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카미유를 아내로 맞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의 <트루빌의 바닷가에서 Sur la Plage a Trouville>, 1870, 유화, 38-46cm.

모네는 트루빌에서 카미유를 모델로 여러 점 그렸습니다. 이 작품에서 카미유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은 카미유의 동생입니다. 7월 보불전쟁이 발발했지만, 6월 정식으로 결혼한 모네 부부는 9월가지 트루빌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때 부댕도 함께 했는데, 1897년 7월 14일 부댕이 모네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이 이때 그린 스케치를 여전히 갖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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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크루빌 바닷가의 카미유 Camille sur la Plage de Trouville>, 1870, 유화, 38-4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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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댕의 <트루빌의 바닷가 La Olage de Trouville>, 1865, 연필과 수채, 11.43-22.8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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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트루빌 바닷가의 카미유>, 1870, 유화, 45-3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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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트루빌의 바닷가 La Olage de Trouville>, 1870, 유화, 82-95cm.


모네는 1870년 6월 28일 카미유 동시외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았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한 증인들 중에는 쿠르베도 있었습니다. 7월 7일에는 모네를 보살펴준 마리 잔 고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해 여름 노르망디의 트루빌 해변에서 작업에 열중한 모네는 카미유를 모델로 여러 점의 트루빌의 바닷가를 그렸습니다. 그는 수 주 동안 여덟 점 이상을 그렸으며, 단번에 그린 듯한 것들입니다.

부댕도 1865년 이곳에서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부댕의 작품과 모네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부댕은 선을 중심으로 고전적인 방법으로 그린 데 비해 모네는 색을 문질러서 형태만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자신이 받은 인상을 긴급히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그가 이듬해 홀랜드에서 그린 <잔담의 잔 강>과 <잔담의 항구>를 보면 이 시기에 색질을 툭툭 잘라서 표현했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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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로슈 누아르의 호텔 The Hotel des Roches Noires>, 1870, 유화


모네는 <로슈 누아르의 호텔>을 오른쪽에서 비스듬히 바라본 장면으로 그렸습니다. 커다란 미국 국기가 쓱쓱 문지른 색조로 펄럭이고, 호텔 꼭대기에는 갈겨 쓴 듯한 붓질이 하늘로 치솟는데, 이것을 한 번의 붓질로 대충 묘사했습니다. 이것은 잘 알려진 호텔의 랜드마크로 금박을 입힌 바다의 신입니다. 이곳에서 작업하는 동안 모네는 보불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보불전쟁(1870년 7월-1871년 2월)은 프로이센의 지도 아래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충돌로 발발한 전쟁입니다. 1870년 7월 9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했고, 군비가 우세한 프로이센은 북독일 연방제국뿐 아니라 남독일 제국의 지지까지 얻어 프랑스로 쳐들어갔습니다. 전황은 프로이센 독일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나폴레옹 3세는 9월 2일에 항복했지만, 독일군은 계속 진격하여 파리를 포위했습니다. 프랑스 국민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파리도 1871년 1월 28일에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2월 베르사유에서 평화협정,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의 대부분을 할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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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

 

 

1884년 여름, 영국 선원 4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육지에서 1600km 떨어진 남대서양을 표류했습니다. 19일째 되던 날, 선장은 제비뽑기를 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정하자고 했습니다. 나흘간 세 남자는 17살 난 소년의 경정맥 급소를 칼로 찔러 죽인 뒤 소년의 살과 피로 연명했습니다. 24일째 되던 날 생존자 3명이 구조되었습니다.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구명보트 사건을 바라보는 두 사고방식이 정의를 이해하는 두 가지 상반된 시작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어떤 행위의 도덕성은 전적으로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달렸다는 시각입니다. 모든 걸 고려해 최선의 상황을 도출하는 행위가 옳다, 또 하나는 도덕적으로 볼 때, 결과가 전부는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샌델은 의무와 권리에는 사회적 결과를 떠나 존중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도덕은 목숨의 숫자를 세고,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특정한 도덕적 의무와 인권은 워낙 기본적인 덕목이라 그런 계산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특정 권리가 그렇게 기본적이라면, 타고난 권리든 신성한 권리든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든 절대적 권리든 간에, 그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더불어서 그것은 왜 기본 권리인가?

