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과 세계 창조에 관한 신화


 
우주 팽창과 대폭발 이론이 전반적으로 옳다면, 우리는 좀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대폭발의 순간은 어떤 상태였는가? 어떻게 물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던 우주에서 갑자기 물질이 생겨났는가? 이러한 물음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코스모스 Cosmos』(1980)의 저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은 사람들이 보통 특이점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신의 몫으로 떠넘긴다면서, 이는 여러 문화권에 공통된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이 무nothing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답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하려면 당연히 “그렇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면서,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식의 결론밖에 내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우주의 기원 문제에는 답이 없다 하고 한 단계 단축하는 것이 어떻까? 또 한편으로, 신은 항시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역시 한 단계 줄여, 우주가 항시 존재했다고 하면 어떨까? 하고 묻습니다.

어느 문화권이든지 창조 이전의 세상과 세계 창조에 관한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신화들은 우주가 사람이나 동물이 하는 바를 따라했다는 순진한 상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에 내재하는 주기성을 즐기며 그 주기성을 최대로 활용합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의 주기서이 가능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수십 년 세월의 인생에도 주기성이 있다면 영겁의 신의 세계라고 주기성이 없으란 법이 있겠는가? 인류 문화의 위대한 종교 중에서 힌두교만이 코스모스가 무한 반복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주가 생멸의 끝없는 순환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우주론이 밝힌 시간 척도와 비슷한 크기의 척도로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유일한 종교가 힌두교입니다. 과학과 힌두교의 시간 척도가 일치하는 건 우연의 결과일 것입니다. 일상의 하루는 낮과 밤 24시간입니다. 그러나 브라흐마의 하루는 지구인의 시간으로 86억4천만 년에 해당합니다. 이는 지구나 태양의 나이보다 긴 시간이고 우주가 대폭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과한 시간의 절반도 넘는 장구한 시간입니다. 힌두교의 가르침은 브라흐마의 1년보다 더 긴 세월도 언급합니다.

인도 문화에는 신이 많은데, 같은 신일지라도 그 현현 양식이 다양합니다. 11세기에 만들어진 촐라Chola 왕조의 청동상에서 우리는 시바Shiva 신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바 신의 여러 現身(현신) 중에서 우주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할 때마다 이뤄지는 창조를 춤으로 형상화한 것이 가장 우아하고 장대합니다. 시바의 우주적 춤을 모티프로 한 이 청동상에서 시바 신은 네 개의 손을 가진 춤의 제왕 나타라자Nataraja로 나타납니다. 위로 치켜든 오른손은 창조의 소리를 내는 북을 들고, 왼손은 화염을 쥐고 있습니다. 널름거리는 불꽃의 혀는 이번에 새로 태어나는 우주도 수십억 년 후에 다시 멸망함을 상징합니다.

코스모스는 영원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할 것입니다. 수축과 팽창의 새로운 주기가 열릴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코스모스, 그것은 바로 인도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우주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코스모스가 바로 그렇게 진동하는 우주라면 대폭발은 우주 창조의 순간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이전 우주가 완전히 파괴되는 최후의 순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주가 연원무궁 팽창하는 우주인지, 아니면 팽창과 수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우주인지 누구나 확인하고 싶을 것입니다.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주 물질의 재고를 조사하는 것이 그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코스모스의 끝, 영원의 벼랑 끝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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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천부적 재능의 예고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계단의 성모>, 1492년경, 대리석 릴리프, 55.9-40cm.


