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국가를 가르는 경계선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공공영역의 브랜딩이 해마다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시 당국의 명칭 사용권을 판매하도록 도와주는 ‘시티 마케팅’ 회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2003년 뉴욕 시장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는 뉴욕 역사상 최초로 최고마케팅책임자를 임명했는데, 그의 임기 초반에 성사된 거래 중 하나가 스내플Snapple을 뉴욕의 공식 음료수로 지정한 것입니다. 이는 1억6,600만 달러짜리 계약이었습니다.

기업과 국가를 가르는 경계선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상업용 첩보위성을 발사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꼭 필요한 분야에서조차도 통치와 마케팅이 뒤얽히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수년 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고문단은 영국의 이미지를 일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습니다. 영국을 “세계적인 박물관이 아니라 세계를 이끄는 선두적인 나라”로 브랜드 재구축rebranding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전통적인 빨간색 공중전화 부스가 투명하고 세련된 유리 부스로 교체되었으며, 투박하게 생긴 런던의 택시들이 날씬한 유선형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 체신부는 루니튠스에 등장하는 만화 주인공 벅스 버니Bugs Bunny 우표를 발행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우표에는 응당 역사적인 인물이 들어가야지 기업 캐릭터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이메일, 팩스, 페덱스Federal Express와의 치열한 경쟁에 직면한 우체국은 그러한 캐릭터 사용이 우편사업이 버틸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이 벅스 버니 우표를 한 장 사서 우편물에 부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보관할 때마다 우체국 수익이 32센트 늘어납니다. 우체국 수익 중에서 우표수집이 기여하는 정도는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체신부는 워너브라더스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전국 500곳 이상의 우체국에서 루니튠스Looney Tunes 넥타이, 모자, 비디오 등 관련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체신부라는 브랜드 자체를 이용하는 포스트마크 아메리카Postmark America라는 이름을 단 새로운 제품 도한 판매 중입니다. 이 제품들에는 과거 역마 우편배달부가 사용하던 2.95달러짜리 모자, ‘배달 완료’라는 프린트된 새겨진 이동용 티셔츠, 우편항공기 조종사의 345달러짜리 가죽 재킷 등이 포함됩니다. 체신부는 이런 우체국 브랜드 상품 판매가 워너브라더스나 월트디즈니 같은 기업을 모델로 삼은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통치와 상업주의가 지나치게 뒤섞이는 현상이 우려의 수준이라고 말합니다. 정치와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커지면 정부 관리들은 대중문화와 광고, 오락 등을 이용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를 높이려고 애쓰기 마련인데, 문제는 그런 위장된 권위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샌델은 대중에게 비치는 이미지를 개선하는 일에 많은 돈을 쓰는 국가기관들은 자신들의 본래 임무를 곧잘 망각한다고 우려합니다. 체신부 장관 마빈 러니언Marvin Runyon은 정부기관에 상업주의가 도입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시장중심의 그리고 고객 친화적인 정부 조직이 되어 국민이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샌델은 국민이 고객이 아니라면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국민에게 원하는 걸 제공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바르게 시행되는 정치란 국민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되돌아보고 그것이 바른지 판단한 후 그 욕구를 수정하도록 이끈다고 말합니다. 고객과 달리 국민은 때로 공동선을 위해 자신들의 욕구를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샌델은 그것이 바로 정치와 상업의 차이점이며 애국심과 브랜드 충성도의 차이라고 지적합니다.

샌델은 정부가 만화 캐릭터와 최신 스타일의 광고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정부 지지도를 높이는 데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공공기관이 갖는 권위와 사명의식을 해친다고 말합니다. 공공기관이 주어진 임무를 망각하면 시민들의 삶에 마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장의 힘과 상업적 압력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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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에 대한 프랑수아 1세의 환대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1516년 3월 17일 피렌체에서 타계했습니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는 후원자를 등에 업고 상당한 활약을 하고 있었지만, 줄리아노가 세상을 떠난 후 레오나르도에게는 새로운 후원자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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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클루에의 <프랑수아 1세>, 1525년경, 97-73cm.


