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존엄사를 선택할 법적 권리가 있는가?


 

현재 미국의 대부분 주에서는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존엄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존엄사를 선택할 법적 권리가 있는지 여부에 관해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만약 연방대법원이 존엄사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린다면 그것은 자살을 합법적 권리로 인정한 연방법원 두 곳의 입장을 뒤엎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견서를 제출한 6명의 저명한 도덕철학자들의 의견에 반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의견서에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참여했는데, 그들은 옥스퍼드 대학 및 뉴욕대학의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 뉴욕 대학의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하버드 대학의 존 롤스John Rawls, 하버드 대학의 토머스 스캔론Thomas Scanlon, MIT의 주디스 자비스 톰슨Judith Jarvis Thomson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이 철학자들의 주장에는 잘못된 신념이 담겨있는데, 그것은 정부가 논쟁의 대상이 되는 도덕적, 종교적 문제들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위해야 한다는 신념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각자의 신념에 따라 사람들이 삶을 살거나 죽을 권리를 가졌음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섯 명의 철학자들은 법원이 자살 자체의 도덕적 의미에 관한 판결을 내리지 않고도 존엄사를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의견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대면하는 방식에 대해 혹은 누군가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적절한가에 대해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판단을 내릴 것을 법원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또한 그들은 “종교적, 철학적 신념에 대한 법원의 그 어떤 강요도 없는 상태에서 죽음에 대한 판단을 자기 스스로 내릴 수 있는” 권리를 법원이 각 개인에게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샌델은 자유주의 철학자들이 중립적 태도를 취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관련된 인식을 그러냈다고 말합니다. 이 인식에 따르면 우리의 생명을 우리 스스로가 만든 창조물로 여기면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삶을 살거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의견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죽음을 삶이라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마지막 장면이 우리의 신념을 반영하기를 바란다.

이 철학자들은 생명을 지속하는 것이 삶의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오히려 손상시킨다고 결론짓고 자신의 삶을 끝내려는 사람들을 대변했습니다.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권리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자유에는 “인간 생명의 존재와 의미, 신비로움에 관한 개념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됩니다. 자율과 선택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철학자들의 이러한 견해에는 “생명은 그 생명을 가진 사람의 소유물”이란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윤리관은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우리는 일정한 의무감을 갖고 그 생명을 지키는 관리인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관점과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샌델은 자유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자율 논리는 전혀 중립적이지 않으며, 많은 종교적 전통에도 어긋나고,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아버지인 로크나 칸트가 지닌 관점과도 거리가 멀다고 말합니다. 로크와 칸트 모두 자살할 권리를 부정했으며, 생명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라는 인식에 반대했습니다.

생명권과 자유를 누릴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것이므로 스스로를 노예제도나 자살에 건네줄 수 없다고 로크는 말했습니다. 로크는 말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권한을 줄 수는 없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생명을 제거할 수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할 권한을 타인에게 줄 수도 없다.

칸트의 경우 자율에 관한 존중에는 타인에 대한 의무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도 수반됩니다. 칸트에 따르면 살인이 옳지 않은 이유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며, 이는 자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칸트는 말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수단으로 이용되는 물건이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 자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칸트와 달리 자유주의 철학자들의 의견서에서는 그 사람이 판단력과 정보를 갖고 있는 한 생명의 가치는 자기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존엄사 허용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응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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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산 조반니 성당>과 <스포르차 예배당>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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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산 조반니 성당 디자인 124A>, 1559-60

카사 부오나로티(미켈란젤로 박물관) 넘버 120A를 보면, 건물 중앙 정사각형으로부터 회랑들이 퍼져 나오도록 고안되어 이는 그의 건축적 공간의 개념이 안에서 밖으로 열리게 하는 데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121A는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선례를 구해 반지름으로 공간을 사방에 골고루 흩뜨린 디자인입니다. 이 디자인에는 불분명한 창 사이의 벽과 벽 구획들이 아주 많습니다. 문제는 밖으로 나온 얇은 둥근 벽과 적당하지 않은 내부 창 사이의 벽들이 중앙에 올려놓게 될 돔의 무게를 견뎌내겠느냐는 점입니다. 이는 중심으로부터 설계된 것만은 분명하지만, 가장자리는 해결되지 않은 많은 요소들로 이뤄져있습니다. 이것은 가냘픈 눈송이 모양의 기하학적 조화로 이뤄져 있습니다.

