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제왕’ 모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네는 1874년에 생드니 가 2번지로 이사했는데, 아르장퇴유의 집 근처였습니다. 그가 이사한 곳은 역 바로 맞은편 초록색 덧문이 있는 분홍색 집으로 집세가 월 1천 4백 프랑으로 오히려 전보다 더 비쌌습니다. 그 집 정원이 처음 캔버스에 나타난 건 1875년의 작품이었고, 화려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르누아르가 모네를 가리켜 “제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1873년 모네의 연수입은 2만 4천 프랑이었지만, 이듬해 천 프랑에 작품 5점을 팔 정도로 궁색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써버렸다는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도 하녀와 정원사를 고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창한 날이면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대동하고 프티 제네빌리에 근처 강둑이나 꽃이 만발한 들판으로 나들이 나가곤 하면서 생활의 여유를 잃지 않았습니다.
1875년부터 프랑스 경제는 더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보불전쟁 이후 계속해서 나빠진 것입니다. 그해 모네의 연수입은 9,765프랑으로 하락했습니다. 마네가 모네에게 생활비를 보태주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모네는 마네에게 편지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마네, 선생에게 자꾸만 도움을 청하는 절 용서하십시오. 선생이 주신 걸 다 써버리고 이제 다시 무일푼 신세가 되었습니다. 선생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선생이 할 수 있으시다면 최소한 40프랑을 우선 꿔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모네는 푸줏간과 빵집에서 더 이상 외상으로 살 수 없을 정도로 빚이 많다고 편지에 적었습니다. 모네가 돈을 빌려가면 아주 오래 있다 갚았지만, 마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에 백 프랑 혹은 천 프랑까지도 선뜻 꿔주었습니다. 마네는 뒤랑-뤼엘에게 모네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편지했다.
“그가 내게 자기 그림을 골라잡아 한 점에 백 프랑씩 10점이나 20점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봐 달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5백 프랑씩 내서 그의 그림들을 구입하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가 모르게 해야겠지요.”
그러나 뒤랑-뤼엘도 형편이 나빠져서 모네의 그림 구매를 중단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뒤랑-뤼엘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마네는 동생 외젠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근래 모네를 만났는데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더구나. 그는 천 프랑이 꼭 필요해서인지 그 돈을 주면 10점을 구매자가 골라잡아도 된다고 한다. 네게 5백 프랑 여유가 있다면 나와 함께 10점을 사도록 하자. 난 그것을 각각 백 프랑에 처분할 자신이 있기 때문에 돈을 곧 되찾을 수가 있단다. 5백 프랑을 보내주면 가서 사도록 하마. 그에게는 너와 내가 샀다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네가 화가로서의 모네의 재능을 인정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마네는 모네가 훌륭한 화가임을 인정했으므로 그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네 역시 마네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마네가 사망한 뒤 <올랭피아>를 뮤지엄에 소장시키는 운동을 펴기도 했습니다.