영국의 도덕철학자이자 법 개혁가 제러미 벤덤Jeremy Bentham(1748-1832)은 이런 질문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자명합니다. 그는 타고난 권리라는 말에 조롱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벤덤은 인생의 목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실현에 있으며, 쾌락을 조장하고 고통을 방지하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도덕과 입법의 기초원리라고 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주장했습니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벤담에 따르면, 옳은 행위는 공리(유용성)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가 말하는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것 일체를 가리킵니다.

벤담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거쳐 자신이 주장하는 원칙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모두 고통과 쾌락이라는 감정에 지배된다. 이 감정은 우리의 ‘통치권자’이다. 이는 모든 행위를 지배할뿐더러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그의 주권에 달렸다.’

공리주의 철학은 우리 모두가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도덕적, 정치적 삶의 기초로 삼습니다. 정부는 법과 정책을 만들 때,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벤담에 따르면, 공동체란 ‘허구의 집단’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뤄집니다. 따라서 시민과 입법자들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정책에서 얻게 되는 이익을 모두 더한 뒤 총비용을 빼면, 다른 정책을 펼 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을까?

벤담은 모든 도덕적 주장이 반드시 행복 극대화를 전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도덕적 싸움은 알고 보면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공리주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를 두고 이견을 보일 뿐이지, 원칙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벤담은 공리 원칙이 정치 개혁의 기초가 되는 도덕 과학을 제시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형벌정책을 더 능률적이고 인도적으로 개선할 방안을 여럿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원형교도소’로서 중앙에 감시탑을 설치해 교도관이 재소자들을 관찰하되 재자들은 교도관을 볼 수 없게 만든 곳입니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원교도소를 민간업자에게 운영하게 하고, 민간업자는 그 대가로 죄수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는데, 이때 죄수들은 하루 16시간 노동을 합니다. 이 계획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시대를 앞선 제안이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에서 이 제안이 부활해, 교도소 운영을 민간 기업에 위탁하는 방안이 논의도기도 했습니다.

샌델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공리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약점이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임을 지적합니다. 공리주의자들에게 개인은 단지 사람들의 선호도를 더할 때 계산되는 한 항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1930년대에 사회심리학자 에드워드 손다이크Edward Thorndike는 공리주의의 가정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정부 보조를 받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다양한 고통을 겪는 대가로 얼마를 받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조사 결과, 새끼발가락 하나를 절단하는 대가는 $57,000였고, 길이 15cm인 산 지렁이 한 마리를 먹는 대가는 $100,000였으며, 주인 없는 고양이를 맨손으로 질식시키는 대가는 $10,000였고, 마을에서 15km 떨어진 캔자스의 농장에서 남은 인생을 사는 대가는 $300,000였습니다. 손다이크는 이 결과가 모든 행위는 하나의 저울로 계량, 배교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손다이크의 어이없는 가격 목록은 그런 비교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결과를 보면서, 설문 응답자가 정말로 캔자스 농장에서의 삶의 미래를 지렁이를 먹는 것보다 세 배 불쾌하게 여겼다고 결론지어야 할까? 아니면 워낙 별개의 체험들이라 의미 있는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어야 할까? 손다이크는 응답자의 1/3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대도 그런 체험을 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을 내놓았다고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응답자가 그 체험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하게” 여긴다는 점을 암시한 부분입니다.

