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종교적 시 <십자가 처형 드로잉>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말년에 종교적인 소네트를 여러 편 썼는데, 이 소네트는 두 드로잉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드로잉과 소네트가 같은 시기에 그려지고 쓰인 것 같습니다. 그에게 미술과 시는 하나이며, 그는 시인이자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시인의 마음으로 시각적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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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십자가 처형 드로잉>, 1540-50


<십자가 처형 드로잉>은 파울리네 예배당에 프레스코를 그릴 무렵에 그린 것들로 추정됩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드로잉과 시를 창조적 표현의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순화시키고, 자신을 늘 따라다니는 십자가 처형의 이미지를 자신의 종교적 시와 동등하게 시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마리아와 그가 가장 사랑한 제자 요한이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들의 몸을 웅크려, 죽어가는 그리스도의 다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얼굴은 죽음의 그늘처럼 숙이고 지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 전,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의 여생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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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십자가 처형 드로잉>, 1540-50


또 다른 드로잉에는 요한이 귀신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습니다. 망토를 두른 마리아는 양팔을 가슴에 모으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른팔이 이중으로 그려져 있어 만화처럼 몸서리치는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 듯 보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마리아의 윤곽을 반복되게 묘사하면서 좀 더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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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부활한 그리스도>, 1530년경, 15.2-17.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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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돌연한 현현>, 1534-64, 232.7-165.6cm.


1532~3년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열다섯 점이나 드로잉했습니다. 바사리와 콘디비 모두 이 드로잉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드로잉들이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에 있는 키지 예배당 제단을 장식하기 위한 습작들로 봅니다. 무덤에서 나와 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올리고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에서 빛은 부활의 상징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말년에 여러 점의 드로잉을 그렸으며, 현존하는 것들은 어떤 작품을 위해 그린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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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마지막 그림: 파울리네 예배당 벽화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교황의 궁전 사이에 끼어 있는 파울리네 예배당에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곳은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성소 가운데 하나이며, 성찬식을 거행하거나 집회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는 교황을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선출하지만, 당시에는 이 예배당에서 선출했습니다. 이런 성소에 그가 두 점의 프레스코화를 그린 것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프라 안젤리코가 프레스코를 그린 예배당이 있었지만, 1537~40년에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설계로 새 예배당이 건축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이름은 1541년 10월 12일에 이미 언급되었지만, 그가 작업을 시작한 것은 이듬해였습니다. 그의 임무는 측면 벽을 장식하는 일이었고, 이 작업은 일흔네 살이 되던 1549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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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사울의 회심>, 1542-45, 625-660cm.


미켈란젤로는 후원자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예배당 장식을 의뢰받고 1542~5년에 <사울의 회심>, 1546~50년에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을 그렸습니다. <사울의 회심>이 먼저 완성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시기는 바오로 3세가 예배당을 시찰했던 1545년 7월 12일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바오로는 사망하기 몇 주일 전인 1549년 10월 13일에 예배당을 방문했지만, 두 번째 그림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을 보지 못했습니다.

두 작품에서는 르네상스의 조화적인 질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화면공간에 텅 비거나 지나치게 꽉 찬 부분도 있으며, 황량하게 빈 부분 옆에 들어설 틈도 없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이 악몽처럼 연속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공간의 시각적 통일성과 공간의 연속적 관계가 폐지되었으며, 공간의 깊이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한꺼번에 찢어 여는 듯이 보입니다. 인물과 공간이 더 이상 통일을 이루지 못하며, 행동의 주체인 사람들은 일체의 개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나이·성별·기질 등을 나타내는 특징들이 모두 사라지고, 모든 것이 보편성·추상성·도식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통적 구성의 규칙을 무시하며 그림 가장자리에 사람들의 모습이 잘리도록 했고, 독특한 비례로 그렸습니다. 이런 점들은 종종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비례를 무시한 것은 기다란 예배당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그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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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사울의 회심>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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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사울의 회심>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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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사울의 회심>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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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사울의 회심>의 부분


