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창조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505년,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에게는 성공과 더불어 부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율리우스 2세가 그해 3월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 자신의 기념비적인 거대한 무덤제작을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로 7m 가로 11m 크기의 무덤에 마흔 개 이상의 실재 사람 크기의 조상들이 장식되는 매우 큰 작업으로 이런 장대하고 화려한 교황 무덤은 과거에 없었습니다.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작은 예배당을 하나 건립할 수 있는 1만 두카트라는 큰돈을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카라라 채석장으로 가서 12월까지 체류하면서 직접 대리석을 골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1506년 로마로 돌아왔을 때 교황에 대한 그의 면회가 사절되었기에 무덤 장식에 대한 작업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몹시 화를 내며 4월 18일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한동안 교황과 반목했으나 그해 11월 21일 볼로냐에서 교황을 만나면서 화해했습니다. 교황은 볼로냐를 로마 다음의 가톨릭 요새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성 페트로니우스의 대표적인 예배당 정면에 교황의 옥좌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청동으로 제작해 세울 것을 의뢰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06년 11월부터 1508년 2월 21일까지 볼로냐에 체류하면서 교황의 동상을 제작한 후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1511년 볼로냐는 공화국의 지도자 오토 데 라 구에라에 의해 다시 한 번 교황의 통치 영역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려 했고, 비록 거장 미켈란젤로의 작품이지만 교황의 동상을 제거해버렸습니다.

성기 르네상스를 출범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율리우스는 도나토 브라만테로 하여금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게 하고, 라파엘로를 기용하여 바티칸의 집무실을 장식하게 했으며, 1508년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Sistine Chapel의 천장화를 의뢰했습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임무는 예배당 천장 전체를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는 것으로 매우 큰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아직까지 그렇게 큰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을 뿐더러 벽이 아니라 높이가 20m도 넘는 높은 천장에 그리는 일이라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천장의 형태가 고르지 않아 인물들의 형태잡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인물들을 튀어나온 것처럼 그리거나 공간에 따라 간격을 조절해가면서 그려야 했습니다. 또한 채광에 따라 색채를 조절해서 그려야 했기 때문에 더욱 어렵고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아니라 그림을 의뢰받은 일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천장 벽화는 세 단계를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곰팡이가 피어 실패했고, 두 번째는 그가 천장의 절반을 채웠을 때 자금부족으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1511년 여름부터 시작된 세 번째 제작단계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가 이 작업을 완성하는 데는 꼬박 4년이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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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궁전과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광장 평면도

오늘날 바티칸 미술관으로 더욱 알려진 바티칸 궁전은 가톨릭교회 대분열에 종지부를 찍은 교황 니콜라우스 5세(1447-55년 재위)에 의해 착공되어 15-16세기에 걸쳐 완공되었습니다. 실제로 대규모 건설을 주도한 사람은 식스투스 4세입니다. 그러나 이 예배당은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한 천장화와 중앙 제단 뒤의 벽화 <최후의 심판>에 의해 더 유명해졌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과 함께 ‘라파엘로의 방’으로 총칭되는 ‘서명의 방’, ‘엘리오드로의 방’, ‘화재의 방’ 등 큰 홀의 벽화가 유명하며,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것입니다. <아테네 학당>을 포함한 ‘서명의 방’과 ‘엘리오드로의 방’ 벽화는 라파엘로 예술의 정점에 점하는 걸작입니다.

건축으로는 벨베데레라고 하는 빌라가 정원 끝에 건설되었으며, 이것은 뒤에 브라만테에 의해 두 채의 긴 복도로 궁전과 접속되고 동시에 ‘벨베데레의 중정’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대 조각이 늘어서 있고, 일종의 미술관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이 중정도 식스투스 5세(1585-90년 재위)에 의해 세워진 바티칸 도서관 건물에 의해 양단되어 있습니다. 니콜라우스 5세가 창설한 도서관 자체의 수집은 그 뒤 역대 교황들에 의해 좀 더 충실해졌고, 구약성서 <여호수아서> 등 중세의 귀중한 사본류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1471년 교황에 즉위한 식스투스 4세(율리우스 2세의 삼촌, 1741-84년 재위)에 의해 1475년 바티칸 궁전 내에 건립되기 시작하여 1483년에 완공되었고, 그해 8월 15일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습니다.