미켈란젤로의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계단의 성모>는 1492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일명 ‘밀어 넣은 릴리프 squashed relief’로 불리는 이 작품은 그가 열여섯 살 혹은 그 이전에 제작했다는 데서 경이롭다고 말할 수 있으며, 천부적 재능을 시위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은 조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의 솜씨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아 나중에 보완했거나 아니면 열다섯 살 이전에 이미 돌 깎는 기술을 익혔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기술을 익혔다고 하더라도 고가의 대리석을 함부로 사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이는 그가 재능을 충분히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돌판에 그림을 새긴 듯한, 두께가 얇고 회화적 원근법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실험적이지만, 완숙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단의 성모>는 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놀라운 구성 솜씨도 함께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높이 55.9cm의 대리석에 성모를 가득 차게 구성했으며, 이런 점은 그의 조각에서 특허와도 같은 요소가 됩니다. 성모는 정방형 토대 위에 앉아 있고, 우미한 옷자락이 주름진 채 아름답게 돌 위로 흘러내립니다. 성모의 옆모습은 가장 이상화된 고전적인 모습으로 둥근 후광 안에 있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천의 주름이 코의 선과 평행을 이뤄 후강을 좀 더 강조해줍니다. 주름진 옷은 작은 폭포처럼 어께를 시작으로 팔을 감아 내려가 다리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 가장자리 프레임에 살짝 닿습니다. 계단 위의 아이들은 관람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보이게 함으로써 원근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약간 떨군 아기의 도톰한 손이 옷 주름 위에 올려 있습니다. 성모의 오른발이 왼쪽 다리 안으로 비스듬히 빠져나와 미켈란젤로가 의도적으로 구성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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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의 <헤롯의 향연>, 1433-35년경, 대리석 릴리프, 50-7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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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의 <성모와 아기>, 1425-28년경, 대리석 릴리프, 33.5-32.2cm.


계단에 앉아 있는 성모라는 주제는 생소한 것으로 메디치 가의 소장품이었던 도나텔로의 <헤롯의 향연> 오른쪽에 보이는 계단과 <성모와 아기>를 합성해 제작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것은 누구를 위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 자신이 소장했다가 이후 그의 조카 레오나르도가 그것을 메디치 가에 주었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피렌체의 카사 부오나로타(미켈란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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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켄타우로스의 전투>, 1492년경, 대리석 릴리프, 33.5-3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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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켄타우로스의 전투>의 부분

약간 볼록한 우유빛 대리석에 제작하면서 전투에 임한 사람들을 모두 누드로 묘사했는데, 고대 미술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보이며, 격렬한 전투에 주된 인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관람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보다는 구성 자체에 관심을 쏟았음을 알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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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켄타우로스의 전투>의 부분


미켈란젤로의 천부적 재능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 <켄타우로스의 전투>이며, 이것 역시 1492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계단의 성모>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 또한 대리석에 릴리프로 회화와 같은 효과를 낸 것으로 보아 그가 일찍이 회화에도 관심이 많았음을 알게 해줍니다. 15세기의 거장 도나텔로가 이런 릴리프를 많이 제작했으며, 어린 미켈란젤로는 거장과 솜씨를 겨루기라도 하듯 일찍이 릴리프를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켄타우로스의 전투>는 운반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대리석 작품으로 <계단의 성모>보다 세 배 이상 크며, 거장 도나텔로의 많은 작품들보다 큽니다. <켄타우로스의 전투>에서는 <계단의 성모>에서와는 달리 공간의 깊이를 따로 창조하지 않고 사람들이 겹치고 겹치는 가운데 절로 공간의 깊이가 생기게 했으며, 사람들을 가득 새기면서 상단의 빈 여백을 거친 모양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미켈란젤로가 공간의 모호함을 해소하지 못하고 일관성을 잃었다고 말하지만, 상단에 거칠게 남긴 부분은 의도적인 것으로 건축에서 미완성으로 남기는 요소를 사용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고대 로마 석관의 구성을 취한 적으로 보아 그가 피사 근처에 잇는 많은 석관들을 보고 연구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작품의 주제에 관해 콘디비는 <데자니라의 강간>으로 보았으며, 바사리는 <헤라클레스와 켄타우로스>라고 적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켄타우로스의 전투>로 봅니다. 이 제목이 타당한지 아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이 릴리프는 사람들이 전투에 휩쓸려 몸과 몸이 겹치고 겹쳐져서 혼돈을 이루고 있으며, 왼쪽의 두 사람은 난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향해 막 돌을 던지려는 공세를 취하고 있어 전투상황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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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도 디 조반니의 <기마병들의 전투>, 1475년경, 청동 릴리프, 4.3-9.9cm.


