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사리,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미술에서 기대하는 것”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1472년 스무 살 때 도제생활을 마치고 마스터로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해 그의 이름이 페루지노와 보티첼리의 이름과 나란히 성 누가 성당의 지출 명단에 올라 있었습니다. 성 누가 성당이 레오나르도를 후원하게 된 건 성모 마리아의 초상을 그린 후부터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마스터가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수련기간이 끝났다는 것뿐이지 여전히 베로키오의 조수로 그를 도왔습니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마스터가 된 후 처음 제작한 것을 아버지가 헐값에 팔았다고 적었고 이는 유명한 전설이 되었습니다. 피에로가 지방에 있을 때 소작인 한 사람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소작인은 자신이 무화과나무로 방패를 만들었다면서 피에로가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에게 장식을 의뢰해주면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피에로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 일을 레오나르도에게 시켰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거친 나무방패를 다듬어 매끈하게 한 후 특별한 유약을 발라 광택을 내고 거기에 고르곤Gorgon(그리스 신화의 동물로 머리가 뱀이며 보는 사람을 돌로 변화시켰다는 세 자매 괴물)의 머리를 그려 넣었는데, 이는 적을 두렵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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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곰의 머리>, 7-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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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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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개 발톱 습작>, 14.1-10.7cm.


레오나르도는 고르곤을 그리기 위해 크고 작은 도마뱀, 귀뚜라미, 메뚜기, 박쥐, 곰, 용, 그리고 그 밖의 낯선 동물들을 드로잉하며 습작했습니다.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괴물을 만들기 위해 “검은 바위의 갈라진 틈으로부터 나와 크게 벌린 입에서 불을 토해내고 눈에서는 빛이 나며 코로부터 독 김이 방사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방패 장식을 완성한 그는 아버지를 모시고 의견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피에로는 아들의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했습니다. 자신이 마귀를 봤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방패는 이래야 합니다. 가지고 가세요”라고 했습니다. 바사리는 이 말에 덧붙여서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미술에서 기대하는 것입니다”라고 레오나르도가 말한 것으로 적었습니다. 피에로는 곧바로 장터로 가서 화살이 방패에 꽂힌 모습으로 장식된 것을 하나 사서 소작인에게 주고 아들이 장식한 방패를 몰래 피렌체 상인에게 1백 두카트를 받고 팔았습니다. 그 상인은 그것을 밀라노 공작에게 3백 두카트에 팔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바사리에 의해서만 전해오지만 사실을 기록한 것 같으며 방패는 현존하지 않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화가는 환상적인 동물을 실재 요소들에서 구성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용을 그릴 때는 “맹견이나 사냥개의 머리에 고양이의 눈, 소마기의 귀, 그레이하운드(몸이 길고 날쌘 사냥개)의 주둥이, 사자의 눈썹, 늙은 수탉의 볏, 거북이의 목”으로 할 것을 권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베로키오가 의전에 사용하는 투구에 장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를 글로써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는 미술품이 단지 장식이서는 안 되고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린 것은 마치 고향의 동굴 앞에서 두려움과 욕망으로 보고 싶어 했던 것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예술이라는 미지의 동굴 속에 이런 것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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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생물학exobiology은 살아 있는 생물들에 관한 증거를 우주에서 찾는다