루이 12세가 1515년 1월 9일에 타계하자 사촌이자 장인인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프랑수아 1세Francis I(1494-1547)였는데, 그는 레오나르도에 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왕으로 불리는 프랑수아 1세는 중세 기사출신 왕과도 같은 기질을 지녔지만, 품위가 있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였으며, 예술가와 인문주의 학자들을 후원했습니다. 1494년 코냐크에서 태어난 그는 1498년 사촌 루이 12세가 즉위했을 때 이미 왕위 계승자로 알려졌고, 공작령 발로아를 물려받았습니다. 스무 살 때 과주가 된 어머니에 의해 누이 마르게르트와 함께 성장했으며, 어머니를 존경한 그는 어머니에게 말할 때에는 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어머니와 누이뿐이었습니다.

루이는 프랑수아를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정치적으로 힘을 쓸 수 없도록 열여덟 살 때 그는 국경 수비를 맡겼습니다. 이때 그는 적의 공격을 받으며 전투에 대한 전략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루이는 사망하기 얼마 전 그를 자신의 열다섯 난 딸 클로드와 결혼시켰으며, 1515년 1월 1일 스무 살의 프랑수아가 프랑스 왕에 즉위했습니다. 루이는 증조모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유산인 밀라노 공작령을 다시 탈환할 수 있을 만한 군대를 남겼고, 프랑수아는 이를 자신이 수행해야 할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와 동맹을 맺은 교황 레오 10세는 프랑수아의 침입을 반겼고, 볼로냐에서 그를 맞았습니다. 교황은 그를 위한 향연을 베풀었습니다. 교황은 그에게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를 선물로 주었고, 프랑수아가 자신과 정교협약을 맺고 프랑스의 부유한 교회들이 자신에게 성직록을 바칠 것을 제안했습니다. 프랑수아는 자신의 주변에 예술가, 시인, 음악가, 학자들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주변에 두면서 “여인이 없는 궁전이란 봄이 없는 한 해와도 같으며, 장미가 없는 봄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프랑스 지방을 다니면서 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여 계속해서 여행했으므로 모든 면에서 두루 박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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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제자(프란체스코 멜치?)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상>, 1510년 이후, 27.4-1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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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바르톨로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1795, 엔그레이빙

16세기의 작가가 붉은색 초크로 드로잉한 것을 모사.


레오나르도는 후원자가 필요했으므로 프랑스로 가야 했습니다. 그해 8월 레오나르도는 산 파울리네 예배당의 바실리카를 측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향한 때는 1516년 가을이거나 이듬해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피렌체를 경유하여 밀라노, 제네브르 산 계곡, 그르노블, 리옹을 여행했으므로 셰르를 향해 비에르종을 거치는 길로 갔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석 달 후 앙부아즈에 도착했습니다. 그와 동행한 사람들은 살라이, 멜치, 그리고 하인 바티스타 데 빌라니스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사용하던 물건, 그림, 드로잉, 필사본 등 모든 것들을 노새 여러 마리에 싣고 프랑스로 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앙부아즈 성 근처에 있는 클루의 작은 집을 레오나르도 일행이 묵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왕후 어머니의 소유인 이 집은 궁전과 지하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왕은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터널을 통해 레오나르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벤베누토 첼리니에 의하면 왕은 레오나르도와 나누는 대화를 몹시 즐겼다고 합니다. ,왕은 매년 그에게 충분한 돈을 주었고 멜치에게도 따로 돈을 주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재산은 2.5 에이커의 정원과 언덕의 풀밭, 포도원, 비둘기장, 귀한 종의 나무, 낚싯배 등이었습니다. 그가 묵은 집 근처에 두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성당으로 이층에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지하에는 커다란 방이 있어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었고 달팽이처럼 생긴 층계를 오르면 침실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벽난로가 딸린 가장 큰 침실을 사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지역의 여인 마투린이 레오나르도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집안을 청소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이때의 생활상은 아라공 추기경의 비서 돈 안토니오 드 비티스가 여행일기에 기록한 것이 전부인데, 그는 1517년 10월 첫째 주에 “매우 유명한” 화가를 방문했다면서 레오나르도가 일흔 살 이상으로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예순다섯 살이었는데 매우 늙어보였던 것 같습니다. 비티스는 그곳에서 세 점의 그림을 보고 “완전무결한” 작품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피렌체 여인의 초상화”를 보았다고 했는데, <모나리자>를 가리킨 것 같으며, 나머지는 <광야의 세례 요한>과 <성 모자와 성 앤>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티스는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가 오른팔이 마비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지만 밀라노에서 함께 온 잘 훈련된 제자가 있었고, 그가 스승의 지침을 받아 훌륭한 그림을 그렸다고 했습니다. 비티스는 레오나르도가 섬세한 채색을 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드로잉과 다른 사람들의 작품 지도를 할 수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비티스의 기록이 잘못된 것 같은데, 레오나르도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에 팔이 마비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면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이 마비되었을 것입니다. 비티스는 레오나르도를 젠틀맨이라 부르면서 적었습니다.

