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지배하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499년 4월 말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에게 포르타 베르첼리나 지방의 포도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주었습니다. 이는 그가 레오나르도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였거나 금고가 바닥이 나서 돈 대신 땅을 준 것으로 짐작됩니다. 1498년 4월부터 루도비코는 정치적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샤를 8세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여자는 통치지역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살리족의 법을 무시하고 비스콘티 공주였던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밀라노를 자신의 통치령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루도비코는 동맹국들 베네치아, 피사, 피렌체, 독일, 그리고 터키와 외교관계를 강화해나갔습니다. 그러나 루이는 비밀리에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피렌체와는 중립적인 관계를 맺은 후 밀라노를 칠 준비를 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알프스를 넘어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1498년 여름 초 프랑스군이 알프스를 넘어오고 있을 무렵 레오나르도는 코르테 베키아 궁에 틀어박힌 지안 갈레아조의 미망인 이사벨라를 위해 목욕탕과 스토브를 고쳐주고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에는 몇 페이지에 걸쳐 보일러와 배관에 관한 디자인이 그려져 있으며 이상적인 온도로 뜨거운 물과 찬 물이 3:1 비율로 섞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군이 8월에 타나로 강이 바라보이는 아라조를 점령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이사벨라의 목욕탕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었습니다.

루이의 군대는 빠르게 남하하여 안노네의 요새와 바시나노, 보기에라, 카스텔누오보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베네치아 군인들도 동쪽으로부터 롬바르디아를 공격해오면서 “이제는 무어인(루도비코의 별명)이 춤을 출 차례다!”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루도비코와 약속했던 동맹국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갈레아조 다 산세베리노는 성을 굳게 닫고 불명예스러운 은둔에 들어갔고, 동생 카이아조의 공작은 프랑스에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루도비코의 회계 담당자는 밀라노 군중에게 폭행당했고, 수하의 장군들은 달아났습니다. 밀라노는 대포 한 방 쏘아보지도 못하고 1498년 9월 14일 조건부로 항복했습니다. 10월 6일 루이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밀라노에 입성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이탈리아 왕족, 프랑스 추기경, 외교관들을 이끌고 와서 세금을 감면해주겠다는 선심을 썼으므로 밀라노 시민들은 열렬히 그를 환영했습니다. 루도비코의 많은 조신들은 이미 밀라노를 떠났지만 레오나르도는 망설였습니다.

파올로 조비오의 기록에 의하면 루이 12세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에서 <최후의 만찬>을 보고 대단히 매료되어 그것을 떼어 프랑스로 운반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으로 봐서 루이가 레오나르도를 기꺼이 만났을 것이고 자신을 위해 일해 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또한 프랑스군의 사령관 리니의 백작은 레오나르도를 통해서 토스카나의 요새에 관해 알고 싶었으므로 자신에게 협조하기를 원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에 백작을 언급한 구절들이 있지만, 그가 백작에게 얼마만큼 협조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밀라노인들을 약탈하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러 밀라노인들의 반감을 사기 시작했으므로 레오나르도가 그들에게 협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밀라노를 떠나기에 앞서, 1499년 말 그동안 모아둔 돈을 은행의 역할을 했던 피렌체의 몬테 디 피에타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으로 송금하고 루카 파치올리와 사랑하는 살라이와 함께 밀라노를 떠났습니다.


347

레오나르도의 <젊은이의 옆모습 (살라이?)>, 1510년경, 21.7-15.3cm.


1500년 초 레오나르도가 베네치아로 갔을 때는 스페인군이 나폴리를 놓고 프랑스군과 충돌했으며 나중에는 롬바르디아를 두고 프랑스와 겨루던 시기였습니다.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을 내모는 데 성공했지만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이탈리아가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건 19세기에 들어서서 통일을 이룩한 후였습니다. 베네치아인들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존경심을 표했지만 그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바사리의 말로는 젊은 조르조네Gioregione(1476/8-1510)가 레오나르도의 “부드럽고 어두운” 양식을 매우 좋아했으며 평생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유화에 폭넓게 사용했으며 팔마 베키오 역시 레오나르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르조네의 <목자들의 경배>, 1505-10년경, 91-111cm.