젊은 지구에는 분명 생명이 어떻게든 존재했습니다. 초기의 이 원시적인 생명의 형태가 아직도 존재할까? 지금 어딘가에 그것들이 잠복해 있고 보다 새로운 생명 형태로 진화도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이 아직도 지구상에 존재한다면, 우리가 이런 생명의 초기 형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초기 지구의 대기권에는 산소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미생물들은 오래 전에 죽었거나, 돌연변이를 일으켰거나, 땅속이나 깊은 바다 속 같은 산소가 없는 드문 지역들로 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지하 깊은 곳의 박테리아 생물량이 지구 표면의 박테리아 생물량과 같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잔재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면, 그리고 발견한다면 생명의 시작에 관한 훌륭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을 보여주는 21세기 과학』(도서출판 知와 사랑)의 저자 레오킴은 연구자들이 우선 이런 잔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뒤 지구의 깊숙한 곳과 같이 수십억 년 동안 산소가 차단된 환경으로 연구를 확장해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또한 산소에 노출되지 않은 샘플들을 수집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들을 성장하게 하는 화학물질과 환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아직까지 아무도 특이한 RNA를 가진 생물이나 최초의 생명을 암시하는 특이한 화학물질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구상에 생명이 어떻게 나타났을까 하는 것에 대한 다음의 가능성은 생명이 우주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아직 특이하거나 단순한 단백질, RNA 혹은 DNA의 형태를 가진 생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최초의 생명은 죽었거나, 숨었거나, 혹은 오늘날 생물들에서 발견되는 복합분자를 이미 갖고 있었던 것으로 결론짓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초의 창조물이 오늘날의 복합분자를 가지고 있었다면, 많은 과학자들은 그것들이 우주에서 왔다고 할 것입니다. 우주생물학exobiology은 살아 있는 생물들에 관한 증거를 우주에서 찾는 최근의 과학입니다.

생명이 지구에서 비롯되었는지 우주에서 씨가 뿌려진 것인지 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우리의 태양은 약 45억 년 되었습니다. 관측 가능한 우주가 약 140억 년 되었으므로 우리의 태양이 존재하기 전에 다른 태양계들이 생명을 잘 발달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우주의 물질에 대한 탐구가 지구에서 생명이 어떻게 출발했는지를 밝혀줄 것입니다. 우리 태양계 안에 있는 행성들과 140개 이상의 위성 가운데 행성으로는 유일하게 화성과, 두 개의 위성 티탄과 유로파에만 지구상에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의문을 가진 과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특성이 있습니다. 토성의 위성 티탄Titan11은 우리의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초기 행성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상당량의 가스 대기권을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상당한 크기의 물질입니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티탄의 대기권에 있는 가장 일반적인 성분은 질소입니다.

티탄, 유로파Europa[목성의 2호 위성이며 목성의 네 번째로 큰 위성. 얼음이나 물이 매우 적고 주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음] 그리고 그 외의 지구 대기권 밖의 물질들에서 발견된 유기화합물들은 초기 지구의 유기화합물들에 대한 보다 나은 자료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런 자료가 이곳에서 생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단서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화성에는 생명이 있을까? 지구가 운석과 혜성들의 포격을 받았을 때 화성도 두들겨 맞았습니다. 여기서 나온 많은 물질들이 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초기 화성에 시내와 바다를 이루는 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화성 표면이 사막이지만, 만년설 속에 그리고 표면 아래에는 많은 물이 아직도 있을 것입니다. 액체인 물은 초기의 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생물을 위한 집이었을 것입니다.

화성의 역사 내내 다른 물체와의 충돌로 표면에 생겨난 물질들이 우주로 배출되었습니다. 그 물질의 일부는 중력에 의해 지구로 끌어당겨졌습니다. 이런 운석들은 화성에서도 생명이 발생했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화성의 생명이 지구 생명의 출처라고 추론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지구에는 화성에서 온 것으로 믿어지는 35개의 운석이 있습니다. 나사NASA의 데이비드 맥케이David McKay는 이런 운석 중 하나가 과거 화성에 생명체가 있었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제는 많은 논쟁을 야기하지만 화성에 대한 앞으로의 과제가 논쟁을 해결해줄 것입니다. 나사와 유럽 항공우주국이 향후 수십 년 내에 이루어낼 몇 가지 임무들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 밖 생명체의 증거를 발견할 최고의 기회는 화성을 심층 탐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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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두 가지 감정이 불현듯 생겼는데, 두려움과 욕망이었다”



레오나르도는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자신의 과거에 관해서는 별로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서른 살가량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적기 시작했습니다. 노트북을 갖고 다니면서 바라본 것에 대한 설명, 대상에 대한 정밀한 계산,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계획 등을 수시로 필기했습니다.

