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함락과 인권 선언문

시민의 동요가 심화되자 루이 16세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사제, 귀족, 제3신분으로 구성된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삼부란 사제가 제1부, 귀족이 제2부, 사제와 귀족에 비해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시민이 제3부입니다. 삼부회는 왕권 주도로 국민 대표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자문기관에 불과했는데, 대표들에게는 의결권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삼부회를 소집하고 의제를 제기하는 것은 국왕에게만 있었습니다.

루이 15세의 손자이자 황태자 루이의 셋째 아들인 루이 16세는 열여섯 살에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하고, 1774년 스무 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인 앙투아네트는 아름다운 외모로 작은 요정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녀는 열네 살 때 정략결혼으로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검소한 루이 16세와는 달리 사치로 국고를 낭비하여 시민들의 빈축을 샀습니다. 루이 16세는 선량하고 성실했지만, 의지가 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여 정무에 열심이었더라도 난국을 타개할 기량은 없었습니다. 그는 삼부회에서 국가가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음을 고백하면서 국고를 마련할 새로운 방안을 고안하라고 주문했고, 참석자들은 정의와 자유의 기치 아래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맞섰습니다. 6월 17일 몇몇 사제들의 지지를 받은 제3신분은 자신들이 국민의 96%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스스로 국민의회라고 선포한 뒤 어떤 명목의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징수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루이 16세가 제도적인 폭력행사를 통해 응수하자, 제3신분 의원들은 자신들의 회의장이 왕의 명령에 의해 폐쇄된 걸 알고 6월 20일 궁정 밖에 위치한 테니스코트에서 회합을 갖고 헌법을 만들 때까지 해산하지 않기로 선서했습니다. 사제 다수와 외에 귀족 50명이 선서에 합세했습니다. 7월, 9일, 국민의회는 스스로 제헌의회임을 선포하고 헌법을 기초하는 과업에 착수했습니다. ‘테니스코트의 선서’가 혁명의 기운을 불러일으켰습니다.

7월 초, 3만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파리와 베르사유 사이에 주둔했고, 왕이 국민의회에 무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7월 11일, 왕은 인기 있는 자크 네케르를 해임했습니다. 네케르는 1781년 프랑스 최초로 재정보고서를 간행하여 재정수지를 국민에 알려 궁정의 비난을 받고 재무총감 직을 사임했다가 1788년 다시 총감에 오른 인물로 국민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낭만주의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샤토브리앙과 더불어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의 선구자 스탈부인이 바로 니케르의 딸입니다. 네케르의 해임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분노했습니다. 니케르는 닷새 후 복직되어 교회재산의 국유화, 아시냐 지폐 발행으로 국가재정의 파국을 막았지만, 혁명 후 사태에 순응할 수 없어 1790년에 사임하고 스위스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은둔했습니다.

한편 왕의 군대가 파리를 포위하고 있다고 상상한 군중은 7월 13일 점포를 약탈하고, 다음날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생탕트완 교외에 있는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습니다. 샤를 5세에 의해 1370~82년에 요새로 건설된 바스티유는 루이 14세 집권 때 귀족, 문필가 등 국사범을 수용한 곳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 후 시인이며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볼테르, 프랑스 유물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계몽사상가 드니 디드로 등도 한때 이곳에 투옥되었습니다. 군중이 몰려갔을 때 바스티유에는 그들의 상상과는 달리 불과 7명의 죄수와 110명의 수비대가 있었습니다. 군중과 수비대의 치열한 총격이 벌어졌으며, 100명이 목숨을 잃은 후 수비대가 항복했습니다. 군중은 바스티유의 수비대장 로네를 거리로 끌어내어 때려 죽였습니다. 로네의 목이 창끝에 내걸렸습니다.

바스티유 함락으로 제헌의회의 두 대표자가 왕으로부터 개선장군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삼부회에서 파리를 대표한 의원 장 실뱅 바이이가 파리의 시장에 선출되고, 마찬가지로 삼부회의 소집의 주창자들 중 하나였던 라파예트는 국민방위대의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다가올 혁명의 쓰나미를 예감하지 못하고 왕정을 옹호하는 반혁명적 태도를 취했다가 인생을 그르쳤습니다. 한때 화가를 꿈꾸었던 바이이는 천문학자가 되고 1763년에는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시장에 재직하던 중 1791년 7월 17일 마르스광장의 폭동을 진압하도록 국민군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것이 학살사건을 유발하자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1793년에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의 판결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하고 미국 독립선언과 비슷한 ‘인권선언안’을 제출하여 국민의회 부의장에 선출된 라파예트는 국민방위대의 사령관이 되어 왕과 혁명세력 사이에서 화해하는 역할을 맡아 입헌왕정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1792년 8월 자코뱅파를 탄압하다 실패하자 오스트리아군에 투항하여 5년 동안 투옥되었습니다.

지방의 도시들이 다투어 파리처럼 새로운 자치제와 국민방위대를 구성하고 도시들이 연맹의 협약을 맺고 결속하자 왕의 권위는 사라졌고, 지사들과 질서유지군은 방임했습니다. 농민들이 무리를 지어 성들을 약탈하고 고문서와 영주의 권리대장을 불 질렀습니다. 귀족들의 돈을 받은 비적 떼가 쳐들어오는 것이 두려워 농민들은 마을에 방책을 쳤습니다. 농촌의 대규모 봉기를 피하기 위해 제헌의원들은 1789년 8월 4일 밤에 모여서 특권과 수많은 봉건적 권리들을 폐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틀 후 의회는 ‘인권 선언문’을 기초했습니다.

1789년 8월 26일, 의회가 17조로 된 ‘인권 선언문’(083)을 공표했습니다. 만인의 법적 평등, 노동, 언론, 양심의 자유, 소유권 등이 보장받는 법전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제1조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제2조에는 모든 정치적 집회는 인간의 자연권을 보존하기 위한 것으로 자유, 재산권, 안전 및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적혀 있고, 제3조에는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에게서 나오지 않은 권한은 행사될 수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다비드가 선언문을 기념비적으로 아름답게 장식했는데, 그에게도 혁명에 대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자기만이 부와 사회적 명성, 그리고 왕과 귀족의 후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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