조르조네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바사리의 전기와 베네치아의 역사가인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 쓴 베네치아미술품에 대한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작품을 제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서명과 제작연도가 있는 작품 도한 한 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는 공적인 후원자를 위한 대형 장식화보다는 개인 수집가를 위해 소형 유화를 그린 최초의 화가입니다. 또한 풍경을 위한 풍경화가 기이하게 여겨지던 때에 시적 정취가 있는 풍경화를 최초로 그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르조네는 새로운 회화의 창시자로서 미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肝膽相照(간담상조) 이야기


唐(당)나라의 문인 韓愈(한유)는 우정을 귀히 여겨 그에겐 훌륭한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친구들 가운데 柳宗元(유종원)은 당시 수구파와의 싸움에 밀려 柳州刺史(유주자사)로 좌천되는 불향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친구이자 문인 劉禹錫(유우석) 역시 播州(파주)의 자사로 좌천되었습니다.

유종원은 유우석의 좌천 소식을 접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파주는 깊숙한 두메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더욱이 노모와 함께 갈 곳이 못 되니 내가 대신 가야겠다.

그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고, 그 덕분에 유우석은 파주보다는 환경이 나은 連州(연주)로 좌천되었습니다.

훗날 한유는 유종원을 위해 쓴 『柳子厚墓誌銘(유자후묘지명)』에 유종원의 우정을 되새기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비로소 참다운 의미를 알 수 있다. 평상시 아무 일 없을 때에는 서로 그리워하고 즐거워하며 연회석상에 놀러 다니며 서로 사양하고, 쓸개나 간을 꺼내 보이고, 해를 가리켜 눈물을 흘리며 죽어도 배반하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머리칼 한 올의 이해관계라도 생기면 거들떠보지 않고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함정에 빠져도 손을 뻗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차 넣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행위는 무지한 짐승도 차마 하지 못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스스로 뜻을 얻었다고 자부한다.

쓸개나 간을 꺼내 보이고”란 말이 간담상조肝膽相照입니다. 간과 쓸개를 서로 본다는 뜻입니다. 감추는 것이 없이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사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는 평상시 아무 일이 없을 때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정작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그걸 이용해 자신의 영달을 취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정치에서 자주 봅니다. 정치인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 괴물입니다. 쓸개나 간을 꺼내 보이다가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그걸 자신의 뜻을 얻는 기회로 활용합니다. 정치란 비정하기 짝이 없는 행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윈 에드워즈의 ‘인구 조절’의 이론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동물들인 포유류와 조류는 위대한 애 키우기 선수들이며, 여기에는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결단도 포함됩니다. 유전자의 이기성의 관점에서 보면 어린 형제를 키우는 것과 어린 자식을 키우는 것 사이에는 원리적인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어느 아이나 근친도는 어느 편에서나 같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동물학자 윈 에드워즈Vero Copner Wynne Edwards(1906-97)는 개개의 동물이 집단 전체를 위해 의도적이고 이타적으로 스스로의 출생률을 감소시킨다고 제안하면서 ‘인구 조절’의 이론을 기초로 했습니다. 이는 주목할 만한 가설입니다. 한 부부당 아이의 평균수가 출산 가능한 시기까지 생존하는 아이의 수로 하여 2인보다 많으면 신생아의 수는 매년 가속적으로 증가할 것입니다. 인구의 증가는 출산 연령에 의해서도 좌우됩니다. 각 세대의 간격을 보다 넓게 하면 매년 증가율은 완만하게 될 것입니다. 인구의 증가를 저지하는 매우 강력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데, 기아, 전염병, 또는 산아제한입니다. 의학의 진보가 인구의 위기 촉진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량 증산도 인구 증가 속도를 가속시켜 인구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먼 장래에 대한 계산에 의해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인류라는 종 전체의 장래 행복에 대한 배려 때문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에게 인구 과잉의 파괴적 귀결을 예견할 수 있는 의식적 선견능력이 있다면서, 생존기계라는 건 일반적으로 유전자라는 이기적 존재에 의해 지배되지만, 이 유전자라는 존재는 장래를 예견하거나 종 전체의 행복을 걱정하는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윈 에드워즈는 진정한 이타적 산아제한이 진화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봅니다. 동물들은 출생률을 조절하고 있다는 것이 윈 에드워즈의 주장입니다. 동물의 산아제한은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실행되는 이타적인 것인가, 아니면 번식을 하고 있는 개체의 이익 때문에 실행되는 이기적인 것인가? ‘평균 이하의 출생률의 자연선택’은 모순이라고 도킨스는 말합니다.

