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의 침묵의 시: <최후의 만찬>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 1495-97, 벽기둥에 유채와 템페라, 460-880cm.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 식당.

왼쪽에서부터 바르톨로메오, 야고보(작은), 안드레, 가롯 유다, 베드로, 요한, 예수, 도마, 야고보(큰), 빌립보, 미태, 유다,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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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크라체; 왼쪽의 작은 건물 식당 안에 <최후의 만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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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내부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는 실제 식당 공간을 화면 공간으로 삼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계속 밀라노에 머물렀습니다. 피렌체와 달리 1495년의 밀라노는 일시적이지만 장치적으로 평화스러웠고, 이때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에게 <최후의 만찬>과 <예수의 수난>을 주문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현재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 식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루도비코는 이 도미니크회 수도원을 좋아하여 종종 와서 명상에 잠기곤 했으며 자신과 아내 비트리스, 가족이 이곳에 묻히기를 소원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1465년경 대성당의 건축가 구이니포르테 솔라리로 하여금 성가대석과 앱스를 부수게 하고, 브라만테에게 건물을 확장 완공하도록 했습니다. 열여섯 개의 아치형 천장으로 돔을 떠받치는 거대한 입방체와도 같은 설교단은 1495년 당시 공사중이었고 2년 후에나 완공되었습니다. 루도비코는 수도원 외관을 닦아내어 윤이 나게 했습니다. 롬바르드 화가 몬토파르노에게 식당 북쪽 벽에 <십자가 처형>을 의뢰했고, 레오나르도에게는 반대쪽 벽에 8.8m 길이의 <최후의 만찬>을 의뢰했습니다. 반델로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로 하고 매년 2천 두카트를 받았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와 함께 이탈리 미술 전반에서 가장 인기 있고,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자신이 체포될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장면입니다. 수도원 식당에 이런 주제의 그림을 장식하는 것은 일반적인 전통이었습니다. 식당은 일시적인 세계와 영원한 세계가 만나는 곳으로 예수가 “내가 너희와 늘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곳이며, 수도승들은 식사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괴테는 레오나르도가 “접는 방식대로 접혀진 테이블 커버, 양쪽 가장자리에 수를 놓은 모양, 빛의 줄무늬”도 그대로 재현했으며, 수도승들이 사용하는 접시와 유리잔까지도 똑같이 재현했다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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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위한 스케치: 건축과 기하에 관한 스케치>, 26.6-21.4cm.


레오나르도는 실제 식당공간을 화면 공간으로 삼았으며, 배경을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구성 중 하나인 현혹적인 건축물로 구성하여 관람자가 깊은 인상을 받도록 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을 위해 드로잉한 종이에는 팔각형 속에 원이 들어 있습니다. 원은 식당 바닥과 지붕의 중앙에 위치하여 이 작품의 비밀스러운 기하를 결정짓는 역할을 합니다. 즉 원의 중심은 그림의 소실점으로 예수의 얼굴을 그 위에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예수를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학적이며 완벽한 기하학적 대칭의 구성을 선택했습니다. 중심인물 예수를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을 보조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그리스도가 뒷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앉은 것조차 우연이 아니라고 적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두 개의 수평선이라는 틀을 깨뜨린다. 자연스러운 식탁의 선은 유지하더라도 위쪽은 전체 그룹의 윤곽을 위해 트여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효과를 계산하는 아주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방의 전체적 조망, 벽의 모습과 장식들이 인물의 효과에 도움을 줘야 하며, 모든 것은 신체를 더욱 크고 입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배치되어야 한다는 방식이다. 그래서 방은 깊어지고, 벽은 여러 개의 벽걸이 장식으로 분할된다. 이런 중첩은 입체의 환각을 돕고, 수직선이 되풀이되면서 저 안쪽에서 발깥 쪽으로 퍼져 나오는 방향에 액센트를 준다. 그것들은 평면과 선들이기에 인물상에 진지하게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볼 수 있다.