전투장면은 당시 흔한 주제로 베르톨도 디 조반니Bertoldo di Giovanni(1435/40-91)의 <기마병들의 전투>가 메디치 궁전에 있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그것을 늘 보았을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무기와 갑옷이 등장하는 전투장명을 표현하지 않고 목욕하던 병사들이 경계신호를 듣고 허겁지겁 물에서 올라오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이런 장면이 기념비적인 벽화로 그려질 수 있었다는 데서 당시 피렌체인들의 예술적 취향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파른 강둑을 기어오르고 무릎 꿇고 몸을 이래로 굽히며 용감하게 일어나 갑옷을 입고 외치거나 달려가는 등 다양한 동작들을 묘사하는 가운데 벌거벗은 신체들을 표현했습니다. 피렌체 예술가 중 해부학에 능한 사람들은 벌거벗은 남자들의 전투장면을 기꺼이 묘사했습니다.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는 이런 장면을 동판화로 두 점 제작했으며, 베로키오는 집의 정면에 벌거벗은 전투자들을 장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들의 작품과 비교하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는 모든 동작이 새롭게 창안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토록 다양한 움직임을 묘사할 수 있었던 건 해부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단의 성모>와 이 작품은 과거에도, 그리고 미켈란젤로 동시대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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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메디치 가의 일원이 되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메디치 궁전, 미켈란젤로가 이곳에서 1490년경부터 1492년까지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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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궁전 조각공원


미켈란젤로는 할머니가 메디치 가와 먼 친척뻘이었으므로 일 마니피코Il magnifico(위대한자)람 별명의 로렌초 데 메디치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1490년부터 1492년까지 메디치 정원에서 베르톨도 디 조반니 문하에서 조각을 수학할 수 있었습니다. 1469년부터 1492년까지 피렌체를 다스린 르네상스의 위대한 후원자 로렌초는 고대 조각품들을 수집하여 자신의 정원을 장식했습니다. 소수에게만 공개된 이 정원은 예술가 지망생들의 캠퍼스와도 같았습니다. 그곳에 있는 고대 유물들은 정원의 책임자가 재능을 인정한 예술가 지망생들에게만 드로잉이 허락되었습니다.

로렌초가 정원의 책임자로 선정한 베르톨도 디 조반니는 도나텔로의 조수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피렌체의 주요 예술가는 못되었지만, 도나텔로의 제자이면서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서 15세기와 16세기 조각에 교량적 역할을 한 점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라고 할 수 있는 메디치 정원의 책임자였다는 사실이 또한 미술사에서 그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베르톨도는 작은 청동조각을 주로 제작한 조각가였기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그로부터 돌 깍는 법을 배웠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쓴 제자 콘디비는 스승이 스스로 돌 깍는 법을 배웠다고 적었습니다.

그라나치가 미켈란젤로와 함께 메디치 정원에서 수학하게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정원에서 수학하던 피에트로 토리지아노Pietro Torrigiano(1472~1528)를 알게 되었으며, 미켈란젤로에게 경쟁심을 가진 토리지아노는 훗날 영국으로 가서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무덤을 건립했습니다. 토리지아노의 운명은 미켈란젤로의 코를 부러뜨린 후 극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두 사람은 브랑카치 예배당Brancacci Chapel에서 드로잉하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토리지아노의 드로잉을 보고 놀리자 화가 난 그는 주먹을 단단히 쥐고 미켈란젤로의 코를 쳤는데 그만 뼈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코는 원상으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았고 토리지아노는 로렌초의 벌을 피하기 위해 피렌체를 벗어나 이탈리아를 이리저리 방랑하면서 별로 중요한 작품을 제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로 가서 1509~10년에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을 위해 일했으며, 1511년경 영국으로 가서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1512~18년 헨리 7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의 무덤을 건립했는데, 순수 르네상스 양식을 영국에 소개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는 1522년 헨리 8세의 무덤을 건립하다 방치한 채 스페인으로 갔습니다. 그는 마귀사냥과도 같은 마구잡이 이단자 탄압 정책에 의해 체포된 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켈란젤로 동문들 가운데 루스티치Rustici는 베로키오의 문하에 있다가 온 사람으로 훗날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떠나기 전 레오나르도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또 다른 조각가로 바치오 다 몬텔루포Baccio da Montelupo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 라파엘로 다 몬텔루포Raffaello da Montelupo는 훗날 미켈란젤로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메디치가는 먼 친척과 가문의 사람들에 의해 태어난 사생아들을 포함해서 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을 수백 명 거느린 대식구였습니다. 메디치 가의 경제적 후원이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메디치 후원 하에 있는 많은 당대의 지성인들과 교류하게 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논리적으로 대화하는 방법과 글쓰기를 배웠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수학한 것은 2년 이상이었습니다. 메디치 가에는 당대의 지성인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는 르네상스 철학의 중요한 인물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있었으며, 로렌초 자녀들의 가정교사 폴리지아노Poliziano도 있었습니다.