많은 동물들은 자기들의 ‘세력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윈 에드워즈는 세력권을 놓고 다투는 동물들이 한 조각의 먹이나 현실적인 목적물 대신 특권을 보증하는 표식이 될 수 있는 대용 목적물을 가지고 싸우는 것으로 본다면서, 대개의 경우 암놈은 세력권이 없는 수놈과는 짝짓기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귀던 수놈이 패하고 다른 수놈이 그 세력권을 차지하면 암놈은 재빠르게 그 승자 편으로 자리바꿈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윈 에드워즈에 따르면 세력권의 획득은 번식의 티켓 혹은 허가증을 입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개체군 전체가 낳을 수 있는 새끼의 총수는 이용 가능한 세력권 수에 의해 제한됩니다. 세력권을 획득하지 못한 개체는 번식을 못할 뿐만 아니라 세력권의 획득을 향해 싸우는 것까지도 포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체는 서로 개체로서의 특징을 파악하고 누구와 싸울 경우, 누구에게는 이길 수 있고 누구에게는 늘 패하는가를 학습합니다.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그들이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박물학자는 순위제 또는 ‘세력 순위 peck order’라고 부르는데, 세력 순위는 닭에서 최초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순위제란 ‘하나의 사회의 계층 질서로서, 그 질서 밑에 있는 모든 개체는 자기의 지위를 분별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은 생각지도 않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위의 개체가 자동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에 실제로 싸움이 계속되는 일은 거의 없으며, 심한 상처도 별로 입지 않습니다. 순위가 높은 개체는 하위의 개체보다 번식의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암놈이 상위의 개체를 선택하거나, 또는 하위의 개체가 암놈에게 접근하는 것을 상위의 개체가 힘써 저지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사회 순위는 번식의 자격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티켓입니다. 직접 암놈을 에워싸고 싸우는 대신 개체는 사회적 지위를 걸고 싸우기 때문에 상위의 사회적 지위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그들은 번식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자인합니다. 물론 하위의 개체는 끊임없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고, 간접적으로 암놈을 가지고 경쟁하지만, 직접 암놈이 개입된 문제에 관해서는 자제합니다. 순위가 높은 수놈만이 번식할 수 있다는 규칙을 기꺼이 받아들인 결과, 개체의 수는 증가하지 않게 됩니다. 동물의 개체군은 순위와 세력권을 가지고 형식적인 다툼을 이용해 실제로 기아에 의한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는 수준보다 약간 적게 개체의 수를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윈 에드워즈가 새의 경우 모든 개체가 따라야 하는 최적은 집단 전체의 관점에서의 최적 알의 수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 영국의 생태학자 데이비드 랙David Lambert Lack(1910~73)은 각각의 이기적 개체는 어미가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최대로 할 수 있는 한 둥지의 알의 수를 선택한다고 주장합니다. 제비의 한 둥지의 최적 알의 수가 3개라면, 4마리 새끼를 키울 경우 각각의 새끼에게 분배되는 먹이의 양이 부족해지므로 성숙 단계까지 살아남는 것은 거의 없게 됩니다. 랙에 따르면 개체가 한 둥지의 알 수를 조절하는 이유는 전혀 이타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산아제한을 행하는 건 집단을 위한 자원을 과잉으로 이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의 살아남는 새기 수를 최대화하기 위해 산아제한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산아제한에 결부시키고 있는 이유와 정반대의 목표가 됩니다.

