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인, 철학자. 화가, 조각가 2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530년경까지의 첫 번째 시기에 나타난 미켈란젤로의 예술관은 성기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성 베드로 성당의 <로마 피에타> 그리고 초기에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은 그의 예술관을 잘 말해주는 전형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미켈란젤로 역시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피렌체 회화의 과학적 전통을 고수했지만, 신플라톤주의를 접하면서부터 그 영향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건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바로 미 자체였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묘사된 인물상들의 웅대함은 자연현상의 단순한 모방 그 이상이며 인체에 대한 이상화 작업은 자연현상을 면밀히 연구한 끝에 얻은 지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인체미에 대한 숭배가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로마의 성기 르네상스는 사상적 측면에서는 기독교와 이교라는 상반된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융합되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프레스코는 도상의 측면에서 보면 가장 박식한 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인물들의 외양은 이교 신들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에게는 기독교와 이교 모두 소중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말년의 신앙생활을 물들인 열정적인 자기포기의 정신을 가졌던 건 아닙니다. 그는 순교한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1452-98)의 영향을 받아 아주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이자 종교개혁가인 사보나롤라는 1491년에 피렌체의 성 마르코 수도원 원장이 된 후 교회혁신을 위한 설교와 예언자적 언사를 구사하여 시민들의 정신적 지도자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사보나롤라가 ‘하느님의 노여움’이라고 예언한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Charles VII(1470-98)의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원정이 이탈리아인에게 신의 벌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프랑스인은 이와 결탁해 민주정치와 신정정치를 혼용한 법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려고 했습니다. 브르타뉴와 정략적으로 결혼하여 그 영토를 확보한 뒤 루이 11세의 부르고뉴와의 결혼정책 파기로 빚은 오스트리아와의 불화를 해결한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원정 시 도시문화와 르네상스 문명에 매료되어 프랑스 인문주의 운동의 소지를 만들었습니다. 한편 사보나롤라의 교회 개혁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지만, 1497년의 사육제에서 시민들의 사치품과 이교도적 미술품 및 서적을 불태운 이른바 ‘허영의 소각’을 비롯해 과격한 방법을 취하자 시민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 반대세력이 우세해지고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의 불화, 프란체스코회와의 대립 등으로 지지 기반을 잃어 사보나롤라는 다른 두 명의 도미니크회 성직자와 함께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물질계의 미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믿음은 대단했는데, 사랑을 주제로 쓴 초기의 시에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신미와 가시적 미를 향한 진한 열정이 종종 육체적 정열과 어우러진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는 그의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됩니다. 바사리와 콘디비 두 사람 모두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인체를 해부해가면서 열심히 해부학을 공부했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연의 정확한 모방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를 모델로 연필소묘를 한 번 했을 뿐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한 살아 있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초상화라는 걸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홀란다는 미켈란젤로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플랑드르 회화를 결명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내 영혼이 눈을 통해 처음 접한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동안
정신적인 영상은 커지지만 물질적인 영상은 움츠러든다.
천하고 별 가치 없는 사물인양.”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예술가란 자연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지만 지안 안에서 보는 것들을 자신의 이상적인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세계의 거시적인 미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대표적인 작품이 그가 1534-41년 사이 클레멘스 7세와 바오로 3세를 위해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위에 있는 프레스코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가 이 예배당 천당에 아담의 형상을 그릴 때만 해도 실재보다 훨씬 더 이상화시켰지만, 아름다운 인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형상을 묘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최후의 심판>에서 그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여기서의 인체는 무겁고 무기력해보이며 사지는 두텁고 우아함이 결여된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것처럼 그가 손을 떨기 시작해서 그렇게밖에 그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물질적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기를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관념을 전달하는, 정신적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물질적인 미를 이용한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실재 세계의 공간이나 원근법, 비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봐서 성기르네상스의 기본원리가 무시된 듯합니다. 물질적인 데서 멀어지고 정신적인 것으로 향한 데는 늙어간다는 것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당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교황의 위치는 매우 약화되었으며, 더욱이 경제적 혼란까지 가중되었습니다. 1527년 로마가 약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더욱 무력해졌습니다. 가톨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 전체의 존폐가 위협당하는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은 동요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신비주의 사상을 이렇게 이탈리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확인하기가 두려운 나머지 선택한 하나의 강구책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종교적 화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는데, 종교적 화가는 예술에 잇어서도 능숙할뿐더러 매우 경건한 인생을 살아감에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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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의 부분
프란시스코 데 홀란다는 『고대 회화에 관한 대화편』(1548)에서 적었습니다.
“하느님의 장엄한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화가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위대하고 능숙한 거장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인생은 성령으로 그에 대한 이해가 증가될 수 있도록, 성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흠이 없어야 한다. 잘못 그려진 하느님의 모습은 신자의 마음을 분산시키며, 신앙심 없는 사람들의 신앙마저 잃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하느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은 신앙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 동요하게 만들어 신앙심을 일게 하여 명상에 잠기게 하며 눈물 흘리게 만든다. 그 모습에서 나오는 참된 아름다움으로 인해 신에 대한 외경심과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대단한 상상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음속에 품은 간념들을 손이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면서 늘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않고 낮게 평가했다”고 적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추구한 아름다움은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이었으므로 눈으로는 감지되지 않고 정신으로서만 감지될 뿐입니다. 그에게 모든 미의 근원은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살고 있는 이 신적 존재는
다른 존재들을 아름답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더욱 아름다워진다.”
미켈란젤로는 예술을 예술가가 하늘로부터 받은 축복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물질인 돌 자체는 상상력이 작용하지 않는 한 쓸모없는 상태입니다.
“펜과 잉크에서
숭고한 양식, 하찮은 양식, 평범한 양식이 나오듯이
대리석에서도 조각가의 재능 여하에 따라
훌륭한 형상과 보잘 것 없는 형상이 생겨난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형상을 만드는 데 있어 자연이 제공해줄 수 없는 전체로서의 조화, 우아함이 깃든 조화만을 추구한 결과 9등신, 10등신 심지어는 12등신까지의 비례법을 적용하곤 한다”고 적었습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미의 어떤 기준에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상상력과 개별적인 영감에 얼마나 의존했는가를 입증해줍니다. 건축에 관한 그의 사고 또한 이와 같았는데,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에 적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비트루비우스와 고대인들이 해놓은 일에 따라, 그리고 내려오는 관례에 따라 사람들이 그동안 완성시킨 척도, 규칙이 좌우하는 일로부터 박차고 나왔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그에게 무한히 감사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가 장인들이 일할 때 늘 따라야만 했던 상도의 굴레와 속박을 내팽개쳐주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생애 후반의 약 20여 년 동안은 그의 예술과 사상적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러 측면에서 관찰할 때 이는 1530년 후반과 1540년 초반에 보여준 예술과 사상ㅇ의 특징들이 좀 더 강화된 양상으로 나나탄 것 뿐입니다.
1545년경 이후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이 극에 달해 라티스 본회의 이후부터는 타협이란 말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교황권의 위치에 변화가 생겼으며, 미켈란젤로가 속한 온건파는 점차 그 힘이 약해지면서 내성적으로 변했습니다. 이 격동기에 나온 것이 마지막이자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오나성하지 못한 <론다니니 피에타>입니다. 그는 이 조각을 통해 육체적 특성을 나타내는 인체의 상징적 요소들을 모두 박탈하여 순수한 정신적인 관념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