예배당의 높이는 20.7m이고, 길이 40.5m, 폭 13.2m입니다. 건축가들 미노 다 피솔레, 안드레아 브레뇨, 조반니 달마타가 대리석 판을 사용해 초기 르네상스 방법으로 복잡한 구조로 만들면서, 난간으로 유명한 설교단을 만들었습니다. 식스투스 4세는 설계 당시부터 회화 장식을 고려했던 이 예배당에 1481-83년 여러 명의 화가들로 하여금 예배당 양쪽 벽에 프레스코를 그리게 했는데, 이 작업에 참여한 화가들은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젤리, 피에로 디 코시모, 페루지노, 핀투리키오, 루카 시뇨렐리, 프라 바르톨로메오였습니다. 그중 페루지노는 제단 뒤 벽의 왼쪽에 모세가 갈대 바구니 속에서 발견되는 장면을, 오른쪽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렸고, 제단 바로 뒤에 <성모의 승천>을 그렸습니다. 두 그림을 시작으로 벽 상단의 왼쪽에 모세의 생애, 오른쪽 벽면에 그리스도의 삶에서 따온 장면들이 현관까지 이어졌습니다. 현재 이 그림들은 미완성으로 남아있습니다. 율리우스는 파란 바탕에 기하학적 황금색 별무늬로만 장식된 원래의 둥근 천장이 낡아 손상되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를 부탁했으며, 그는 <창세기> 등을 주제로 한 천장화와 중앙 제단 뒤의 벽화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원형 창문들 사이 벽감에는 다양한 모습과 교황들을 작은 프레스코로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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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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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토네티의 <1483년의 시스티나 예배당 내부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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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바르바자의 <시스티나 예배당 내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보이는 제단쪽 방향>, 1766, 엔그레이빙, 42-78cm.

이것은 바르바자가 프란체스코 파니니의 작품을 묘사한 것으로 이 작품에 나타난 벽화는 실재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부수적 공간에는 어두운 색을 칠해 더욱 효과적으로 리듬감을 부여했습니다. 인물들의 크기를 다르게 그렸는데, 조각상과 같은 효과를 내야 하는 인물과 그림으로 나타내야 하는 이야기 부분의 인물로 구분했습니다. 예언자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은 이야기적 그림 속의 공간과는 다른, 뵐플린의 말을 빌면 현실적 공간에 그려져 있습니다. 각각의 공간은 각각의 화면으로 전개되어 동시에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하나씩 바라보게 되지만, 다양한 인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통일된 효과를 창출한 데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놀라운 창조입니다. 이는 건축적 구획의 단순함이 강력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기둥, 벽 띠, 옥좌들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단색의 효과가 십분 이용되었습니다. 그가 15세기의 다채로운 장식적 무늬를 사용했다면 이런 리듬은 생겨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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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 제단쪽(서쪽)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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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 평신도용 출입구(동쪽) 방향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의 얼굴을 묘사하고 창세기로부터 창조의 에피소드를 묘사한 후 인간의 죄악과 예언자들의 활약을 구약성서를 근거로 천장 전체를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제단 쪽 벽면에 <최후의 심판>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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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이야기: 아버지의 유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마을에 사는 한 현인이 아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중병에 걸렸습니다. 현인은 아무래도 아들을 못 보고 죽을 것 같아 유서를 썼습니다. 그는 유서에 모든 재산을 한 노예에게 상속하고 아들에게는 아들이 원하는 한 가지를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현인은 죽었고, 노예는 자신의 행운을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주인집 아들에게 현인의 죽음을 알리고 유서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들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아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랍비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는 랍비에게 말했습니다.

여태까지 전 아버님을 화나게 해드린 일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는데, 아버님께선 모슨 이유로 저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랍비가 말했습니다.

진정하게. 자네 아버님께선 매우 현명한 분이시네. 아버님께서 자네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것일세. 유서가 그걸 말해주고 있네.

그렇지만 아들은 납득할 수 없어 계속 원망했습니다.

노예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하시다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아버님께서 절 조금이라도 사랑하셨다면 그런 어리석은 조치를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랍비가 그를 타일렀습니다.

자네도 아버님처럼 현명한 생각을 가져야 하네. 자네 아버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분이 자네에게 남기신 것이 무엇인지 곧 알 수 있을 것이네.

