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로 간 미켈란젤로: 성 도미니크의 무덤 장식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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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라르도 디 조반니의 <열일곱 살의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 1489, 양피지에 쳄페라, 33-22.5cm.
로렌초가 타계한 후 메디치 가를 이끈 인물은 피에로 데 메디치였습니다. 그는 오만하고 인내심이 없는 위인으로 가문의 힘을 남용한 나머지 결국 프랑스의 침략을 초래했습니다. 프랑스 왕 샤를 8세(1483-98년 재위)는 1494년 9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입해 나폴리를 프랑스령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피에로는 아버지 로렌초가 나폴리의 침략으로부터 피렌체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르자나에서 샤를과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피렌체의 가장 중요한 재산인 피사의 렉혼, 그리고 서쪽에 있는 피렌체의 모든 요새를 전쟁 기간 중 프랑스에 내주어 나폴리 원정이 길을 터주었으며, 20만 플로린(약 60억 원)을 내놓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피렌체의 시뇨리와 시위원회는 경악했고, 피에로를 못마땅하게 여겨온 메디치 가 사람들은 그를 내좇기로 결정했습니다.
피에로가 사르자나에서 돌아왔을 때 베키오 궁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사람들이 그에게 야유하며 돌을 던졌습니다. 시민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메디치 궁전과 정원, 그리고 피에로의 재정을 담당한 사람들의 집을 약탈했습니다. 그들은 메디치 가문이 4대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들을 훔치고 흐트러뜨렸으며, 남은 것들은 정부에 의해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피에로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는 시뇨리가 피에로와 추기경 조반니를 생포해올 경우 5천 플로린, 시신을 갖고 온다면 2천 플로린을 주겠다고 공약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피에로는 가족과 동생들을 데리고 도시를 빠져나갔습니다. 시뇨리는 1494년 12월 2일 시민들을 모으고 그들로부터 향후 1년 동안 일할 20명의 새로운 시의원과 행정장관들을 선입하게 했습니다. 선거권을 가진 3천 명의 남자들은 대의원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이후 대평의회가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공화국은 1495년 6월 10일부터 집무에 들어갔습니다. 이는 피렌체가 처음 민주주의를 시도한 것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대평의회를 소집하기 위해 시모네 폴라이우올로가 5백인의 홀Hall of the Five Hundred를 개축했으며, 8년 후 바로 이 홀에서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양쪽 벽에 프레스코를 그리게 됩니다.
피에로가 도피하기 한 달 전 미켈란젤로는 베네치아로 먼저 도피했습니다. 1494년 10월의 편지에서 그의 도피행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베네치아에서 가까운 파도바로 가서 조토와 도나텔로가 남긴 중요한 작품들을 보았고, 볼로냐 대성당 외관을 장식한 야코포 델라 퀘르시아의 릴리프를 보았습니다. 이 시기 그가 그린 그림이 현존하지 않지만, 이들 세 사람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의 소개로 베네치아에 있는 볼로냐의 귀족 조반 프란체스코 알도브란디의 집에 기거할 수 있게 되어 그 집에서 1년 동안 지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지성을 아낀 알도브란디는 매일 저녁 그가 낭독하는 위대한 토스카나 작가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의 작품 구절들을 들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세 작가에 관해 잘 알고 있었고, 특히 단테의 위대한 신학적 서시사 『신곡 The Divine Comedy』에 정통했습니다. 단테의 문장은 매우 지성적이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미켈란젤로가 단테를 이해했다는 것이 익히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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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도미니크 성당의 도미니크의 유골함, 1267-1539, 대리석
알도브란디는 미켈란젤로에게 볼로냐의 산 도미니크 성당 안에 있는 도미니크 무덤의 미완성 조각들을 채우는 작업을 요청했습니다. 성 도미니크 무덤은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베네치아의 명소였으며, 예술적 기념비가 세워진 곳으로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열아홉 살의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들이 기존의 작품들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신중을 기해 1년이 조금 넘게 작업했으며, 약 60cm 정도의 조각 세 점을 제작했습니다. 도미니크회의 창시자 도미니크의 뼈가 보관된 이 유골함은 14세기 니콜로 피사노에 의해 장식되기 시작했지만, 미완성으로 남아있었습니다. 훗날 니콜로 델 라르카(유골함의 니콜로)라 불린 니콜로 다풀리아라는 유명한 조각가가 장식했으나 오나성하지 못하고 1492년에 사망했습니다. 니콜로는 1470-73년경에 왼쪽 무릎 위에 촛대를 받치고 있는 천사를 제작했는데, 미켈란젤로는 니콜로가 제작한 것과 한 쌍으로 어울리는 형상으로 제작하도록 요청받아 20여 년 후 그보다 4.5cm 큰 <촛대를 든 천사>를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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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촛대를 든 천사>, 1494-95, 대리석, 높이 51.5cm. 산 도미니크 성당의 도미니크의 유골함.
무거운 촛대를 오른쪽 무릎 위에 받치고 무릎을 꿇은 천사는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천사의 왼쪽 어깨로부터 늘어진 옷자락을 허리 아래 벨트로 잡아맨 섬세한 묘사는 감탄할 만합니다.