벤담의 최대 행복 원칙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은 첫째,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모조리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하는 오류를 점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반박에 답을 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73)입니다. 밀은 벤담의 친구이자 제자인 제임스 밀의 아들입니다. 제임스는 아들을 집에서 가르쳤고, 존은 신동으로 자랐습니다. 그는 세 살에 그리스어를, 여덟 살에 라틴어를 공부했습니다. 열한 살에는 로마법의 역사를 썼습니다. 스무 살 때 신경쇠약에 걸려 이후 여러 해 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해리엇은 당시 두 아이를 둔 유부녀였지만,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해리엇의 남편이 죽자, 두 사람은 결혼했습니다. 벤담의 신념을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한 밀은 해리엇을 가장 훌륭한 지적 동반자이자 협력자로 신뢰했습니다.

밀의 저서 『자유론 On Liberty』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영어권 세계의 고전입니다. 이 책의 요지는, 사람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면서 개인을 보호하려 들거나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라는 것이 밀의 주장입니다. 밀이 말하는 자유의 원칙은 벤담의 공리주의 원칙보다 더 엄격한 도덕적 기초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밀은 우리가 공리를 극대화하되, 매 순간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되리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수가 반대 의견을 막거나 자유사상가를 검열할 수 있다면, 오늘 당장 공리가 극대화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불행이 늘고 행복은 줄 것입니다.

반대 의견을 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면 장기적으로 사회가 행복해진다고 믿은 이유는 무엇일까? 밀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반대 의견의 전부 혹은 일부가 사실로 판명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다수 의견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이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다수 의견이 독단이나 편견에 빠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관습과 관례를 다르도록 강요하는 사회는 답답하고 순종적인 체제로 전락해, 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힘과 활기를 잃기 쉽습니다.

밀의 설명에 따르면, 순응은 삶의 적입니다.


지각, 판단, 차별적 감정, 정신활동, 나아가 도덕적 기호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의 능력은 선택하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관습에 따라 행동할 때는 선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 경우, 사람들은 최고를 분별하거나 탐하는 것에서 경험을 쌓을 수 없다. 정신과 도덕도 근력과 마찬가지로 사용해야 좋아진다. ... 세상이, 혹은 내 몫에 해당하는 세상이, 내 인생 계획을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유인원처럼 흉내 내는 능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자기 계획을 자기가 선택하는 사람만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밀은 관습을 따르면 인생에 만족하면서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비교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무엇을 하느냐뿐만 아니라 어떤 태도로 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하다.

밀은 행동과 결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도 중요함을 역설했습니다. 그에게 개성이 중요한 이유는 쾌락을 주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격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욕구와 충동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 아닌 사람은 인격이 없는 사람이며, 그것은 증기기관차에 인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샌델은 공리주의에 대한 두 번째 반박, 즉 공리주의는 모든 가치를 하나의 저울로 계량한다는 주장에 대한 밀의 반응 역시 공리와는 무관한 도덕적 이상에 기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밀은 긴 수필 『공리주의』에서 공리주의자들이 저급 쾌락과 고급 쾌락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벤담에게 쾌락은 쾌락이고 고통은 고통이었습니다. 이 경험이 저 경험보다 더 나은가, 못한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로 인한 쾌락이나 고통의 강도와 지속성입니다. 벤담은 여러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샌델은 벤담의 공리주의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가 사적 판단을 배제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모든 취향이 동등하게 계산됩니다. 벤담은 이 쾌락이 저 쾌락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모든 가치를 하나의 저울에 올려 계량하고 비교할 수 있다는 벤담의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공리주의를 반박하는 사람들은 쾌락에도 분명 고급과 저급이 있다고 믿습니다.

콜로세움에서 그리스인을 사자 우리에 던진 로마인을 예로 들면, 이 끔찍한 짓거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희생자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그 행위는 고상한 쾌락이 아닌 비뚤어진 쾌락을 충족한다는 생각입니다. 비뚤어진 쾌락을 충족하기보다는 취향을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벤담과 달리 밀은 욕구의 양이나 강도만이 아니라 질을 평가해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공리만으로 그 구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밀은 “행복을 양산할수록 옳은 행동이며, 그 반대 상황을 초래할수록 나쁜 행동이다. 행복이란 쾌락이 있고 고통은 없는 것이며, 불행이란 고통이 있고 쾌락은 궁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도덕 이론의 바탕이 된 삶의 이론인 쾌락 추구와 고통에서의 해방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목표”라고 확신하며, “모든 바람직한 것은 ... 쾌락이 내재한다는 점에서, 혹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막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했습니다.