아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자 랍비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자신이 죽고 나면 아들인 자네가 집에 없으므로 노예가 재산을 갖고 달아나거나 탕진하거나 또는 경우에 따라서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마저도 아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네. 또한 모든 재산을 노예에게 상속한다는 유서를 남기신 건 재산을 모두 노예에게 상속함으로써 노예가 기뻐하며 자네에게 달려가 자신의 죽음을 알릴 것이고, 재산도 소중하게 건수해 둘 것이라는 걸 아버님께선 알고 계셨던 것이네.

아들이 말했습니다.

그것이 제게 무슨 소용이란 말씀입니까?

자넨 젊은 탓에 자네 아버님의 현명함에 미치지 못하는군. 노예의 재산은 모두 주인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아버님께서는 유서에 분명 한 가지만은 자네에게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고 쓰셨지 않은가? 그러니까 자네는 전 재산을 가진 노예를 선택하면 될 것이야. 자네 아버님의 애정과 현명함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네.

그제야 비로소 아들은 아버지의 깊은 뜻을 깨달았고, 랍비의 말대로 한 뒤 그 노예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 후 그 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지혜는 감히 따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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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밀라노 궁정의 인정을 받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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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광야의 세례 요한을 위한 스케치>, 1508-15년경, 24-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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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화파의 <레다>, 1508-15년경

래오나르도의 작품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제우스가 스파르타 왕 틴다루스의 아내 레다를 유혹하기 위해 백조로 변신했다는 기상천외한 전설이 레오나르도에게 호감을 주었고, 그는 레다가 두 쌍의 쌍둥이가 나오는 두 개의 알을 낳은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쌍둥이들은 카스토르, 폴룩스, 클리템네스트라, 헬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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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화파의 <레다>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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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레다 머리의 습작>, 20-16.2cm.



레오나르도가 1506년 5월 30일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간 건 프랑스 왕의 명으로 밀라노를 다스리던 총독 샤를 앙부아즈의 부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1482년 처음 밀라노를 가본 후 1507년, 1509년과 1511년 세 차례 더 내방했습니다. 두 번째 밀라노 체류기간 동안 그는 두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루브르에 있는 <광야의 세례 요한>과 우피치에 있는 <레다>입니다. <성모자와 성 앤>, <모나리자>, <광야의 세례 요한>, <레다>에서의 미소는 레오나르도가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영혼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입니다.

학식 있는 시인 안토니오 세니가 레오나르도에게 레다를 주제로 그릴 것을 권했고, 레오나르도 자신도 오비디우스의 『변신 Metamorphoses』를 읽고 제우스의 변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레다>는 레오나르도의 첫 여자 누드이면서 처음으로 고대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입니다. 레다는 무릎을 모으고 서서 백조를 밀어내듯이 애무하고 있습니다. 상체를 튼 조형성, 머리의 각도, 가로지른 팔, 아래로 처진 어깨 등으로 레다는 적나라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여자 누드의 아름다움에 민감했는데, 피부의 부드러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피렌체의 동시대 화가들도 여자 누드를 그렸지만, 대개 피부의 질감보다는 형상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에는 <레다>에서 볼 수 있는 매력이 없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입체화 기법을 사용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섬세한 촉감을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레오나르도가 그린 <레다>는 현존하지 않고 모작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원작은 루이 13세 휘하의 장관들 중 하나가 1700년경 완고한 신앙을 가진 늙은 마담 드 마인테농의 명을 받아 파괴했거나 불에 태워 없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본래 그림이 어떠했는지는 라파엘로의 드로잉과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모작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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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무릎을 꿇은 레다와 백조>, 16-1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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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무릎을 꿇은 레다와 백조>, 16-1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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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소 피오렌티노의 <미켈란젤로의 레다와 백조 모사>, 1530년 이후, 170-248cm.

미켈란젤로는 백조와 스파르타 왕후를 그리스인이 대리석으로 조각하듯 괴물 같은 한 쌍으로 왕후를 육감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레오나르도의 그림과는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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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레다와 백조>, 1506년경, 레오나르도의 작품 모사, 20.8-19.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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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미상의 <레다와 백조>, 16세기,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112-86cm.