뵐플린은 레오나르도가 피할 수 없는 식탁의 선 하나만을 유지한 점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방식으로 간주했으며, 예수의 몸짓과 모습에 고요하고도 위대한 요소가 있다면서 이는 15세기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특징으로 꼽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침묵의 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를 모델들의 몸짓, 태도, 얼굴에 나타난 성격의 특징으로 하여 침묵 속에 전하려고 했으며 그의 의도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는 모델들의 행동을 연출에 의한 것처럼 표현하여 각각의 개성이 나타나도록 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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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어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위한 스케치 구성>, 26.1-39.4cm.


이제 막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손가락을 쭉 편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지칭된 사람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워서 귀가 오른쪽 어깨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다. 손가락을 펴서 옆 사람 얼굴 아래에 댄 사람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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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의 부분, 예수와 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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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의 부분.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 요한과 가롯 유다 사이에 베드로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요한은 그리스도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레오나르도는 모델들의 귀와 입을 중시하며, 손을 화자의 반응과 언어에 대한 설명으로 표현했으므로 우리는 그림에서 놀라움, 회의심, 두려움, 성냄, 부인, 혐의 등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면서 “대체 누가 선생님을 팔아넘길 수 있겠느냐”며 놀라워하고, 빌립보는 일어서서 발생할 일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며, 바르톨로메오도 벌떡 일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베드로에게 누구냐고 묻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으며 놀라거나 더러는 화를 내며 자신들의 무죄와 신실함을 주장합니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차분한 모습이며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 예수와 유사한 의상을 한 제자 요한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그리스도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왼쪽 끝의 바르톨로메오는 이제 막 방에 들어온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의 옆에 얼굴이 검은 유다가 앉아 있고, 그의 손이 그릇에 거의 닿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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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최후의 만찬>, 1448년경, 프레스코, 470-975cm. 산타 아폴로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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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 1480, 프레스코, 400-800cm. 산 마르코 수도원


시뇨렐리,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기를란다요 등 콰트로첸토(15세기) 화가들은 부패한 인간상으로 대표되는 유다를 묘사할 때 테이블 반대편, 관람자에게 등을 돌린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런 식의 규칙을 무시하고 모든 제자를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나누어 나란히 함께 앉게 했습니다.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그린 것은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후대 화가들은 더 이상 유다를 예수 반대편에 따로 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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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최후의 만찬>, 1635년경, 레오나르도의 양식으로


과거 화가들이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통일성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대화합니다. 그래서 그림이 유다의 배신을 시사하는 장면인지 단순히 만찬의 장면인지 불분명합니다. 예수가 말씀을 마친 후의 장면을 모티프로 삼은 건 15세기의 관점에서 오나전히 벗어난 일로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이런 모티프를 사용한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을 1495년경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매우 게을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작업실에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 가서 직접 그리는 일이라서 사람들이 볼 대에는 그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 완성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요하게 한 것 같습니다. 반델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아침 일찍 식당으로 가서는 바닥에서 2m 높이에 있는 발판에 올라가 그리기 시작하여 어떤 때에는 먹고 마시는 것을 잊어버리고 해가 질 때까지 붓질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나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며칠 동안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도 레오나르도는 코르테 베키아에서 흙으로 말을 빚는 일에 전념하다가 정오에 무슨 생각이 났는지 수도원으로 달려가서는 발판에 올라가 붓질을 한두 번 하고 가버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가 이 시기에 무엇 때문에 바빴는지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일을 동시에 진행했고, 그런 이유 때문인지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는 데 2-3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루도비코의 서기이자 시인인 발다사레 타코네에 의하면 당시 레오나르도는 ‘다나에’를 위한 무대장치를 했고, 루도비코의 애인 세실리아에 의해 1498년에 완공된 궁전과 스포르제스코 성의 외관을 장ㅅ기했습니다. 또한 이름을 알 수 없는 후원자의 집을 디자인했으며, 공작부인 비트리스의 별장과 성내에 있는 아파트 그리고 방 몇 개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다양한 건물들의 주변과 내부를 드로잉했는데, 이는 그가 밀라노의 공공건축가로 활약한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합니다. 이때 그는 5년째 여섯 명의 조수를 데리고 있었고, 이들의 생활을 책임졌기 때문에 벌이가 신통치 않아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찮은 일로 여겼지만 피아센자 대성당의 청동문을 제작했으며, 브레스치아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제단화를 그렸고, 팔기 위한 디자인들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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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수염 난 늙은 남자의 반신상>, 14.5-11.3 cm.

