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원의 상체관련 질환: 머리, 얼굴, 목


1. 목과 얼굴, 머리


목의 문제는 목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얼굴에 있는 기관과 머리에까지 연결된다. 목이 굽어서 목을 구성하고 있는 근육이 굳으면 목이 아플 뿐만 아니라 얼굴 자체와 눈, 코, 귀, 입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두통까지 일으킨다. 목에 통증을 느끼지 않더라도 목 근육이 굳으면 마찬가지로 나쁜 영향을 준다. 목의 문제는 목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목을 구성하고 있는 근육이 얼굴과 머리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얼굴과 얼굴에 있는 기관, 머리, 나아가서는 두뇌의 문제까지도 목과 관련시켜서 파악해야 한다. 뇌졸중(풍)은 뇌의 문제가 아니라 목의 문제다. 갑자기 크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치밀어오를 때 목에서 뇌로 연결되는 신경에 너무 큰 부하가 걸리게 되는데, 이때 신경이 잠시 끊어져 쓰러지게 된다.

풍을 맞는 사람의 공통적인 체형은 목이 굽어 자라목처럼 짧아져 있고, 목이 굵어져 있다. 목이 짧아지고 굵어져 있는 만큼 목 근육이 굳어 있는 것이다. 근육이 굳어 있어 신경은 눌려 잘 통하지 않고 혈관 역시 눌려서 경화된 상태에 있다. 신경이 잘 통하면 과부하가 걸려도 신경이 끊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목이 굽어 근육이 굳어 있는 상태에서 신경이 눌려 잘 통하지 않을 때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신경이 끊어지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2. 목디스크

목디스크(경추사이판 탈출증)는 초기에는 목 근육이 굳으면서 통증이 일어나는데, 이런 증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어깨나 가슴 쪽에도 통증이 나타날 수 있다. 등이 조이거나 당길 수도 있다. 눈이 침침해지고 머리가 아플 수도 있다. 심지어 팔이 시리거나 저릴 수도 있고,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증세가 함께 올 수 있다.

그러나 목디스크는 경추사이판이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결과일 뿐이다. 목등뼈(=경추)가 어긋나게 배열되면 경추사이판 역시 튀어나오게 된다. 이것은 몸이 굽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 그로 인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원인은 목이 굽어 목의 근육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 근육이 굳어 신경을 누를 때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던 대로 목이 굽었다는 것은 목만 굽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골반이 아래로 말려 내려가 있고, 허리는 뒤로 가 있으며, 등은 앞으로 굽어 있고, 목과 어깨 역시 앞으로 굽어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어떤 사람은 꼬리뼈가, 어떤 사람은 허리가, 어떤 사람은 어깨나 목이 아프다고 느낀다. 특정 부위의 근육이 더 굳어 있을 때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목 근육에서 가장 큰 근육은 등세모근이다. 목이 뻣뻣하고 잘 안 돌아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근육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 또 다음으로 목을 구성하는 큰 근육인 목빗근(=흉쇄유돌근. 가슴뼈의 맨 위 끝과 빗장뼈의 안쪽 끝에서 시작해 귀의 뒤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는 크고 긴 목 근육)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 등세모근, 목빗근과 함께 목을 형성하고 있는 작은 근육들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 이 증세가 있는 사람의 이들 근육을 손가락으로 조금 세게 누르면 자지러지게 아프다.

목뿐만 아니라 어깨까지 아픈 것은 어깨가 앞으로 굽어 어깨뼈가 밖으로 벌어지고 위로 뜨면서 경추 1번에서 흉추 7번까지 등 뒤를 넓게 덮고 있는 등세모근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 어깨뼈와 가슴등뼈 사이가 아픈 것, 즉 등이 조이고 당겨진다고 느끼는 것 역시 어깨뼈가 밖으로 벌어지고 위로 뜨면서 이 부위에 있는 근육을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팔이 시리거나 저리고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며 팔을 따라서 손가락 끝까지 저리고 아픈 것 역시 어깨뼈가 밖으로 벌어지고 위로 뜨면서 팔의 근육이 밀려 굳게 되기 때문이다. 또 눈이 침침하거나 눈물이 나오고 머리가 아픈 것은 목 근육이 굳어 신경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컴퓨터 사용 인구가 늘면서 하루 종일 구부리고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는 사람이 많아 목이 굽고 목 근육이 굳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목을 보호하고 목 디스크에 걸리지 않으려면 컴퓨터 모니터를 높여야 한다.


3. 두 통

사람들은 보통 두통을 두뇌가 아픈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두통은 머리뼈(=두개골) 바깥쪽의 두피(頭皮: 머리뼈를 둘러싸고 있는 부분)나 얼굴 오른쪽이나 왼쪽, 위쪽에서 통증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머리뼈 안쪽에서 생기는 두통은 열이 있을 때나 숙취가 있을 때 등 한정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 또한 두뇌에서 통증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두뇌 자체는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간세포와 마찬가지로 신경세포는 통증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장기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두통은 모두 머리뼈 바깥쪽에서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머리뼈 바깥쪽에 발생하는 두통은 얼굴과 목 근육이 굳어서 생긴다. 일반적으로 근육이 굳으면 신경을 누르고, 신경이 눌릴 때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두통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머리가 아픈 것은 목 근육이 굳어 이와 인접해 있는 두피와 얼굴의 근육이 굳어서 생기는 것이다. 현대의학에서는 특히 두통의 원인으로 동맥의 수축을 강조하는데, 동맥이 수축되는 것은 앞의 “근육과 신경, 혈관은 함께 간다”에서 살펴보았듯이 근육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 근육이 굳으면 혈관이 눌려 혈관이 수축되는 것이다. 이때 혈액이 잘 순환되지 않게 된다.