새끼를 키우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우선 알을 만들기 위해 어미 새는 대량의 먹이와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합니다. 어미 새는 배우자의 도움을 받아 알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짓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어미 새는 몇 주 동안 알 품기를 계속합니다. 새끼가 부화하면 어미 새는 거의 쉬지 않고 새끼의 먹이를 나르는데, 박새의 경우 어미 새는 낮 동안 평균 30초마다 1회의 비율로 먹이를 둥지로 나릅니다. 어미 새는 애 낳기와 애 키우기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한 마리의 어미 새 혹은 한 쌍의 짝이 구할 수 있는 먹이와 자원의 총량이 그들이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됩니다.

집단번식의 주요 무대에서 세력권 소유자 중 누군가가 쓰러지면 즉시 낙오자 중 하나가 그 후계자 자리에 앉아 번식을 시작합니다. 윈 에드워즈의 입장에서 보면 낙오자들의 역할은 무대 옆에 대기하고 있는 대역과 같습니다. 낙오자가 나타내는 이런 행동이 이기적 개체로서 가장 좋은 전략에 속한다고 도킨스는 말합니다. 그는 동물을 도박꾼에 비유할 수 있으며, 때로는 가장 좋은 전략은 공격 전략이 아닌 관망 전략이라고 말합니다. 이기적 유전자론은 그 동물이 가장 좋은 결정은 일단 자제하고, 장래의 더 좋은 기회에 희망을 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다표범 중 새치기를 꾀하지 않는 낙오된 바다표범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좋은 기회가 오지 않고 그 바다표범이 자손을 못보고 죽을지도 모르지만 이 도박은 이길 수도 있는 도박입니다. 옥외의 울타리 안에 생쥐들을 풀어놓은 뒤 먹이를 충분히 공급하고 자유로이 전식하게 하는 실험을 한 결과 생쥐의 개체군은 어느 수준까지 증가했지만 그 후에는 일정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암놈의 번식능력이 감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번식능력의 감퇴 효과를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은 스트레스인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개체군의 과밀화에 따라 출생률을 감소시키는 암놈에게 자연선택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밀이 앞으로 초래될 기근을 나타내주는 지표가 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동물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 입장에서 볼 때 최적 수의 새끼를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이 낳은 새끼의 수가 적거나 너무 많으면, 그들이 최종적으로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는 그들이 꼭 맞는 수의 새끼를 낳아서 키울 때의 수보다 적을 것입니다. ‘꼭 맞는 수’라고 하는 것은 개체군이 과밀한 해에는 개체군이 희박한 해에 비해 보다 작은 수가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과밀은 기근의 전조가 됩니다. 어떤 암놈이 기근이 예측되는 증거에 접할 경우 스스로 출생률을 감소시키는 건 그 암놈의 이기적 이익에 적합한 것이라고 도킨스는 말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켈란젤로, “신의 어머니는 지상의 어머니처럼 울지 않는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343

사진: 카라라의 대리석 채석장 광경


그해 갈리는 미켈란젤로에게 또 다른 <에로스>(현존하지 않음)를 의뢰했고, 또한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추기경 장 드 라그롤라와의 계약협상에 참여해주었습니다. 추기경은 이 작품을 산 페트로넬라 성당에 장식하려고 주문했습니다. 원래의 계약은 1498년 8월 29일부터 작품을 제작하기로 했지만, 추기경이 돈을 미리 주었기 때문에 1497년 11월 미켈란젤로는 토스카나의 카라라 채석장에서 직접 대리석을 가져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각가가 채석장에 가서 자신이 사용할 재료를 직접 구하는 것은 보통이었으나 미켈란젤로가 채석장을 찾은 건 이때가 처음입니다. 그는 채석장 여러 곳을 두루 둘러보고 최상의 대리석을 구입했습니다.


344

미켈란젤로의 <로마 피에타>, 1498-99, 대리석, 175.3cm.

성모 마리아는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의 왼발이 닿는 아래의 나무뿌리는 사후의 삶을 상징합니다. 앞서 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조각받침대는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조각 자체에 내포되는 의미를 지니는 조각의 일부분입니다. 그는 <바쿠스>를 완성하자마자 이것을 제작했으며, 두 작품 모두 바닥 낮게 두려고 받침대를 낮게 만들었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성 베드로 대성당 아래층에 전시되어 있는데, 방탄유리로 가려져 있고, 멀찌감치에서 관람하도록 되어 있어 마치 진열장에 전시된 주각 위의 공예품을 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시된 것으로 그가 의도한 빛에 의한 효과를 즐길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주각은 현대 미술고나에서 생긴 개념으로 르네상스 시대에만 해도 조각은 관람자의 손이 닿을 만큼 낮게 진열되었습니다.


