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정보를 적절하게 수집하고 활용할 수 있을까?




토요일 책을 몇 권 구입하기 위해 교보문고에 갔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살펴보고 사기 위해 인터넷으로 주문하지 않고 직접 간 것입니다.

서점 안에 들어서서 느낀 건 서점이 정보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지식을 정보란 말로 대신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수명이 매우 짧다는 것을 알고부터 지식을 정보란 말로 대신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책은 정보를 잘 편집한 것입니다.

인터넷에도 정보가 넘쳐나지만, 책과 다른 점은 편집이 되지 않은 상태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데 과연 이 많은 정보가 필요할까?



우리가 다른 별에 이주해 가서 살게 된다면, 그래서 지구에서의 지식 혹은 정보를 운반해가야 한다면 얼마만큼 가져가야 할까?

서점의 모든 책을 다 가져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서점에는 다양한 정보들로 채워져 있을 터인데 그것들을 다 가져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줄이고 줄이면 어느 정도가 될까?

인류에게 꼭 필요한 정보의 양은 얼마나 될까?

그걸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전, 그것이 브리태니커 사전이든 그것보다 더 활용되는 사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압축된 인류의 정보라고 할 것입니다.

나머지의 정보는 사전에 대한 예증 내지는 좀더 구체적인 설명일 것입니다.



전 제가 구입하기를 원하는 책을 제 스스로 선반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그건 그곳에서 일하는 점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이 너무 많아서 누구의 기억에도 저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원했던 책은 <김기림 문학비평>, 북한에서 발간한 <조선력대미술가편람>, <김말봉의 문학과 사회> 그리고 이상의 아내이자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쓴 김환기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전 책 제목을 쓴 쪽지를 점원에게 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네 권 중 제가 교보문고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건 한 권 <김기림 문학비평>뿐이었습니다.

<조선력대미술가편람>은 인터넷으로만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전에 검토할 수 없이 구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두 권은 절판된 것들이라서 헌책방에서 구해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보문고에는 엄청난 양의 책이 있지만, 없는 책도 여간 많지 않습니다.

정보가 우리의 상상의 초월할 정도로 많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매일 새로운 글이 엄청난 양으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정보를 상대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불필요한 정보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정보를 적절하게 수집하고 활용할 수 있을까?

쉬운 문제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소셜네트워크에 있어서 너무 가벼운 관계를 설정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입니다.

블로그만 사용합니다.

이제 블로그는 고전적인 방식이 되었지만,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검색을 적절히 활용합니다.

그러나 검색은 어느 정도의 정보를 가진 사람에게만 유효한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100퍼센트 믿을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언비어와도 같아서 알아서 취하고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언비어로 말하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정확한 정보가 아닙니다.

모두가 필요한 정보가 아닙니다.

해로운 정보도 엄청 많습니다.

정보를 가려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서로 다른 주장을 펴는 책들을 접할 때 그런 느낌이 더욱 듭니다.



정보가 많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정보, 혹은 유용한 정보,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서 꼭 필요한 정보는 헌책방에서 구해야 하거나 오프라인에서는 구입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정보를 불필요한 정보 가운데서 가려내고 수집한다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정보가 중요하지 않은 정보 가운데 꼭꼭 숨어있는 실정입니다.

서점에서 눈앞에 전시된 많은 책들을 양서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많이 팔기 위한 상업적 이유 때문에 가장 좋은 장소에 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양서는 발굴해야 할 정도로 어딘가에 숨어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일조차 쉽지 않습니다.



헌책방을 뒤졌지만 전 <김말봉의 문학과 사회>와 김향안이 쓴 남편 김환기 화백에 관한 책을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두 권은 꼭 필요한 정보인데.



매일 새로운 신간이 새로운 정보의 탈을 쓰고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린 더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작 필요한 정보 찾기에 나서야 합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는 이런 노역이 있습니다.