124A는 미켈란젤로의 가장 인상 깊은 드로잉이면서 르네상스의 어느 제도가의 것보다도 훌륭합니다. 120A에서의 각 쌍의 대각선 회랑이 124A에서는 중앙으로부터 바깥 둘레에까지 흩어지며 더욱 더 넓어졌습니다. 앞서 그린 드로잉들에서의 얇은 둥근 벽 안의 공간과는 달리 이 디자인에서는 단단하고 두터운 돌 안에서 공간을 파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건물이 크고, 구조적으로 두터운 외피에 의해 공간이 대칭적으로 파낸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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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산 조반니 성당 디자인 104A>, 15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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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산 조반니 성당 디자인 121A>, 1559-60


미켈란젤로는 1559~60년 로마에 있는 피렌체인들을 위한 산 조반니 성당을 디자인했지만 불행하게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 교회는 미켈란젤로의 역동적 개념과는 달리 티베르 제방 위에 우뚝 솟게 할 대건축물이었습니다. 그의 드로잉들 가운데 특히 세 점의 드로잉을 보면 상상력과 디자인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건축을 외벽으로 에워싸인 상자처럼 여기지 않고 역동적 공간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건물 중심으로부터 외벽으로의 공간에 맞추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처럼 간략화하고 통합하는 방법으로 디자인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일반적인 유형인 그리스 십자형 배치를 중앙을 향해 열린 별모양의 방사형 배치로 대체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네 개의 기둥으로 지지되던 반원 혹은 다각형의 돔 형태의 볼트인 큐폴라는 가장자리에 놓인 여덟 개의 벽기둥으로 지지됩니다. 교차부는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동심원 형태입니다. 일반적으로 직각을 이루던 모서리 대신 외부의 입면은 둥근 벽을 보여줍니다. 이 형태는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적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리스 십자형의 중앙집중식 건축 양식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의 일반적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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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도>의 변화

A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평형


중앙집중식 건축은 고대 이탈리아에서 사용되었던 양식으로, 4세기 중반에 건설된 밀라노의 산 로렌초 성당은 예외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이 건물에서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4열편 모양의 설계 방식을 발견했으며, 예배당의 세 면에서는 그리스 십자형 도면 혹은 팔각형 도면의 모델을 발견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이 건물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16세기가 배출한 위대한 건축가들이 대부분 이 유형을 채택했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대한 브라만테의 최초의 도면 그리스 십자평형과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당 그리스 십자형 모두는 중앙집중식입니다. 이 양식의 단점은 많은 군중이 모이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이 점을 보완한 것이 중앙집중식에 긴 형태의 건축물을 부착한 혼합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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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스포르차 예배당>, 156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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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스포르차 예배당>의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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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스포르차 예배당>의 기둥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작품인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의 고대 바실리카 안에 있는 <스포르차 예배당>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입니다. 그는 1560년경에 예배당의 내부를 원형과 정사각형으로 디자인하면서 4분의 1 구획들을 둥근 벽으로 하고 세 개의 정사각형이 제단의 깊숙한 부분이 되게 했습니다. 이런 기하학적 구성은 관람자의 눈에 단번에 띄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네 개의 기둥이 중앙의 아치형 천장을 떠받들고 예배당의 활력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돌 하나로 된 거대한 기둥들이 정사각형 각 모퉁이에서 중앙에 집중되는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로마의 피렌체인들을 위한 산 조반니 성당 디자인의 요소들이 이 예배당에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바로크 건축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세기의 주역인 피에트로의 아들이자 바로크의 대가인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1598-1680)는 이 작은 예배당에서 역동적인 공간을 발견했습니다.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인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는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피에트로에게 대리석 조각을 배웠으며, 유력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일찍부터 창조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재위기에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의 코르나로 예배당을 장식했는데, 비록 소규모이지만 조각, 건축, 회화를 하나의 장엄한 장식적 통일체로 융합시키고자 한 그의 의도로 완성된 걸작입니다. 그 외에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앱스를 장식했으며, 바티칸 궁전의 정면 계단 등을 설계했고, 베르사유 궁의 <루이 14세> 등을 포함한 다수의 흉상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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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공간의 밀도Density와 암흑물질Dark Matter


 