피에타는 ‘가장 경건한’이라는 뜻으로 마리아가 죽은 아들 그리스도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있는 모습이 보통입니다. 피에타는 14세기 독일에서 발전되었고 르네상스에 와서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스물세 살 때 시작하여 스물다섯 살 때 완성한 <로마 피에타>는 예수이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비탄스러운 모습이 매우 우아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가장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이후 그가 제작한 피에타들과 구별하기 위해 <로마 피에타>라 부릅니다.

미켈란젤로가 “신의 어머니는 지상의 어머니처럼 울지 않는다”고 했듯이 조용히 머리를 숙인 성모 마리아는 동적인 요소가 없고 내려뜨린 왼손만이 간접적으로 고통을 표시합니다. 이러한 절제된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속죄의 의미를 되새겨보라는 표현입니다. 뵐플린은 이를 16세기의 감정으로 보면서 형식적인 면에서 15세기 피렌체 양식에서 나왔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고 마리아의 머리가 미켈란젤로의 다른 작품과도 같지 않지만 과거 피렌체인들이 사랑했던 가늘고 섬세한 유형이라고 했는데, 훗날 그의 작품이 더 넓고 강력한 육체의 모습이라서 수긍이 됩니다. 미켈란젤로가 더 이후에 이 작품을 제작했더라면 두 인물을 훨씬 더 긴밀한 덩어리로 뭉쳐놓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비탄과 더불어 기품을 유지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앞이마에 가는 선을 새겨 넣었는데 이는 자연광이 위에서 아래로 비출 경우 그늘이 지는 경계선이 됩니다. 경계선을 새겨 넣음으로써 그늘이 선에 닿아 얇은 망사처럼 보이도록 고안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성모의 가슴에 대각선의 장식 띠를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밀라노 조각가 고보(크리스토페로 솔라리의 별명)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작품에 서명이 없어 고보의 작품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목격한 미켈란젤로가 그날 밤 성모의 가슴 장식 띠에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제작했음 MICHELANGELUS BUONARROTUS FIORENTINUS FACIEBAT”이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식 띠 아래 몸이 유기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미켈란젤로가 돌연히 서명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띠에 서명하려고 계획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장식띠에 피렌체인이라고 적은 것을 놓고 그가 자신의 태생을 적어 넣음으로써 피렌체인이 예술에 있어 밀라노인보다 우수함을 나타내려고 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 피에타>를 제작하면서부터 가톨릭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피치노로부터 사랑과 미의 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정신에 내재하는 이미지’를 대리석이라는 질료로 구체화했습니다. 자신의 예지를 신뢰한 그는 그 안에서 미를 질료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정신의 형상을 구체화하는 것을 예술가의 사명으로 인식하여 미술을 형상과 질료 사이의 교량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신의 형상을 돌덩이에 새겨 넣으면 그것이 생명력을 지니며 조각의 드러난 형상은 정신 안에 있는 자신의 형상에 상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조각을 제작하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불멸하는 지고의 선 혹은 미에 대한 사랑이며, 질료는 사랑의 대상으로 임시 존재할 뿐입니다. 그는 인체의 미적 형체에 전념했는데, 아름다운 인체는 신으로 하여금 관조를 용이하게 해주는 작업이었습니다.


345

미켈란젤로의 <로마 피에타>의 부분

마리아의 얼굴은 사랑스러우면서도 근심으로 가득 찼지만, 표정은 침착하면서도 평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안고 있는 시신이 신의 아들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비탄은 없을 수 없기에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로마 피에타>에서 미켈란젤로는 삼십 중반의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를 젊은 여인으로 묘사했습니다. 실제로는 오십을 넘었을 마리아를 이토록 젊은 모습으로 묘사한 이유는 불멸의 젊음으로 마리아의 온전한 순결을 상징하려고 한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보다 젊게 묘사된 것은 단테의 『신곡』 천국 편에서 성 베르나르의 기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동정녀 어머니, 당신 아들의 딸이여,