예배당에 들어서면 왼쪽을 먼저 바라보게 되는데, 그곳에 <사울의 회심>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번갯불이 내려오고 크리스천을 탄압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은 빛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말에서 떨어진 채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길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체험을 한 사울은 개종하고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르네상스 회화의 불문율의 규칙을 깨고 미켈란젤로는 화면의 구성에서 두 주인공 그리스도와 사울을 뚜렷하게 수직으로 놓고, 화면 왼쪽으로 많이 이전시켰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선 사람들은 번갯불이 하늘과 지상을 잇는 극적인 장면을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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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 1546-50, 625-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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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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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의 부분


제단을 향해 걸어가면서 사람들은 두 번째 그림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을 보게 되는데, 조명이 어두워서 그림이 더욱 어둡게 보입니다. 구름이 해를 가리고 하루가 저물 무렵 지상에서 벌어진 참혹한 장면입니다. <사울의 회심>에서 빛이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는 데 비해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에서는 빛이 가려졌습니다. 그림 하단 오른쪽 베드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들 중 관람자를 바라보는 두 여인의 응시가 비극적 사건과 우리를 연결시킵니다.

베드로는 비례에 맞지 않게 크게 묘사되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매우 강렬해서 그 이미지가 우리의 마음속 깊이 새겨집니다. 우리의 시선은 왼쪽으로부터 언덕 위 처형장면에서 오른쪽 언덕을 내려오는 사람들을 향하게 됩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반원형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사울의 회심>은 신속하게 일어난 사건으로 표현된 데 비해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은 천천히 고통 속에 일어난 사건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우리를 두 그림의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우리의 지각을 그림 속으로 안내하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이 예배당에 모이는 교황과 추기경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축복과 책임을 부여받은 것에 대해 베드로로부터 권고를 받고 하늘의 섭리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이 크리스천의 의무이며,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두 그림을 통해 기독교 화가로서의 천재적 재능을 충분히 시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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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집단 우대정책에 대한 보상 논리는 다양성 논리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서로 다른 윤리적, 도덕적 가치가 경쟁할 수 있는 사회, 의견 불일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라고 말합니다.

샌델은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예로 듭니다. 1996년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공공교육 및 고용에서 소수인종 특혜를 금하는 주의 헌법 개정안 제안209Proposition 209가 주민투표로 통과되었습니다. 2003년에 연방대법원은 미시간 대학에 소수인종 지원자들에게 가산점을 주는 입학 방침을 철회하라고 명령했지만, 미시간 법학대학원의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지지하고 인종이 입학심사에서 고려사항이 될 수 있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1997년 휴스턴에서 소수집단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금지한다는 안건이 주민투표에서 부결된 반면, 소수인종 특혜를 금하자는 제안209에 대해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투표로 통과시켰습니다. 소수집단 우대정책 반대자들은 여론이 다른 이유가, 미국인들이 새로운 차별정책으로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고, 지지자들은 대중의 마음속에 끈질기게 남아있는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하지만, 샌델은 모두 틀린 생각이라면서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인종과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연관시키기 때문에 오류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소수집단 우대정책 옹호론이 미국인의 신성한 믿음에 도전을 제기하는 점으로 노력한 사람만이 오로지 일자리를 얻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대학입학 심사에서 인종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의 두 가지 근거는, 보상논리와 다양성 논리입니다. 보상 논리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고 바로잡는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이 논리는 입학 허가를 중요한 혜택으로 보고 과거의 차별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그 혜택을 나눠주려 합니다.

그러나 보상 논리는 다양성 논리에 비하면 설득력이 다소 떨어집니다. 보상 논리에 근거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반대하는 이들은, 보상을 받는 사람이 꼭 원래의 피해자는 아니며 보상하는 사람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도 없다고 지적합니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수혜자 가운데 많은 수가 중산층 학생들이며, 이들은 도시 빈민가의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들이 겪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정책 때문에 입학 허가에서 탈락한 학생들이 더 힘겨운 역경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보상 논리로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정책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입학할 수 있었을 학생들이 과거 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는 짐을 왜 그들이 져야 하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즉, 소수집단 우대정책이란 이름으로 시행되는 많은 프로그램들을 정당화하기에 보산 논리는 근거가 너무 부족합니다.