새삼 정보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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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제왕’ 모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는 1874년에 생드니 가 2번지로 이사했는데, 아르장퇴유의 집 근처였습니다. 그가 이사한 곳은 역 바로 맞은편 초록색 덧문이 있는 분홍색 집으로 집세가 월 1천 4백 프랑으로 오히려 전보다 더 비쌌습니다. 그 집 정원이 처음 캔버스에 나타난 건 1875년의 작품이었고, 화려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르누아르가 모네를 가리켜 “제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1873년 모네의 연수입은 2만 4천 프랑이었지만, 이듬해 천 프랑에 작품 5점을 팔 정도로 궁색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써버렸다는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도 하녀와 정원사를 고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창한 날이면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대동하고 프티 제네빌리에 근처 강둑이나 꽃이 만발한 들판으로 나들이 나가곤 하면서 생활의 여유를 잃지 않았습니다.

1875년부터 프랑스 경제는 더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보불전쟁 이후 계속해서 나빠진 것입니다. 그해 모네의 연수입은 9,765프랑으로 하락했습니다. 마네가 모네에게 생활비를 보태주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모네는 마네에게 편지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마네, 선생에게 자꾸만 도움을 청하는 절 용서하십시오. 선생이 주신 걸 다 써버리고 이제 다시 무일푼 신세가 되었습니다. 선생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선생이 할 수 있으시다면 최소한 40프랑을 우선 꿔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모네는 푸줏간과 빵집에서 더 이상 외상으로 살 수 없을 정도로 빚이 많다고 편지에 적었습니다. 모네가 돈을 빌려가면 아주 오래 있다 갚았지만, 마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에 백 프랑 혹은 천 프랑까지도 선뜻 꿔주었습니다. 마네는 뒤랑-뤼엘에게 모네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편지했다.

그가 내게 자기 그림을 골라잡아 한 점에 백 프랑씩 10점이나 20점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봐 달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5백 프랑씩 내서 그의 그림들을 구입하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가 모르게 해야겠지요.

그러나 뒤랑-뤼엘도 형편이 나빠져서 모네의 그림 구매를 중단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뒤랑-뤼엘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마네는 동생 외젠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근래 모네를 만났는데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더구나. 그는 천 프랑이 꼭 필요해서인지 그 돈을 주면 10점을 구매자가 골라잡아도 된다고 한다. 네게 5백 프랑 여유가 있다면 나와 함께 10점을 사도록 하자. 난 그것을 각각 백 프랑에 처분할 자신이 있기 때문에 돈을 곧 되찾을 수가 있단다. 5백 프랑을 보내주면 가서 사도록 하마. 그에게는 너와 내가 샀다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네가 화가로서의 모네의 재능을 인정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마네는 모네가 훌륭한 화가임을 인정했으므로 그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네 역시 마네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마네가 사망한 뒤 <올랭피아>를 뮤지엄에 소장시키는 운동을 펴기도 했습니다.

뒤랑-뤼엘은 팔지 못한 채 소장하고 있는 그림들이 너무 많아 당분간 그림을 구입할 수 없었으므로 모네는 스스로 새 구매자를 물색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의 주요 구매자들로 오페라 바리톤 가수 장 밥티스트 포르와 직물상인 에르네스 오슈드가 있었습니다. 오슈드는 1874년 5월에 <인상, 일출>을 8백 프랑을 주고 산 열정적인 수집가입니다. 뒤랑-뤼엘은 경매를 통해 자신과 모네의 경제난을 한꺼번에 해결할 생각으로 1875년 3월 24일 드루오 호텔 경매장에 경매인으로 나섰습니다. 모네를 비롯하여 르누아르, 베르테, 시슬레가 163점의 그림을 경매에 내놓았으며, 모네의 그림 20점이 비교적 낮은 가격인 그림당 2백 프랑에 입찰되었습니다. 1875년은 모네에게 최악의 해였습니다. 포르, 에밀 블레몽, 에르네스 메, 앙리 루아르, 빅토르 쇼케 등이 헐값에 모네의 그림을 구입하면서 자기 소장품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모네의 재능을 알리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228

모네의 <석탄을 내리는 남자들 Men Unloading Coal>, 1875, 유화


1875년에 모네가 그린 그림들에는 그의 경제적 어려움이 반영된 듯 색조가 어두운 것이 특기할 만합니다. 다리 아래서 노역하는 노동자들을 그린 <석탄을 내리는 남자들>은 아르장퇴유가 산업화되어가는 일면을 보여줍니다. 수직선, 수평선, 대각선이 모두 사용된 이 작품은 모네가 그린 것들 가운데 가장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그림입니다.


