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밀라노 궁정의 인정을 받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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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광야의 세례 요한을 위한 스케치>, 1508-15년경, 24-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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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화파의 <레다>, 1508-15년경
래오나르도의 작품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제우스가 스파르타 왕 틴다루스의 아내 레다를 유혹하기 위해 백조로 변신했다는 기상천외한 전설이 레오나르도에게 호감을 주었고, 그는 레다가 두 쌍의 쌍둥이가 나오는 두 개의 알을 낳은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쌍둥이들은 카스토르, 폴룩스, 클리템네스트라, 헬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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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화파의 <레다>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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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레다 머리의 습작>, 20-16.2cm.
레오나르도가 1506년 5월 30일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간 건 프랑스 왕의 명으로 밀라노를 다스리던 총독 샤를 앙부아즈의 부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1482년 처음 밀라노를 가본 후 1507년, 1509년과 1511년 세 차례 더 내방했습니다. 두 번째 밀라노 체류기간 동안 그는 두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루브르에 있는 <광야의 세례 요한>과 우피치에 있는 <레다>입니다. <성모자와 성 앤>, <모나리자>, <광야의 세례 요한>, <레다>에서의 미소는 레오나르도가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영혼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입니다.
학식 있는 시인 안토니오 세니가 레오나르도에게 레다를 주제로 그릴 것을 권했고, 레오나르도 자신도 오비디우스의 『변신 Metamorphoses』를 읽고 제우스의 변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레다>는 레오나르도의 첫 여자 누드이면서 처음으로 고대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입니다. 레다는 무릎을 모으고 서서 백조를 밀어내듯이 애무하고 있습니다. 상체를 튼 조형성, 머리의 각도, 가로지른 팔, 아래로 처진 어깨 등으로 레다는 적나라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여자 누드의 아름다움에 민감했는데, 피부의 부드러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피렌체의 동시대 화가들도 여자 누드를 그렸지만, 대개 피부의 질감보다는 형상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에는 <레다>에서 볼 수 있는 매력이 없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입체화 기법을 사용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섬세한 촉감을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레오나르도가 그린 <레다>는 현존하지 않고 모작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원작은 루이 13세 휘하의 장관들 중 하나가 1700년경 완고한 신앙을 가진 늙은 마담 드 마인테농의 명을 받아 파괴했거나 불에 태워 없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본래 그림이 어떠했는지는 라파엘로의 드로잉과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모작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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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무릎을 꿇은 레다와 백조>, 16-1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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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무릎을 꿇은 레다와 백조>, 16-1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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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소 피오렌티노의 <미켈란젤로의 레다와 백조 모사>, 1530년 이후, 170-248cm.
미켈란젤로는 백조와 스파르타 왕후를 그리스인이 대리석으로 조각하듯 괴물 같은 한 쌍으로 왕후를 육감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레오나르도의 그림과는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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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레다와 백조>, 1506년경, 레오나르도의 작품 모사, 20.8-19.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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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미상의 <레다와 백조>, 16세기,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112-86cm.
<레다>를 그리기 위한 레오나르도의 습작이 여러 점 현존하는데 <안기아리 전투>를 그릴 무렵부터 습작하기 시작했으며, 밀라노에 두 번째 체류하면서 계속 드로잉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레다>는 16세기의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도 <레다>를 그렸는데, 현존하지 않으며 이를 모사한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의 <레다>는 레오나르도의 것보다는 신화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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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라피오의 <프란체스코 멜치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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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멜치의 <포모나와 베르툼노스>, 1517-20년경, 패널에 유채, 185-134cm.
<광야의 세례 요한>과 <레다>를 그리면서 레오나르도는 바프리오 지역의 열다섯 살 난 귀족의 아들 프란체스코 멜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멜치는 레오나르도를 잘 따랐으며, 레오나르도의 제자가 되어 회화를 배우겠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훌륭한 롬바르드 가문의 아들이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데 대해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2세 휘하의 지휘관이었던 아버지 지롤라모 멜치가 반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롤라모가 개방적이었거나 레오나르도의 명성이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멜치는 레오나르도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면서 그가 병이 났을 때는 간호해주었고, 작업장을 살라이와 함께 책임지고 관리했습니다. 멜치의 작품이 몇 점 있는데, <포모나와 베르툼노스>를 보면 레오나르도의 화법을 답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07년 레오나르도는 루이 12세의 상임 화가 겸 공학가에 선임되었습니다. 1507년 혹은 그 이듬해 루이가 신임한 장군 중 한 사람인 마샬 트리불지오는 레오나르도에게 산 라자로 예배당 내 자신의 무덤 디자인을 주문했습니다. 장군은 자신이 말을 탄 모습으로 무덤에 장식되기를 원했으므로 레오나르도는 다시 말의 포즈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그의 드로잉을 보면 전에 스포르차 동상의 구상과는 달리 장군이 지휘봉을 들고 있으며 갑옷을 입은 상태이지만 젊은이의 혈기 있는 모습입니다. 그의 드로잉은 트리불지오의 모습이 아니라, 군대 지휘관의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조각받침대도 고안했으며, 개선문의 형상과 고대 사원의 석관을 안치하는 형상 등으로 미켈란젤로가 율리우스 2세를 위해 디자인한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일에 집념을 갖고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세밀하게 드로잉하고 테라코타로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청동 가격을 파악하여 트리불지오 장군에게 예산을 보고했습니다. 동상의 대좌를 위한 대리석을 연마하는 노동자들의 인건비와 그 밖에 무덤에 필요한 돌과 건축적 작업에 필요한 인건비를 상세히 보고서에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