그는 해부학을 썼으며 특히 남자든 여자든 인체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도록 사지·근육·신경·정맥·관절·내장들을 회화 습작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과거에 없던 일이다. 그는 우리에게 드로잉을 보여주며 각기 다른 연령의 남녀시신을 서른 구 이상 해부했다고 말했다.

비티스는 레오나르도가 물의 성질, 다양한 기계들, 그리고 그 밖의 주제들에 관해 이탈리아어로 상당한 양의 글을 썼고, 읽는 즐거움과 더불어 유익하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이것들을 출간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저술에 관해 대체적으로만 언급할 뿐 방문자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는 걸 허락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발명한 내용에 관해 구체적으로 실험하는 걸 반대했고, 수압에 관한 논문에서 “물을 늘이거나 줄이지 않은 채 수압을 변경할 수 있음을 기술했다”고 적었습니다. 비티스는 또 그가 소리, 말horse, 새의 비행, 눈과 시력, 탄도학, 건물의 붕괴, 공기, 별, 회화, 주물 등에 관해 실현 가능함이 아니라 이론적인 논문들을 썼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비티스는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이 단순히 드로잉과 글로 되어 있어 불완전한 상태이며 불규칙한 연구로서 그 자체로 사용될 수 없음을 지적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이런 연구를 과학적·기술적·이론적으로 진전시키기에는 너무 늙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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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오토 모빌>, 1478-80년경, 27-20cm.


그렇다면 프랑수아 1세는 왜 많은 돈을 지불해가며 늙고 활동할 수 없는 레오나르도를 붙잡아두었던 것일까.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며 과학자인 레오나르도와의 대화를 즐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프랑수아의 말벗이나 되어주고 녹을 먹는 편한 생활을 하는 데 만족했던 건 아닙니다. “쇠는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슨다”고 적었듯이 스스로를 녹슨 쇠가 되도록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드로잉했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충고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1518년경에 쓴 페이지 귀퉁이에는 “나는 지속해야만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말년에는 알렉산더 대왕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가 서로에게 교사였다. 권력을 가진 알렉산더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많은 지식을 가진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들의 모든 가르침을 섭렵했다.

어쩌면 레오나르도는 자신과 프랑수아와의 관계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와 같은 것이 되길 원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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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시작


벨기에의 성직자 조지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1894~1966)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므로 시작도 있었다는 논리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기체를 압축하면 온도가 올라간다는 열역학법칙law of thermodynamics에 착안하여 탄생초기의 우주가 엄청난 고온상태였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르메트르는 1927년에 우주가 초고온, 초고밀도의 초원자superatom 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폭발을 일으켜 팽창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초원자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미국의 추리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49)였습니다. 포는 물질들이 서로 잡아당기고 있으므로 초창기의 우주가 아주 작은 영역 속에 초고밀도상태로 응축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르메트르는 물리학학회에 종종 참석해 난해한 질문을 퍼부으면서 학자들을 괴롭혔습니다. 물리학자들은 그의 아이디어를 일종의 유머로 취급했으며 곧바로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아서 에딩턴은 말했습니다. “나는 현재의 질서가 대폭발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 이토록 질서정연한 자연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다는 것은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러 해에 걸쳐 끈질기게 반복된 르메트르의 주장에 학계가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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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광야의 세례 요한(바쿠스)>: 전통으로부터의 단절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광야의 세례 요한(바쿠스)>은 밀라노에서 바쿠스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리려고 마음먹었던 것으로 이때 완성한 것입니다. 이것은 레오나르도가 1510년경 바레세의 무세오 델 사크로몬테에서 스케치한 것을 제자들이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데,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멜치, 마르코 오조네, 체사레 다 세스토, 베르나조네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 혹은 바쿠스의 얼굴은 모호한 모습으로 거의 여성적이며 누드로 묘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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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다 세스토의 <팔과 어깨, 그리고 인물에 대한 습작>, 39.5-23.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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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오조네의 <수염 난 남자 머리 습작>, 지름 22cm.