<레다>를 그리기 위한 레오나르도의 습작이 여러 점 현존하는데 <안기아리 전투>를 그릴 무렵부터 습작하기 시작했으며, 밀라노에 두 번째 체류하면서 계속 드로잉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레다>는 16세기의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도 <레다>를 그렸는데, 현존하지 않으며 이를 모사한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의 <레다>는 레오나르도의 것보다는 신화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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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라피오의 <프란체스코 멜치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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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멜치의 <포모나와 베르툼노스>, 1517-20년경, 패널에 유채, 185-134cm.


<광야의 세례 요한>과 <레다>를 그리면서 레오나르도는 바프리오 지역의 열다섯 살 난 귀족의 아들 프란체스코 멜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멜치는 레오나르도를 잘 따랐으며, 레오나르도의 제자가 되어 회화를 배우겠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훌륭한 롬바르드 가문의 아들이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데 대해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2세 휘하의 지휘관이었던 아버지 지롤라모 멜치가 반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롤라모가 개방적이었거나 레오나르도의 명성이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멜치는 레오나르도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면서 그가 병이 났을 때는 간호해주었고, 작업장을 살라이와 함께 책임지고 관리했습니다. 멜치의 작품이 몇 점 있는데, <포모나와 베르툼노스>를 보면 레오나르도의 화법을 답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07년 레오나르도는 루이 12세의 상임 화가 겸 공학가에 선임되었습니다. 1507년 혹은 그 이듬해 루이가 신임한 장군 중 한 사람인 마샬 트리불지오는 레오나르도에게 산 라자로 예배당 내 자신의 무덤 디자인을 주문했습니다. 장군은 자신이 말을 탄 모습으로 무덤에 장식되기를 원했으므로 레오나르도는 다시 말의 포즈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그의 드로잉을 보면 전에 스포르차 동상의 구상과는 달리 장군이 지휘봉을 들고 있으며 갑옷을 입은 상태이지만 젊은이의 혈기 있는 모습입니다. 그의 드로잉은 트리불지오의 모습이 아니라, 군대 지휘관의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조각받침대도 고안했으며, 개선문의 형상과 고대 사원의 석관을 안치하는 형상 등으로 미켈란젤로가 율리우스 2세를 위해 디자인한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일에 집념을 갖고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세밀하게 드로잉하고 테라코타로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청동 가격을 파악하여 트리불지오 장군에게 예산을 보고했습니다. 동상의 대좌를 위한 대리석을 연마하는 노동자들의 인건비와 그 밖에 무덤에 필요한 돌과 건축적 작업에 필요한 인건비를 상세히 보고서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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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마음을 일으키고 형성한다


마음이 변하면 뇌 또한 변화합니다. 심리학자 도널드 헵Donald Olding Hebb(1904-85)의 연구에 따르면 뇌의 뉴런들이 함께 작동할 때, 이들 사이에는 연결이 생겨납니다. 즉 정신적 활동은 실제로 신경구조를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 흘러가는 생각이나 느낌조차도 뇌에 흔적을 남기는데, 이는 봄비가 언덕에 작은 자국을 남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흘러가느냐가 우리의 뇌를 만들어나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통해 우리의 뇌를 더욱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삶의 질이 더욱 나아지고, 함께하는 다른 이들의 삶도 나아지게 됩니다.

우리의 뇌는 약 1.5kg 정도의 두부 같은 조직으로 1조1천억 개 이상의 세포로 이뤄져 있으며, 1천억 개 이상의 뉴런이 들어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각 뉴런은 약 5천 개의 연결, 즉 시냅스를 통해 다른 뉴런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시냅스에서는 다른 뉴런으로부터 신경전달물질이라는 화학물질 분비로 대표되는 신호를 받게 됩니다. 신호에 따라 뉴런은 작동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데, 이는 매 순간 받아들인 다양한 신호의 조합을 통해 신호를 보내어 다른 뉴런의 작동 여부를 알려주게 됩니다.

각 뉴런의 신호는 소량의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뇌가 정보를 운반하는 체계는 심장이 혈액을 운반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러한 정보들이 모여서 마음을 만들어내는데, 대부분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합니다.