메디치 가를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는 버질Virgil과 단테의 작품에 능통한 크리스토포로 란디노Cristoforo Landino도 있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정통한 인문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도 있었는데, 피코는 플라톤 철학과 성서를 연관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어렸지만 그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영향은 훗날 그의 미학과 시에 반영되었습니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정원에 가고부터 기를란다요의 작업장에는 가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끝내 라틴어에 능통하지 못해 고전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으며 이탈리아어로 쓴 저작들을 읽었는데, 단테, 페트라르크, 보카치오의 저작들을 읽었으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오비드, 세네카, 시세로 등의 고전도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성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고상한 사상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고 편지와 시를 많이 썼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과 초기의 활약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의 글을 통해서이며 또한 그와 교류했던 아스카니오와 조지오 바사리를 통해서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식구 Medici man’가 되었는데, 이는 메디치가의 정치적 위상과 변화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걸 말합니다.

당시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유럽의 여느 나라 예술가들에 비해 나은 환경에 있었으며, 이는 이탈리아의 도시생활이 더욱 더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군주 혹은 독재자들이 유럽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유효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는 유럽 다른 나라의 예술가들에 비해 훨씬 많은 일감이 있었습니다. 북유럽에서는 예술가가 한 도시에 묶여 있어야 했지만,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닐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지역적 길드의 규정이 완화될 수 있었습니다. 길드의 제약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다니며 작업할 수 없습니다. 예술가들은 발주자의 보호를 받았으며 궁정화가들은 처음부터 길드의 권한 밖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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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우주는 완전 대칭의 상태에서 시작했다


 
20세기 초 당시로서는 최대 구경의 반사 망원경이 윌슨 산 정상에 건설되었습니다. 이 망원경이 먼 은하들의 적색 이동 현상을 발견하게 해주었지만, 당시에 이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윌슨 산 정상에서는 로스앤젤레스 시가 멀리 내려다보이는데, 그때는 악명 높은 스모그도 없었고 시가지의 야간 조명 또한 미미한 수준이어서 윌슨 산의 밤하늘은 맑고 어두워 천문 관측이 아주 적격이었습니다. 천문대 건설 당시 망원경의 거대한 부품들을 산 정상으로 옮기는 데 노새들이 동원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영국 유학을 마친 에드윈 허블Edwin Hubble(1889-1953)이 윌슨 산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두뇌 회전이 빠르고, 천문학계 바깥에 발이 넓으며, 세련된 매너를 갖춘 미남이었습니다. 옥스퍼드에서 단 1년 간 로즈 장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익힌 영국식 억양을 자랑스레 구사한 인물이었습니다. 나선 모양의 성운들이 ‘섬 우주island universe’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 인물이 바로 허블입니다. 섬 우주는 우리 은하와 같이 수많은 별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인데, 허블은 어떤 부류의 별들의 절대 고아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이용해 이 먼 은하들의 거리를 측정했습니다. 거리 측정에 쓰이는 이런 부류의 천체들을 우리는 ‘표준 초standard candle’라고 부릅니다.

