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후원가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자였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가 1464년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재산과 권력, 그리고 취향을 쉰 살의 아들 피에로가 계승했습니다. 피에로는 비교적 재능이 있는 인물로 도덕적이었고 아버지를 따라 여행하면서 외교에도 능통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친절했으며 문학, 종교, 예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코시모의 지성, 온화함, 세련된 미적 감각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피에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당시 로렌초는 스무 살이었고, 줄리아노는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피렌체인들은 두 아들이 아직 어려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정부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적잖게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피에로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안 코시모는 로렌초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생전에 그를 훈련시켰습니다. 로렌초는 할아버지의 뜻대로 요아네스 아르지로풀로스로부터 그리스어를, 피치노로부터 철학을 배웠으며 어렸을 적부터 어깨너머로 정치인, 시인, 예술가, 인문주의자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전술을 배웠으며 열아홉 살 때 피렌체의 주요 가문 자녀들의 군대놀이 경기에서 용맹성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피에로가 사망한 1469년부터 1492년까지 피렌체를 통치했으며, 이 시기는 피렌체의 황금기에 속합니다.
피에로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로렌초와 클라리체 오르시니를 결혼시켰습니다. 이로써 메디치 가는 로마의 가장 유력한 두 가문 중 하나인 오르시니 가와 사돈이 되어 정치적·경제적 기반이 더욱 탄탄해졌습니다. 로렌초의 결혼식은 피렌체 전체의 잔치로 사흘 동안 지속되었고 사탕과자만도 5천 파운드가 소요되었습니다.
피에로가 타계했을 때 로렌초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자였으며, 이는 이탈리아 최고 부자임을 의미했습니다. 메디치 가의 재무구조는 시와 맞물려 있었으므로 메디치 가와 관련된 많은 채무자, 고객, 친구, 직원들이 피에로가 사망한 후 이틀 동안 시민 지도자들은 로렌초의 집으로 가서 앞으로 정부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에 관해 물었습니다. 로렌초는 현상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적 혹은 메디치 가에 맞먹는 가문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렌초는 경험이 많은 시민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주요 문제들에 관해 자신에게 제안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동생 줄리아노와 자신의 권력을 나누려고 했지만, 줄리아노는 모든 권력을 사양하고 음악·시·마상 창시합·사랑을 즐겼습니다.
번영이 지속되었으므로 시민들은 로렌초의 통치에 묵묵히 따랐습니다. 1471년 피렌체를 방문한 밀라노 공작 갈레아조 마리아 스포르차는 메디치 가의 번영과 메디치 궁전과 정원이 조각·도자기·보석·그림·고전 사본·건축 유물로 박물관을 이룬 것을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메디치 가의 번영은 교황에 즉위한 식스투스 4세가 메디치 가에게 지속적으로 교황청 재정을 담당해줄 것을 요청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1480~90년은 피렌체의 정치·문학·예술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습니다. 로렌초는 자신이 수집한 건축적 유물과 조각품들을 코시모와 피에로가 수집한 작품들과 함께 메디치 궁전과 산 마르코 수도원 사이의 정원에 장식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학자·시인들을 후원했으며, 바사리는 로렌초의 후원 아래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예술가가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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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도 디 조반니의 <전투 장면>, 1478년 이후, 청동 릴리프, 43-99cm.
예술 후원가로서의 로렌초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베르톨도 디 조반니Bertoldo di Giovanni(1429년경-91)와의 관계입니다. 베르톨도는 비주류에 속하는 소품 조각가였지만 도나텔로로부터 수학한 후 조수로 그를 도왔고, 이후 미켈란젤로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는 15세기의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와 16세기의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로렌초는 예술가들 가운데 베르톨도를 가장 가까이 했습니다. 유연하며 오래 보존되는 최상품 청동만을 재료로 하여 작은 크기의 장식적이며 우아한 형상의 작품을 제작하는 베르톨도의 양식이 로렌초의 취향에 가장 부합되었던 것 같습니다. 베르톨도는 로렌초와 한 집에 살면서 매일 함께 식사를 하고 로렌초가 여행을 갈 때 동행했으며 로렌초의 미술고문으로 로렌초가 세운 미술 아카데미의 초대 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머와 요령이 있었으며 임기응변에 재주가 있었고 로렌초가 가까이 했지만, 주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로렌초의 예술에 대한 견해와 소망을 재빨리 알아채며 공감하는 재능이 있었는데, 이는 곧 궁정예술가의 이상형이었습니다. 로렌초는 소품을 좋아했으므로 그가 수집한 작품 중에 커다란 조각품은 드물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취향은 장식적인 것과 값비싼 것, 유희적인 것과 기예적인 것으로 소군주국 영주들의 로코코 취향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의 수집품의 주류는 5~6천 점의 조각 또는 부조가 있는 보석류였습니다. 이 장르는 고대부터 있어왔고, 베르톨도는 고대 기술과 고대 모티프를 사용했습니다.
