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메디치 가의 일원이 되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메디치 궁전, 미켈란젤로가 이곳에서 1490년경부터 1492년까지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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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궁전 조각공원


미켈란젤로는 할머니가 메디치 가와 먼 친척뻘이었으므로 일 마니피코Il magnifico(위대한자)람 별명의 로렌초 데 메디치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1490년부터 1492년까지 메디치 정원에서 베르톨도 디 조반니 문하에서 조각을 수학할 수 있었습니다. 1469년부터 1492년까지 피렌체를 다스린 르네상스의 위대한 후원자 로렌초는 고대 조각품들을 수집하여 자신의 정원을 장식했습니다. 소수에게만 공개된 이 정원은 예술가 지망생들의 캠퍼스와도 같았습니다. 그곳에 있는 고대 유물들은 정원의 책임자가 재능을 인정한 예술가 지망생들에게만 드로잉이 허락되었습니다.

로렌초가 정원의 책임자로 선정한 베르톨도 디 조반니는 도나텔로의 조수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피렌체의 주요 예술가는 못되었지만, 도나텔로의 제자이면서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서 15세기와 16세기 조각에 교량적 역할을 한 점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라고 할 수 있는 메디치 정원의 책임자였다는 사실이 또한 미술사에서 그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베르톨도는 작은 청동조각을 주로 제작한 조각가였기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그로부터 돌 깍는 법을 배웠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쓴 제자 콘디비는 스승이 스스로 돌 깍는 법을 배웠다고 적었습니다.

그라나치가 미켈란젤로와 함께 메디치 정원에서 수학하게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정원에서 수학하던 피에트로 토리지아노Pietro Torrigiano(1472~1528)를 알게 되었으며, 미켈란젤로에게 경쟁심을 가진 토리지아노는 훗날 영국으로 가서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무덤을 건립했습니다. 토리지아노의 운명은 미켈란젤로의 코를 부러뜨린 후 극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두 사람은 브랑카치 예배당Brancacci Chapel에서 드로잉하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토리지아노의 드로잉을 보고 놀리자 화가 난 그는 주먹을 단단히 쥐고 미켈란젤로의 코를 쳤는데 그만 뼈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코는 원상으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았고 토리지아노는 로렌초의 벌을 피하기 위해 피렌체를 벗어나 이탈리아를 이리저리 방랑하면서 별로 중요한 작품을 제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로 가서 1509~10년에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을 위해 일했으며, 1511년경 영국으로 가서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1512~18년 헨리 7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의 무덤을 건립했는데, 순수 르네상스 양식을 영국에 소개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는 1522년 헨리 8세의 무덤을 건립하다 방치한 채 스페인으로 갔습니다. 그는 마귀사냥과도 같은 마구잡이 이단자 탄압 정책에 의해 체포된 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켈란젤로 동문들 가운데 루스티치Rustici는 베로키오의 문하에 있다가 온 사람으로 훗날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떠나기 전 레오나르도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또 다른 조각가로 바치오 다 몬텔루포Baccio da Montelupo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 라파엘로 다 몬텔루포Raffaello da Montelupo는 훗날 미켈란젤로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메디치가는 먼 친척과 가문의 사람들에 의해 태어난 사생아들을 포함해서 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을 수백 명 거느린 대식구였습니다. 메디치 가의 경제적 후원이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메디치 후원 하에 있는 많은 당대의 지성인들과 교류하게 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논리적으로 대화하는 방법과 글쓰기를 배웠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수학한 것은 2년 이상이었습니다. 메디치 가에는 당대의 지성인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는 르네상스 철학의 중요한 인물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있었으며, 로렌초 자녀들의 가정교사 폴리지아노Poliziano도 있었습니다.

메디치 가를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는 버질Virgil과 단테의 작품에 능통한 크리스토포로 란디노Cristoforo Landino도 있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정통한 인문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도 있었는데, 피코는 플라톤 철학과 성서를 연관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어렸지만 그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영향은 훗날 그의 미학과 시에 반영되었습니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정원에 가고부터 기를란다요의 작업장에는 가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끝내 라틴어에 능통하지 못해 고전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으며 이탈리아어로 쓴 저작들을 읽었는데, 단테, 페트라르크, 보카치오의 저작들을 읽었으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오비드, 세네카, 시세로 등의 고전도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성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고상한 사상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고 편지와 시를 많이 썼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과 초기의 활약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의 글을 통해서이며 또한 그와 교류했던 아스카니오와 조지오 바사리를 통해서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식구 Medici man’가 되었는데, 이는 메디치가의 정치적 위상과 변화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걸 말합니다.

당시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유럽의 여느 나라 예술가들에 비해 나은 환경에 있었으며, 이는 이탈리아의 도시생활이 더욱 더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군주 혹은 독재자들이 유럽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유효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는 유럽 다른 나라의 예술가들에 비해 훨씬 많은 일감이 있었습니다. 북유럽에서는 예술가가 한 도시에 묶여 있어야 했지만,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닐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지역적 길드의 규정이 완화될 수 있었습니다. 길드의 제약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다니며 작업할 수 없습니다. 예술가들은 발주자의 보호를 받았으며 궁정화가들은 처음부터 길드의 권한 밖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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