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돌로 표현된 희생의 의미 <론다니니 피에타>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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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 1556-64년경, 대리석, 높이 1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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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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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의 부분


미켈란젤로는 타계하기 전 1556~64년경 <론다니니 피에타>를 제작했습니다. 론다니니란 명칭이 붙은 것은 로마 궁전에 오랫동안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위해 제작했다는 기록이 없어 자신을 위해 제작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말년에 쓴 개인적인 시의 내용과도 부합되어 그가 기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그리고 창조를 통해 구원을 소망하기 위해서 제작한 것 같습니다.

이것을 피에타라고 부르지만 과거 그가 제작한 피에타들과는 다른 모습이며, 전혀 새로운 형상입니다. 어머니는 바위 위에 올라서서 죽은 아들을 부축하고 있지만, 힘에 겨워 겨우 붙잡고 있을 뿐입니다. 마리아의 반쯤 선 자세와 그리스도의 모습을 불분명하게 묘사한 데서 그리스도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한쪽 눈을 뜨고 자신의 왼쪽 어깨에 올린 어머니의 손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래 돌덩이가 하나였던 것처럼 두 사람은 한 덩이가 되었습니다.

<피렌체 피에타>와 마찬가지로 자세히 보면 마리아와 그리스도를 각각 명료하게 새기기에는 돌이 부족하며 돌에 맞게 미완성의 형식으로 작품을 마무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작업 도중에 이미지를 변경하여 원래의 이미지를 지워나갔는데, 이런 점은 유령의 일부분처럼 남아있는, 분리된 그리스도의 오른팔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따로 붙어 있는, 잊히지 않는 오른팔을 보면 초기 구성은 보다 우람한 그리스도의 몸을 제작하려고 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놓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작업 도중에도 계속해서 형상을 바꾸려고 시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창조력의 분출은 그가 한 형상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형상에 집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가늘고 길게 제작한 데서 추상에 대한 개념과 의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추상화 경향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두드러지는데, 몇 세기 앞서 그가 실험한 것입니다. 그는 과격하게 추상화했지만, 자신이 구주로 삼은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일그러뜨리지 않고 어머니를 업은 모습으로 묘사하고, 어머니를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 가득한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 그가 돌을 인간의 몸으로 만든 후 다시 그 몸으로부터 정신을 표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사랑을 추상을 통해서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과 그 밖의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희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에게서 처음으로 고독하고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마력적인 힘에 쫓기는 근대적 예술가, 즉 자신의 상념에만 사로잡혀 있고 자신의 상념 이외에는 거들떠보지 않으며 자신의 재능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의 예술가적 사명 위에 어떤 높은 힘이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를 대하게 된다.

아놀드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이렇게 적으면서, 미켈란젤로에 와서야 비로소 예술가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로 인해 르네상스 이후 예술가는 천재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으며, 예술가 자신이 바로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유행의 주체가 되었다고 봅니다. 여태까지는 예술가들이 세상의 영예를 기렸다면, 이제는 반대로 세상이 예술가들의 영예를 기리게 된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예술가가 개인적·종교적 숭배를 위한 도구였지만 이제는 예술가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신의 축복도 후원자로부터 예술가 자신에게로 옮겨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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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부교감심경계를 활성화시킨다


 

 

 

 

평상시 자동적으로 몸이 이완 상태로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완 과정에서는 부교감신경계 회로를 사용하므로 부교감신경계 강화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이완을 통해 싸움 또는 도망의 교감신경계가 완화되는데, 이는 이완된 근육에서 뇌의 경보센터로 상황이 호전되었다는 피드백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깊은 이완 상태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화가 나지 않습니다.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당장 시험해 볼 수 있는 네 가지를 권합니다.

 



1. 혀, 눈, 턱의 근육을 이완시킨다.

2. 긴장이 몸에서 빠져나가 땅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느낌을 받도록 한다.

3. 손 위로 따뜻한 물을 흘려보낸다.

4. 몸을 더듬어보아 긴장된 곳이 있으면 그 부분을 이완한다.

 



횡경막 호흡에는 1-2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횡경막은 허파 아래쪽에 있는 근육으로, 호흡을 돕습니다. 횡경막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됩니다.

