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지배하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499년 4월 말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에게 포르타 베르첼리나 지방의 포도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주었습니다. 이는 그가 레오나르도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였거나 금고가 바닥이 나서 돈 대신 땅을 준 것으로 짐작됩니다. 1498년 4월부터 루도비코는 정치적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샤를 8세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여자는 통치지역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살리족의 법을 무시하고 비스콘티 공주였던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밀라노를 자신의 통치령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루도비코는 동맹국들 베네치아, 피사, 피렌체, 독일, 그리고 터키와 외교관계를 강화해나갔습니다. 그러나 루이는 비밀리에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피렌체와는 중립적인 관계를 맺은 후 밀라노를 칠 준비를 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알프스를 넘어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1498년 여름 초 프랑스군이 알프스를 넘어오고 있을 무렵 레오나르도는 코르테 베키아 궁에 틀어박힌 지안 갈레아조의 미망인 이사벨라를 위해 목욕탕과 스토브를 고쳐주고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에는 몇 페이지에 걸쳐 보일러와 배관에 관한 디자인이 그려져 있으며 이상적인 온도로 뜨거운 물과 찬 물이 3:1 비율로 섞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군이 8월에 타나로 강이 바라보이는 아라조를 점령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이사벨라의 목욕탕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었습니다.
루이의 군대는 빠르게 남하하여 안노네의 요새와 바시나노, 보기에라, 카스텔누오보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베네치아 군인들도 동쪽으로부터 롬바르디아를 공격해오면서 “이제는 무어인(루도비코의 별명)이 춤을 출 차례다!”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루도비코와 약속했던 동맹국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갈레아조 다 산세베리노는 성을 굳게 닫고 불명예스러운 은둔에 들어갔고, 동생 카이아조의 공작은 프랑스에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루도비코의 회계 담당자는 밀라노 군중에게 폭행당했고, 수하의 장군들은 달아났습니다. 밀라노는 대포 한 방 쏘아보지도 못하고 1498년 9월 14일 조건부로 항복했습니다. 10월 6일 루이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밀라노에 입성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이탈리아 왕족, 프랑스 추기경, 외교관들을 이끌고 와서 세금을 감면해주겠다는 선심을 썼으므로 밀라노 시민들은 열렬히 그를 환영했습니다. 루도비코의 많은 조신들은 이미 밀라노를 떠났지만 레오나르도는 망설였습니다.
파올로 조비오의 기록에 의하면 루이 12세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수도원에서 <최후의 만찬>을 보고 대단히 매료되어 그것을 떼어 프랑스로 운반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으로 봐서 루이가 레오나르도를 기꺼이 만났을 것이고 자신을 위해 일해 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또한 프랑스군의 사령관 리니의 백작은 레오나르도를 통해서 토스카나의 요새에 관해 알고 싶었으므로 자신에게 협조하기를 원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에 백작을 언급한 구절들이 있지만, 그가 백작에게 얼마만큼 협조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밀라노인들을 약탈하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러 밀라노인들의 반감을 사기 시작했으므로 레오나르도가 그들에게 협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밀라노를 떠나기에 앞서, 1499년 말 그동안 모아둔 돈을 은행의 역할을 했던 피렌체의 몬테 디 피에타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으로 송금하고 루카 파치올리와 사랑하는 살라이와 함께 밀라노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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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젊은이의 옆모습 (살라이?)>, 1510년경, 21.7-15.3cm.
1500년 초 레오나르도가 베네치아로 갔을 때는 스페인군이 나폴리를 놓고 프랑스군과 충돌했으며 나중에는 롬바르디아를 두고 프랑스와 겨루던 시기였습니다.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을 내모는 데 성공했지만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이탈리아가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건 19세기에 들어서서 통일을 이룩한 후였습니다. 베네치아인들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존경심을 표했지만 그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바사리의 말로는 젊은 조르조네Gioregione(1476/8-1510)가 레오나르도의 “부드럽고 어두운” 양식을 매우 좋아했으며 평생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유화에 폭넓게 사용했으며 팔마 베키오 역시 레오나르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르조네의 <목자들의 경배>, 1505-10년경, 91-111cm.
조르조네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바사리의 전기와 베네치아의 역사가인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 쓴 베네치아미술품에 대한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작품을 제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서명과 제작연도가 있는 작품 도한 한 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는 공적인 후원자를 위한 대형 장식화보다는 개인 수집가를 위해 소형 유화를 그린 최초의 화가입니다. 또한 풍경을 위한 풍경화가 기이하게 여겨지던 때에 시적 정취가 있는 풍경화를 최초로 그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르조네는 새로운 회화의 창시자로서 미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