그는 왼손잡이로 알려졌습니다. 피렌체 조각가이며 건축가인 라파엘로 다 몬텔루포는 자서전에서 미켈란젤로도 타고난 왼손잡이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쓴 콘디비와 바사리는 이 점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미켈란젤로가 오른손으로도 작업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에는 사소한 내용도 적혀 있는데 지출내역, 편지초안, 어떤 사람의 이름, 공리, 빌려봐야 할 책의 목록, 잊지 말아야 할 사항 등입니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적기도 했으며, 고백 형식으로 감정을 적기도 했는데,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드문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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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아르노 강과 언덕이 있는 풍경>, 19.5-28.6cm.

왼쪽 상단에 ‘결백한 성 마리아의 축제날인 1473년 8월 5일이란 날짜를 명기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날짜를 명기한 건 집안의 전통적 내력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공증인이었기 때문에 꼼꼼하게 날짜를 기록하는 버릇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빈치의 언덕에서 내려다본 장면을 그린 드로잉이 몇 점 남아 있습니다. 그가 펜으로 <아르노 강과 언덕이 있는 풍경>을 그렸을 때는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이 드로잉에는 아카데믹한 요소가 있어 그의 고유한 양식이 생기기 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에게는 특별한 드로잉입니다.

<아르노 강과 언덕이 있는 풍경>은 서양미술사에서 최초의 풍경화 드로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풍경화가 흔히 다루어졌지만, 서양에서는 배경으로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더러 미술사학자들은 이 풍경화가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으로 그려졌다고 하지만 특별히 날짜를 기록한 것으로 봐서 베로키오의 작업장을 잠시 떠나 고향을 찾았을 때 그린 것 같습니다. 당시 견습생들이 잠시 여름휴가를 얻는 건 보통 있었던 일입니다.

이 드로잉 뒷면을 보면 하단에는 언덕 아래 돌로 된 아치가 있고, 하늘에는 남자 누드가 그려져 있습니다. 누드 왼쪽의 웃는 얼굴 위에는 ‘나는 안토니오의 집에 묵었는데 만족스럽다 jo. morando. dant. sono. chontento’고 적혀 있습니다. 안토니오는 의붓아버지로 레오나르도가 어머니와 한동안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드로잉은 그가 기분 좋은 상태에서 그린 것이며, 흘려 쓴 글씨에서도 기분이 매우 상쾌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안토니오는 할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해서 과연 레오나르도가 누구의 집에 묵었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1473년이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수 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드로잉에 바위, 산, 강이 보이며 어린 시절을 보낸 이 풍경은 그가 마음속에 깊이 담아둔 정신의 휴식처였다. 그는 <동굴의 성모>, <성모자와 성 앤, 양>, <모나리자>의 배경에 이런 장면을 사용했습니다. 이 드로잉을 그릴 즈음에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격렬한 욕망과 함께 불안한 마음으로 자연이 창조한 다양하고도 낯선 풍부한 것들을 보려고 위에 매달린 바위를 지나 한참을 걸어서 커다란 동굴 입구에 당도하자 잠시 선 채로 놀라움에 휩싸였는데, 그것이 존재하리하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집중해서 보려고 왼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을 눈 위에 올려 그늘을 만들어 안을 응시하면서 캄캄한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했다. 난 잠시 그러고 있었고 두 가지 감정이 불현듯 생겼는데, 두려움과 욕망이었다. 위협하는 동굴, 어두움에 대한 두려움과 놀랄 만한 것이 안에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가 더 이상 글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두려움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했음이 틀림없을 텐데 현존하는 작품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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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 모던 아트 그리고 샤갈 전시회 소감



설날 아침 덕수궁 미술관으로 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청 앞은 사람들이 별로 없고 도시가 조용한 느낌이었습니다. 덕수궁에 간 건 오랜만입니다.

