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신의 어머니는 지상의 어머니처럼 울지 않는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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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카라라의 대리석 채석장 광경
그해 갈리는 미켈란젤로에게 또 다른 <에로스>(현존하지 않음)를 의뢰했고, 또한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추기경 장 드 라그롤라와의 계약협상에 참여해주었습니다. 추기경은 이 작품을 산 페트로넬라 성당에 장식하려고 주문했습니다. 원래의 계약은 1498년 8월 29일부터 작품을 제작하기로 했지만, 추기경이 돈을 미리 주었기 때문에 1497년 11월 미켈란젤로는 토스카나의 카라라 채석장에서 직접 대리석을 가져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각가가 채석장에 가서 자신이 사용할 재료를 직접 구하는 것은 보통이었으나 미켈란젤로가 채석장을 찾은 건 이때가 처음입니다. 그는 채석장 여러 곳을 두루 둘러보고 최상의 대리석을 구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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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로마 피에타>, 1498-99, 대리석, 175.3cm.
성모 마리아는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의 왼발이 닿는 아래의 나무뿌리는 사후의 삶을 상징합니다. 앞서 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조각받침대는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조각 자체에 내포되는 의미를 지니는 조각의 일부분입니다. 그는 <바쿠스>를 완성하자마자 이것을 제작했으며, 두 작품 모두 바닥 낮게 두려고 받침대를 낮게 만들었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성 베드로 대성당 아래층에 전시되어 있는데, 방탄유리로 가려져 있고, 멀찌감치에서 관람하도록 되어 있어 마치 진열장에 전시된 주각 위의 공예품을 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시된 것으로 그가 의도한 빛에 의한 효과를 즐길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주각은 현대 미술고나에서 생긴 개념으로 르네상스 시대에만 해도 조각은 관람자의 손이 닿을 만큼 낮게 진열되었습니다.
피에타는 ‘가장 경건한’이라는 뜻으로 마리아가 죽은 아들 그리스도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있는 모습이 보통입니다. 피에타는 14세기 독일에서 발전되었고 르네상스에 와서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스물세 살 때 시작하여 스물다섯 살 때 완성한 <로마 피에타>는 예수이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비탄스러운 모습이 매우 우아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가장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이후 그가 제작한 피에타들과 구별하기 위해 <로마 피에타>라 부릅니다.
미켈란젤로가 “신의 어머니는 지상의 어머니처럼 울지 않는다”고 했듯이 조용히 머리를 숙인 성모 마리아는 동적인 요소가 없고 내려뜨린 왼손만이 간접적으로 고통을 표시합니다. 이러한 절제된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속죄의 의미를 되새겨보라는 표현입니다. 뵐플린은 이를 16세기의 감정으로 보면서 형식적인 면에서 15세기 피렌체 양식에서 나왔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고 마리아의 머리가 미켈란젤로의 다른 작품과도 같지 않지만 과거 피렌체인들이 사랑했던 가늘고 섬세한 유형이라고 했는데, 훗날 그의 작품이 더 넓고 강력한 육체의 모습이라서 수긍이 됩니다. 미켈란젤로가 더 이후에 이 작품을 제작했더라면 두 인물을 훨씬 더 긴밀한 덩어리로 뭉쳐놓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비탄과 더불어 기품을 유지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앞이마에 가는 선을 새겨 넣었는데 이는 자연광이 위에서 아래로 비출 경우 그늘이 지는 경계선이 됩니다. 경계선을 새겨 넣음으로써 그늘이 선에 닿아 얇은 망사처럼 보이도록 고안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성모의 가슴에 대각선의 장식 띠를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밀라노 조각가 고보(크리스토페로 솔라리의 별명)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작품에 서명이 없어 고보의 작품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목격한 미켈란젤로가 그날 밤 성모의 가슴 장식 띠에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제작했음 MICHELANGELUS BUONARROTUS FIORENTINUS FACIEBAT”이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식 띠 아래 몸이 유기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미켈란젤로가 돌연히 서명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띠에 서명하려고 계획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장식띠에 피렌체인이라고 적은 것을 놓고 그가 자신의 태생을 적어 넣음으로써 피렌체인이 예술에 있어 밀라노인보다 우수함을 나타내려고 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 피에타>를 제작하면서부터 가톨릭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피치노로부터 사랑과 미의 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정신에 내재하는 이미지’를 대리석이라는 질료로 구체화했습니다. 자신의 예지를 신뢰한 그는 그 안에서 미를 질료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정신의 형상을 구체화하는 것을 예술가의 사명으로 인식하여 미술을 형상과 질료 사이의 교량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신의 형상을 돌덩이에 새겨 넣으면 그것이 생명력을 지니며 조각의 드러난 형상은 정신 안에 있는 자신의 형상에 상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조각을 제작하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불멸하는 지고의 선 혹은 미에 대한 사랑이며, 질료는 사랑의 대상으로 임시 존재할 뿐입니다. 그는 인체의 미적 형체에 전념했는데, 아름다운 인체는 신으로 하여금 관조를 용이하게 해주는 작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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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로마 피에타>의 부분
마리아의 얼굴은 사랑스러우면서도 근심으로 가득 찼지만, 표정은 침착하면서도 평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안고 있는 시신이 신의 아들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비탄은 없을 수 없기에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로마 피에타>에서 미켈란젤로는 삼십 중반의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를 젊은 여인으로 묘사했습니다. 실제로는 오십을 넘었을 마리아를 이토록 젊은 모습으로 묘사한 이유는 불멸의 젊음으로 마리아의 온전한 순결을 상징하려고 한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보다 젊게 묘사된 것은 단테의 『신곡』 천국 편에서 성 베르나르의 기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동정녀 어머니, 당신 아들의 딸이여,
비천하면서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 격찬을 받는 이여,
영원한 의지의 목적을 정하신 분이여,
당신이야말로 인류를 고상하게 만드셨고
조물주로 하여금 피조물들을 멸시하지 않게 하시고
조물주 자신을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작품을 의뢰한 추기경 드 라그롤라는 작품이 완성되는 것도 보기 전 1499년 8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프랑스 왕이 바티칸에 파견한 사람들 가운데 최고 책임자였으므로 시신은 프랑스 왕의 예배당인 산 페트로넬라 예배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원래 벽감에 안치될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나 완성되자마자 추기경의 묘비 평석 바로 앞 낮은 방형대좌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며 산 페트로넬라 예배당을 부수게 되자 작품의 위치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서명한 유일한 작품이자 그를 자립시켜준 <로마 피에타>는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과 더불어 초기 르네상스를 마감하고 예술적으로 더욱 진전된 성기 르네상스를 연 작품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