밀은 쾌락과 고통이 전부라고 주장하면서 “더 바람직하고 더 가치 있는 쾌락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밀은 간단한 시험을 제안합니다. “두 가지 쾌락이 있을 때, 그 둘을 경험한 사람들 전부 혹은 거의 전부가 어느 하나를 절대적으로 좋아한다면, 그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 따위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더 바람직한 쾌락이다.” 밀은 “(어떤 행위가) 바람직한 무엇인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실제로 사람들이 그것을 바란다는 사실뿐이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쾌락을 질적으로 구분하는 그의 시험은 한 가지 분명한 반박의 여지가 있다면서 샌델은 우리가 대개 고급 쾌락보다는 저급 쾌락을 더 좋아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샌델은 우리가 더러 플라톤을 읽거나 오페라를 보러 가기보다는 소파에 누워 시트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이처럼 어떤 행위가 특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즐기기 쉽게 때문에 더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합니다.

밀은 가장 뛰어난 사람도 “더러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고급 쾌락을 제쳐두고 저급 쾌락을 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누구나 가끔은 소파에서 빈둥거리고 싶은 충동에 굴복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렘브란트와 텔레비전 재방송의 차이를 모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밀은 이 점을 지적하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만약 바보가, 아니면 돼지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면, 문제를 자기 쪽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급 능력을 신뢰하는 밀의 표현에 수긍이 가지만, 샌델은 밀이 그 말에 기대면서 공리주의 전제에서 벗어났음을 주장합니다. 욕구는 더 이상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저급인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은 우리의 바람과 욕구와는 별개인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상에서 나옵니다. 어떤 쾌락이 고급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더 좋아해서가 아니라 고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샌델은 우리가 『햄릿』을 위대한 예술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그보다 못한 오락거리보다 그것을 더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급 능력을 끌어내고 더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밀은 공리주의가 모든 것을 단순히 쾌락과 고통으로 이분해 계산해버린다는 혐의를 벗기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공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꼴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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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오찬>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의 <오찬 The Luncheon>, 1868, 유화, 230-150cm.

오찬은 매일매일의 일상사이지만 묘사하기에 다라서는 매우 고상한 삶의 일면입니다. 아이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아이의 장난감은 의자 아래 나동그라져 있습니다. 카미유 둥 뒤에 하녀가 보이는데, 모네는 경제적으로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하녀를 고용하여 카미유를 돕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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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오찬>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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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오찬>의 부분


모네가 1868-69년 겨울 에트레타에서 카미유와 아들 장과 함께 행복감을 맛보면서 그린 것이 <오찬>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음에도 230×150cm 크기로 그린 것을 보면 야망을 갖고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은 이제 한 살 반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앉은 테이블이 빛으로 인해 관람자의 시선을 끕니다. 테이블 위에 신문 『르 피가로 Le Figaro』가 놓여 있으며, 아직 펴서 읽지 않은 상태입니다. 손님은 아직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창문에 몸을 기대고 장갑을 벗으려고 합니다. 오찬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손님은 친구 혹은 친척으로도 보이지 않아 불편한 상태로 그냥 서 있는 것이 어색해 보이며 하녀의 동작도 불분명합니다.

이 작품은 내용을 알 수 없는 스냅사진처럼 보입니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요소는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에서도 나타났고, 드가의 <강간>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마도 전통적인 회화 구성에 현대인의 삶을 삽입한 데서 오는 19세기식 그림인지도 모릅니다. 모네가 이런 형식주의에 매여 그린 그림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지 실내의 장면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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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붉은 망토 The Red Cape>, 1868-69, 유화, 100-80cm.

눈이 내리는 정원을 지나가던 카미유가 창문을 통해 안을 응시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그녀의 얼굴을 충분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충 표현했으며, 붉은 망토가 두드러집니다.


