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오찬>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의 <오찬 The Luncheon>, 1868, 유화, 230-150cm.
오찬은 매일매일의 일상사이지만 묘사하기에 다라서는 매우 고상한 삶의 일면입니다. 아이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아이의 장난감은 의자 아래 나동그라져 있습니다. 카미유 둥 뒤에 하녀가 보이는데, 모네는 경제적으로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하녀를 고용하여 카미유를 돕게 했습니다.
169
모네의 <오찬>의 부분
170
모네의 <오찬>의 부분
모네가 1868-69년 겨울 에트레타에서 카미유와 아들 장과 함께 행복감을 맛보면서 그린 것이 <오찬>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음에도 230×150cm 크기로 그린 것을 보면 야망을 갖고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은 이제 한 살 반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앉은 테이블이 빛으로 인해 관람자의 시선을 끕니다. 테이블 위에 신문 『르 피가로 Le Figaro』가 놓여 있으며, 아직 펴서 읽지 않은 상태입니다. 손님은 아직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창문에 몸을 기대고 장갑을 벗으려고 합니다. 오찬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손님은 친구 혹은 친척으로도 보이지 않아 불편한 상태로 그냥 서 있는 것이 어색해 보이며 하녀의 동작도 불분명합니다.
이 작품은 내용을 알 수 없는 스냅사진처럼 보입니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요소는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에서도 나타났고, 드가의 <강간>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마도 전통적인 회화 구성에 현대인의 삶을 삽입한 데서 오는 19세기식 그림인지도 모릅니다. 모네가 이런 형식주의에 매여 그린 그림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지 실내의 장면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170-1
모네의 <붉은 망토 The Red Cape>, 1868-69, 유화, 100-80cm.
눈이 내리는 정원을 지나가던 카미유가 창문을 통해 안을 응시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그녀의 얼굴을 충분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충 표현했으며, 붉은 망토가 두드러집니다.
이 무렵 모네는 캔버스도 없고 물감도 떨어져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린 <붉은 망토>는 <오찬>에 비하면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려진 것으로 모네가 그렸을까 하고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172
르누아르의 <그루누예르 La Grenouillere>, 1869
그루누예르란 말은 ‘개구리 연못’이란 뜻으로 사람들이 수영도 하고 보트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식사하고 유희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당시 이곳은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은 보호지역이었으므로 여기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폴레옹 3세와 그의 아내 외제니가 승인하는 공식 도장을 책임자로부터 받아야 했습니다.
176
모네의 <그루누예르 La Grenouillere>, 1869, 유화, 74.6-99.7cm.
173-1
모네의 <그루누예르>의 부분
171
르누아르의 <그루누예르 La Grenouillere>, 1869, 유화, 59-80cm.
175
모네의 <그루누예르의 일광욕 Les Bains de la Grenouillere>, 1869, 유화, 73-92cm.
모네는 1869년 6월에 파리 서쪽 센 강변의 작은 마을 생미셸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모네가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말을 들은 가난한 르누아르가 부모의 집에서 음식물을 운반해 왔습니다. 두 사람은 1869년 6월과 10월 사이에 그르누예르 근처 유원지의 ‘떠 있는 카페’로 가서 이젤을 나란히 하고 작업했습니다. 이곳에서의 두 사람의 작업에서 인상주의 풍경화 기법이 나타났는데, 붓질이 짧아졌고 긴급한 인상이 가벼운 붓질로 영롱하게 나타났습니다. 과거 풍경화 개념으로 보면 두 사람의 풍경화는 완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스케치처럼 보입니다.
모네의 경우는 이런 종류의 그림이 처음이 아니었고 <베네쿠르의 강>에서 이미 토막 난 붓질로 순간의 느낌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세세한 묘사를 무시하고 단지 외곽선만을 그린 후 빛에 의한 색질의 달라짐을 통해 자연의 변화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색을 섞어 사용하기보다는 순수한 색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붓질을 더욱 짧게 했는데, 색의 진동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네는 살롱을 “진정한 전투지”라고 말해 왔으므로 이곳에서 그린 그림과 <오찬>을 1870년 봄 살롱에 출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심사위원들 중에는 밀레, 코로, 도비니가 포함되었고, 밀레와 도비니가 특별히 힘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모네가 낙선한 것입니다. 모네가 낙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부 평론가들이 그의 낙선에 관해 언급하면서 심사에 의문을 제기했고, 여론이 나쁘자 코로와 도비니가 심사위원직을 사임했습니다. 모네는 4년 후 첫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유일하게 큰 사이즈의 이 작품을 출품하여 대중에게 소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