실제로 두통 증세가 있는 사람의 목 근육을 풀어 주어 보면 증명이 된다. 목 근육이 풀리면 머리가 아파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 대개는 금세 확 펴진다. 지긋지긋한 머리의 통증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4. 눈, 코, 귀, 입, 얼굴의 병


두통은 목 근육이 굳어 머리뼈를 둘러싼 두피나 얼굴의 근육이 굳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치통은 잇몸이 떠 있어 풍치(風齒)가 발생하거나 이가 상해 충치(蟲齒)가 있는 상태에서 곪아서 생기는 것이며, 생리통은 장기가 하수돼 자궁이 눌리면서 굳어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두통은 목 근육이 풀려야 하고, 치통은 떠 있는 잇몸이 제자리를 잡거나 충치 먹은 이를 때워 주어야 하며, 생리통은 하수된 장기가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는 것이다.

몸살림운동에서 찾아낸,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가장 궁극적인 원인은 몸이 굽고 관절이 틀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인은 몸이 굽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눈, 코, 귀, 입, 얼굴의 병은 그 근원이 대부분 목에 있다. 물론 목의 문제는 목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골반부터 목까지 전체적인 구조의 문제이다. 그러나 눈, 코, 귀, 입, 얼굴에 이상이 생겼을 때에는 당장 발생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때 목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이명(耳鳴=귀울림)을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명은 몸 밖에서 실제로 소리가 나지 않는데도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느끼는 질환을 말한다. 낮에는 이명 현상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밤에 아무 소리도 발생하지 않을 때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 기차가 칙칙폭폭 하면서 달리는 소리, 쏴 하는 소리 등 소리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귀에 이상이 있나 진단을 받아 보아야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치료를 해도 거의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목 근육이 풀리면 이명은 쉽게 사라진다. 귀에서 두뇌로 연결되는 신경은 목을 통해서 두뇌로 가는데, 목 근육이 굳어 있으면 이 신경이 눌리게 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명현상이 나타난다고 본다. 따라서 목의 근육을 풀어주면 이명 현상도 사라진다.

망막색소변성증(網膜色素變性症. 또는 색소성망막염. 줄여서 망막변성이라고도 함)이라고 불리는 눈의 병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이 질환은 망막의 색소가 변성을 일으키면서 시력이 떨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실명(失明)까지 초래하는 무서운 병이다. 현대의학에서는 이 병의 원인을 당뇨성과 선천성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는데, 근래 서구에서는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실명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몸살림운동에서는 이 병의 원인도 목 근육이 굳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이와 관련해서 사례가 하나 있다. 한 남자가 당뇨에다 당뇨성 망막변성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남자는 실제로 시력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연히 몸살림운동을 알게 됐는데, 몸살림운동에서 허리를 펴면 당뇨가 사라진다는 얘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고 한다. 당뇨가 사라지면 당연히 당뇨로 인해 발생하는 당뇨성 망막변성도 사라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운동법을 배워 집에서 혼자 이 운동을 시작한 지 3개월 후에 찾아왔는데, 이때에는 당의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눈도 밝아졌다고 했다.

또 눈이 침침하거나 나빠지는 것은 모두 목 근육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 눈이 침침할 때 목 근육이 풀리면 눈이 맑고 시원해진다. 뿐만 아니라 안구(眼球)의 압력이 높아져 잘 볼 수 없게 되는 녹내장(綠內障: 이 병으로 시력을 잃었을 때 눈동자의 색이 푸르게 보여서 녹내장이라고 함)이나 수정체(水晶體)가 회백색으로 흐려져서 시력이 떨어지는 백내장(白內障: 투명해야 할 수정체가 회백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백내장이라고 함) 역시 목 근육이 풀리면 저절로 사라진다.

눈의 문제는 결국 목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메커니즘은 귀의 이명을 설명할 때 얘기했던 것과 동일하다. 눈에서 중추신경계로 연결되는 신경이 눌려서 눈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음식 맛을 모르게 된다고 하는데, 이 역시 목 근육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노인이 되어서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앞으로 굽는다. 몸이 굽으면 자연히 목 근육도 굳게 되고, 이것 때문에 음식 맛을 모르게 된다. 음식 맛을 느끼는 신경이 눌려서 잘 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사례를 보면 70대 중반의 한 할머니의 경우 몸이 펴지면서 전에는 점점 더 느끼지 못하게 돼 가던 음식 맛을 느끼게 되었다. 짠 맛을 잘 느끼지 못해 짜거나 싱겁게 간을 했는데, 이제는 간을 잘 맞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맵거나 신 음식을 잘 먹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런 음식도 잘 먹는다고 한다.