은하 하나에서 오는 빛은 그 은하를 이루는 수십억 개의 별들이 방출하는 빛의 총합입니다. 별에서 비교적 온도가 낮은 외곽부의 대기는 별 내부에서 나오는 특정 파장들의 빛을 흡수하여 스펙트럼 사진에 여러 개의 흡수선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 스펙트럼의 파장을 측정하면 별의 대기를 구성하는 화학 조성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도 우리 태양과 같은 성분의 물질로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적색 이동을 가장 쉽게 해석할 수 있는 방편은 이것이 도플러 효과Doppler effect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도플러 효과란 파동을 발생시키는 파원과 그 파동을 관측하는 관측자 중 하나 이상이 운동하고 있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파원과 관측자 사이의 거리가 좁아질 때에는 파동의 주파수가 더 높게, 거리가 멀어질 때에는 파동의 주파수가 더 낮게 관측되는 현상입니다. 적색 이동은 은하들이 모두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리고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력으로 후퇴한다는 추론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있는 은하들은 서로 멀어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허블의 발견은 우주의 기원이 대폭발임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적색 이동이 우주 팽창의 유일한 증거는 아닙니다. 적색 이동과는 별도로 우주 배경 복사도 우주의 팽창을 설명하는 중요한 관측 사실입니다. 하늘의 어느 방향을 보든 미약한 세기의 전파 신호가 잡힙니다. 잡힌 전파 신호의 세기가 파장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조사하면, 이 신호를 내는 물질의 온도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우주 배경 복사에서 측정한 온도가, 식어버린 화구 온도의 추정 값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우주 배경 복사 역시 우주 팽창의 훌륭한 증거가 됩니다. 정밀한 전파 망원경을 U-2 비행기에 실어서 지구 대기의 최상부로 올려 보내 하늘의 모든 방향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거기서 얻은 결과를 부차적으로 근사 분석하니 우주 배경 복사의 세기가 완벽에 가까운 대칭적 분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대폭발 순간에 화구가 모든 방향으로 일정하게 팽창했다고 미루어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즉 우주는 완전 대칭의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관측 결과를 좀 더 정밀한 방법으로 분석하니 우주 배경 복사에 약간의 비대칭성이 드러났습니다. 『코스모스 Cosmos』(1980)의 저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은 우리 은하수 은하가 자신이 속해 있는 국부 은하군의 다른 은하들과 함께 처녀자리 은하단 방향으로 초속 600km 이상의 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다면 앞으로 드러난 이 비대칭성은 대부분 깨끗하게 설명된다고 말합니다. 이 정도의 속력이면 우리는 100억 년 이내에 처녀자리 은하단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은하의 연구가 한결 수월해질 것입니다. 처녀자리 은하단은 여태껏 알려진 은하단들 중에서 구성원이 가장 많은 초대형의 은하단으로서 나선 은하, 타원 은하, 불규칙 은하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우주의 보석상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은하는 처녀자리 은하단으로 돌진하고 있는 걸까? 우주 배경 복사를 고공에서 관측한 조지 스무트George Fitzgerald Smoot III(1945-)와 그의 동료들은 처녀자리 은하단의 중력 작용으로 우리 은하수 은하가 이 은하단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라는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2006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스무트는 그 은하단 내부에 여태껏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은하들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이 은하단이 차지한 공간 역시 20억 광년을 가로지르는 방대한 규모라고 밝혔습니다.

관측 가능한 우주가 수백억 광년의 규모라는 것과 처녀자리 은하단의 크기가 20억 광년이란 점을 고려하면, 이보다 더 먼 거리에 비슷한 규모의 초은하단들이 또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탄생 초기에 물질 분포의 비균질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라서 지금의 처녀자리 초은하단 정도의 질량을 끌어 모으기에는 우주의 나이가 충분치 않습니다. 따라서 스무트는 대폭발 당시 우주의 물질 분포에는 상당한 수준의 비균질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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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우주 팽창에 적극 참여하는 준성체quasi-stellar