로렌초는 피렌체인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고, 피렌체 왕국의 건재함을 보여주고자 과거에 없던 큰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는 축제를 도시의 미인들 중 한 사람 루크레지아에게 바쳤습니다. 로렌초는 니콜로 아르딘겔리라는 사람의 아내인 루크레지아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축제에 돈과 열정을 쏟았습니다. 말구종은 로렌초를 위해 이탈리아 각지의 훌륭한 말들을 구해 바쳤습니다. 로렌초의 방패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베로키오에게 군기를 주문하고 그날의 여왕 루크레지아를 위한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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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의 <갈레아조 마리아 스포르차의 초상>, 1471년경, 패널에 템페라, 65-42cm.
특기할 만한 큰 축제는 1471년 3월 15일 밀라노의 공작 갈레아조 마리아 스포르차Galeazzo Maria Sforza(1444-76, 1466-76 재위)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스포르차의 방문은 대단했는데, 기마병 1백 명과 보병 5백 명이 금색 천으로 장식한 열두 대의 마차를 호위했으며, 공작 부부가 마차에서 내릴 때 실크와 벨벳으로 지은 의상을 입은 종복 50명이 두 사람을 에워쌌습니다. 로렌초의 의상은 공작에 비하면 수수한 편이었습니다. 창병 50명이 5백 쌍의 사냥개를 이끌고 팔에 매를 묶은 매부리 분대가 뒤를 이었습니다. 순종 말 5백 필도 행렬을 따랐는데, 모두 장식 마의를 걸쳤고 절반은 공작이, 나머지 절반은 공작부인이 사용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신 2천 명이 귀족의 뒤를 따랐습니다.
스포르차의 피렌체 방문은 피렌체와 메디치 가 모두의 위상을 한층 높여주었습니다. 로렌초는 공작 부부를 라르 가에 있는 궁전에서 맞았으며, 공작이 묵을 방들을 베로키오가 장식했습니다. 공작 부부는 로렌초가 소장한 많은 미술품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축제를 통해 피렌체 상류사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베로키오 작업장의 반장 정도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디치 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밀라노의 공작처럼 그도 그곳에 소장된 고대 미술품들을 보고 경탄했을 것입니다. 로렌초는 베로키오에게 공작을 위해 로마 스타일의 갑옷과 투구를 디자인하라고 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전사의 옆모습>을 그렸는데, 아마 이런 갑옷과 투구였던 것 같습니다. 갑옷은 소용돌이무늬, 사자의 얼굴과 발톱, 이빨, 독수리 날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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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가장무도회 의상을 한 인물>
밀라노 공작이 피렌체를 방문하는 중,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를 포함한 조수들과 함께 종교적 축제 행렬을 따라 산 펠리체 성당에 <수태고지>,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에 <그리스도의 승천>, 산 스피리토 성당에 <사도들에게 성령의 내림>을 장식했습니다. 그런데 3월 21~22일 그림을 모두 걸었을 때 불이 나서 성당이 전소되는 재앙이 닥쳤습니다. 화재 원인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세워놓은 많은 횃불들 중 하나가 쓰러져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피렌체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화재가 무서운 흉조이며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했습니다. 피렌체인들의 공통된 의견은 밀라노인들이 사순절부터 부활절 오후까지 40일 동안 단식과 참회하는 기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잔치를 벌이면서 쾌락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