5. 턱

턱의 이상 역시 목 근육과 관련이 있다. 목의 주요 근육 중 하나인 목빗근(빗장뼈와 흉추 1번에서 시작해 귀 윗부분까지 연결되는 근육)이 굳으면서 주변 근육, 특히 씹을근(=교근[咬筋]. 턱 위에 있으면서 아래턱을 앞쪽으로 당기는 작용을 하는 근육)까지 굳으면 턱에 이상이 생긴다. 아랫니와 윗니가 제대로 맞물리지 앉는 부정교합(不正咬合)은 이것 때문에 발생한다. 음식물을 씹을 때 턱이 아픈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증세가 있을 때 목빗근을 풀어 주면 씹을근까지 풀리면서 씹는 게 아주 편해진다(구체적인 방법은 필요운동 중 “턱” 참조). 관자놀이(귀와 눈 사이에 있는 곳. 맥박이 뛸 때 관자가 움직인다는 데서 나온 말)보다 밑의 지점을 눌러 보면 씹을 근이 만져지는데, 목빗근이 풀리면 이 근육도 자동적으로 풀려 부드러워진다. 이는 목빗근을 푸는 운동을 하기 전과 하고 난 이후를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면 근육이 굳고 안면 신경이 마비되면서 입과 눈이 한쪽으로 틀어지는 구안와사(口眼煱斜)라는 것이 있다. 와사풍(煱斜風)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병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얼굴 근육이 어떤 이유로 비정상적인 형태로 굳어 버린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가장 잘 발생하는 경우는 갑자기 얼굴에 찬 것이 닿을 때다. 찬물로 세수를 하다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운 유리창에 얼굴을 댔다가, 심지어는 얼굴에 찬바람을 맞고도 안면 마비 증세가 올 수 있다. 예전에는 주로 노인들한테 나타났는데, 요즘에는 30대에도 이 증세가 나타난다.

이 병 역시 목 근육과 관련이 있다. 목 근육이 굳지 않으면 구안와사는 오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얼굴 근육이 굳는 데 있지만, 그 근원을 따져 보면 결국은 목 근육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우선 이 증세는 얼굴 근육이 심하게 굳어 있을 때 나타난다. 심하게 굳어 있는 얼굴 근육에 갑자기 찬 것이 닿으면 얼굴 근육이 급격하게 경색되면서 신경이 심하게 눌리게 된다. 이 상태가 계속되는 되는 것이 와사풍이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지만, 목 근육이 굳지 않으면 얼굴 근육이 굳지 않는다. 또 목 근육이 풀리면 얼굴 근육도 풀리게 된다.

그래서 해결책은 목 근육과 얼굴 근육을 풀어 주는 것이다. 먼저 목 근육을 풀어 주고 다음에 얼굴 근육을 풀어 준다. 그러면 심하게 일그러져 있던 입은 상당한 정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런 다음에 작아진 눈 옆에 있는 누르면 아픈 근육을 자꾸 손가락으로 눌러서 풀어 주면 짝짝이 눈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오나르도의 침묵의 시: <최후의 만찬>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 1495-97, 벽기둥에 유채와 템페라, 460-880cm.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 식당.

왼쪽에서부터 바르톨로메오, 야고보(작은), 안드레, 가롯 유다, 베드로, 요한, 예수, 도마, 야고보(큰), 빌립보, 미태, 유다, 시몬


326-5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크라체; 왼쪽의 작은 건물 식당 안에 <최후의 만찬>이 있습니다.


326-3

수도원 내부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는 실제 식당 공간을 화면 공간으로 삼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계속 밀라노에 머물렀습니다. 피렌체와 달리 1495년의 밀라노는 일시적이지만 장치적으로 평화스러웠고, 이때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에게 <최후의 만찬>과 <예수의 수난>을 주문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현재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 식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루도비코는 이 도미니크회 수도원을 좋아하여 종종 와서 명상에 잠기곤 했으며 자신과 아내 비트리스, 가족이 이곳에 묻히기를 소원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1465년경 대성당의 건축가 구이니포르테 솔라리로 하여금 성가대석과 앱스를 부수게 하고, 브라만테에게 건물을 확장 완공하도록 했습니다. 열여섯 개의 아치형 천장으로 돔을 떠받치는 거대한 입방체와도 같은 설교단은 1495년 당시 공사중이었고 2년 후에나 완공되었습니다. 루도비코는 수도원 외관을 닦아내어 윤이 나게 했습니다. 롬바르드 화가 몬토파르노에게 식당 북쪽 벽에 <십자가 처형>을 의뢰했고, 레오나르도에게는 반대쪽 벽에 8.8m 길이의 <최후의 만찬>을 의뢰했습니다. 반델로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로 하고 매년 2천 두카트를 받았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와 함께 이탈리 미술 전반에서 가장 인기 있고,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자신이 체포될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장면입니다. 수도원 식당에 이런 주제의 그림을 장식하는 것은 일반적인 전통이었습니다. 식당은 일시적인 세계와 영원한 세계가 만나는 곳으로 예수가 “내가 너희와 늘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곳이며, 수도승들은 식사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괴테는 레오나르도가 “접는 방식대로 접혀진 테이블 커버, 양쪽 가장자리에 수를 놓은 모양, 빛의 줄무늬”도 그대로 재현했으며, 수도승들이 사용하는 접시와 유리잔까지도 똑같이 재현했다고 적었습니다.