다양성 논리가 그보다는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논리는 우대를 받은 소수집단 학생이 실제로 차별을 겪었는지 증명하는 문제와 상관이 없습니다. 다양성 논리를 펴는 사람들은 입학 허가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이들은 학교에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합니다. 출신 배경이 비슷한 학생들끼리 모여 있을 때보다 서로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집단 우대정책 반대자들은 그러한 목적인 인정하더라도 그 수단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학교의 다양성 증대라는 목적은 바람직하지만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 단지 소수민족이 아니라 해서 입학에 불이익을 받는 것은 불공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높은 성적과 뛰어난 가능성을 가진 학생은 입학을 허가받을 자격이 없단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샌델은 다양성 논리 저변에 깔린 심오한 가정을 엿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입학 허가는 뛰어난 자격을 포상하기 위해 수여하는 영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험 점수가 높은 학생도, 불리한 처지에 놓인 소수집단 학생도 입학을 허가받을 도덕적 자격은 없다고 말합니다. 입학심사 기준이 가치 있는 사회적 목적이라면, 그리고 지원자들의 입학 여부가 그에 따라 결정된다면 어느 누구도 불평할 권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다양성 논리가 지닌 도덕적 힘은 입학 허가를 개인이 누리는 영광에서 분리하고 공공선과 연결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 정치적 공격에 취약한 측면이기도 합니다. 일자리와 기회가 ‘그것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보상’이란 믿음은 미국인의 사고방식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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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의 새로운 역사: 예술의 한 장르가 된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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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비토리아 콜로나의 초상>, 1536년경, 32.6-25.8cm.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와 비토리아 콜로나는 미켈란젤로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입니다. 콜로나는 페스카라의 후작 부인이며, 카발리에리 역시 로마의 귀족 출신입니다. 콜로나와 그녀의 친구들은 인문주의적 교양을 갖추고 특히 종교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교제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38년 이후 그녀의 친구가 되었고, 콜로나가 중심이 된 모임을 통해 열성적인 가톨릭 개혁파들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 출신의 화가 프란시스코 홀란다Francisco Hollanda(1517-84)는 저서 『고대 회화에 관한 대화편』(1539)에서 콜로나와 그녀의 친구들의 종교적 열정을 묘사했습니다. 아놀드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미켈란젤로가 그의 정신적 부활과 후기 작품에서 보여준 정신주의적(물질 속에 내재된 이미지를 꺼내는) 양식을 낳은 결정적 자극을 이 모임에서 받았을 것으로 추정했으며, 미켈란젤로가 겪은 이러한 종교적 발전은 르네상스에서 반종교개혁 운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다만 특이한 점으로 그의 내면적 변천이 매우 정열적이며 작품을 통한 그 표현이 추호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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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이상적인 얼굴>, 1532/34, 20.5-16.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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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이상적인 얼굴>, 1532/34, 28.5-23.5cm.


미켈란젤로는 카발리에리와 콜로나를 위해 드로잉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켰으므로 드로잉 역사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했습니다. 그의 드로잉은 매우 정교해서 완성도를 인정한 수집가들은 다투어 수집하려고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로부터 드로잉을 선물 받은 콜로나는 감사를 표하면서 그 작품들이 “완벽하게 그려졌고 창의력이 풍부하며 경이롭게 완성되었다”고 그의 천재성을 극찬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은 천재 개념의 발견에 있습니다. 예술가의 작품보다는 그의 능력, 작품의 성공 여부보다는 작품에 나타난 예술가의 의도와 사상이 더욱 중요시되면서 천재에 대한 개념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런 사고는 개인적 표현방법이 그 자체 흥미롭고 유익하게 여겨지면서부터 가능했습니다. 이런 사고의 발전에는 콰트로첸토(15세기) 시기에 소묘, 초안, 드로잉, 밑그림 등과 같은 미완성 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늘어나는 애호가 바탕에 깔려 있고, 이러한 이해와 애호는 예술가의 천재성에 바탕을 두기 때문입니다. 소묘나 드로잉은 르네상스 사람들에게 예술적 형상화라는 의미뿐 아니라 기록, 즉 예술적 창작과정을 나타내는 기록으로서도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완성된 작품과는 다른 하나의 특수한 표현 형식으로 인식했으며, 창작과정의 시작에서 창작자 자신과 미처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여준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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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성모 머리 위 수직의 십자가 나무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피의 값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귀는 1530년경의 소모적인 종교 논쟁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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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십자가 처형>