피카소와 모던 아트 전시회는 빈에 소재하는 알베르티나 미술관The Albertina의 소장품을 보여주는 전시회입니다. 합스부르크 왕조시대 빈의 가장 큰 궁이었던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그래픽 아트 컬렉션으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미술관은 약 백만 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소장품의 규모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거의 같습니다.

이번에 소개된 작품들은 대부분 20세기 초의 것들로 야수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구성주의가 대부분이고, 신표현주의 작품도 조금 있습니다. 따라서 20세기 미술 전반을 두루 이해하는 전시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그의 친구들, 즉 브뤼케(다리파) 화가들의 작품이 있고, 또한 앙리 마티스를 비롯한 야수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브뤼케와 야수주의와 더불어서 바실리 칸딘스키를 비롯한 블라우에라이터(청기사)에 속한 화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어 표현주의 작품을 골고루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들 표현주의 화가들은 190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활약했습니다.

제게 특히 감동을 준 건 에밀 놀데Emil Nolde의 <달빛이 흐르는 밤 Moonlit Night>(1914)이었습니다. 브뤼케 그룹은 건국을 전공하던 학생들이 조성한 것으로 키르히너를 중심으로 네 명이 주요 멤버였지만, 나중에 나이 든 놀데가 가세함으로써 그룹의 기능이 탄탄해졌습니다. 놀데는 잠시 동안만 그들과 어울렸는데, 작품은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습니다. 범신론적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달빛이 흐르는 밤>이 그 중 하나입니다. 파란색으로 밤의 분위기를 조성한 후 노란색으로 달과 달에 비친 달빛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조각은 몇 점 전시되지 않았지만, 장(혹은 한스) 아르프의 유기적 형태의 청동으로 뜬 조각이 좋았고,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은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게 감동을 준 건 피카소의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검정색과 흰색만을 사용해서 그린 입체주의 초상화 앞에서 전 오래 서서 탄복을 금치 못했습니다. 고상한 취향을 불쾌하다고 말한 피카소, 그는 과연 20세기 미술사의 아버지임이 분명했습니다.


덕수궁을 나와 곧장 시립미술관으로 갔습니다. 98세까지 산 운에 억세게 좋은 화가 마크 샤갈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러시아 비테프스크(현재 벨라루스) 근교에서 1887년에 유대인으로 태어나 프랑스로 망명한 샤갈은 1985년에 타계했습니다.

시립미술관에 전시된 많은 작품들은 그가 1차 세계대전 때에 러시아로 피신했을 때 그곳에서 유대인 예술극장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들입니다. 러시아 혁명 초기, 즉 1920년대에 러시아 정부는 모던 아트를 탄압하지 않았으므로 샤갈이 마음 놓고 제작한 것들입니다. 삽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가서 보면 좋을 듯한 전시회입니다. 시적인 회화가 무엇이고 색채의 세계를 어디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지 보는 것도 감상의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작품 <나와 마을>(1912), <도시 위에서>(1914-18), <산책>(1917-18)을 전시장에서 직접 관람할 수 있습니다.


전시장을 나오니 두 시가 되었습니다.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습니다. 여섯 시에 연신내 몸살림운동 수련장에서 원장 이범님과 그 밖의 사범들과 술 마시고 윷놀이를 하기로 되어 있어, 곧장 집으로 가서 에너지를 보충하고 오후부터 밤 늦게까지 먹는 즐거움도 만끽했습니다. 설을 보는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으로 잘 보냈습니다. 행복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다수가 선택한 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동서보다 돈을 조금만 더 벌면 행복할 수 있다.”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행복의 조건이 같은 것 같습니다. 행복은 비교에서 오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과 비교해서 더 낫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금년엔 동서보다 혹은 미래의 동서보다 돈을 조금만 더 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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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후원가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자였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가 1464년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재산과 권력, 그리고 취향을 쉰 살의 아들 피에로가 계승했습니다. 피에로는 비교적 재능이 있는 인물로 도덕적이었고 아버지를 따라 여행하면서 외교에도 능통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친절했으며 문학, 종교, 예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코시모의 지성, 온화함, 세련된 미적 감각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피에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당시 로렌초는 스무 살이었고, 줄리아노는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피렌체인들은 두 아들이 아직 어려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정부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적잖게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피에로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안 코시모는 로렌초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생전에 그를 훈련시켰습니다. 로렌초는 할아버지의 뜻대로 요아네스 아르지로풀로스로부터 그리스어를, 피치노로부터 철학을 배웠으며 어렸을 적부터 어깨너머로 정치인, 시인, 예술가, 인문주의자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전술을 배웠으며 열아홉 살 때 피렌체의 주요 가문 자녀들의 군대놀이 경기에서 용맹성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피에로가 사망한 1469년부터 1492년까지 피렌체를 통치했으며, 이 시기는 피렌체의 황금기에 속합니다.