321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위한 스케치: 건축과 기하에 관한 스케치>, 26.6-21.4cm.


레오나르도는 실제 식당공간을 화면 공간으로 삼았으며, 배경을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구성 중 하나인 현혹적인 건축물로 구성하여 관람자가 깊은 인상을 받도록 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을 위해 드로잉한 종이에는 팔각형 속에 원이 들어 있습니다. 원은 식당 바닥과 지붕의 중앙에 위치하여 이 작품의 비밀스러운 기하를 결정짓는 역할을 합니다. 즉 원의 중심은 그림의 소실점으로 예수의 얼굴을 그 위에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예수를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학적이며 완벽한 기하학적 대칭의 구성을 선택했습니다. 중심인물 예수를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을 보조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그리스도가 뒷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앉은 것조차 우연이 아니라고 적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두 개의 수평선이라는 틀을 깨뜨린다. 자연스러운 식탁의 선은 유지하더라도 위쪽은 전체 그룹의 윤곽을 위해 트여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효과를 계산하는 아주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방의 전체적 조망, 벽의 모습과 장식들이 인물의 효과에 도움을 줘야 하며, 모든 것은 신체를 더욱 크고 입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배치되어야 한다는 방식이다. 그래서 방은 깊어지고, 벽은 여러 개의 벽걸이 장식으로 분할된다. 이런 중첩은 입체의 환각을 돕고, 수직선이 되풀이되면서 저 안쪽에서 발깥 쪽으로 퍼져 나오는 방향에 액센트를 준다. 그것들은 평면과 선들이기에 인물상에 진지하게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볼 수 있다.

뵐플린은 레오나르도가 피할 수 없는 식탁의 선 하나만을 유지한 점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방식으로 간주했으며, 예수의 몸짓과 모습에 고요하고도 위대한 요소가 있다면서 이는 15세기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특징으로 꼽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침묵의 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를 모델들의 몸짓, 태도, 얼굴에 나타난 성격의 특징으로 하여 침묵 속에 전하려고 했으며 그의 의도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는 모델들의 행동을 연출에 의한 것처럼 표현하여 각각의 개성이 나타나도록 구성했습니다.


322

레어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위한 스케치 구성>, 26.1-39.4cm.


이제 막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손가락을 쭉 편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지칭된 사람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워서 귀가 오른쪽 어깨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다. 손가락을 펴서 옆 사람 얼굴 아래에 댄 사람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327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의 부분, 예수와 도마


324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의 부분.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 요한과 가롯 유다 사이에 베드로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요한은 그리스도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레오나르도는 모델들의 귀와 입을 중시하며, 손을 화자의 반응과 언어에 대한 설명으로 표현했으므로 우리는 그림에서 놀라움, 회의심, 두려움, 성냄, 부인, 혐의 등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면서 “대체 누가 선생님을 팔아넘길 수 있겠느냐”며 놀라워하고, 빌립보는 일어서서 발생할 일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며, 바르톨로메오도 벌떡 일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베드로에게 누구냐고 묻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으며 놀라거나 더러는 화를 내며 자신들의 무죄와 신실함을 주장합니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차분한 모습이며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예수와 유사한 의상을 한 제자 요한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그리스도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왼쪽 끝의 바르톨로메오는 이제 막 방에 들어온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의 옆에 얼굴이 검은 유다가 앉아 있고, 그의 손이 그릇에 거의 닿을 듯합니다.


327-1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최후의 만찬>, 1448년경, 프레스코, 470-975cm. 산타 아폴로니아


328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 1480, 프레스코, 400-800cm. 산 마르코 수도원


시뇨렐리,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기를란다요 등 콰트로첸토(15세기) 화가들은 부패한 인간상으로 대표되는 유다를 묘사할 때 테이블 반대편, 관람자에게 등을 돌린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런 식의 규칙을 무시하고 모든 제자를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나누어 나란히 함께 앉게 했습니다.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그린 것은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후대 화가들은 더 이상 유다를 예수 반대편에 따로 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331