이 무렵 모네는 캔버스도 없고 물감도 떨어져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린 <붉은 망토>는 <오찬>에 비하면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려진 것으로 모네가 그렸을까 하고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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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그루누예르 La Grenouillere>, 1869

그루누예르란 말은 ‘개구리 연못’이란 뜻으로 사람들이 수영도 하고 보트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식사하고 유희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당시 이곳은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은 보호지역이었으므로 여기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폴레옹 3세와 그의 아내 외제니가 승인하는 공식 도장을 책임자로부터 받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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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그루누예르 La Grenouillere>, 1869, 유화, 74.6-99.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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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그루누예르>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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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그루누예르 La Grenouillere>, 1869, 유화, 59-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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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그루누예르의 일광욕 Les Bains de la Grenouillere>, 1869, 유화, 73-92cm.


모네는 1869년 6월에 파리 서쪽 센 강변의 작은 마을 생미셸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모네가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말을 들은 가난한 르누아르가 부모의 집에서 음식물을 운반해 왔습니다. 두 사람은 1869년 6월과 10월 사이에 그르누예르 근처 유원지의 ‘떠 있는 카페’로 가서 이젤을 나란히 하고 작업했습니다. 이곳에서의 두 사람의 작업에서 인상주의 풍경화 기법이 나타났는데, 붓질이 짧아졌고 긴급한 인상이 가벼운 붓질로 영롱하게 나타났습니다. 과거 풍경화 개념으로 보면 두 사람의 풍경화는 완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스케치처럼 보입니다.

모네의 경우는 이런 종류의 그림이 처음이 아니었고 <베네쿠르의 강>에서 이미 토막 난 붓질로 순간의 느낌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세세한 묘사를 무시하고 단지 외곽선만을 그린 후 빛에 의한 색질의 달라짐을 통해 자연의 변화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색을 섞어 사용하기보다는 순수한 색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붓질을 더욱 짧게 했는데, 색의 진동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네는 살롱을 “진정한 전투지”라고 말해 왔으므로 이곳에서 그린 그림과 <오찬>을 1870년 봄 살롱에 출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심사위원들 중에는 밀레, 코로, 도비니가 포함되었고, 밀레와 도비니가 특별히 힘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모네가 낙선한 것입니다. 모네가 낙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부 평론가들이 그의 낙선에 관해 언급하면서 심사에 의문을 제기했고, 여론이 나쁘자 코로와 도비니가 심사위원직을 사임했습니다. 모네는 4년 후 첫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유일하게 큰 사이즈의 이 작품을 출품하여 대중에게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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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수태고지>, 1470-73년경,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98-21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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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천사>, 1475-78년경,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17.7-15.1cm.


레오나르도가 야코포 살타렐리와 남색을 벌인 것으로 기소되기 전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는 것이 <수태고지>입니다. 1470~73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1867년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기 전까지 몬테 올리베토 수도원에 걸려 있었고, 기를란다요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베로키오의 작품이라고 했지만, 러스킨만은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1907년, 수태를 알리는 천사 가브리엘의 소매를 그린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이 출간되면서 사람들은 이것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1475~78년경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삽입한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와 이 작품을 비교하면, 레오나르도의 회화기법이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동정녀의 기다란 손가락과 가슴의 장식적 요소가 그러합니다. 서툰 솜씨도 보이고 특히 동정녀의 팔과 탁자가 원근법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작품은 전체적으로 호감을 느끼게 하고, 조화로우며 깊이가 있고 밝으며 공간감이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그의 고유한 창조성을 충분히 알게 해줍니다.

<수태고지>에서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관망을 보여주는 요소가 발견되는데, 화면 앞의 꽃밭 외에도 천사의 날개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실재 새의 날개를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다른 화가들은 날개를 지나치게 꾸미고 어색하게 부착시켰지만, 그의 날개는 자연에서 관망한 것입니다. 인체와 동물의 몸에 관해 충분한 지식이 있는 그는 날개가 어깨로부터 자란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착했습니다. 과거 화가들이 도상으로 날개를 어깨 조금 아랫부분에 형식적으로 단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의 면밀한 사실주의와 공상적인 날개를 하고 있는 보티첼리와 필리포 리피의 천사들을 비교하면 자연주의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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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의 <수태고지>의 부분, 1489-90, 패널에 템페라, 156-150cm.