레오나르도는 예언이라는 개념에 흥미를 느꼈으며, 그의 그림에는 출생과 운명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그는 포도주의 신과 자유를 느끼는 환희, 그리고 예언적 성자의 개념을 혼용했습니다. 주피터와 세멜레의 아들 바쿠스가 부활한 것과 요한이 예언한 구세주 역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겹쳐놓은 것입니다. 그는 고대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고 했습니다. 피치노가 플라톤의 저서에서 그리스도의 개념을 찾은 것처럼 그도 고대에서 예언자의 개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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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광야의 세례 요한>, 1510-15년경, 패널에 유채, 69-57cm.

성자를 왼쪽 어깨에 표범가죽을 걸친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이교 신들에게서 볼 수 있는 남성이지미나, 여성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면서 부대적인 부분과 일화는 최소화했으므로 특별히 읽을거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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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성 모자와 앤, 세례 요한을 위한 습작>의 부분


레오나르도는 <광야의 세례 요한>을 그릴 때 바쿠스의 요소를 인용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그릴 때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지내던 남루한 차림의 예언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의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해 그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는 그런 성서적 기담에는 관심이 없었고 단지 자신의 작품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릴 때부터 특정한 몸짓에 의한 강렬함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거나 화면 밖 어느 곳을 향하도록 하는 방법을 종종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의 미소는 정신분석적 의미를 띄는 것으로 사뭇 자조적입니다. 이런 형식의 그림은 여태까지의 회화사에서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는 것으로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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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복지와 자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문제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좋은 삶이란 공정함과 시민 덕성에 대한 공유된 이해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정치 논쟁의 핵심 주제는 복지와 자유인데, 이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공정한 사회는 개인의 좋은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공정함이란 주제는 시민적 덕성과 공공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공공선을 위한 문제는 다음 네 가지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1. 시민의식, 희생, 봉사

공공선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이 되기 위해선 강력한 공동체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좋은 삶을 규정하는 태도를 버리고 건전한 시민 덕성을 배양해야 한다. 덕성이란 다양한 계층과 인종이 함께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시민의식을 함양하는 걸 말한다. 공동체 의식과 결속을 실현하고 상호책임감을 배양하는 것이다.


2, 시장의 도덕적 한계

오늘날의 문제는 시장원리가 과거 비시장 규범에 지배받던 삶의 영역까지 파고든 것이다. 예를 들면 민간 사업자에게 전쟁을 아웃소싱하는 것, 상업적 대리 임신의 증가, 학교에 시장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관행이 늘어나는 것, 영리를 추구하는 민영 교도소의 출현 등이다.


3. 불평등, 결속감, 시민적 덕성

많은 나라들에서 커져가는 빈부격차는 민주사회 시민들에게 필요한 공동의 결속이 이뤄지는 걸 방해한다.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빈부의 삶은 더욱 분리되고 이는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4. 도덕적 참여의 정치

사람들은 정치와 법률이 도덕적, 종교적 논쟁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샌델은 다원화된 사회의 시민들은 도덕과 종교에 관해 저마다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므로 정부가 상호존중에 기반을 둔 정치를 펴야 한다고 말합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 신념을 존중하는 방법으로 무시해왔는데, 이러한 회피는 거짓된 존중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우려합니다. 이러한 회피가 해로운 역효과와 분노를 야기하는 것에 우려를 표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도덕적, 종교적 논쟁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공공의 숙고를 함으로써 반드시 일치된 합의에 이르는 건 아니지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경제가 화두인 시대에 경제적 풍요가 최고의 선이 되어버려서 보다 근본적인 도덕적 논쟁과 토론이 이뤄지지 못합니다. 경제 중심의 사회가 낳은 폐해는 심각한데, 도덕적 해이와 거짓말, 각종 로비와 공직자의 부패, 경제인의 각종 특혜와 비윤리적 이권개입, 일반 시민의 도덕 불감증 등 비도덕이 묵인될 수 있다는 근거가 빈약한 관용이 사회 저변에 깔려있습니다.