뇌는 마음을 일으키고 형성합니다. 뇌의 무게는 체중의 2%에 불과하지만, 산소와 포도당의 20-25%를 사용할 만큼 바쁘게 움직입니다. 뇌는 냉장고처럼 항상 윙윙거리며 일하기 때문에 깊은 사색을 할 때나 잠들어있을 때나 거의 같은 양의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1천억 개의 뉴런의 조합 결과인 작동 여부에 대한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보면 10의 백만 제곱, 즉 1 뒤에 0이 백만 개 붙어 있는 수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상태의 수인 셈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수가 겨우 10의 80제곱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것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 수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뇌는 전체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일하기 때문에 주의나 감정 같은 기능을 뇌의 한 부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건 대개 지나친 단순화에 불과합니다.

의식적인 정신 작용은 대개 몇 초 안에 이뤄지는 시냅스의 형성과 해체에 따른 일시적인 합동의 결과이며, 이는 개울물의 작은 소용돌이와도 흡사합니다.

우리 뇌는 몸의 다른 부분과도 상호작용을 하며 이를 통해 외부와 상호작용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뇌와 신체,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자연 환경과 사회, 문화, 그리고 마음 그 자체에 의해 모습을 갖춥니다. 마음과 뇌는 지극히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므로 상호의존적인 하나의 체계로 보아 마음/뇌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명상이 마음과 뇌를 평온하게 하여 마음속의 고요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정교한 방법으로 마음과 뇌를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참선이나 기도 등을 해보았거나 고요한 밤하늘의 별들을 경외심을 갖고 바라본 적이 있다면 이미 명상수련을 경험한 셈입니다. 과학은 여러 종교 가운데 불교를 주로 연구하고 있는데, 이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신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믿음 그 자체에서 무언가를 기대하지 말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교는 심리학과 신경학적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마음에 대한 상세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청년 싯다르타 태자가 여러 해에 걸쳐 마음과 뇌를 수련했고, 깨달음에 이른 날 밤, 그는 마음 깊숙이 파고 들어가 고통의 원인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사십여 년 동안 북인도 전역을 돌며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싯다르타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 즉 욕망과 증오의 불길을 끄고 청정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법, 한결같이 마음을 집중하여 번뇌는 벗어나는 법, 정각에 이르는 길 설파했습니다. 삼학은 불교 수행의 세 기둥이라 할 수 있으며, 매일의 행복의 원천이 될 뿐 아니라, 심리학적 성장과 함께 영적 깨달음의 근간이 됩니다.

계戒란, 우리의 행동과 말, 그리고 생각을 통제함으로써 자신과 남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 덕을 쌓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에서 계는 전전두 피질의 명령에 의존한다. 전전두란 이마 바로 뒤, 뇌의 가장 앞쪽이며 피질은 뇌의 바깥쪽 층을 의미합니다. 계는 또한 부교감신경계와 대뇌 변연계에서의 긍정적인 감정에 의해 상향적으로 조절되기도 합니다. 계는 공감, 친절, 사랑의 뇌를 이루는 근거가 됩니다.

정定은 우리 내부와 외계를 파악할 때 어떻게 주의 집중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뇌는 집중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주로 정보를 얻게 되기 때문에 정은 좋은 경험을 받아들이는 데에, 아울러 그것을 우리의 일부로 만드는 관문이 됩니다.

혜慧는 상식에 관한 것으로,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상처 입히고, 도움을 주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즉 고통의 원인과 고통을 끝내는 법을 일컬음입니다.

계戒, 정定, 혜慧는 조절, 학습, 그리고 선택이라는 뇌의 세 가지 기능에 의해 유지됩니다. 뇌는 스스로를 조절할 뿐 아니라 우리 몸 점체도, 신호등의 초록불과 빨간불처럼 흥분과 억제 활동의 조합을 통해 조절합니다. 또한 뇌는 새로운 회로를 형성하며 기존의 회로를 강화 혹은 약화시킴으로써 학습합니다. 또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에 가치를 매기고 정보를 취사선택합니다.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이들 세 가지 기능이 신경계의 모든 수준에서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시냅스 말단에서 복잡하게 뒤얽힌 화학물질의 조합으로부터 전체 뇌의 통합적 조절, 반응, 인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요 정신 작용에 관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戒, 정定, 혜慧 각각은 이들 기능 중 하나와 특히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계는 조절에 주로 의존하는데, 양자 모두 긍정적인 경향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것을 억제하고, 정은 새로운 것을 학습하게끔 하는데 이는 주의집중을 통해 뇌의 회로가 형성되며 과거 학습의 결과를 안정되고 확고한 인지 상태로 발전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혜는 다양한 선택의 결과를 안정되고 확고한 인지 상태로 발전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혜는 다양한 선택의 문제인데, 더 큰 즐거움을 위해 사소한 것을 버리는 것 등이 그 예입니다. 결과적으로 계, 정, 혜를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조절, 학습, 선택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들 세 가지 신경계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은 계, 정, 혜 세 가지 기둥을 떠받쳐주는 버팀목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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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론의 탄생