229

모네의 <일본 소녀 The Japanese Girl>, 1876, 유화

이것은 제2회 인상주의전에 출품된 작품입니다. 실제 사람 크기로 그린 이 그림의 모델은 카미유로 화려한 일본 의상 기모노에 붉은색이 감도는 금발 가발을 쓰고 <초록 드레스의 여인>에서와 같은 포즈를 취하면서 이번엔 관람자를 향해 얼굴을 돌렸습니다. 이것은 일본화를 모방한 것입니다. 모네는 열일곱 살 때부터 일본 판화를 수집했습니다. 카미유가 입은 기모노와 둥근 부채는 일본 제품이며, 포즈 또한 일본인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모네가 인물화를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하자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린 것입니다.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1876년 4월에 파리의 플레티에 가에 위치한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전시회는 제1회전에 참여한 30명 중 19명밖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인상주의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화가들이 불참했는데, 제1회 전시회에 대한 언론의 공격이 악몽처럼 되살아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모네를 비롯하여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드가, 베르테가 주요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모네는 18점을 출품했으며, 그해에 그린 <일본 소녀>도 포함되었습니다.


232-2

알프레드 르 프티의 캐리커처 <인상주의자들의 왕 King of the Impressionists>, 1876

모네가 아닌 마네를 인상주의자들의 왕으로 묘사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232-3

마네의 <봉 복 Bon Bock>, 1873, 유화, 94-83cm.


흥미로운 점은 알프레드 르 프티가 인상주의 화가들의 왕으로 모네가 아닌 마네를 묘사한 것입니다. 르 프티는 마네가 맥주병을 깔고 앉은 것으로 풍자했는데, 마네의 <봉 복>을 두고 어느 평론가가 “금년에 마네가 맥주에다 물을 탔구먼”이라고 꼬집은 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1873년 살롱에 소개된 <봉 복>은 할스의 화법으로 어두침침한 효과를 한층 드러낸 작품입니다.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에 대해 “몸집이 크고 얼굴이 불그스레한 이 쾌락주의자의 모습은 담배와 맥주 말고는 세상과 절연한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고 평했습니다. 마네가 바티뇰 그룹의 예술가들과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인상주의 그룹전에 참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티뇰 그룹의 예술가들이 참여를 권했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이 마네를 인상주의의 왕으로 여긴 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알베르 울프와 몇몇 평론가들이 전시회가 형편없다고 혹평했지만 제1회 인상주의전에 비하면 언론의 반응은 훨씬 호의적인 편이었습니다. 아르망 셀베스트르와 말라르메가 호평했고, 에밀 졸라 역시 모네의 주도적 역할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졸라는 “그룹의 리더는 모네다. 그의 붓질은 유별난 화사함으로 단연 눈에 띈다”고 적었습니다.


232

모네의 <칠면조 Turkeys>, 1876, 유화


231

모네의 <몽제롱의 연못 The Pool at Montgeron>, 1876, 유화


230

모네의 <몽제롱의 정원 모퉁이 A Corner of the Garden at Montgeron>, 1876, 유화


1876년 봄 모네는 파리에 머물며 마네, 시슬레와 더불어 작업했고, 그해 가을에는 백화점 부호 에르네스 오슈드의 집에 한동안 묵었는데, 그와 거래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몽제롱의 샤토에 있는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었던 오슈드는 아내 알리스가 상속받은 로탕부르그 저택 장식을 위해 네 점을 의뢰했는데 높이가 약 172cm, 폭 140-193cm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모네는 대연회장을 장식하기 위해 여름과 가을을 오슈드의 저택에 묵으면서 <칠면조>, <몽제롱의 연못>, <몽제롱의 정원 모퉁이>, <사냥>(또는 <몽제롱의 공원길>이라고 한다) 네 점을 그렸습니다. 그는 눈부신 꽃들로 화려한 자연의 경관과 연못에 비친 자연의 모습을 놀라운 효과가 나도록 표현했습니다. 그는 숲과 꽃 그리고 물을 주로 그려왔지만 <칠면조>는 매우 낯선 주제입니다. <칠면조> 배경의 건물이 로탕부르그 저택입니다. 이 작품 역시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대담한 원근법을 사용한 것이며, 앞에 칠면조가 잘린 것도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순간성을 느끼게 해주는 요소입니다.

