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에 대한 프랑수아 1세의 환대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1516년 3월 17일 피렌체에서 타계했습니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는 후원자를 등에 업고 상당한 활약을 하고 있었지만, 줄리아노가 세상을 떠난 후 레오나르도에게는 새로운 후원자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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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클루에의 <프랑수아 1세>, 1525년경, 97-73cm.
루이 12세가 1515년 1월 9일에 타계하자 사촌이자 장인인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프랑수아 1세Francis I(1494-1547)였는데, 그는 레오나르도에 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왕으로 불리는 프랑수아 1세는 중세 기사출신 왕과도 같은 기질을 지녔지만, 품위가 있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였으며, 예술가와 인문주의 학자들을 후원했습니다. 1494년 코냐크에서 태어난 그는 1498년 사촌 루이 12세가 즉위했을 때 이미 왕위 계승자로 알려졌고, 공작령 발로아를 물려받았습니다. 스무 살 때 과주가 된 어머니에 의해 누이 마르게르트와 함께 성장했으며, 어머니를 존경한 그는 어머니에게 말할 때에는 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어머니와 누이뿐이었습니다.
루이는 프랑수아를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정치적으로 힘을 쓸 수 없도록 열여덟 살 때 그는 국경 수비를 맡겼습니다. 이때 그는 적의 공격을 받으며 전투에 대한 전략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루이는 사망하기 얼마 전 그를 자신의 열다섯 난 딸 클로드와 결혼시켰으며, 1515년 1월 1일 스무 살의 프랑수아가 프랑스 왕에 즉위했습니다. 루이는 증조모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유산인 밀라노 공작령을 다시 탈환할 수 있을 만한 군대를 남겼고, 프랑수아는 이를 자신이 수행해야 할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와 동맹을 맺은 교황 레오 10세는 프랑수아의 침입을 반겼고, 볼로냐에서 그를 맞았습니다. 교황은 그를 위한 향연을 베풀었습니다. 교황은 그에게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를 선물로 주었고, 프랑수아가 자신과 정교협약을 맺고 프랑스의 부유한 교회들이 자신에게 성직록을 바칠 것을 제안했습니다. 프랑수아는 자신의 주변에 예술가, 시인, 음악가, 학자들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주변에 두면서 “여인이 없는 궁전이란 봄이 없는 한 해와도 같으며, 장미가 없는 봄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프랑스 지방을 다니면서 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여 계속해서 여행했으므로 모든 면에서 두루 박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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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제자(프란체스코 멜치?)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상>, 1510년 이후, 27.4-1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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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바르톨로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1795, 엔그레이빙
16세기의 작가가 붉은색 초크로 드로잉한 것을 모사.
레오나르도는 후원자가 필요했으므로 프랑스로 가야 했습니다. 그해 8월 레오나르도는 산 파울리네 예배당의 바실리카를 측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향한 때는 1516년 가을이거나 이듬해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피렌체를 경유하여 밀라노, 제네브르 산 계곡, 그르노블, 리옹을 여행했으므로 셰르를 향해 비에르종을 거치는 길로 갔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석 달 후 앙부아즈에 도착했습니다. 그와 동행한 사람들은 살라이, 멜치, 그리고 하인 바티스타 데 빌라니스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사용하던 물건, 그림, 드로잉, 필사본 등 모든 것들을 노새 여러 마리에 싣고 프랑스로 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앙부아즈 성 근처에 있는 클루의 작은 집을 레오나르도 일행이 묵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왕후 어머니의 소유인 이 집은 궁전과 지하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왕은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터널을 통해 레오나르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벤베누토 첼리니에 의하면 왕은 레오나르도와 나누는 대화를 몹시 즐겼다고 합니다. ,왕은 매년 그에게 충분한 돈을 주었고 멜치에게도 따로 돈을 주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재산은 2.5 에이커의 정원과 언덕의 풀밭, 포도원, 비둘기장, 귀한 종의 나무, 낚싯배 등이었습니다. 그가 묵은 집 근처에 두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성당으로 이층에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지하에는 커다란 방이 있어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었고 달팽이처럼 생긴 층계를 오르면 침실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벽난로가 딸린 가장 큰 침실을 사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지역의 여인 마투린이 레오나르도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집안을 청소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이때의 생활상은 아라공 추기경의 비서 돈 안토니오 드 비티스가 여행일기에 기록한 것이 전부인데, 그는 1517년 10월 첫째 주에 “매우 유명한” 화가를 방문했다면서 레오나르도가 일흔 살 이상으로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예순다섯 살이었는데 매우 늙어보였던 것 같습니다. 비티스는 그곳에서 세 점의 그림을 보고 “완전무결한” 작품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피렌체 여인의 초상화”를 보았다고 했는데, <모나리자>를 가리킨 것 같으며, 나머지는 <광야의 세례 요한>과 <성 모자와 성 앤>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티스는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가 오른팔이 마비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지만 밀라노에서 함께 온 잘 훈련된 제자가 있었고, 그가 스승의 지침을 받아 훌륭한 그림을 그렸다고 했습니다. 비티스는 레오나르도가 섬세한 채색을 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드로잉과 다른 사람들의 작품 지도를 할 수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비티스의 기록이 잘못된 것 같은데, 레오나르도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에 팔이 마비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면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이 마비되었을 것입니다. 비티스는 레오나르도를 젠틀맨이라 부르면서 적었습니다.
“그는 해부학을 썼으며 특히 남자든 여자든 인체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도록 사지·근육·신경·정맥·관절·내장들을 회화 습작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과거에 없던 일이다. 그는 우리에게 드로잉을 보여주며 각기 다른 연령의 남녀시신을 서른 구 이상 해부했다고 말했다.”
비티스는 레오나르도가 물의 성질, 다양한 기계들, 그리고 그 밖의 주제들에 관해 이탈리아어로 상당한 양의 글을 썼고, 읽는 즐거움과 더불어 유익하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이것들을 출간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저술에 관해 대체적으로만 언급할 뿐 방문자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는 걸 허락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발명한 내용에 관해 구체적으로 실험하는 걸 반대했고, 수압에 관한 논문에서 “물을 늘이거나 줄이지 않은 채 수압을 변경할 수 있음을 기술했다”고 적었습니다. 비티스는 또 그가 소리, 말horse, 새의 비행, 눈과 시력, 탄도학, 건물의 붕괴, 공기, 별, 회화, 주물 등에 관해 실현 가능함이 아니라 이론적인 논문들을 썼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비티스는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이 단순히 드로잉과 글로 되어 있어 불완전한 상태이며 불규칙한 연구로서 그 자체로 사용될 수 없음을 지적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이런 연구를 과학적·기술적·이론적으로 진전시키기에는 너무 늙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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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오토 모빌>, 1478-80년경, 27-20cm.
그렇다면 프랑수아 1세는 왜 많은 돈을 지불해가며 늙고 활동할 수 없는 레오나르도를 붙잡아두었던 것일까.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며 과학자인 레오나르도와의 대화를 즐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프랑수아의 말벗이나 되어주고 녹을 먹는 편한 생활을 하는 데 만족했던 건 아닙니다. “쇠는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슨다”고 적었듯이 스스로를 녹슨 쇠가 되도록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드로잉했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충고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1518년경에 쓴 페이지 귀퉁이에는 “나는 지속해야만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말년에는 알렉산더 대왕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가 서로에게 교사였다. 권력을 가진 알렉산더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많은 지식을 가진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들의 모든 가르침을 섭렵했다.”
어쩌면 레오나르도는 자신과 프랑수아와의 관계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와 같은 것이 되길 원했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