얼마 후에 그린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은 <모나리자>를 예고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실재에 충실했으며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인물을 그릴 때는 성격이 겉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칭찬받을 수 없다.” 지네브라Ginevra란 이름은 배경의 로뎀나무 숲에서 알 수 있는데, 로뎀나무는 이탈리아어로 지네프로ginepro입니다. 로뎀나무는 지네브라의 고상한 인격을 나타내는 데 매우 적절했습니다. 지네브라는 1481년에 타계한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1474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루이지 니콜리니란 남자와 결혼했으며, 1521년경 타계했습니다. 시인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했으며 로렌초 데 메디치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소네트를 두 점 쓴 적이 있습니다. 시인들이 찬양한 그녀의 미모를 레오나르도는 회화의 언어로 찬양했습니다. 앙드레 말로는 『예술 심리학 La Psychologie de l’art』에서 레오나르도가 “과거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을 창조했으며 이는 단순히 인물을 그려 넣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특성과 관객 모두 빠질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런 공간은 <모나리자>에서 다시 발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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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익명에 의해 동성연애자로 기소되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당시 피렌체에는 남색이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증거는 없지만 베로키오가 동성연애자란 소문이 있었고, 결혼을 하지 않은 많은 예술가들이 남색을 즐겼다는 설도 있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이 남색을 얼마나 즐겼는지는 독일에서 피렌체인이란 말 플로렌저Florenzer가 동성연애자를 의미한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1500년경 레오나르도와 어울렸던 화가 안토니오 바치는 공공연하게 동성연애자임이 알려져 있었고, 별명은 남색이란 뜻의 일 소도마Il Sodoma였습니다.

1476년 초, 스물네 살의 레오나르도는 익명에 의해 동성연애자로 기소되었습니다. 당시 피렌체에는 익명으로 고소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 사기, 살인모의, 강간 등을 쉽게 고소할 수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열일곱 살의 야코포 살타렐리와 남색을 벌인 것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야코포는 금세공 도제로서 소문난 남창이었습니다. 그때 기소된 사람은 레오나르도 외에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또 다른 기소자들 중 하나는 금 세공가 바르톨로메오 디 파스퀴노였고, 다른 하나는 재단사 리오나르도 데 토르나부오니였습니다. 첫 법정심리는 1476년 4월 9일에 열렸습니다. 법정은 비교적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했는데, 충분한 증거와 증인의 서명이 있는 내용을 제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제출되지 않았으므로 법정심리는 6월 7일로 연기되었고, 검찰이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레오나르도와 두 명의 젊은이는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 해결의 전말에는 메디치 가문의 압력이 있었습니다. 기소자 중 리오나르도 데 토르나부오니의 성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어머니 성으로, 이 자의 기소는 곧 메디치 가문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이 때문에 메디치 가문은 법정에 압력을 넣었으며, 레오나르도와 나머지 한 명도 그 덕에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레오나르도가 남색을 즐겼다는 증거가 없어 사실의 여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는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고 여자를 친구로 둔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잘생긴 젊은 사내들과 어울렸습니다. 그가 남자 누드를 많이 그렸으므로 그들이 단지 모델이었는지 아니면 동성애 상대들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얼굴, 손, 몸동작에 국한되었고 젊은 남자의 경우에는 인체의 모든 부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해부학에 관심이 생겼을 때 그는 남자의 생식기 구조를 묘사하면서 남자의 성기를 다양하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여자의 은밀한 곳을 드로잉한 건 단 두 차례뿐이며 과장되었습니다. 또 다른 페이지의 기계에 관한 드로잉에서 그는 남녀의 섹스 행위를 묘사했는데, 두 개의 남성의 성기가 만나는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또 다른 페이지에는 음경이 남자의 엉덩이를 향한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남자의 성기에 관해 적었습니다.

