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창조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505년,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에게는 성공과 더불어 부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율리우스 2세가 그해 3월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 자신의 기념비적인 거대한 무덤제작을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로 7m 가로 11m 크기의 무덤에 마흔 개 이상의 실재 사람 크기의 조상들이 장식되는 매우 큰 작업으로 이런 장대하고 화려한 교황 무덤은 과거에 없었습니다.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작은 예배당을 하나 건립할 수 있는 1만 두카트라는 큰돈을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카라라 채석장으로 가서 12월까지 체류하면서 직접 대리석을 골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1506년 로마로 돌아왔을 때 교황에 대한 그의 면회가 사절되었기에 무덤 장식에 대한 작업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몹시 화를 내며 4월 18일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한동안 교황과 반목했으나 그해 11월 21일 볼로냐에서 교황을 만나면서 화해했습니다. 교황은 볼로냐를 로마 다음의 가톨릭 요새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성 페트로니우스의 대표적인 예배당 정면에 교황의 옥좌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청동으로 제작해 세울 것을 의뢰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06년 11월부터 1508년 2월 21일까지 볼로냐에 체류하면서 교황의 동상을 제작한 후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1511년 볼로냐는 공화국의 지도자 오토 데 라 구에라에 의해 다시 한 번 교황의 통치 영역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려 했고, 비록 거장 미켈란젤로의 작품이지만 교황의 동상을 제거해버렸습니다.

성기 르네상스를 출범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율리우스는 도나토 브라만테로 하여금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재건축하게 하고, 라파엘로를 기용하여 바티칸의 집무실을 장식하게 했으며, 1508년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Sistine Chapel의 천장화를 의뢰했습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임무는 예배당 천장 전체를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는 것으로 매우 큰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아직까지 그렇게 큰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을 뿐더러 벽이 아니라 높이가 20m도 넘는 높은 천장에 그리는 일이라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천장의 형태가 고르지 않아 인물들의 형태잡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인물들을 튀어나온 것처럼 그리거나 공간에 따라 간격을 조절해가면서 그려야 했습니다. 또한 채광에 따라 색채를 조절해서 그려야 했기 때문에 더욱 어렵고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아니라 그림을 의뢰받은 일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천장 벽화는 세 단계를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곰팡이가 피어 실패했고, 두 번째는 그가 천장의 절반을 채웠을 때 자금부족으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1511년 여름부터 시작된 세 번째 제작단계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가 이 작업을 완성하는 데는 꼬박 4년이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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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궁전과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광장 평면도

오늘날 바티칸 미술관으로 더욱 알려진 바티칸 궁전은 가톨릭교회 대분열에 종지부를 찍은 교황 니콜라우스 5세(1447-55년 재위)에 의해 착공되어 15-16세기에 걸쳐 완공되었습니다. 실제로 대규모 건설을 주도한 사람은 식스투스 4세입니다. 그러나 이 예배당은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한 천장화와 중앙 제단 뒤의 벽화 <최후의 심판>에 의해 더 유명해졌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과 함께 ‘라파엘로의 방’으로 총칭되는 ‘서명의 방’, ‘엘리오드로의 방’, ‘화재의 방’ 등 큰 홀의 벽화가 유명하며,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것입니다. <아테네 학당>을 포함한 ‘서명의 방’과 ‘엘리오드로의 방’ 벽화는 라파엘로 예술의 정점에 점하는 걸작입니다.

건축으로는 벨베데레라고 하는 빌라가 정원 끝에 건설되었으며, 이것은 뒤에 브라만테에 의해 두 채의 긴 복도로 궁전과 접속되고 동시에 ‘벨베데레의 중정’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대 조각이 늘어서 있고, 일종의 미술관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이 중정도 식스투스 5세(1585-90년 재위)에 의해 세워진 바티칸 도서관 건물에 의해 양단되어 있습니다. 니콜라우스 5세가 창설한 도서관 자체의 수집은 그 뒤 역대 교황들에 의해 좀 더 충실해졌고, 구약성서 <여호수아서> 등 중세의 귀중한 사본류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1471년 교황에 즉위한 식스투스 4세(율리우스 2세의 삼촌, 1741-84년 재위)에 의해 1475년 바티칸 궁전 내에 건립되기 시작하여 1483년에 완공되었고, 그해 8월 15일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습니다.

예배당의 높이는 20.7m이고, 길이 40.5m, 폭 13.2m입니다. 건축가들 미노 다 피솔레, 안드레아 브레뇨, 조반니 달마타가 대리석 판을 사용해 초기 르네상스 방법으로 복잡한 구조로 만들면서, 난간으로 유명한 설교단을 만들었습니다. 식스투스 4세는 설계 당시부터 회화 장식을 고려했던 이 예배당에 1481-83년 여러 명의 화가들로 하여금 예배당 양쪽 벽에 프레스코를 그리게 했는데, 이 작업에 참여한 화가들은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젤리, 피에로 디 코시모, 페루지노, 핀투리키오, 루카 시뇨렐리, 프라 바르톨로메오였습니다. 그중 페루지노는 제단 뒤 벽의 왼쪽에 모세가 갈대 바구니 속에서 발견되는 장면을, 오른쪽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렸고, 제단 바로 뒤에 <성모의 승천>을 그렸습니다. 두 그림을 시작으로 벽 상단의 왼쪽에 모세의 생애, 오른쪽 벽면에 그리스도의 삶에서 따온 장면들이 현관까지 이어졌습니다. 현재 이 그림들은 미완성으로 남아있습니다. 율리우스는 파란 바탕에 기하학적 황금색 별무늬로만 장식된 원래의 둥근 천장이 낡아 손상되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를 부탁했으며, 그는 <창세기> 등을 주제로 한 천장화와 중앙 제단 뒤의 벽화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원형 창문들 사이 벽감에는 다양한 모습과 교황들을 작은 프레스코로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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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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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토네티의 <1483년의 시스티나 예배당 내부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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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바르바자의 <시스티나 예배당 내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보이는 제단쪽 방향>, 1766, 엔그레이빙, 42-78cm.

이것은 바르바자가 프란체스코 파니니의 작품을 묘사한 것으로 이 작품에 나타난 벽화는 실재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부수적 공간에는 어두운 색을 칠해 더욱 효과적으로 리듬감을 부여했습니다. 인물들의 크기를 다르게 그렸는데, 조각상과 같은 효과를 내야 하는 인물과 그림으로 나타내야 하는 이야기 부분의 인물로 구분했습니다. 예언자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은 이야기적 그림 속의 공간과는 다른, 뵐플린의 말을 빌면 현실적 공간에 그려져 있습니다. 각각의 공간은 각각의 화면으로 전개되어 동시에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하나씩 바라보게 되지만, 다양한 인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통일된 효과를 창출한 데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놀라운 창조입니다. 이는 건축적 구획의 단순함이 강력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기둥, 벽 띠, 옥좌들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단색의 효과가 십분 이용되었습니다. 그가 15세기의 다채로운 장식적 무늬를 사용했다면 이런 리듬은 생겨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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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 제단쪽(서쪽)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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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 평신도용 출입구(동쪽) 방향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의 얼굴을 묘사하고 창세기로부터 창조의 에피소드를 묘사한 후 인간의 죄악과 예언자들의 활약을 구약성서를 근거로 천장 전체를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제단 쪽 벽면에 <최후의 심판>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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