1930년대에 스위스 태생의 천문학자, 물리학자이자 프리츠 츠비키Fritz Zwicky(1898~1974)는 1922년 취리히의 스위스연방공과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25~72년 미국 패서디나의 칼텍(캘리포니아공대)에서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1930년대 초에 고체상태, 기체이온화, 열역학thermodynamics 등의 분야에 많은 기여를 했으나 곧 초신성supernova(격렬하게 폭발한 뒤 광도光度가 평상시에 비해 수십만에서 수억 배까지 순식간에 증가하는 별), 신성nova(망원경으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던 별이 갑자기 밝아져 수일 내에 광도가 수천 배에서 수만 배에 이르는 별로 은하계 안에서 매년 수십 개의 신성이 출현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중 관측되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음), 우주선cosmic rays(宇宙線, 대기 분자와 충돌 전의 미립자와 방사선을 1차우주선이라 하고 충돌 후 발생한 미립자와 방사선을 2차우주선이라고 함) 등의 연구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그는 1934년에 미국의 천문학자 발터 바데Walter Baade(1893~1960)와 함께 초신성이란 정상적인 신성과는 완전히 다르며 더욱 드물게 일어나는 (우리의 은하에서 1천 년에 두세 번) 항성폭발의 일종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초신성을 찾기 위해 주위의 다른 은하를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1937~41년에 18개를 발견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기록된 초신성은 12개에 불과했습니다.

츠비키는 머리털자리 은하단Coma cluster에 있는 은하들의 움직임이 뉴턴의 중력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관측에 의하면 은하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뉴턴의 중력법칙을 적용할 경우 은하단cluster of galaxies은 당장 해체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머리털자리가 분해되지 않고 그 형태를 유지하려면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수백 배 이상 많은 물질이 존재해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양의 물질이 그 근처를 가득 메우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1962년에 거대한 천체의 운동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신기한 현상이 워싱턴 DC에 소재하는 카네기과학연구소Carnegie Institution for Science의 지자기과 선임연구원이며 여성 천문학자 베라 루빈Vera Rubin(1928~)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수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일수록 공전속도orbital velocity가 느리고 가까운 행성일수록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루빈이 은하수에 속해 있는 푸른 별들의 이동속도를 관측해보니 은하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는 뉴턴의 운동법칙에 위배되는 현상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은하수는 원심력centrifugal force을 이기지 못하고 당장 분해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은하수는 지난 1백억 년 동안 지금과 같은 형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왔습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려면 은하수의 총질량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10배 이상 커야 합니다. 즉 뉴턴의 법칙이 옳다면 은하수 질량의 90%가 우리의 눈으로부터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천문학자들이 루빈을 무시한 데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1978년 루빈과 그녀의 동료들은 11개의 은하를 관측하여 그것들 모두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알베르트 보스마Albert Bosma는 수십 개의 나선은하들을 분석한 끝에 루빈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천문학계는 암흑물질의 존재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지의 물질을 관측하는 다양한 방법 중에 미지의 물질 사이를 진행하는 별빛의 궤적locus을 관측하는 것이 있습니다. 암흑물질은 중력에 의해 빛의 경로를 휘어지게 만듭니다. 최근 들어 과학자들은 허블망원경의 도움으로 우주에 산재하는 암흑물질의 분포도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암흑물질이 외형적으로 검다는 것 외에는 일상 물질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갈색왜성이나 중성자별, 블랙홀 등은 우리의 눈(혹은 망원경)에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물체는 중입자baryon(중입자는 핵자nucleon와 중핵자hyperon로 구분할 수 있고, 핵 자체는 양성자proton와 중성자neutron가 속하며, 중핵자에는 람다입자, 시그마입자, 크사이입자가 속합니다. 대체로 질량은 중간자meson보다 무겁고, 핵자를 제외한 나머지 중입자의 수명은 중간자에 비해 짧은 편임)으로 이루어진 일상적인 물체들인 양성자나 중성자 등처럼 견고하게 뭉쳐있다. 과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마초MACHOs(Massive Compact Halo Objects), 즉 거대질량의 고밀도 무리 천체라 합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기존의 주장을 모두 부정하면서 암흑물질이 전혀 새로운 형태의 물질로 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암흑물질은 윔프WIMPs(Weakly Interacting Massive Particles), 즉 약하게 반응하는 질량이 큰 입자들이라고도 하는데, 현재로서는 암흑물질을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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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 2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

|2005 문화관광부 학술부분 추천도서|

위대한 커플시리즈 No. 5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은 르네상스의 두 거장을 역사 속에서 비교 분석한 책이다. 전세계 천재 가운데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천부적 재능으로 예술가의 지위를 확보해낸 미켈란젤로.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문화혁명 속에서 예술계의 르네상스를 완성시킨 그들의 발자취와 더불어 정치․경제․종교와의 관련 속에서 예술의 독자성을 일구어낸 행보를 살펴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근대 과학의 지평을 열다