종종 성기는 주인의 허락이나 생각과는 무관한 자체운동을 한다. 남자가 깨어있거나 잠들었을 때 성기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주인이 행동을 개시하기를 원하지만, 성기는 이를 거부한다. 성기는 종종 행동하기를 욕망하지만, 주인이 이를 금한다. 이렇기 때문에 이 창조물은 종종 주인과는 별개로 자체의 삶과 지성을 가지는 것이며, 남자는 그것에 명칭을 붙이거나 보여주기를 부끄러워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그것을 가리고 숨길 것이 아니라 미사에서의 신부처럼 엄숙하게 드러내야만 한다.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은 다분히 자기 고백적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아버지는 두 아내를 땅에 묻고 세 번째 아내를 맞았고, 어머니는 의붓동생을 넷이나 낳았으며,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 또한 의붓동생을 낳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레오나르도에게 성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의 어린 시절에 관심이 많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린 시절 기억 A Childhood Memory of Leonardo da Vinci』(1910)을 출간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새가 나는 장면을 스케치한 종이 뒷면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내가 가장 어렸을 적에 관한 기억들 가운데 하나인 솔개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해야 할 것 같다. 난 그때 요람에 있었던 것 같은데 솔개 꼬리가 내 입을 열게 만들었고 꼬리는 속 입술을 여러 차례 쳤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솔개를 독수리로 잘못 알고 독수리 꼬리를 어머니의 젖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왜 독수리라는 새를 선택했는지에 관해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이에 대한 해석을 위해 이집트 신화까지 들먹이며 진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을 독일어로 번역한 책을 참조했는데, 사실 레오나르도가 니비오nibbio(솔개)라고 쓴 것을 독일어 번역자가 독수리Geier로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번역자의 실수로 빚어진 대학자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레오나르도의 출생과 부모의 헤어짐을 앞으로 형성되는 그의 성격에 매우 심각한 문제로 제기했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어머니에 대해 가졌던 상반되는 감정교차를 해독하여 레오나르도 내면의 갈등을 분석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부지불식간에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데 대한 책임이 있다는 ‘냉담한 어머니’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로 인해 레오나르도가 억제된 성적 욕구를 동성애로 진전시켰으며, 결국에는 모든 성적 행위를 거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순화현상이 그로 하여금 지적 관심과 ‘탐구의 본능’을 한층 강화시켜서 그의 예술적 창조성을 손상시켰다고 보았습니다. 어린 레오나르도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이별에 대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또 입었을 것이며, 어머니가 딴 남자로부터 의붓동생들을 낳았을 때 마음의 상처가 더 깊어졌을 것은 사실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자식을 낳는 것을 불행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훗날 의붓동생 하나가 아들을 낳았다고 연락을 취했을 때, 놀랍게도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편지를 받고 네게 후계자가 생긴 것을 알았고 그 사건이 네게 큰 즐거움을 준 것을 이해한다. 나는 어느 정도 네게 타고난 분별력이 있다고 판단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건 내게 선견지명이 없었음을 알게 해주는구나. 너는 부단히 경계하는 적을 자식으로 두게 된 것을 기뻐하지만 자식의 모든 에너지는 자유를 쟁취하는 데 있고 그 놈은 네가 죽은 후에야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답장은 아버지 피에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의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의 성적 충동과 행위가 대단히 낮았고 일반 동물들의 수준보다 조금 높았던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하지만 여자의 음부를 확대해서 그린 점과 남자의 성기를 “길고, 두텁고, 무겁게” 그리거나 “짧고, 가늘며, 부드럽게” 그린 점으로 봐서 그가 성적 관심을 억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태도는 성적 충동과 성적 행위가 낮은 사람의 태도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육체적 쾌락을 남용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매독에 대한 위협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는 육욕이 진정한 사랑을 해치고 지성적인 활동을 저하시키며 실망과 비탄이 따르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그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의 보편적인 사고였습니다. 저명한 라틴어 학자 추기경 벰보는 1497년경에 라틴어로 ‘사랑하다’와 ‘괴롭다’ 혹은 ‘쓰라리다’는 말은 같은 단어 아마레amare에서 왔다면서 사랑함으로써 괴롭고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견해를 우화적 드로잉으로 표현했습니다. 두 남자가 같은 몸에서 솟아오른 모습으로 한 사람은 늙은이로 한 손에는 불꽃을 다른 손에는 참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잘생긴 젊은이는 한 손에 갈대를 들고 다른 손에는 금화를 들고 있으며 금화가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고통과 쾌락을 상징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쾌락과 고통에 관해 적었습니다.