우주가 정적이면서 균일하다는 것이 1920년대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이 가진 견해였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우주전역에 걸쳐 먼지와 별들이 골고루 분포되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도 리처드 벤틀리의 문제에 직면하여 중력이 항상 인력으로 작용하므로 별들은 결국 중심부를 향해 뭉칠 것이며 따라서 우주가 파국적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주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뉴턴과 마찬가지로 그도 우주가 정적인 상태를 영원히 유지한다고 보았으므로 방정식으로 정적인 우주를 유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1917년 자신의 방정식에 우주상수cosmological constant라는 새로운 항을 추가하여 난처한 상황을 피했습니다. 우주상수를 첨가하면 반중력antigravity이 도입되어 우주의 파국적 종말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이론적으로 우주상수는 ‘밀어내는 중력’인 반중력을 생성하고 반중력이 중력과 서로 상쇄되면 우주는 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기존의 중력이 정확하게 상쇄되도록 우주상수의 값을 임의로 결정함으로써 정적인 우주를 인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중력은 암흑물질이 생성하는 반중력과 정확하게 상쇄됩니다. 그 후 70년 동안 우주상수는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최근 몇 년 전에 우주의 비밀을 풀 후보로 주목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 물리학자 빌렌 드 지터Wilhelm de Sitter(1872~1934)는 1917년에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연구하면서 무한히 크면서 물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우주도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만족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밀어내는 반중력에 의해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야 합니다. 진공에 물질이 전혀 없더라도 그곳의 암흑에너지가 우주를 팽창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드 지터의 논문으로 물리학자들은 난관에 빠졌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우주는 정적이면서 그 속에 물질이 존재하지만 드 지터의 우주는 동적이면서 물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드 지터의 우주에서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가 팽창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1919년 한 무리의 천문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장거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태양 근처의 공간이 휘어져있으므로 그곳을 지나는 별빛의 경로도 휘어진다는 것을 예견한 바 있었습니다. 이때 빛의 구부러지는 정도를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으로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태양 근처에 있는 별은 태양 빛에 가려 보이지 않으므로 천문학자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영국의 천문학자, 이론물리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1882~1944)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영국에 처음 소개한 사람으로 왕립천문학회의 간사였던 에딩턴은 1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드 지터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입수한 뒤 1918년에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영국 물리학회에 기고했습니다. 에딩턴은 1919년 관측 팀을 이끌고 아프리카 서해안의 기니 만Gulf of Guinea 근처에 있는 프린시페Principe 섬으로 가서 일식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임무는 일식이 진행될 때 태양 근처에 있는 별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천문학자 앤드루 크로멜린Andrew Claude de la Cherois Crommelin(1865~1939)이 이끈 또 한 팀의 학자들은 브라질 남부의 수브랄Sobral로 가서 동일한 관측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이 관측한 별빛의 이탈각departure angle은 평균 1.79초(1초=1/60분=1/3600도)였는데, 이 값은 아인슈타인이 예견했던 1.74초와 거의 일치했습니다. 이론과 실험의 차이는 오차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진다는 일반상대성이론의 예견은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1919년 11월 6일, 영국 왕립학회와 왕립천문학회의 연합모임에서 노벨상 수상자이자 왕립학회 회장 조셉 존 톰슨 경Sir Joseph John Thompson(1856~1940)은 말했습니다. 톰슨은 전자가 최소 전하를 가진 하전체임을 입증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간사고의 산물이다. 비유로 말하면 아인슈타인은 외딴 섬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과학이 싹트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중력을 설명하는 그의 이론은 뉴턴 이후 가장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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