우리의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해주는 태양열 기구, 운하, 비행기, 냉․온수기, 증기 기관차, 기중기 등 수많은 과학적 발명품들. 19세기의 산물로 여겨지던 이러한 발명품들이 바로 레오나르도의 천재성 속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은 경탄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며, 그와 동시대인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들도 그에게 크나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공식적인 교육 대신 무엇이든 혼자 터득해야만 했던 사생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가란 아름다움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 그대로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자연을 과학적으로 조망하라"는 주장은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려는 그의 신념의 표현이다. 서른 구 이상의 사체를 해부하면서 남긴 드로잉들은 심장, 폐 등 순환기를 비롯해 간, 장 등의 소화기, 생식기 등을 해부 분석한 것들로 18세기 말까지 의학적 자료로써 인정받을 정도로 정교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바랐던 레오나르도의 ‘르네상스 맨’적인 호기심은 인체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안으로 파고들어 도시의 구획을 통한 복지공간의 창출을 기획했으며, 운하를 이용한 이윤 축적을 예감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경제․사회적인 면에서 이 진보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의 아이디어는 제한적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 평생 군사 전문가가 되기를 바랐던 그는 200여 년 후 만들어질 기관총의 전신을 고안했고, 비행의 원리를 터득했다. 또한 거울을 이용한 태양열 기구, 기중기, 물과 공기의 흐름에 관한 연구 등 그가 일구어놓은 많은 과학적 발견들은 아무런 장비도 없이 수많은 과학 분야를 탐험한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미켈란젤로,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다

교황권의 파행이 극치에 달하는 정치적 혼란과 이탈리아 전역에 감돌던 전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작된 그의 예술인생은 르네상스 미술의 이정표가 된다. 초기 르네상스 미술은 섬세하고 유려한 작품을 지향했던 교황과 귀족들에 의해 이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단지 종교와 신분에 종속적인 존재로 그들의 주문을 통해 작품을 제작했을 뿐이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이런 예술계의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유려하고 우미한 그의 초기 작품들은 당시 예술계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후 명성을 얻은 미켈란젤로는 예술가가 처했던 종속관계를 청산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정신에 내재한 이미지를 물질로 구현’하고자 했다.
“돌 속에 이미 내재한 형상을 자유롭게 했을 뿐이다.” 미켈란젤로는 오랜 사색 끝에 얻어진 자신의 정신에 내재한 추상적 형상을 질료로 탁월하게 구현시킬 줄 알았고 ‘순수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자연을 과학적으로 조망하라”던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예술이󰡒자연보다 더욱 지혜롭다󰡓고 주장했으며 예술을 통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물질은 정신을 드러나게 하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최후의 심판>에 표현된 육중하고 뒤틀린 육체들과 구성은 정해진 대상을 교리에 맞춰 그려야만 했던 당시의 사고방식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고, 또한 종교적 제약을 벗어나고자 한 그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신성모독, 이단사상, 동성애, 오만 등 그에 대한 수많은 험담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 있을 때 3권의 전기가 출간되었고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까지 불렸다. 이러한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재능에 힘입어, 그 이후의 화가들은 더 이상 종교와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그려내는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왜, 그들을 만나야만 하는가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도 친숙하게만 느껴지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그들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책들을 통해 소개되는 것은 유래를 찾기 힘든 천재성과 예술적 재능 때문이었다. 수학자․과학자․이론가로 명성을 떨친 레오나르도의 노트북에서 발견되는 번득이는 천재성과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흘러넘치는 예술적 재능은 세계인들을 경탄하게 만든다. “쇠처럼 녹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레오나르도의 천재성과 참된 삶을 위한 고민했던 미켈란젤로의 종교적 신념은 삶에 대한 성숙한 시각을 제시한다.
현대는 기술에 의존하여 사색과 고민을 잊고 살며, 본질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상대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즉흥적으로 제시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립과 반목이 아닌 ‘조화’이다. 레오나르도의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과 미켈란젤로의 물질 속에서 정신을 뽑아내는 사색은 현대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만나야 하는 중대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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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최후를 장식한 성 베드로 대성당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며 기독교계에서 가장 큰 교회이자 르네상스 건축의 집대성입니다. 그러나 1506년 이전의 이 성당은 무질서한 건축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교황 율리우스의 수석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이 성당을 1506년부터 개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라만테는 영리한 디자이너였지만 엉성한 공학가였습니다. 그는 서둘러 개축하느라 고대 성당의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을 부수었습니다. 그는 중앙의 돔을 떠받치기 위한 네 개의 거대한 돌 받침대를 세우면서 지붕 무게와 측압에 대한 상당한 착오를 범했습니다. 브라만테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은 예술가들이 그의 본래 디자인을 망쳐놓았습니다. 30년 동안 부수고 짓기를 반복한 성 베드로 대성당 때문에 로마를 찾는 이들에게 그곳은 쇠퇴한 지역으로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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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새로운 성 배드로 대성당을 위한 나무 모델>