쾌락과 고통은 쌍둥이처럼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둘은 상반되기 때문에 서로가 등을 돌리고 있다. 네가 쾌락을 선택한다면 고난과 후회만 안겨주는 사람이 배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쾌락과 고통이란 그러한 것들이며 ... 그것들은 서로가 상반되는 것처럼 등을 맞대고 있지만, 노고와 고통이 쾌락의 기초가 되며 허영과 외설적인 쾌락은 고통의 기초가 되므로 기초는 하나이며 동일한 몸에서 솟아오른다.

그러므로 여기서 쾌락은 상처를 입히는 독이 든 갈대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토스카나에서는 갈대를 침대 아래 까는데, 사람들은 침대에서 허황된 꿈을 꾼다. 사람들의 인생은 많은 부분이 침대와 관련이 있다. 또한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좇아 환영적인 쾌락을 맛본다. 그래서 갈대는 이런 것들을 상징한다.

레오나르도는 쾌락과 고통을 관련지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아침에 침대에서 곧바로 못 일어나고 미적거리는 습관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는 잠이 깬 채 침대에 누워 꿈을 꾸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드로잉 하단에 “털이 든 매트리스나 누빈 매트리스에 누우면 새로워지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혼자만의 쾌락을 추구한 것 같았습니다. 그가 “짝짓기 행위”의 추함을 비난한 것은, 이성간의 성적 관계를 뜻하며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고 섹스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의문들을 그는 적었습니다. “야수들이 자기들의 씨를 쾌락으로 심게 되는 동기는 무엇이며, 왜 암놈은 쾌락으로 씨를 받으려고 기다렸다가 고통 속에서 새끼를 낳는 것일까?”, “만약 연인이 자기가 함께 할 대상에 순응한다면 결과는 즐겁고 상쾌하며 만족하게 될 것이다. 연인이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과 하나가 될 때 평화를 발견하고 억압에서 자유로워지며 휴식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무가치할 경우 연인은 자신을 기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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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질투에 대한 두 비유>, 21-28.9cm.



레오나르도는 질투와 미덕을 관련지었습니다. “미덕이 생기는 순간 미덕은 질투를 생겨나게 한다. 질투와 미덕이 구분되는 것보다는 몸을 몸의 그림자로부터 구분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질투에 관해 이렇게 표현했다.

그녀(질투)는 잘생긴 얼굴에 가면을 쓴다. 승리와 진실이 불쾌감이 되어 그녀의 눈은 종려와 올리브 나뭇가지에 의해 상처를 입고 귀는 월계수와 상록수 나뭇가지에 의해 상처를 입는다. 그녀로부터 오는 섬광은 그녀의 말이 사악함을 상징한다. 끊임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녀는 수척해지고 주름지며 격렬한 뱀이 그녀의 심장을 갉아먹는다. 그녀는 화살을 위한 웅변이 있는 화살통을 갖고 있는데, 종종 웅변으로 상처를 입게 되며 … 그녀의 손에는 화병이 있고 그 속에는 전갈들, 두꺼비들, 그리고 그 밖의 독액을 분비하는 야수들이 숨어 있다.

레오나르도가 질투를 두려워한 까닭은 질투는 고의적인 뜬소문을 무성케 해서 나쁜 평판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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