모네는 오슈드 부부와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그해 오슈드는 마네도 그의 저택에 초대했습니다. 저택에 알리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장식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습니다. 마네가 <꽃밭 속의 젊은 여인>이란 제목으로 알리스를 그렸는데, 모네의 영향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윤곽을 흐리게 그렸으므로 알리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모네가 그곳에 머문 동안 이변이 발생했는데, 알리스와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알리스는 1877년 8월 20일에 여섯 번째 자식 장 피에르를 낳았으며, 모네의 아들로 추측됩니다. 훗날 모네에 관한 책을 쓴 장 피에르는 노년기의 자신의 모습이 모네와 닮았다는 내용을 적었으므로 이 부분을 놓고 그가 모네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되었습니다. 알리스는 후에 모네의 두 번째 아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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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지원이란 집단지능이다


 

1900년, 평균 미국인은 100달러 가운데 76달러를 식비와 의복비, 주거비로 지출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항목에 지출되는 돈은 평균 37달러에 불과합니다. 1700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에 있던 태양왕 루이 14세는 매일 저녁 홀로 만찬을 즐기면서 금그릇과 은그릇에 담긴 40종의 요리를 골라 먹었다고 합니다.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 데 498명이 동원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부자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루이 14세와 비교한다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가난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가는 슈퍼마켓이란 보물창고는 루이 14세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신선, 냉동, 통조림, 훈제, 즉석 식품이 완비되어 있으며, 재료로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온갖 종류의 생선, 새우, 가리비, 달걀, 메추리알, 감자, 고구마, 옥수수, 콩, 당근, 무, 양배추, 가지, 오이, 당근, 참기름, 올리브유, 포도씨유, 땅콩기름, 금귤, 큰 뿌리 샐러리, 아욱, 7종의 양상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에겐 전속요리사가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이탈리아식, 중국식, 일본식, 프랑스식, 미국식, 인도식, 태국식, 페루식, 한식 등 아무거나 골라서 식당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모든 식당의 숙련된 요리사들이 우리를 위해 봉사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전속 재단사가 없지만, 언제든지 우리가 원하는 옷을 주문해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 전역에서 우릴 위해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자가용 비행기가 없지만, 저가 항공노선 표를 사면 숙련된 조종사가 루이 14세가 꿈도 꾸지 못했던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줍니다. 우리에겐 양초 심지를 조절해줄 하인은 없지만, 전등 스위치만 올리면 곧바로 밝은 빛이 들어옵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인이 없지만, 휴대전화가 있습니다. 전용 약제사는 없지만, 약국에 가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습니다. TV 채널을 돌리기만 하면 우릴 위해 준비한 많은 소식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유명 영화배우의 이혼 소식도 집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The Rational Optimist』의 저자 매트 리들리Matt Ridley(1958-)는 루이 14세의 하인 498명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즉각적인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태양왕의 하인들과 달리 이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매트 리들리는 묻습니다. 이것이 교환과 전문화가 인류를 위해 일으킨 마술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이며 윤리학자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1723-90)가 일찍이 말했습니다. “문명사회의 개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지원을 상시적으로 필요로 한다. 우정을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생애를 통틀어도 불과 몇 명 되지 않는데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지원이란 집단지능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다(1899-1992)는 지식에 관해 적절하게 말했습니다. “결코 집중되거나 통합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개인 모두가 지닌, 불완전하고 흔히 상충되는 지식의 흩어진 조각으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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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와 동성애가 동등하게 사생활 보호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사점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이성애와 동성애가 동등하게 사생활 보호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사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문제에 두 가지 방식으로 답할 수 있다면서, 하나는 자원주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인 관점이라고 말합니다. 전자는 자율권을 내세우는 반면 후자는 동성애나 이성애가 추구하는 인간의 행복에 호소합니다. 자원주의 논리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보편성과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지극히 사적인 인간관계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관점에서는, 동성애와 이성애가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반면 실질적인 관점에서는, 전통적인 이성간 결혼의 가치 있는 많은 측면들이 동성간 결혼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성애와 동성애를 같이 인정해야 하는 이유는 둘 다 개인의 선택에서 기인한 행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둘 다 중요한 인간의 선을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은 자율권에만 의지하지 않고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에도 존재하는 미덕을 강조합니다. 동성애자의 사생활 보호권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결혼과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충실한 마음으로 함께 하겠다는 신성한 약속이자 삶의 조화로움을 증진시키는 결합”이며 고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결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방항소법원은 동성애 금지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습니다. 항소법원에서 이성애와 동성애 모두 인간의 선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항소법원 판사는 결혼관계가 중요한 이유가 단지 출산의 목적 때문만이 아니라, “상호 지지와 자기표현을 위한 훌륭한 만남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판사는 연방대법원이 중요하게 여긴 특성들이 동성혼에도 존재할 수 있다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현재 논의되는 이러한 성행위가 이성간 결혼에서와 같은 목적에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스탠리 대 조지아Stanley vs. Georgia 재판에서는 개인이 사적 공간에서 음란물을 소지할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이 판결은 피고의 집에서 발견된 음란물이 ‘고귀한 목적’에 기여한다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만의 사적 공간에서 즐길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1980년 뉴욕 대 오노프레New York vs. Onofre 사건에서도 누욕항소법원은 이와 동일한 근거로 동성애자의 사생활 보호권을 인정했습니다. 법원은 “음란하다고 비난받는 도구를 이용해 성적 욕구를 만족시킬” 권리가 존재한다면, 쌍방 합의에 기초한 성행위가 비상적일지라도 그 권리 역시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법원은 이 판결의 중립성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에 관한 그 어떤 신학적, 도덕적, 심리적 판단에 대해서도 견해를 표명하지 않는다. 충분한 지식과 능력을 지닌 기관이나 개인들도 동성애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으며, 실제로도 이견을 보인다.