피에로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로렌초와 클라리체 오르시니를 결혼시켰습니다. 이로써 메디치 가는 로마의 가장 유력한 두 가문 중 하나인 오르시니 가와 사돈이 되어 정치적·경제적 기반이 더욱 탄탄해졌습니다. 로렌초의 결혼식은 피렌체 전체의 잔치로 사흘 동안 지속되었고 사탕과자만도 5천 파운드가 소요되었습니다.

피에로가 타계했을 때 로렌초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자였으며, 이는 이탈리아 최고 부자임을 의미했습니다. 메디치 가의 재무구조는 시와 맞물려 있었으므로 메디치 가와 관련된 많은 채무자, 고객, 친구, 직원들이 피에로가 사망한 후 이틀 동안 시민 지도자들은 로렌초의 집으로 가서 앞으로 정부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에 관해 물었습니다. 로렌초는 현상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적 혹은 메디치 가에 맞먹는 가문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렌초는 경험이 많은 시민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주요 문제들에 관해 자신에게 제안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동생 줄리아노와 자신의 권력을 나누려고 했지만, 줄리아노는 모든 권력을 사양하고 음악·시·마상 창시합·사랑을 즐겼습니다.

번영이 지속되었으므로 시민들은 로렌초의 통치에 묵묵히 따랐습니다. 1471년 피렌체를 방문한 밀라노 공작 갈레아조 마리아 스포르차는 메디치 가의 번영과 메디치 궁전과 정원이 조각·도자기·보석·그림·고전 사본·건축 유물로 박물관을 이룬 것을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메디치 가의 번영은 교황에 즉위한 식스투스 4세가 메디치 가에게 지속적으로 교황청 재정을 담당해줄 것을 요청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1480~90년은 피렌체의 정치·문학·예술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습니다. 로렌초는 자신이 수집한 건축적 유물과 조각품들을 코시모와 피에로가 수집한 작품들과 함께 메디치 궁전과 산 마르코 수도원 사이의 정원에 장식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학자·시인들을 후원했으며, 바사리는 로렌초의 후원 아래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예술가가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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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도 디 조반니의 <전투 장면>, 1478년 이후, 청동 릴리프, 43-99cm.


예술 후원가로서의 로렌초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베르톨도 디 조반니Bertoldo di Giovanni(1429년경-91)와의 관계입니다. 베르톨도는 비주류에 속하는 소품 조각가였지만 도나텔로로부터 수학한 후 조수로 그를 도왔고, 이후 미켈란젤로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는 15세기의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와 16세기의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로렌초는 예술가들 가운데 베르톨도를 가장 가까이 했습니다. 유연하며 오래 보존되는 최상품 청동만을 재료로 하여 작은 크기의 장식적이며 우아한 형상의 작품을 제작하는 베르톨도의 양식이 로렌초의 취향에 가장 부합되었던 것 같습니다. 베르톨도는 로렌초와 한 집에 살면서 매일 함께 식사를 하고 로렌초가 여행을 갈 때 동행했으며 로렌초의 미술고문으로 로렌초가 세운 미술 아카데미의 초대 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머와 요령이 있었으며 임기응변에 재주가 있었고 로렌초가 가까이 했지만, 주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로렌초의 예술에 대한 견해와 소망을 재빨리 알아채며 공감하는 재능이 있었는데, 이는 곧 궁정예술가의 이상형이었습니다. 로렌초는 소품을 좋아했으므로 그가 수집한 작품 중에 커다란 조각품은 드물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취향은 장식적인 것과 값비싼 것, 유희적인 것과 기예적인 것으로 소군주국 영주들의 로코코 취향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의 수집품의 주류는 5~6천 점의 조각 또는 부조가 있는 보석류였습니다. 이 장르는 고대부터 있어왔고, 베르톨도는 고대 기술과 고대 모티프를 사용했습니다.