비천하면서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 격찬을 받는 이여,

영원한 의지의 목적을 정하신 분이여,

당신이야말로 인류를 고상하게 만드셨고

조물주로 하여금 피조물들을 멸시하지 않게 하시고

조물주 자신을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작품을 의뢰한 추기경 드 라그롤라는 작품이 완성되는 것도 보기 전 1499년 8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프랑스 왕이 바티칸에 파견한 사람들 가운데 최고 책임자였으므로 시신은 프랑스 왕의 예배당인 산 페트로넬라 예배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원래 벽감에 안치될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나 완성되자마자 추기경의 묘비 평석 바로 앞 낮은 방형대좌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며 산 페트로넬라 예배당을 부수게 되자 작품의 위치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서명한 유일한 작품이자 그를 자립시켜준 <로마 피에타>는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과 더불어 초기 르네상스를 마감하고 예술적으로 더욱 진전된 성기 르네상스를 연 작품이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탈무드』와 랍비


유대인은 『탈무드』를 ‘바다’라고 부릅니다. 바다 속은 끝이 없고 그곳에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탈무드』는 모두 20권으로 1만2천 쪽에 달하며, 2백50만 개 이상의 단어로 이뤄진 방대한 책입니다. 기원전 500년으로부터 기원후 500년에 이르는 약 1천 년의 세월 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것을 2천 명에 달하는 학자들이 10년 동안에 편찬한 책입니다. 유대인은 이 책을 유대 5천 년의 지혜이자 지식의 창고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행복과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유대인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탈무드』의 원류는 『구약성서』입니다. 『구약성서』를 보완, 발전시킨 것입니다. 『탈무드』는 랍비로부터 제자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으므로 대부분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되어 있습니다.

『탈무드』는 수백 년 동안 여러 도시에서 편찬사업이 추진되었으며, 오늘날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팔레스타인 탈무드』의 두 종류가 유명합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팔레스타인 탈무드』보다 더 중시되고, 그 권위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하는 『탈무드』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입니다.

본래 ‘탈무드’란 말은 ‘위대한 연구’, ‘위대한 학문’, ‘위대한 고전연구’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탈무드』는 어느 권을 펼쳐도 2페이지로 시작되는데, 1페이지는 책을 펼친 사람의 경험을 쓰기 위해 남겨진 것이라고 합니다. 출판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지만, 『탈무드』는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를 여백으로 남겨두는 것이 원칙입니다.

『탈무드』는 바빌로니아에서 기원후 500년에 편찬되기 시작했습니다. 1334년에 손으로 쓰인 『탈무드』가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처음 인쇄된 건 1520년 베네치아에서였습니다.

1244년 파리에 있었던 모든 『탈무드』는 그리스도교 교도들에 의해 몰수되고 금서가 되었으며, 24대의 짐수레에 실린 채 불태워졌습니다.

1263년에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표자와 유대 측의 대표자가 모인 공개석상에서 『탈무드』가 그리스도교에 반대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토론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1415년에 이르러 유대인이 『탈무드』를 읽는 것이 법령으로 금지되었습니다.

1520년에 로마에서 모든 『탈무드』가 압수되어 불태워졌습니다.