법원의 역할은 특정한 도덕적 관점을 법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관점을 배제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샌델은 동성애의 도덕성을 다루지 않고 배제한다는 관용 논리가 상당한 장점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가치에 대해 심각한 의견 불일치가 발생할 경우 이 논리를 적용하면 대립하는 양측에게 양보하도록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 논리를 따르면 도덕적 견해를 바꿀 필요 없이 사회적 평화와 권리 실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가치관을 바꾸도록 설득당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사적 공간에서 동성애를 즐기는 사람들을 묵인하면 됩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이 같은 관용을 도덕성과 관계없이 정치적 합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샌델은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중립적 관용에 두 가지 난점이 있다면서, 첫째, 현실적으로 볼 때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함의가 전혀 없이 오로지 자율권만을 토대로 사회적 협력이 확보될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난점으로 그는 권리 존중의 질을 말합니다. 뉴욕항소법원 판례가 보여주듯 동성애를 허용하려면 동성애를 천박한 것으로 폄하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음란물과 동등하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한 천박함에도 불구하고 허용해야 하는 그런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샌델은 충분한 존중이 이뤄지려면 동성애자의 삶에 대해 적어도 어느 정도의 인정이 필요하다면서 오로지 자율권의 측면에서만 이뤄지는 법적, 정치적 담론에 의해서는 그러한 인정이 이뤄지기 어려움을 지적합니다.

연방대법원은 2003년 로렌스 대 텍사스Lawrence vs. Texas 사건에서 동성간의 이른바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금하는 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앤서니 케네디Anthony Kennedy 판사는 법원의 최종 입장을 밝히면서, 개인적인 도덕 판단을 피하는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자유란 생각, 믿음, 표현, 특정한 사적인 행동에 대한 자유를 포함하는 자율적인 자아 개념이다.

나아가 법원은 케이시 재판에 등장한 진술서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습니다.

인간 생명의 존재와 의미, 신비로움에 관한 개념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자유의 핵심이다. 만일 국가의 강제로 이러한 인식들에 관한 신념이 형성된다면 그 신념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다.

텍사스 주의 동성애금지법을 위헌으로 판결한 케네디 판사의 의견에는 또 다른 실제적 이유가 있었는데, 도덕적으로 합당한 삶의 방식을 그릇되게 비하한 점에 있습니다. 케네디 판사는 말했습니다.