먼저 손을 갈비뼈 아래에서 5cm쯤 아래의 배 위에 얹습니다. 아래를 바라보며 평상시처럼 호흡하되, 손을 주목한다. 손은 위아래로 조금씩 움직일 것입니다.

이제 손을 그 자리에 둔 채, 숨 쉴 때마다 손이 가슴과 수직이 되게 앞뒤로 움직이도록 호흡합니다. 적어도 한 호흡마다 손이 2-3cm 이상 움직이도록 합니다.

 

심호흡: 들이쉴 수 있는 한 최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몇 초간 숨을 멈춥니다. 다시 천천히 숨을 내쉬며 몸을 이완합니다. 심호흡을 하면 실제로 허파가 팽창되므로, 휴지 상태의 크기로 돌아오기 위해서 호흡을 내쉴 때, 부교감신경계가 작동하게 됩니다.

 

입술만지기: 부교감신경섬유는 우리 입술에 분포하는데 입술을 만지면 부교감신경계가 자극을 받습니다. 또한 입술을 만지면 음식을 먹거나 아기가 젖을 빠는 것과 비슷하게 진정되는 기능이 있습니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 마음챙김이란 현재 접하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해 완전히 집중하되, 판단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순간 실재하는 신체 감각에 집중하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호흡의 자극인 인지합니다. 걷기, 팔 뻗기, 삼키기 등의 자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한 호흡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걸음이라도 마음챙김을 해본다면 놀랄 만큼 집중이 되며 평온해질 것입니다.

 

심상화: 심상화는 뇌의 우반구를 활성화시키며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내면의 수다를 멈추게 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평화로운 산정호수의 모습을 몇 초간 생각합니다. 시간이 충분한 집 같은 곳이라면 호수 주변을 산책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솔숲의 향기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심박균형맞추기: 통상적인 심장 박동은 매번 조금씩 차이가 생기는데 이를 심박 다양성이라 합니다. 분당 심박수가 60번이라면 심장이 초당 한 번 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심장은 기계적인 메트로놈이 아니므로 매번 박동마다 그 간격이 조금씩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즉, 1초, 1.05초, 1.1초, 0.85초, 0.9초 등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심박 다양성은 자율신경계 활성을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숨을 들이쉴 때는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므로 심박수가 조금 빨라지고, 내쉴 때는 부교감신경계 활성으로 느려집니다. 스트레스, 부정적인 감정, 노화 등은 심박 다양성을 증가시키는데, 상대적으로 심박 다양성이 낮은 사람은 심장발작 후 빨리 회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심박 다양성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면 스트레스 감소와 심혈기관 건강 및 면역 기능과 감정 조절에 도움이 됩니다.

심박 다양성은 부교감신경계 활성의 좋은 지표로, 전반적인 건강과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는 직접 심박 다양성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하트매스 연구소HeartMath Institute가 제시하는 세 단계 접근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들숨과 날숨이 같은 시간 동안 유지되도록 호흡한다. 들이마시면서 하나, 둘, 셋, 넷 하고 세고, 내쉴 때도 마찬가지로 한다.

2. 동시에 심장을 통해 들숨과 날숨을 상상하거나 느껴본다.

3. 호흡이 골고루 심장에 전해졌으면 감사, 친절, 사랑 등의 즐겁고 충만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느낌이 호흡과 함께 심장을 흘러가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명상: 명상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부교감심경계를 활성화시킵니다. 여기에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주의를 돌리는 것으로부터 이완, 몸에 주의를 집중하기 등이 포함됩니다.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부교감신경계 및 뇌의 다른 부분을 자극함으로써 명상은 다음과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1. 뇌도, 해마, 전전두피질의 회색질을 증가시킨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피질이 얇아지는 현상이 명상에 의해 줄어들고, 피질을 강화시켜준다. 주의집중 능력, 연민, 공감 등을 포함해 이들 영역과 관련된 심리학적 기능들을 향상시킨다.

2. 기분을 관장하는 좌측 전두엽의 활성을 증가시킨다.

3. 명상수련을 오래 한 티베트 승려의 경우 빠른 뇌파인 감마파의 세기와 도달 범위가 증가한다. 뇌파는 약하지만 뚜렷한 전자기파로, 여러 뉴런이 리드미컬하게 하께 작용함에 따라 나타난다.

