튜브 끝을 귀에 대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배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음악을 통해 소리의 파장을 발견한 그는 간단한 기구 튜브로도 소리를 전달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소리보다는 시각과 빛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눈의 역할에 매우 경이로워하면서 “눈은 우주 전체의 이미지가 아주 작은 공간에 들어 있음을 믿는다”고 적었고, 정신은 아주 오래된 이미지를 상기해내는 힘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눈을 카메라 렌즈의 원리로 이해하여 카메라와 눈 모두 빛의 작용으로 이미지를 피라미드 모양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았으며, 햇빛을 분석하여 무지개로 나타나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이탈리아의 건축가이며 인문주의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72)와 마찬가지로 그도 4세기 후 미셀 세브루가 명료하게 밝혀내기 전에 이미 보색complementary color에 관한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물에 관한 논문을 수없이 썼습니다. 물의 운동은 늘 그의 뇌리 속에 있었습니다. 2천1백 년 전 탈레스가 말한 것처럼 그도 “물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탈레스와 마찬가지로 물은 그에게 만물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는 밀라노에서 운하를 디자인하고 건립하여 배들이 지름길로 물자를 운반할 수 있게 했으며, 물에 대한 집중적 연구를 통해 일상생활에 편리함을 주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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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베들레헴의 별꽃, 풀, 미나리아제비, 아네모네, 또 다른 종자에 관한 식물학상의 연구>, 1505-07년경, 19.6-15.8cm.


자연을 관찰한 그는 자연사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식물의 잎이 줄기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자연법칙을 정립하기 시작했고, 나이테로 나무의 나이를 아는 방법도 알아냈습니다. 그렇지만 당대의 망상을 전부 버리지는 못했는데, 어느 특정한 동물이 눈앞에 있거나 그 동물을 만질 경우 낫는 병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인체를 직접 해부하며 인간의 내부와 각 부분들의 작용을 알게 되면서부터 미신적인 생각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른 구 이상의 시신을 해부했으며, 한 권의 책으로 엮기 위해 수백 점의 드로잉과 글을 기록했습니다. 자궁, 심장, 폐, 두개골, 힘줄, 창자, 안구, 뼈대, 두뇌, 그리고 여인의 하복부 등을 직접 보고 드로잉 했습니다. 자궁을 과학적으로 재현한 건 그가 처음이며, 해부학에 관한 상세한 드로잉과 글은 전에 없던 것들입니다. 오늘날 空洞(공동)으로 알려진, 광대뼈에 난 구멍을 드로잉으로 보여준 것도 그가 처음입니다. 또한 죽은 황소의 심장에 액체 왁스를 넣어 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인체에 관한 주요 논문들은 프랑스 군대가 밀라노를 침입했을 때 사라졌지만, 오늘날 그는 위대한 과학자로 기억됩니다. 과학에 대한 관심과 성과를 알 때 비로소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됩니다. 이는 미켈란젤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점으로 두 사람을 동일한 관점에서 비교하는 건 공정치 못합니다. 두 사람의 진가는 각기 상응하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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