가장 흔한 도덕의 타락은 도둑질과 유사한 것으로 뇌물로 공직자들의 호주머니를 채워주고 그 대가로 특혜와 이권을 챙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로비는 은밀히 행해지지만 드러날 경우 대중의 강렬한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샌델은 도덕적 타락이 공개적으로 성행하는 것으로 복권사업을 지적합니다. 소득세가 생겨난 이후 정부 재정과 관련해 복권사업이 합법적으로 정부 수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복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도박이 부도덕한 행위임을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반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그 힘을 잃었는데, 부도덕이란 의미에 대한 개념이 변화한 것도 부분적 원인이지만, 시민들이 도덕과 부도덕을 법률로 규정하는 걸 꺼리기 때문입니다. 도박이 사회 전반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용인하려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복권 찬성론자들의 근거 세 가지는 첫째, 복권은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공공서비스에 필요한 정부 수입을 늘리는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과 세금과 달리 복권은 의무가 아닌 선택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둘째, 복권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오락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복권을 파는 판매소들, 복권을 홍보하는 과고회사와 언론 매체들도 정당하게 수입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대다수 국민이 복권사업을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 사업이 민간 사업자가 운영할 수 없는 독점 사업이라는 것입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경쟁적으로 영업하는 카지노 사업은 배당금 총수입 약 90%를 손님에게 돌려주는 반면, 정부가 독점하는 복권은 총수입의 50%만 당첨자들에게 돌려주는 것도 반대 이유입니다.

복권 옹호론자들이 직면한 딜레마는 두 가지로 하나는 복권이 합당한 사업이라면 왜 민간 기업이 그것을 판매하고 운영해서는 안 되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권이 매춘처럼 비도덕적 사업이라면 왜 정부가 그것을 운영하느냐는 것입니다.

복권 옹호론자들은 사람들이 도박의 도덕성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므로 비도덕적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부도덕한 데서 수입을 얻는 걸로는 술, 담배 등에서 정부가 ‘죄악세’를 부과하는 사례를 예로 듭니다. 그러면서 복권은 세금을 물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권 구매 행위는 자유방임주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데 정부가 단순히 복권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권을 홍보하고 구매를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경우 해마다 복권광고에 4억 달러를 지불하고 복권사업자는 손꼽히는 대형 광고주가 합니다.

샌델은 복권사업이 최고의 가망고객들로 노동자계층, 소수민족, 빈민층을 상대로 가장 적극적인 광고를 펴는 것을 지적합니다. 시카고 빈민가에 세워진 대형 광고판에는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현란하게 쓰여 있습니다. 복권광고가 더 이상 뼈 빠지게 일할 필요가 없다는 환상을 자극합니다. 복권광고는 특히 매월 초순에 주로 등장하는데, 이때는 사회보장제도와 복지기금 수혜자들에게 기금이 지급되는 시기입니다. 샌델은 다른 대부분의 정주 지원 서비스 예를 들면 치안서비스와는 대조적으로 복권판매소가 빈민가와 노동자 거주 지역에 많은 반면 부유층 지역에는 적은 것을 지적합니다.

매사추세츠의 극빈 지역 가운데 하나인 첼시 지역의 경우 복권 판매인이 주민 363명에 1명꼴인 반면 부유층 지역인 웰즐리는 주민 3,063명 당 1명입니다. 첼시 주민들은 1년 동안 복권 구입에 1인당 915달러를 썼으며 이는 소득의 8%에 가까운 금액입니다. 또 다른 부유층 지역인 링컨의 주민들은 1인당 불과 30달러를 썼으며 이는 소득의 0.1%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매사추세츠의 복권 수익은 주정부 수입의 무려 13%를 차지합니다.

복권 사업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많은 사람들에게 복권 구매는 자발적 선택에 근거한 자유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도박중독자 치료모임에 가입하는 복권 중독자들도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매일 1,500달러의 즉석복권을 긁어 노후자금을 모두 탕진하고 신용카드 11개가 마이너스가 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샌델은 복권이 공동선의 질을 떨어뜨린다면서 정부가 비뚤어진 시민 교육을 제공하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더 많은 돈과 원활한 정부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ㅔ 이제 미국의 주정부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이용해 운만 따라주면 불행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끝없는 노동의 악순환에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퍼뜨려야만 하는 형편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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