4. 스트레스 연관 호르몬인 코티솔 레벨이 낮아진다. 코티솔cortisol은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는 동안 부신에서 분비된다. 코티솔은 편도체를 자극하고 해마를 억제한다.

5. 명역계를 강화시킨다.

6. 심혈관계ㅡ 천식, II형 당뇨병, 생리전증후군, 만성통증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질병에 도움이 된다.

7. 불면증, 긴장, 공포증, 섭식 장애 등의 다양한 심리적 문제들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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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자서전 <피렌체 피에타>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만토바의 안드레아 만테냐 이후 미켈란젤로가 처음으로 자신의 묘비를 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성당에 있는 자신의 묘지를 피에타로 꾸미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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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피렌체 피에타>, 1547-55년경, 대리석, 높이 23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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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피렌체 피에타>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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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피렌체 피에타>의 부분


그는 네 사람으로 구성된 피에타를 제작했는데, 이는 그가 가장 야망을 갖고 작업에 임했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복잡한 구성이라서 마음에 흡족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234cm 높이의 대리석에 네 사람을 비례적으로 상관관계가 되게 구성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가 스물세 살 때 제작한 <로마 피에타>와 이 작품을 비교하면 성모에 대한 묘사가 아주 달라 그의 예술적 사고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엄숙하면서도 숭고한 표정 대신 아들 가까이에 얼굴을 갖다 댄 것으로 비탄을 암시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그 뒤에 서 있는 니코데모스에 비해 너무 작은데, 돌이 충분하지 못해 마리아의 얼굴을 완성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작업 도중에 원래의 구상을 변경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또한 채석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새로운 구상을 했을 경우 작업하던 돌을 버리고 충분한 크기의 돌로 다시 작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죽은 아들의 시신을 떠받칠 마리아의 얼굴과 그리스도의 왼쪽 다리를 묘사할 돌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을 완성시키려면 왼쪽 다리를 따로 제작해서 붙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조각적 원리에 어긋나는 일로 그는 한 덩이의 돌로 조각이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특기할 점은 대부분의 관람자들이 그리스도의 왼쪽 다리가 없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것을 불완전한 상태로 보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걸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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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피렌체 피에타>의 부분


그리스도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도상학적으로 니코데모스여야 하지만,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은 늙은 미켈란젤로 자신을 표현한 것으로 봅니다. 자신을 남몰래 그리스도를 추종했던 니코데모스의 역할로 삽입시켰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자서전적 작품으로, 그도 그리스도가 필요로 할 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보입니다. 이것을 완성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신의 묘비를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비문을 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가 왜 이 작품을 완성시키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대리석의 질에 낙담했으며, 하인이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데 염증을 느껴 망치로 작품을 망가뜨렸다고 이야기를 꾸며냈습니다. 많은 미술사학자들 또한 개인적으로 중요한 이 작품을 미켈란젤로가 왜 망가뜨렸는지에 관해 갖은 억측을 했습니다. 그가 이 작품을 망가뜨린 연유는 명확치 않습니다. 단지 추측해보자면 자신의 묘비를 자신이 직접 깎는 것은 죽어야 할 운명에 직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피에타를 완성하는 것은 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지만, 그 자신에게는 더 이상 작업을 계속해야 할 목적이 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조각은 이후 티베리오 칼카니가 미켈란젤로의 허락을 얻어 완성시켰습니다. 칼카니가 복구한 부분은 부서졌던 그리스도의 신체 왼쪽 부분이며, 미완성의 그리스도에다 새 다리를 끼우려는 의도로 다리 부분을 말끔히 다듬어 못자국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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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량 선고에 대한 정신건강 논리와 인과응보 논리


형량 선고 시에 피해자의 증언이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근거에 의존하는데, 하나는 정신건강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인과응보 논리입니다. 정신건강 논리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에 동참함으로써 위안을 얻고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처벌이 피해자에게 위안을 제공한다면, 피해자는 처벌의 종류를 결정하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도록 허용하는 법에서 주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 정신건강 논리입니다. 이는 법정을 소란스러운 토크쇼 현장처럼 만듭니다. 텍사스 주에서는 형량 선고 이후 피해자나 가족이 법정에서 가해자에게 심한 말을 퍼부을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정신건강 논리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범죄자 처벌의 효과와 범죄자 처벌의 목적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이 인과응보 논리로서 배심원단에게 범죄의 도덕적 무게감을 충분히 인식시키기 위해 피해자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인과응보 논리에서는, 피해자가 감정을 배출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실천하고 도덕적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피해자 진술이 형량 선고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감정이 범죄의 본질을 왜곡하는 경우, 판사가 형향 선고에서 그것의 비중을 줄이면 된다는 논리입니다.