비토리아 콜로나는 시인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녀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열렬한 종교적 시를 지어 몇 점의 드로잉과 함께 그녀에게 선물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녀를 위해 드로잉한 것들 중에는 단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그린 <피에타>도 포함됩니다. 그는 <십자가 처형>도 드로잉했는데, 그리스도가 비탄의 음성으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소리치는 모습입니다. 이 드로잉을 받고 콜로나는 미켈란젤로에게 적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보다 실재 같고 완성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없을 것입니다. … 난 이것보다 완성도가 높은 그림을 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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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쌍두 사륜마차의 전복>, 15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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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쌍두 사륜마차의 전복>, 1530-40


콜로나가 적은 대로 <십자가 처형>은 과거 대가들의 작품들과는 달리 실재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의 드로잉은 사람들에게 매우 호감을 주었고, 프린트, 그림 등으로 만들어져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은 원래 목적을 갖고 그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에게 드로잉을 가르쳤는데, 이것들이 드로잉을 가르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쌍두 사륜마차의 전복>을 그렸을 때에는 두 사람이 동일한 주제의 고대 릴리프를 관찰하고 막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드로잉 하단에 적었습니다.

토마소 군, 이 드로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의 우르비노 하인에게 말해주게. 자네에게 약속한 대로 내일 저녁까지는 다르게 그릴 시간적 여유가 있네. 만약 드로잉이 마음에 들어 내가 완성시키기를 바란다면 내게 돌려보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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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티티우스의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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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아이들의 바카날>


드로잉은 카발리에리의 마음에 들었고, 미켈란젤로는 그것을 완성했습니다. 당시 미켈란젤로와 카발리에리는 고상하면서 열정적인 연인 관계였으며, 그는 카발리에리에게 그림과 시를 종종 선물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 미켈란젤로는 <티티우스의 벌>과 <아이들의 바카날>을 포함해 그를 위한 또 다른 드로잉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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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의 후유증


1965년 독일 태생의 미국 천체물리학자 아노 펜지어스Arno Allan Penzias(1933~)와 로버트 윌슨Robert Woodrow Wilson(1936~)은 입지가 위태로워진 정상상태우주론steady state cosmology에 마지막 치명타를 날렸습니다. 뮌헨에서 태어난 펜지어스는 1940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1954년 뉴욕시립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윌슨은 1957년 휴스턴의 라이스 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칼텍(캘리포니아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펜지어스와 윌슨은 뉴저지의 벨연구소Bell Laboratories(정식명칭은 AT&T Bell Laboratories, Inc.)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라디오망원경에 잡힌 신호를 분석하던 중 원치 않는 잡음이 계속해서 감지되는 이상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 잡음의 정체는 가모브가 1948년에 예견했던 마이크로파배경복사였습니다. 펜지어스와 윌슨이 발견한 것은 빅뱅의 잔해가 분명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했으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78년에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펜지어스와 윌슨이 배경복사를 발견한 사건은 조지 가모브와 프레드 호일의 연구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호일에게 이 발견은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결국 호일은 1965년에 『네이처 Nature』지를 통해 정상상태우주론으로는 우주배경복사와 헬륨의 양을 설명할 수 없음을 천명하면서 자신의 패배를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펜지어스와 윌슨의 발견으로 정상상태이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빅뱅이론이 우주론의 최첨단에 자리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주의 팽창과 관련된 자세한 사항들은 여전히 미지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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