미켈란젤로는 이 모델을 보고 호화스럽기만 한 모습이며, 바보 같은 소와 저능한 양들을 위한 목장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1516~46년에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는 명목상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책임자였지만 그가 건설한 부분은 거의 없고, 그나마 그가 건축한 것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변경·개수되었습니다. 그는 수년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값비싼 참으로 엄청난 모델을 제작했는데 모델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모델을 보고 상갈로가 예술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웃층과 아래층의 지나치게 많은 장소들은 쫓기는 사람들이 숨을 만하거나 위조화폐를 제조하거나 수녀들을 성폭행하거나 다른 악행들을 저지르는 등 헤아릴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기에 충분해서 밤에 교회 문을 닫게 되면 악행자들을 잡아내는 데 스물다섯 명의 남자가 필요할 정도이다.

상갈로는 피렌체의 건축가 집안으로 건축가, 족가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1443?-1516), 그의 동생이자 제자인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1455-1534), 그들의 조카인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1483-1546) 등이 배출되었습니다. 줄리아노 다 상갈로는 브루넬레스키의 추종자로 자신의 많은 작품들에 브루넬레스키의 양식을 적용했고, 1514-15년 동안 브라만테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했으며, 브루넬레스키가 건설한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 설계를 맡았고, 건축가로서 15세기부터 성기 르네상스로의 이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고대 연구에 강한 열정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친구이자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는 브라만테의 추종자로 간주되었고, 작품에서는 줄리아노보다 위풍당당하고 고전적인 특성을 지닙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는 숙부들 밑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1503년경까지 브라만테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브라만테의 영향을 받은 그는 파르네세 가를 위해 일했으며, <파르네세 궁정>을 설계했습니다. 이 궁전은 이후 미켈란젤로에 의해 보완되었습니다. 일 조바네는 1516-46년 동안 명목상 성 배드로 대성당의 건설책임자였습니다.

1546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로 임명된 미켈란젤로는 어마어마한 자원 낭비와 설계상의 오류라는 곤란한 상황에서 이 일에 관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브라만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성당에 대한 브라만테의 계획은 혼돈스럽지 않고 분명하며 단순하고 계발적이며 … 아름다운 디자인이고 … 상갈로가 시도했지만 브라만테의 구성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참된 방법으로 마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말한 대로 브라만테의 원래 개념에 충실하면서 그의 공학적 결함을 수정하여 30년이나 지난 건물을 막 지어낸 건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는 상당 부분을 부수고 새롭게 개축했습니다.

성당은 밖에서 보면 꽉 짜인 조각 덩어리로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사방의 공간이 매우 넓고 위로도 크게 트여 있어 빛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각 벽기둥을 이층, 삼층 창문을 지나 위로 똑바로 처마 언저리 돌출부와 지붕과 천장 사이 공간에까지 닿게 해서 격동적이 되게 하고 돔이 벽기둥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습니다. 건물은 바닥으로부터 채광창까지 흐르는 듯한 선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는 평석을 촘촘하게 쌓아올려 벽면을 잔잔한 물결처럼 만들었으므로 벽면은 거대한 구조상의 평면 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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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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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도>의 변화

A는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평형이고, B는 상갈로, C는 미켈란젤로의 설계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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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 대성당 돔을 위한 나무 모델>, 1561년경, 라임나무, 템페라, 500-400-20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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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 대성당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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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


브라만테의 원래 디자인을 충족시킨 돔은 반구형으로,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작품이며 성 베드로 대성당을 완성된 건축물로 만들었다. 그는 약속대로 돔을 위한 모델을 만들었고, 미켈란젤로 사후의 건축가들이 그의 디자인을 본받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의 내부 공간에 들어서면 우리는 왜소해지고 난쟁이가 된 기분이 듭니다. 벽기둥의 받침대보다 작고, 가장 작은 벽토 천사보다도 작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모든 것들이 비례적으로 구성되었지만, 대단히 큰 규모라서 공간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이 거대한 건물 중앙에 그리스도가 반석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그 위에 교회를 건립하겠다고 한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이곳 위에 돔으로부터 빛이 쏟아집니다. 이제 우리는 반구형 지붕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 하면 미켈란젤로를 떠올리게 됩니다. 150년의 건축 역사를 가진 이 성당을 미켈란젤로가 20여 년 만에 훌륭한 건축물로 완성시킨 것입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미켈란젤로가 최후를 장식한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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