샌델은 인과응보 논리는 피해자 증언을 옹호하는 효과적인 근거가 되지만, 두 가지 반박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첫째, 피해자들의 성품이나 사회적 지위, 부의 정도를 증거로 사용하는 건 어떤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보다 더 가치 있다는 가정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살인자가 네 자녀의 아비를 죽인 것과 아무도 슬퍼해줄 사람이 없는 미혼의 부랑자를 죽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설령 살인의 도덕적 죄과가 다른 살인보다 더 크다 할지라도 범죄자가 애초에 알지 못한 어떤 측면 때문에 처벌을 높이는 건 불공정하지 않느냐는 반론입니다. 상대의 신분을 모르는 상태에서 저질러진 사건의 경우 죽은 사람이 범죄자냐 성직자냐에 따라 형량이 달라져야 하느냐는 논리입니다.

현재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는 피해자 진술을 허용하고 있으며, 의회는 피해자 진술 조항을 1994년 연방범죄법안에 포함시켰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168명이 사망한 오클라호마시티 폭파사건 피해자들이 재판에 입회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누군가 범죄로 피해를 입었다면 그 사람은 구경하는 반관자의 자리가 아니라 범죄를 심판하는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샌델은 정신건강 논리가 도덕적 책임과의 분리를 나타낸다면 인과응보 논리는 도덕적 책임을 회복하려는 열망을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후자의 충동을 전자의 충동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적절하고 현명하게 시행될 경우 피해자 증언이 범죄의 잘못을 명백하게 조명함으로써 정의 실련에 기여할 수 있지만, 피해자는 ‘범죄를 심판하는 과정의 한가운데’ 놓는 일은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범죄에 합당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는 도덕성보다 피해자의 심리적 욕구가 우선시될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될 경우 개인적 복수에 불과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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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함락과 인권 선언문

시민의 동요가 심화되자 루이 16세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사제, 귀족, 제3신분으로 구성된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삼부란 사제가 제1부, 귀족이 제2부, 사제와 귀족에 비해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시민이 제3부입니다. 삼부회는 왕권 주도로 국민 대표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자문기관에 불과했는데, 대표들에게는 의결권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삼부회를 소집하고 의제를 제기하는 것은 국왕에게만 있었습니다.

루이 15세의 손자이자 황태자 루이의 셋째 아들인 루이 16세는 열여섯 살에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하고, 1774년 스무 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인 앙투아네트는 아름다운 외모로 작은 요정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녀는 열네 살 때 정략결혼으로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검소한 루이 16세와는 달리 사치로 국고를 낭비하여 시민들의 빈축을 샀습니다. 루이 16세는 선량하고 성실했지만, 의지가 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여 정무에 열심이었더라도 난국을 타개할 기량은 없었습니다. 그는 삼부회에서 국가가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음을 고백하면서 국고를 마련할 새로운 방안을 고안하라고 주문했고, 참석자들은 정의와 자유의 기치 아래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맞섰습니다. 6월 17일 몇몇 사제들의 지지를 받은 제3신분은 자신들이 국민의 96%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스스로 국민의회라고 선포한 뒤 어떤 명목의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징수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루이 16세가 제도적인 폭력행사를 통해 응수하자, 제3신분 의원들은 자신들의 회의장이 왕의 명령에 의해 폐쇄된 걸 알고 6월 20일 궁정 밖에 위치한 테니스코트에서 회합을 갖고 헌법을 만들 때까지 해산하지 않기로 선서했습니다. 사제 다수와 외에 귀족 50명이 선서에 합세했습니다. 7월, 9일, 국민의회는 스스로 제헌의회임을 선포하고 헌법을 기초하는 과업에 착수했습니다. ‘테니스코트의 선서’가 혁명의 기운을 불러일으켰습니다.

