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인, 철학자. 화가, 조각가 1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를 지칭하는 콰트로첸토Quatrocento, 즉 1400년대와 성기르네상스를 지칭하는 친퀘첸토Cinquecento, 즉 1500년대 미술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를 따른 것이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BC 428/427-348/347)과 고대 후기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누스Plotinus(204-70)의 저술에 대한 이탈리아의 플라톤주의 철학자 피치노Marsillio Ficino(1433-99)의 주석이 규범이 되었습니다. 관조를 통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에 대한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될 수 있다는 피치노의 주장은 플라톤이 가까스로 인정한 광기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예술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피치노의 주장이었습니다.
메디치가의 후원 하에 다양한 프레스코와 우피치 궁전 설계 등을 맡은 바 있는 화가이며 건축가 그리고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예술을 “모방에 대한 모방”이라고 한 플라톤의 모방론을 받아들였으며, 플리니우스와 더불어 개화, 몰락, 재출발이라는 세 가지 시대의 학설을 미술 발전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이 학설을 적용하여 그는 고대 미술을 하나의 정점으로 보고 암흑의 중세를 몰락으로 대비시켰지만, 14세기의 예술부흥으로 말미암아 중세의 몰락이 극복되는 것입니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고대가 극복되었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에 대한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할 수 있었던 사람은 몇 되지 않았는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이탈리아의 시인 프란체스코 베르니Francesco Berni(1497/98-1520)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몇 점 보았는데, 배운 바는 없으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픞라톤의 저작에서 그것들 전부를 읽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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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밤>, 1526-31년경
미켈란젤로는 작품 <밤>을 예로 들어 그것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돌 속에 이니 내재한 형상을 자신이 자유롭게 한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정신에 내재한 추상적 형상을 질료로 탁월하게 구현시킬 줄 알았고, 관람자로 하여금 플라톤이 말한 순수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는 주로 피치노의 영향을 받았는데, 피치노는 예술이 “자연보다 지혜롭다”고 주장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자연을 더욱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공언했습니다.
프랑스어 르네상스Renaissance(1300-1600년)는 이탈리아어 리나쉬타Rinascita의 번역으로 재탄생rebirth, 혹은 새로운 탄생을 뜻하며, 이 말은 순수미술에서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약진을 특징지은 말입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미켈란젤로에게 있었다면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에게 자신의 호화로운 무덤제작을 맡기면서 면죄부의 판매량을 지나치게 늘렸기 때문에 루터와 그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분리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바로크의 이버지로 불립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에 나타난 뒤틀리고 긴장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바로크를 예고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 예술가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바로크와 관련해서 언급하는 건 미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영예입니다.
회화와 조각, 그리고 드로잉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할 만한 미켈란젤로는 뒤늦게 시인으로도 알려졌습니다. 그의 편지 495편이 1623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대부분 가족이나 후원자에게 보낸 개인적 내용이거나 작업에 관한 것들로 예술론을 유추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쓴 시들은 예술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더라도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것들이므로 미에 대한 그의 사고를 추론하게 해줍니다.
미켈란젤로 자신이 직접 쓴 글 외에도 세 명의 당대인이 그에 관해 쓴 자료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데 홀란다Francisco Hollanda는 포르투갈 화가로서 1538년에 로마로 와서 미켈란젤로 주변에서 한동안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1548년 『고대 회화에 관한 대화편 Tractato de Pintura Antigua』을 썼는데, 자신이 미켈란젤로라는 대가와 밀찰되어 있었음을 은근히 과시하여 자신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의 저서는 자만심의 결과물이지만, 미켈란젤로의 생애 중 전기 작가들이 소흘히 다룬 시기에 관련된 내용이라서 소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대에 출간된 두 번째 저술로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기록한 미켈란젤로의 전기입니다. 이 책은 1550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1568년의 두 번째 판에서는 거의 다시 썼다 싶을 정도로 수정 증보되었습니다. 이 책은 자료제공 측면에서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제작방법을 기술했으며, 아울러 약간이나마 그의 견해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540년대 말부터 조수로 활동한 미켈란젤로의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1525-74)가 쓴 『미켈란젤로 전기』는 1553년에 출간되었으며, 셋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힙니다.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다룬 이 책은 바사리가 잘못 서술한 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쓰인 듯합니다. 콘디비는 다소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말과 사고를 기록하는 데 있어 바사리나 홀란다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콘디비가 『미켈란젤로 전기』를 출간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일흔여든 살이었고, 미켈란젤로의 조상, 출생, 그리고 어린 시절에 관한 콘디비의 전기는 당시의 기록과 늙은 미켈란젤로의 어렴풋한 기억에 근거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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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레 다 볼테르라의 <미켈란젤로의 초상>, 1565, 청동.
미켈란젤로는 장수했으므로 그의 사고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했으므로 이를 체계적이고 명확한 한 줄기로 정리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로마에서 제작한 초기 작품들은 성기르네상스의 만개한 양식을 보여주지만, 1564년 타계하기 전에는 매너리즘 양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