1562년에는 교회가 검열하여 『탈무드』를 삭제하거나 찢어냈으므로 현존하는 『탈무드』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탈무드』는 수개 국어로 번역되어 『탈무드』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탈무드』는 농업, 제사, 여자, 민법과 형법, 사원, 순결과 불순의 6부로 나눠져 있습니다. 『탈무드』의 권위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반드시 미시나mishina라는 부분에서 시작합니다. 미시나는 유대의 오랜 가르침, 오랜 약속 등이 구전으로 전해진 부분입니다. 이 미시나를 둘러싼 방대한 의견이나 토론이 『탈무드』인 것입니다. 이 토론은 둘로 나눠지는데, 하라카와 아가타입니다. 하라카는 유대적인 생활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거룩한 것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사, 건강, 예술, 식사, 회화, 언어, 대인관계 등 생활을 다스리는 모든 것이 하라카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가타는 『탈무드』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 신학, 역사, 도덕, 시, 속담, 성서의 해설, 과학, 의학, 수학, 천문학, 심리학, 형이상학 등 인간이 가진 모든 지혜를 포함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종교학교에서는 9세부터 『탈무드』의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되는데, 이러한 종교학교에서는 『탈무드』 외에는 공부시키지 않습니다. 따라서 학생은 10년에서 15년 동안 『탈무드』의 연구에만 열중하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랍비를 양성하는 학교에 진학하려면 일반 대학에 가서 학사학위를 받아야 합니다. 랍비를 양성하는 학교가 대학원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랍비가 되기 위해서는 매우 엄격한 입학시험을 거쳐, 4년에서 6년 동안 『탈무드』를 처음부터가 아니라 중간에서부터 배우게 됩니다. 이는 이전이 이미 많은 걸 배워왔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입학시험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입시과목은 먼저 성서, 히브리어, 아랍어, 역사입니다. 이는 자그만치 4천 년의 역사이므로 대단한 것입니다. 유대문학, 법률, 『탈무드』의 심리학, 설교학, 교육학, 처세학, 철학이 있으며, 그 밖에 몇 가지 논문도 써야 합니다. 졸업 때에는 4-6년 동안 배운 것에 대한 최후의 시험이 또 행해집니다.

이들 과목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중심이 되는 건 『탈무드』입니다. 반 이상의 시간이 『탈무드』에 배당되고, 『탈무드』 외의 과목에서 수업은 교수 강의에 의해서 행해지는데, 『탈무드』에 대한 강사는 보통의 강사는 교사와는 달리 뛰어난 인격자가 선택됩니다. 『탈무드』의 교사는 유대문화가 배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인격자가 선택됩니다. 이는 『탈무드』의 말을 빌어 말하면 왼손으로 학생을 차갑게 떠밀고, 오른손으로는 학생을 따뜻이 끌어안을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학생 쪽에서는 『탈무드』를 한 개인으로 공부하지 않고,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서 공부합니다. 큰 소리로 낭독하고 모두 모여서 외우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조가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서 3년 동안이나 공부를 계속합니다. 『탈무드』의 교사는 결코 어떻게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므로 자신들이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략 한 시간의 수업을 받기 위해서는 4시간가량 공부해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한 시간의 수업을 듣기 위해서 20시간 이상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탈무드』의 학급은 반드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 생활에 정통해야 합니다.

무난히 졸업할 수 있게 된 사람은 처음 2년 동안 학교를 위해 일합니다. 학교를 위한 봉사란 종군 랍비가 되어도 좋고, 랍비가 없는 마을에 가서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교구가 독립되어 있으므로 가톨릭처럼 랍비가 어디로 파견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 유대인의 지역사회로부터 랍비의 양성학교에 편지가 와서, 랍비가 없으니 한 달에 얼마만큼의 보수로 랍비가 될 사람을 구해달라는 신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졸업이 가까워진 랍비는 자기가 그곳에 가고 싶다고 학교의 사무국에 신청한 뒤 그 지역사회에 직접 가서 면접시험을 받습니다.

지역사회가 어떤 랍비를 선택하는가는 자유이며, 랍비 쪽도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사회에서도 여러 명의 랍비 후보자와 만날 수도 있으며, 이족에서도 여러 곳에 가 보아서 자신이 바라는 장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일이 잘 되면 그 지역사회의 예배당에 속하는 랍비가 될 수 있는데, 보통 2년 정도가 한 기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랍비의 역할은 유대인 학교의 책임자이고, 예배당의 관리자이며, 또한 설교자입니다. 그는 유대의 모든 전통을 대신해서 공부하고, 요람에서 무덤에 가기까지 유대인 사회애서 문제의 해결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그를 맞아들이고, 죽으면 매장하고 결혼할 대에도 이혼할 때에도 입회합니다. 따라서 랍비는 학자이며 또 교사입니다.

15세기가지 랍비는 무급이었습니다. 때문에 대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5세기 이후부터 랍비의 보수를 지역사회가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랍비란 말은 1세기경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히브리어로 ‘교사’라는 뜻이고, 영어로는 래바이라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