7월 초, 3만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파리와 베르사유 사이에 주둔했고, 왕이 국민의회에 무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7월 11일, 왕은 인기 있는 자크 네케르를 해임했습니다. 네케르는 1781년 프랑스 최초로 재정보고서를 간행하여 재정수지를 국민에 알려 궁정의 비난을 받고 재무총감 직을 사임했다가 1788년 다시 총감에 오른 인물로 국민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낭만주의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샤토브리앙과 더불어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의 선구자 스탈부인이 바로 니케르의 딸입니다. 네케르의 해임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분노했습니다. 니케르는 닷새 후 복직되어 교회재산의 국유화, 아시냐 지폐 발행으로 국가재정의 파국을 막았지만, 혁명 후 사태에 순응할 수 없어 1790년에 사임하고 스위스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은둔했습니다.

한편 왕의 군대가 파리를 포위하고 있다고 상상한 군중은 7월 13일 점포를 약탈하고, 다음날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생탕트완 교외에 있는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습니다. 샤를 5세에 의해 1370~82년에 요새로 건설된 바스티유는 루이 14세 집권 때 귀족, 문필가 등 국사범을 수용한 곳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 후 시인이며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볼테르, 프랑스 유물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계몽사상가 드니 디드로 등도 한때 이곳에 투옥되었습니다. 군중이 몰려갔을 때 바스티유에는 그들의 상상과는 달리 불과 7명의 죄수와 110명의 수비대가 있었습니다. 군중과 수비대의 치열한 총격이 벌어졌으며, 100명이 목숨을 잃은 후 수비대가 항복했습니다. 군중은 바스티유의 수비대장 로네를 거리로 끌어내어 때려 죽였습니다. 로네의 목이 창끝에 내걸렸습니다.

바스티유 함락으로 제헌의회의 두 대표자가 왕으로부터 개선장군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삼부회에서 파리를 대표한 의원 장 실뱅 바이이가 파리의 시장에 선출되고, 마찬가지로 삼부회의 소집의 주창자들 중 하나였던 라파예트는 국민방위대의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다가올 혁명의 쓰나미를 예감하지 못하고 왕정을 옹호하는 반혁명적 태도를 취했다가 인생을 그르쳤습니다. 한때 화가를 꿈꾸었던 바이이는 천문학자가 되고 1763년에는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시장에 재직하던 중 1791년 7월 17일 마르스광장의 폭동을 진압하도록 국민군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것이 학살사건을 유발하자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1793년에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의 판결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하고 미국 독립선언과 비슷한 ‘인권선언안’을 제출하여 국민의회 부의장에 선출된 라파예트는 국민방위대의 사령관이 되어 왕과 혁명세력 사이에서 화해하는 역할을 맡아 입헌왕정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1792년 8월 자코뱅파를 탄압하다 실패하자 오스트리아군에 투항하여 5년 동안 투옥되었습니다.

지방의 도시들이 다투어 파리처럼 새로운 자치제와 국민방위대를 구성하고 도시들이 연맹의 협약을 맺고 결속하자 왕의 권위는 사라졌고, 지사들과 질서유지군은 방임했습니다. 농민들이 무리를 지어 성들을 약탈하고 고문서와 영주의 권리대장을 불 질렀습니다. 귀족들의 돈을 받은 비적 떼가 쳐들어오는 것이 두려워 농민들은 마을에 방책을 쳤습니다. 농촌의 대규모 봉기를 피하기 위해 제헌의원들은 1789년 8월 4일 밤에 모여서 특권과 수많은 봉건적 권리들을 폐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틀 후 의회는 ‘인권 선언문’을 기초했습니다.

1789년 8월 26일, 의회가 17조로 된 ‘인권 선언문’(083)을 공표했습니다. 만인의 법적 평등, 노동, 언론, 양심의 자유, 소유권 등이 보장받는 법전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제1조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제2조에는 모든 정치적 집회는 인간의 자연권을 보존하기 위한 것으로 자유, 재산권, 안전 및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적혀 있고, 제3조에는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에게서 나오지 않은 권한은 행사될 수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다비드가 선언문을 기념비적으로 아름답게 장식했는데, 그에게도 혁명에 대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자기만이 부와 사회적 명성, 그리고 왕과 귀족의 후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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