로렌초는 피렌체인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고, 피렌체 왕국의 건재함을 보여주고자 과거에 없던 큰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는 축제를 도시의 미인들 중 한 사람 루크레지아에게 바쳤습니다. 로렌초는 니콜로 아르딘겔리라는 사람의 아내인 루크레지아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축제에 돈과 열정을 쏟았습니다. 말구종은 로렌초를 위해 이탈리아 각지의 훌륭한 말들을 구해 바쳤습니다. 로렌초의 방패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베로키오에게 군기를 주문하고 그날의 여왕 루크레지아를 위한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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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의 <갈레아조 마리아 스포르차의 초상>, 1471년경, 패널에 템페라, 65-42cm.


특기할 만한 큰 축제는 1471년 3월 15일 밀라노의 공작 갈레아조 마리아 스포르차Galeazzo Maria Sforza(1444-76, 1466-76 재위)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스포르차의 방문은 대단했는데, 기마병 1백 명과 보병 5백 명이 금색 천으로 장식한 열두 대의 마차를 호위했으며, 공작 부부가 마차에서 내릴 때 실크와 벨벳으로 지은 의상을 입은 종복 50명이 두 사람을 에워쌌습니다. 로렌초의 의상은 공작에 비하면 수수한 편이었습니다. 창병 50명이 5백 쌍의 사냥개를 이끌고 팔에 매를 묶은 매부리 분대가 뒤를 이었습니다. 순종 말 5백 필도 행렬을 따랐는데, 모두 장식 마의를 걸쳤고 절반은 공작이, 나머지 절반은 공작부인이 사용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신 2천 명이 귀족의 뒤를 따랐습니다.

스포르차의 피렌체 방문은 피렌체와 메디치 가 모두의 위상을 한층 높여주었습니다. 로렌초는 공작 부부를 라르 가에 있는 궁전에서 맞았으며, 공작이 묵을 방들을 베로키오가 장식했습니다. 공작 부부는 로렌초가 소장한 많은 미술품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축제를 통해 피렌체 상류사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베로키오 작업장의 반장 정도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디치 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밀라노의 공작처럼 그도 그곳에 소장된 고대 미술품들을 보고 경탄했을 것입니다. 로렌초는 베로키오에게 공작을 위해 로마 스타일의 갑옷과 투구를 디자인하라고 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전사의 옆모습>을 그렸는데, 아마 이런 갑옷과 투구였던 것 같습니다. 갑옷은 소용돌이무늬, 사자의 얼굴과 발톱, 이빨, 독수리 날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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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가장무도회 의상을 한 인물>


밀라노 공작이 피렌체를 방문하는 중,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를 포함한 조수들과 함께 종교적 축제 행렬을 따라 산 펠리체 성당에 <수태고지>,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에 <그리스도의 승천>, 산 스피리토 성당에 <사도들에게 성령의 내림>을 장식했습니다. 그런데 3월 21~22일 그림을 모두 걸었을 때 불이 나서 성당이 전소되는 재앙이 닥쳤습니다. 화재 원인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세워놓은 많은 횃불들 중 하나가 쓰러져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피렌체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화재가 무서운 흉조이며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했습니다. 피렌체인들의 공통된 의견은 밀라노인들이 사순절부터 부활절 오후까지 40일 동안 단식과 참회하는 기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잔치를 벌이면서 쾌락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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