렘브란트의 <최후의 만찬>, 1635년경, 레오나르도의 양식으로


과거 화가들이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통일성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대화합니다. 그래서 그림이 유다의 배신을 시사하는 장면인지 단순히 만찬의 장면인지 불분명합니다. 예수가 말씀을 마친 후의 장면을 모티프로 삼은 건 15세기의 관점에서 오나전히 벗어난 일로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이런 모티프를 사용한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을 1495년경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매우 게을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작업실에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 가서 직접 그리는 일이라서 사람들이 볼 대에는 그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 완성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요하게 한 것 같습니다. 반델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아침 일찍 식당으로 가서는 바닥에서 2m 높이에 있는 발판에 올라가 그리기 시작하여 어떤 때에는 먹고 마시는 것을 잊어버리고 해가 질 때까지 붓질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나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며칠 동안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도 레오나르도는 코르테 베키아에서 흙으로 말을 빚는 일에 전념하다가 정오에 무슨 생각이 났는지 수도원으로 달려가서는 발판에 올라가 붓질을 한두 번 하고 가버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가 이 시기에 무엇 때문에 바빴는지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일을 동시에 진행했고, 그런 이유 때문인지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는 데 2-3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루도비코의 서기이자 시인인 발다사레 타코네에 의하면 당시 레오나르도는 ‘다나에’를 위한 무대장치를 했고, 루도비코의 애인 세실리아에 의해 1498년에 완공된 궁전과 스포르제스코 성의 외관을 장ㅅ기했습니다. 또한 이름을 알 수 없는 후원자의 집을 디자인했으며, 공작부인 비트리스의 별장과 성내에 있는 아파트 그리고 방 몇 개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다양한 건물들의 주변과 내부를 드로잉했는데, 이는 그가 밀라노의 공공건축가로 활약한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합니다. 이때 그는 5년째 여섯 명의 조수를 데리고 있었고, 이들의 생활을 책임졌기 때문에 벌이가 신통치 않아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찮은 일로 여겼지만 피아센자 대성당의 청동문을 제작했으며, 브레스치아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제단화를 그렸고, 팔기 위한 디자인들을 제작했습니다.


323

레오나르도의 <수염 난 늙은 남자의 반신상>, 14.5-11.3 cm.

이 늙은 남자는 <최후의 만찬>에서의 성 베드로의 모습 같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 제자들의 얼굴을 밀라노 거리의 행인들을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의 얼굴은 모르타로의 추기경 측근인 공작 조반니를 모델로 하고 손은 파르마의 알렉산드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바사리와 지랄디에 의하면 1497년경 레오나르도는 열한 명의 제자와 유다의 몸을 그렸지만, 유다의 머리만 남겨놓은 채 일 년이 넘도록 완성시키지 않자 수도원측이 루도비코에게 불평했습니다.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도에게 속히 완성할 것을 종용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이유로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여전히 레오나르도가 완성하지 않자 루도비코는 다시 그를 불러 불편한 심기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레오나르도는 수도원 신부들은 예술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을 뿐 아니라 화가는 노동자처럼 작업하지 않는다면서 변명했습니다.

전하, 유다의 머리만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소문난 악한이기에 그의 사악함에 걸맞은 얼굴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찾느라 거의 일 년 동안 전하도 아시는 것처럼 흉포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보르게토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악한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얼굴을 찾기만 하면 그날로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면 전하께 저를 모함한 자가 바로 유다에 합당할 터인즉 그 자의 얼굴을 대신 그려놓겠습니다.

지랄디는 루도비코가 fp오나르도의 응답에 만족해하면서 레오나르도의 편에 섰다고 했습니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발견했고, 작품을 완성했지만 <최후의 만찬>은 혹평을 받았습니다. 바사리 시대의 사람들은 “현혹스러운 착색”에 지나지 않는 작품이라고 냉대했으며, 1624년 카르투지오 수도회(1086년 성 브루노가 프랑스 샤르트리우스에 개설한) 수사 사네스는 “볼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시기 수도원의 벽을 자르고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으므로 다리와 테이블 커버 일부가 잘렷습니다. 그리고 괴테에 의하면 1500년과 1800년 두 차례의 홍수로 그림이 심히 파손되었습니다. 1796년에는 나폴레옹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인들은 사용하지 않던 식당을 마초를 저장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공화국 기병들은 벽돌을 제자들의 얼굴에 던지면서 재미있어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말에는 폭탄이 식당 지붕에 떨어졌지만, 다행히도 레오나르도의 작품은 모래주머니들로 가려져 있었으므로 파손되지 않았습니다.

18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 작품 전체를 복원시키려는 열정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복원자들 특히 벨로티의 경우 오히려 작품을 망쳐놓았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복원작업이 이뤄졌으며, 1820년과 1908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습니다. 1946년과 1953년 사이에 본래의 상태로 복원하려는 시도가 한 차례 있었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붉은색 겉옷이 최종적으로 복원되었으며, 그 후에는 좀 더 과학적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루도비코는 1497년 6월 서둘러 이 작품과 그 밖의 작품을 보러왔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바사리와 지랄디를 포함해서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그해 초 세상을 떠난 것으로 미뤄 자신과 아내의 무덤을 수도원에 마련하기 위해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루도비코는 생전에는 아내 비트리스에게 질색했지만, 그녀가 사망하자 그녀를 숭배할 정도로 애정을 나타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포학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다


孔子(공자)가 수레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태산 기슭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습니다.

공자 일행이 발길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길가의 숲속에 무덤 셋이 보이고, 여인이 그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자로에게 여인에게 가서 그 연류를 알아보라고 말했습니다.

자로가 여인에게 다가가 어인 일로 슬피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곳은 매우 무서운 곳입니다. 수년 전 시아버님께서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는데, 작년엔 남편이 같은 변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자식까지 호랑이에게 잃고 말았습니다.

자로는 “이렇게 무서운 곳을 왜 떠나지 않는 것입니까?” 하고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여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이곳에 살면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당하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제물을 빼앗기는 일이 없기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苛政猛虎(가정맹호), 포학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다는 걸 명심하라.