이 늙은 남자는 <최후의 만찬>에서의 성 베드로의 모습 같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 제자들의 얼굴을 밀라노 거리의 행인들을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의 얼굴은 모르타로의 추기경 측근인 공작 조반니를 모델로 하고 손은 파르마의 알렉산드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바사리와 지랄디에 의하면 1497년경 레오나르도는 열한 명의 제자와 유다의 몸을 그렸지만, 유다의 머리만 남겨놓은 채 일 년이 넘도록 완성시키지 않자 수도원측이 루도비코에게 불평했습니다.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도에게 속히 완성할 것을 종용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이유로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여전히 레오나르도가 완성하지 않자 루도비코는 다시 그를 불러 불편한 심기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레오나르도는 수도원 신부들은 예술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을 뿐 아니라 화가는 노동자처럼 작업하지 않는다면서 변명했습니다.

전하, 유다의 머리만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소문난 악한이기에 그의 사악함에 걸맞은 얼굴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찾느라 거의 일 년 동안 전하도 아시는 것처럼 흉포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보르게토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악한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얼굴을 찾기만 하면 그날로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면 전하께 저를 모함한 자가 바로 유다에 합당할 터인즉 그 자의 얼굴을 대신 그려놓겠습니다.

지랄디는 루도비코가 fp오나르도의 응답에 만족해하면서 레오나르도의 편에 섰다고 했습니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발견했고, 작품을 완성했지만 <최후의 만찬>은 혹평을 받았습니다. 바사리 시대의 사람들은 “현혹스러운 착색”에 지나지 않는 작품이라고 냉대했으며, 1624년 카르투지오 수도회(1086년 성 브루노가 프랑스 샤르트리우스에 개설한) 수사 사네스는 “볼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시기 수도원의 벽을 자르고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으므로 다리와 테이블 커버 일부가 잘렷습니다. 그리고 괴테에 의하면 1500년과 1800년 두 차례의 홍수로 그림이 심히 파손되었습니다. 1796년에는 나폴레옹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인들은 사용하지 않던 식당을 마초를 저장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공화국 기병들은 벽돌을 제자들의 얼굴에 던지면서 재미있어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말에는 폭탄이 식당 지붕에 떨어졌지만, 다행히도 레오나르도의 작품은 모래주머니들로 가려져 있었으므로 파손되지 않았습니다.

18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 작품 전체를 복원시키려는 열정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복원자들 특히 벨로티의 경우 오히려 작품을 망쳐놓았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복원작업이 이뤄졌으며, 1820년과 1908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습니다. 1946년과 1953년 사이에 본래의 상태로 복원하려는 시도가 한 차례 있었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붉은색 겉옷이 최종적으로 복원되었으며, 그 후에는 좀 더 과학적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루도비코는 1497년 6월 서둘러 이 작품과 그 밖의 작품을 보러왔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바사리와 지랄디를 포함해서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그해 초 세상을 떠난 것으로 미뤄 자신과 아내의 무덤을 수도원에 마련하기 위해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루도비코는 생전에는 아내 비트리스에게 질색했지만, 그녀가 사망하자 그녀를 숭배할 정도로 애정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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