 
대폭발 이후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종을 겪고 있는 젊은 은하인 퀘이사quasar는 준성전파원準星電波源이란 뜻의 quasi-stellar radio source의 머리글자들을 조합해 만든 단어입니다. 천문학자들은 NGC6251과 M87 같은 거대 타원 은하들의 중심 깊숙이에는 질량이 태양의 수백만 내지 수십억 배나 되는 블랙홀이 각각 들어앉아 으르렁거리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수십억 광년 저 너머에는 은하 중심부의 폭발이나 소동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격렬한 변동을 겪고 있는 천체들이 있으며, 이 천체들이 퀘이사입니다. 퀘이사가 발견되고 얼마 후 준성전파원들 모두가 반드시 강력한 전파원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준성전파원은 준성체라는 뜻의 quasi-stellar object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요즘은 이를 더 줄여서 QSO로 흔히 표기합니다. 겉보기에는 별과 구별하기 어려웠으므로 처음에는 이것들이 우리 은하에 속한 천체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분광 관측을 통해 적색 이동을 측정해 본 결과, 준성체가 우리 은하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천체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준성체는 우주 팽창에 적극 참여하는 천체입니다. 우리에게서 후퇴하는 속도가 광속의 90%에 이르는 준성체들도 있으므로 그것들은 우주의 저 먼 변방에 있는 셈입니다. 준성체들이 이렇게 먼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보기 밝기가 별만 한 것을 보면 그것들의 원래 광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원래의 광도를 환산해보면 초신성 1000개가 동시에 폭발할 때 예상되는 밝기의 수준입니다.

퀘이사의 에너지원이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즉 전대미문의 거대한 파괴가 퀘이사 내부에서 진행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분출되는 퀘이사 하나하나에서 수백만 개에 이르는 세상들이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파괴되는 세상 중에는 생물과 그 파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생물이 살고 있는 곳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외계 은하들을 연구함으로써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지만, 상상을 초월한 규모로 벌어지는 격렬한 혼돈의 폭력 역시 우주의 한 속성입니다. 우주는 자연과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은하와 별 그리고 문명을 멸망시키는 파괴자입니다. 우주 앞에서 우리의 생명, 인생, 문명, 역사는 그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의 은하수 은하와 같이 겉보기에 점잖고 준수한 은하에도 들썩거리는 구석이 있으며, 야단스러운 동네가 있습니다. 우리 은하의 중심부를 전파 망원경으로 자세히 관찰하면 태양의 수백만 배나 되는 질량의 수소 기체구름 두 덩이가 은하핵에서부터 분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은하 중심핵에서 자잘한 폭발들이 늘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에너지 우주 망원경이 지구 주위를 선회하면서 우리 은하의 핵을 관찰한 결과 특정 파장을 지닌 강력한 감마선이 방출되는 것이 검출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은하수 은하의 핵 속에 거대 질량 블랙홀이 숨어 있다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은하 진화의 긴 여정에서 격동의 청년기에 속하는 은하들은 준성체로 나타나거나 격렬한 폭발을 일으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바깥 세상에 내보입니다. 우리의 은하수 은하 같은 은하들은 중년기에 들어선 착실하고 건실한 은하입니다. 퀘이사는 청년기의 은하로 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데, 퀘이사까지의 거리가 수십억 광년이므로 우리가 관측하는 퀘이사의 모습은 이미 수십억 년 전에 일어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은하에서 태양이 은하의 중심을 도는 회전 속도는 초속 200km 정도입니다. 이 값은 시속 72만km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바른 속도이기는 하지만, 은하 중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약 2만5천 광년이나 되기 때문에 이 속도로 한 바퀴 도는 데 2억5천만 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태양의 나이가 대략 50억 년이므로 태양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은하의 중심을 20번 정도 완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선 팔을 들락날락하기를 반복하면서 이렇게 여러 번 은하의 중심을 맴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은하에는 뚜렷하게 드러난 나선 팔이 두 개 있습니다. 별들이 태어나는 지역이 나선 팔입니다. 나선 팔 안에 반드시 태양과 같이 중년기에 들어선 별들만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태양은 현재 나선 팔과 다른 나선 팔 사이를 지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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