苛政猛虎(가정맹호)란 말은 魯(노)나라의 大夫(대부) 季孫氏(계손씨)가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하고 백성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데서 빗대어 한 말입니다. 魯(노)나라는 공자의 고국입니다. 정치인이 마음속에 새겨두어야 할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칼 세이건, 은하와 은하 사이에서 검출된 강력한 엑스선 복사




전파 망원경은 아주 멀리 있는 천체의 미약한 신호도 잡아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억 광년 이상 떨어져 있는 퀘이사의 신호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퀘이사라고 해도 5억 광년은 떨어져 있고, 100억 광년, 120억 광년, 아니 이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퀘이사들도 많습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을 볼수록 시간적으로는 먼 과거에 일어난 상황을 보는 것입니다. 120억 광년 떨어져 있는 퀘이사를 관찰하는 건 그 퀘이사의 120억 년 전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멀리 볼수록 더 오래된 과거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우주의 지평선 근처를 본다면 우리는 대폭발 시대의 우주와 같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형배열Very Large Array(VLA)은 27대의 전파 망원경으로 구성된 전파 간섭계로서 뉴멕시코 주의 오지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개별 망원경이 수신하는 전파 신호의 위상을 모두 고려해서 망원경의 배열을 미리 결정하고 관측을 시작합니다. 구성 망원경들을 전선으로 연결하여 각 망원경으로 들어오는 신호의 세기와 위상을 합성함으로써 망원경 27대가 하나의 망원경같이 작동하도록 고안되었습니다. 가장 먼 두 안테나의 거리가 합성 망원경의 지름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대형배열은 지름이 수십km에 이르는 거대한 전파 망원경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따라서 대형배열은 가시광선 대역을 분석하는 광학 망원경처럼 전파 대역의 자잘한 스펙트럼을 상세하게 분석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전파 망원경입니다.

어떤 전파 망원경은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다른 전파 망원경과 연결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지구의 지름을 온통 기선baseline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까 지구만 한 크기의 전파 망원경이 탄생하는 셈입니다. 앞으로는 전파 망원경들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될 터인데, 그때가 오면 우리는 그 크기가 내행성계만 한 전파 망원경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전파 망원경 배열이면 퀘이사의 내부 구조와 정체도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추정되는 퀘이사들의 거리를 정확히 알아낸다면, 우리는 우주의 팽창 속도가 수십억 년 전에는 현재보다 빨랐다가 점점 느려졌는지, 아니면 우주가 앞으로 팽창을 멈추고 수축할 것인지 등을 판가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전파 망원경들은 아주 높은 수신 감도를 자랑합니다, 전파 망원경이 검출하는 먼 퀘이사의 전파 신호는 1000조분의 1와트, 즉 10-15와트입니다. 오늘날 전파천문학자들은 우주 배경 복사를 전 하늘에 걸쳐 측정하여 그 세기의 분포도를 작성한다거나 밝기에 따른 퀘이사의 개수를 헤아려 우주 진화의 정체를 밝히려고 합니다. 그들은 외계 생물이 내놓을지 모르는 신호를 열심히 찾기도 합니다.

고온의 물질, 특히 별의 대기층에 있는 물질은 사람의 눈이 식별할 수 있는 빛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주로 은하의 외곽부에 있는 저온의 성간 기체와 성간 티끌은 가시광선을 방출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눈에 쉽게 띄지 않습니다. 대신 전파 대역에서 전자기파를 방출합니다. 그러므로 우주론적 신비를 캐내려면 통상의 광학 망원경이 아니라 대륙 간 전파 망원경 배열과 같은 초대형의 연구 시설이 필요합니다. 엑스선 대역도 외계 은하와 우주론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공위성에 실린 엑스선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한 결과 은하와 은하 사이에서 강력한 엑스선 복사가 검출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은하 간 물질로 존재하는 고온의 수소가스가 이 엑스선 복사의 원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수소라면 그때까지 관측되지 않은 막대한 양의 그 수소는 코스모스의 팽창을 막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그것을 우리가 진동 우부에 갇혀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좀 더 최근에 수행된 고분해 엑스선 관측을 바탕으로 도쿄 태생의 리카르도 자코니Ricardo Giacconi(1926-)는 은하 간 공간에서 검출된 엑스선 복사가 많은 點光源(점광원)들이 중첩되어 나타난 결과라고 규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점광원들은 아주 먼 거리에 있는 퀘이사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태껏 숨어있던 질량의 일부를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우주의 새로운 구성원이 알려질 때마다 우주 평균 밀도의 값이 수정되어 왔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볼로냐로 간 미켈란젤로: 성 도미니크의 무덤 장식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310

게라르도 디 조반니의 <열일곱 살의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 1489, 양피지에 쳄페라, 33-22.5cm.


로렌초가 타계한 후 메디치 가를 이끈 인물은 피에로 데 메디치였습니다. 그는 오만하고 인내심이 없는 위인으로 가문의 힘을 남용한 나머지 결국 프랑스의 침략을 초래했습니다. 프랑스 왕 샤를 8세(1483-98년 재위)는 1494년 9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해 나폴리를 프랑스령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피에로는 아버지 로렌초가 나폴리의 침략으로부터 피렌체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르자나에서 샤를과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피렌체의 가장 중요한 재산인 피사의 렉혼, 그리고 서쪽에 있는 피렌체의 모든 요새를 전쟁 기간 중 프랑스에 내주어 나폴리 원정이 길을 터주었으며, 20만 플로린(약 60억 원)을 내놓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피렌체의 시뇨리와 시위원회는 경악했고, 피에로를 못마땅하게 여겨온 메디치 가 사람들은 그를 내좇기로 결정했습니다.