<촛대를 든 천사>를 보면 박력 있는 근육을 한 천사의 몸체에 비해 날개는 작지만 젊은 조각가의 야심과 탁월한 기술이 한껏 돋보입니다. 이 로마 풍의 천사는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작품들 중 가장 정감 있는 것으로, 선입자의 작품에 일치되도록 우미한 중세적 양식을 좇아 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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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콜레 데 로비르테의 <성 페트로니우스>, 1475, 패널에 유채, 27-1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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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페트로니우스>, 1494-95, 대리석, 높이 63.5cm. 산 도미니크 성당.
볼로냐의 수호성인 성 페트로니우스는 도시를 단순화한 모델을 들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입체적 모델은 단순한 형태이지만, 도시 볼로냐를 상징하는 건물들과 성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높은 타워들은 단테의 『신곡』 제1편 「지옥편」에 나오는 유명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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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프로콜로스>, 1494-95, 대리석, 높이 55.9cm. 산 도미니크 성당.
성 프로콜로스는 오른손을 불끈 쥔 모습으로 매우 호전적으로 보입니다. 미켈란젤로는 프란체스코 델 코사의 제단화 <성 플로리안>의 모습과 부드러운 에너지, 그리고 옷의 우미한 주름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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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델 코사의 제단화 <성 플로리안>, 1473, 패널에 유채, 79-55cm.
성 페트로니우스는 볼로냐의 수호성인으로 그의 손에는 도시를 단순화한 모델이 들려 있습니다. 성 페트로니우스는 에르콜레 데 로비르테 외 많은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시에나의 조각가 야코포 델라 퀘르시아가 앞서 제작한 성 페트로니우스 조각은 볼로냐 시민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퀘르시아의 작품을 참조하여 <성 페트로니우스>를 제작했습니다. <촛대를 든 천사>와 <성 페트로니우스>에서 조토와 마사초의 영향이 보입니다. 콘디비는 유골함을 장식한 작품들로 <촛대를 든 천사>와 <성 페트로니우스>만 언급했으므로 <성 프로콜로스>가 과연 미켈란젤로의 작품인지 논란거리가 되게 했습니다. <성 프로콜로스>는 1572년에 끌어내려져 형편없는 방법으로 보수되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니콜로 델 라르카가 제작하기 시작했던 것을 미켈란젤로가 오나성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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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사보나롤라의 초상>, 1497년경, 패널에 유채, 53-47cm.
당시 미켈란젤로는 볼로냐를 떠나 피렌체로 가고 싶었지만, 당시 피렌체에는 불같은 성격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1452-98)는 부르주아들의 부패한 생활을 힐난하는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피렌체 대성당에서 설교하며 피렌체인들의 방탕한 생활을 꾸짖고 피렌체를 새로운 예루살렘을 위한 근거지로 만들어 그리스도가 유일한 지도자인 신정주의 체제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보나롤라에 의해 피렌체인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자제하게 되었고, 심지어 책과 미술품들을 불에 태우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영향력 하에 있는 한 피렌체는 예술가들이 살기 어려웠고, 특히 메디치 가와 관련 있는 예술가들에게는 그러했습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페라라 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이탈리아인들의 맹목적인 사악함을 싫어했으며, 예절, 예술, 시, 종교마저도 타락시키는 인본주의적 이교 사상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부패의 원인이 성직자들의 부패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볼로냐에 있는 도미니크회 수도회에 가입했고, 성서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1482년 피렌체로 파견되어 산 마르코 수도원의 강사 직을 맡은 뒤 높은 학식과 금욕생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487년 피렌체를 떠나 볼로냐의 일반 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임기가 끝난 뒤에는 여러 도시들을 두루 다니며 설교를 통해 정부의 폭정을 과감하게 비판했습니다.
사보나롤라의 권위가 커지자 교황은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제의함으로써 자기 밑에 두려고 했으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이에 1496년 11월 7일 교황은 그의 모든 권위를 잃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1496년 강림절부터 1497년 사순절까지 ‘에스겔’에 대한 연속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사보나롤라에게 불리한 사건들이 벌어졌고, 피렌체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나쁘게 진전되어 그의 힘이 약해졌습니다. 가장 악랄한 정적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그를 혹독하게 고문했으며, 어떤 좌목이라도 뒤집어씌우기 위해 심문기록을 위조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재판이 열린 뒤 그는 세속 군대에 넘겨져 두 동료와 함께 교수형과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화형에 처해진 순간의 기록은 마치 교회 교부들 생애의 한 장면과 같았습니다. 그는 처형대에 오르기 전에 교황의 사면과 全大赦(전대사)를 경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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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그라나치의 <1494년 피렌체에 진입하는 샤를 8세>, 1527년경, 패널에 유채, 75-122cm.
한편 피렌체에 진입한 샤를 8세는 자신의 요구를 약간 완화시켜 피렌체 시민들을 달래면서 나폴리 왕국을 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습니다. 샤를 8세가 이탈리아 전역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피사는 밀라노와 베네치아와의 동맹으로 독립을 강화했습니다. 피렌체 평의회는 피사와의 전쟁에 투자했습니다. 부자들로 하여금 강제로 돈을 빌려주게 하고 대신 정부의 채권을 발행했는데, 1496년 정부의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정부는 로렌초의 방법을 모방하여 가난한 신부들을 위한 혼인지참금을 제공하기 위해 정부에 맡겨진 돈을 빌려오고 이러는 가운데 부정부패가 심화된 데다 그해 11월간의 장마로 흉년이 들어 길에는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신들이 널려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민들은 로렌초 시기의 평화를 우너하게 되었고, 1497년 메디치 가에서 들고 일어나 피에로의 정부를 회복시키고 정부 지도자 다섯 명을 사형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