바워스 재판의 쟁점이 단순히 특정한 성행위를 할 권리였다고 말하는 건 잘못이다. 이는 결혼이 단순히 성행위 권리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면 결혼한 부부를 비하하는 셈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샌델은 사생활 보호권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모두의 성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이는 성생활이 자율권과 선택을 반영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선을 구현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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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베네치아 대운하>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제1회 인상주의전이 열렸던 1874년 9월 마네는 자신보다 네 살 어린 제임스 티소James Tissot(1836-1902)와 함께 베니스로 갔습니다. 마네는 말라르메에게 티소가 그림을 사줄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해서 그곳으로 간다고 편지했습니다.

티소의 본명은 자크 조셉으로 1871년 런던으로 간 후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영어 이른 제임스를 사용했습니다. 마네의 동생 외젠이 부인 베르테와 함께 1875년 여름 런던에 갔을 때 티소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티소는 마네, 드가와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베르테가 런던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티소가 왕자처럼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드가가 젊었을 때 존경하면서도 경쟁상대로 여긴 티소는 파리에 잘 알려진 인물화 화가였습니다. 1867-68년에 <제임스 티소의 초상>을 그릴 때만 해도 무명이던 드가와는 달리 티소는 이미 성공한 화가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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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의 <L.L.의 초상 Portrait de Mlle L.L. (Jeune Femme en Veste Rouge)>, 1864, 유화, 124-99.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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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의 <제임스 티소의 초상 Portrait de James Tissot>, 1867-68, 유화, 151.4-112cm.

티소를 부러워한 드가는 잠시 머무른 화실을 떠나지 못해 좀이 쑤시는 듯한 말쑥한 신사로 티소를 묘사했습니다. 배경에 루카스 크라타흐의 <프리드리히 대제>가 보입니다.


아르장퇴유에 있던 모네도 베니스로 가서 마네와 티소에 합류했고, 세 사람은 커티스 부부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커티스는 런던에 안주하여 영국 회화에 영향을 준 미국인 예술가들 존 싱어 사전트와 헨리 제임스의 친구였습니다. 마네 부부는 10월 2일까지 베니스에서 머물렀으며, 티소가 소개한 사람이 많은 작품을 사주어서 매우 즐거운 여행이 되었습니다.

마네는 그곳에서 스케치한 것들을 파리로 가져와 기억을 되새겨 완성했으며 <베네치아 대운하>는 그것들 중 한 점입니다. 마네는 왼쪽 건물을 거칠게 대충 그렸는데, 모네가 30년 후에야 그릴 그림처럼 단순화했습니다.

티소는 마네의 베니스 풍경 한 점을 2천 5백 프랑에 구입했습니다. 베르테의 말로는 그 가격은 티소에게 코끼리 비스킷 정도라면서 티소는 단번에 30만 프랑어치 작품을 판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마네의 베니스 그림 2점을 포르가 5천 프랑과 6천 프랑에 구입했고, 뒤랑-뤼엘도 마네의 그림을 구입했습니다. 당시 1천 5백 프랑이 오늘날 약 960달러에 해당하므로 그림 값을 대충 어림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네의 베니스 그림들을 칭찬하자 모네가 빈정댔습니다.

그 그림들은 징글맞다. 그것들이 어째서 무가치한지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난 아내와 함께 베니스에 갔다. 난 그곳에서 스케치를 했고 다시 그곳에 갔어야만 했는데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해서 나는 기억을 되새겨 완성했는데 자연이 앙갚음을 했다. 알겠느냐? 나는 나만 알고 누구도 알 수 없도록 파리의 장면을 기억을 되새겨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베니스의 장면은 그렇게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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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베네치아 대운하 Le Grand Canal, Venice>, 1908, 유화, 73-92cm.

모네의 그림에서 빛의 반사가 영롱하게 나타나 있어 대상에 대한 고나찰이 매우 치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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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콘다리니 궁전, 베네치아 Le Palais Contarini, Venice>, 1908, 유화, 73-92cm.


야외의 화가인 모네는 자연의 섬세한 변화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처음 방문한 지역의 장면은 그 자리에서 완성해야지 기억에 담았다가 화실에서 완성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음을 지적하려고 한 것입니다. 모네 자신도 스케치한 그림에 기억을 되새겨 그려봤지만 자연이 앙갚음했다고 했는데, 당시의 일기의 변화를 기억해서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모네는 40년이 더 지난 1908년에 두 번째 아내 알리스와 다시 베니스로 가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기억을 상기하여 그릴 수 없는 순간적인 빛의 역할을 담아내는 작업의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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