피에로가 사르자나에서 돌아왔을 때 베키오 궁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사람들이 그에게 야유하며 돌을 던졌습니다. 시민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메디치 궁전과 정원, 그리고 피에로의 재정을 담당한 사람들의 집을 약탈했습니다. 그들은 메디치 가문이 4대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들을 훔치고 흐트러뜨렸으며, 남은 것들은 정부에 의해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피에로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는 시뇨리가 피에로와 추기경 조반니를 생포해올 경우 5천 플로린, 시신을 갖고 온다면 2천 플로린을 주겠다고 공약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피에로는 가족과 동생들을 데리고 도시를 빠져나갔습니다. 시뇨리는 1494년 12월 2일 시민들을 모으고 그들로부터 향후 1년 동안 일할 20명의 새로운 시의원과 행정장관들을 선입하게 했습니다. 선거권을 가진 3천 명의 남자들은 대의원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이후 대평의회가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공화국은 1495년 6월 10일부터 집무에 들어갔습니다. 이는 피렌체가 처음 민주주의를 시도한 것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대평의회를 소집하기 위해 시모네 폴라이우올로가 5백인의 홀Hall of the Five Hundred를 개축했으며, 8년 후 바로 이 홀에서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양쪽 벽에 프레스코를 그리게 됩니다.

피에로가 도피하기 한 달 전 미켈란젤로는 베네치아로 먼저 도피했습니다. 1494년 10월의 편지에서 그의 도피행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베네치아에서 가까운 파도바로 가서 조토와 도나텔로가 남긴 중요한 작품들을 보았고, 볼로냐 대성당 외관을 장식한 야코포 델라 퀘르시아의 릴리프를 보았습니다. 이 시기 그가 그린 그림이 현존하지 않지만, 이들 세 사람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의 소개로 베네치아에 있는 볼로냐의 귀족 조반 프란체스코 알도브란디의 집에 기거할 수 있게 되어 그 집에서 1년 동안 지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지성을 아낀 알도브란디는 매일 저녁 그가 낭독하는 위대한 토스카나 작가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의 작품 구절들을 들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세 작가에 관해 잘 알고 있었고, 특히 단테의 위대한 신학적 서시사 『신곡 The Divine Comedy』에 정통했습니다. 단테의 문장은 매우 지성적이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미켈란젤로가 단테를 이해했다는 것이 익히 알려졌습니다.


314

산 도미니크 성당의 도미니크의 유골함, 1267-1539, 대리석


알도브란디는 미켈란젤로에게 볼로냐의 산 도미니크 성당 안에 있는 도미니크 무덤의 미완성 조각들을 채우는 작업을 요청했습니다. 성 도미니크 무덤은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베네치아의 명소였으며, 예술적 기념비가 세워진 곳으로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열아홉 살의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들이 기존의 작품들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신중을 기해 1년이 조금 넘게 작업했으며, 약 60cm 정도의 조각 세 점을 제작했습니다. 도미니크회의 창시자 도미니크의 뼈가 보관된 이 유골함은 14세기 니콜로 피사노에 의해 장식되기 시작했지만, 미완성으로 남아있었습니다. 훗날 니콜로 델 라르카(유골함의 니콜로)라 불린 니콜로 다풀리아라는 유명한 조각가가 장식했으나 오나성하지 못하고 1492년에 사망했습니다. 니콜로는 1470-73년경에 왼쪽 무릎 위에 촛대를 받치고 있는 천사를 제작했는데, 미켈란젤로는 니콜로가 제작한 것과 한 쌍으로 어울리는 형상으로 제작하도록 요청받아 20여 년 후 그보다 4.5cm 큰 <촛대를 든 천사>를 제작했습니다.


315

미켈란젤로의 <촛대를 든 천사>, 1494-95, 대리석, 높이 51.5cm. 산 도미니크 성당의 도미니크의 유골함.

무거운 촛대를 오른쪽 무릎 위에 받치고 무릎을 꿇은 천사는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천사의 왼쪽 어깨로부터 늘어진 옷자락을 허리 아래 벨트로 잡아맨 섬세한 묘사는 감탄할 만합니다.


<촛대를 든 천사>를 보면 박력 있는 근육을 한 천사의 몸체에 비해 날개는 작지만 젊은 조각가의 야심과 탁월한 기술이 한껏 돋보입니다. 이 로마 풍의 천사는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작품들 중 가장 정감 있는 것으로, 선입자의 작품에 일치되도록 우미한 중세적 양식을 좇아 제작한 것입니다.


318

에르콜레 데 로비르테의 <성 페트로니우스>, 1475, 패널에 유채, 27-13cm.


316

미켈란젤로의 <성 페트로니우스>, 1494-95, 대리석, 높이 63.5cm. 산 도미니크 성당.

볼로냐의 수호성인 성 페트로니우스는 도시를 단순화한 모델을 들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입체적 모델은 단순한 형태이지만, 도시 볼로냐를 상징하는 건물들과 성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높은 타워들은 단테의 『신곡』 제1편 「지옥편」에 나오는 유명한 것들입니다.


317

미켈란젤로의 <성 프로콜로스>, 1494-95, 대리석, 높이 55.9cm. 산 도미니크 성당.

성 프로콜로스는 오른손을 불끈 쥔 모습으로 매우 호전적으로 보입니다. 미켈란젤로는 프란체스코 델 코사의 제단화 <성 플로리안>의 모습과 부드러운 에너지, 그리고 옷의 우미한 주름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319

프란체스코 델 코사의 제단화 <성 플로리안>, 1473, 패널에 유채, 79-55cm.


성 페트로니우스는 볼로냐의 수호성인으로 그의 손에는 도시를 단순화한 모델이 들려 있습니다. 성 페트로니우스는 에르콜레 데 로비르테 외 많은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시에나의 조각가 야코포 델라 퀘르시아가 앞서 제작한 성 페트로니우스 조각은 볼로냐 시민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퀘르시아의 작품을 참조하여 <성 페트로니우스>를 제작했습니다. <촛대를 든 천사>와 <성 페트로니우스>에서 조토와 마사초의 영향이 보입니다. 콘디비는 유골함을 장식한 작품들로 <촛대를 든 천사>와 <성 페트로니우스>만 언급했으므로 <성 프로콜로스>가 과연 미켈란젤로의 작품인지 논란거리가 되게 했습니다. <성 프로콜로스>는 1572년에 끌어내려져 형편없는 방법으로 보수되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니콜로 델 라르카가 제작하기 시작했던 것을 미켈란젤로가 오나성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034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사보나롤라의 초상>, 1497년경, 패널에 유채, 53-47cm.


당시 미켈란젤로는 볼로냐를 떠나 피렌체로 가고 싶었지만, 당시 피렌체에는 불같은 성격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1452-98)는 부르주아들의 부패한 생활을 힐난하는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피렌체 대성당에서 설교하며 피렌체인들의 방탕한 생활을 꾸짖고 피렌체를 새로운 예루살렘을 위한 근거지로 만들어 그리스도가 유일한 지도자인 신정주의 체제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보나롤라에 의해 피렌체인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자제하게 되었고, 심지어 책과 미술품들을 불에 태우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영향력 하에 있는 한 피렌체는 예술가들이 살기 어려웠고, 특히 메디치 가와 관련 있는 예술가들에게는 그러했습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페라라 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이탈리아인들의 맹목적인 사악함을 싫어했으며, 예절, 예술, 시, 종교마저도 타락시키는 인본주의적 이교 사상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부패의 원인이 성직자들의 부패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볼로냐에 있는 도미니크회 수도회에 가입했고, 성서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1482년 피렌체로 파견되어 산 마르코 수도원의 강사 직을 맡은 뒤 높은 학식과 금욕생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487년 피렌체를 떠나 볼로냐의 일반 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임기가 끝난 뒤에는 여러 도시들을 두루 다니며 설교를 통해 정부의 폭정을 과감하게 비판했습니다.

사보나롤라의 권위가 커지자 교황은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제의함으로써 자기 밑에 두려고 했으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이에 1496년 11월 7일 교황은 그의 모든 권위를 잃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1496년 강림절부터 1497년 사순절까지 ‘에스겔’에 대한 연속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사보나롤라에게 불리한 사건들이 벌어졌고, 피렌체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나쁘게 진전되어 그의 힘이 약해졌습니다. 가장 악랄한 정적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그를 혹독하게 고문했으며, 어떤 좌목이라도 뒤집어씌우기 위해 심문기록을 위조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재판이 열린 뒤 그는 세속 군대에 넘겨져 두 동료와 함께 교수형과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화형에 처해진 순간의 기록은 마치 교회 교부들 생애의 한 장면과 같았습니다. 그는 처형대에 오르기 전에 교황의 사면과 全大赦(전대사)를 경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320

프란체스코 그라나치의 <1494년 피렌체에 진입하는 샤를 8세>, 1527년경, 패널에 유채, 75-122cm.


한편 피렌체에 진입한 샤를 8세는 자신의 요구를 약간 완화시켜 피렌체 시민들을 달래면서 나폴리 왕국을 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습니다. 샤를 8세가 이탈리아 전역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피사는 밀라노와 베네치아와의 동맹으로 독립을 강화했습니다. 피렌체 평의회는 피사와의 전쟁에 투자했습니다. 부자들로 하여금 강제로 돈을 빌려주게 하고 대신 정부의 채권을 발행했는데, 1496년 정부의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정부는 로렌초의 방법을 모방하여 가난한 신부들을 위한 혼인지참금을 제공하기 위해 정부에 맡겨진 돈을 빌려오고 이러는 가운데 부정부패가 심화된 데다 그해 11월간의 장마로 흉년이 들어 길에는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신들이 널려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민들은 로렌초 시기의 평화를 우너하게 되었고, 1497년 메디치 가에서 들고 일어나 피에로의 정부를 회복시키고 정부 지도자 다섯 명을 사형시켰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