뒤랑-뤼엘은 팔지 못한 채 소장하고 있는 그림들이 너무 많아 당분간 그림을 구입할 수 없었으므로 모네는 스스로 새 구매자를 물색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의 주요 구매자들로 오페라 바리톤 가수 장 밥티스트 포르와 직물상인 에르네스 오슈드가 있었습니다. 오슈드는 1874년 5월에 <인상, 일출>을 8백 프랑을 주고 산 열정적인 수집가입니다. 뒤랑-뤼엘은 경매를 통해 자신과 모네의 경제난을 한꺼번에 해결할 생각으로 1875년 3월 24일 드루오 호텔 경매장에 경매인으로 나섰습니다. 모네를 비롯하여 르누아르, 베르테, 시슬레가 163점의 그림을 경매에 내놓았으며, 모네의 그림 20점이 비교적 낮은 가격인 그림당 2백 프랑에 입찰되었습니다. 1875년은 모네에게 최악의 해였습니다. 포르, 에밀 블레몽, 에르네스 메, 앙리 루아르, 빅토르 쇼케 등이 헐값에 모네의 그림을 구입하면서 자기 소장품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모네의 재능을 알리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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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석탄을 내리는 남자들 Men Unloading Coal>, 1875, 유화
1875년에 모네가 그린 그림들에는 그의 경제적 어려움이 반영된 듯 색조가 어두운 것이 특기할 만합니다. 다리 아래서 노역하는 노동자들을 그린 <석탄을 내리는 남자들>은 아르장퇴유가 산업화되어가는 일면을 보여줍니다. 수직선, 수평선, 대각선이 모두 사용된 이 작품은 모네가 그린 것들 가운데 가장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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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일본 소녀 The Japanese Girl>, 1876, 유화
이것은 제2회 인상주의전에 출품된 작품입니다. 실제 사람 크기로 그린 이 그림의 모델은 카미유로 화려한 일본 의상 기모노에 붉은색이 감도는 금발 가발을 쓰고 <초록 드레스의 여인>에서와 같은 포즈를 취하면서 이번엔 관람자를 향해 얼굴을 돌렸습니다. 이것은 일본화를 모방한 것입니다. 모네는 열일곱 살 때부터 일본 판화를 수집했습니다. 카미유가 입은 기모노와 둥근 부채는 일본 제품이며, 포즈 또한 일본인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모네가 인물화를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하자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린 것입니다.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1876년 4월에 파리의 플레티에 가에 위치한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전시회는 제1회전에 참여한 30명 중 19명밖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인상주의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화가들이 불참했는데, 제1회 전시회에 대한 언론의 공격이 악몽처럼 되살아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모네를 비롯하여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드가, 베르테가 주요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모네는 18점을 출품했으며, 그해에 그린 <일본 소녀>도 포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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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르 프티의 캐리커처 <인상주의자들의 왕 King of the Impressionists>, 1876
모네가 아닌 마네를 인상주의자들의 왕으로 묘사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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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봉 복 Bon Bock>, 1873, 유화, 94-83cm.
흥미로운 점은 알프레드 르 프티가 인상주의 화가들의 왕으로 모네가 아닌 마네를 묘사한 것입니다. 르 프티는 마네가 맥주병을 깔고 앉은 것으로 풍자했는데, 마네의 <봉 복>을 두고 어느 평론가가 “금년에 마네가 맥주에다 물을 탔구먼”이라고 꼬집은 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1873년 살롱에 소개된 <봉 복>은 할스의 화법으로 어두침침한 효과를 한층 드러낸 작품입니다.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에 대해 “몸집이 크고 얼굴이 불그스레한 이 쾌락주의자의 모습은 담배와 맥주 말고는 세상과 절연한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고 평했습니다. 마네가 바티뇰 그룹의 예술가들과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인상주의 그룹전에 참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티뇰 그룹의 예술가들이 참여를 권했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이 마네를 인상주의의 왕으로 여긴 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알베르 울프와 몇몇 평론가들이 전시회가 형편없다고 혹평했지만 제1회 인상주의전에 비하면 언론의 반응은 훨씬 호의적인 편이었습니다. 아르망 셀베스트르와 말라르메가 호평했고, 에밀 졸라 역시 모네의 주도적 역할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졸라는 “그룹의 리더는 모네다. 그의 붓질은 유별난 화사함으로 단연 눈에 띈다”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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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칠면조 Turkeys>, 1876,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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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몽제롱의 연못 The Pool at Montgeron>, 1876,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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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몽제롱의 정원 모퉁이 A Corner of the Garden at Montgeron>, 1876, 유화
1876년 봄 모네는 파리에 머물며 마네, 시슬레와 더불어 작업했고, 그해 가을에는 백화점 부호 에르네스 오슈드의 집에 한동안 묵었는데, 그와 거래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몽제롱의 샤토에 있는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었던 오슈드는 아내 알리스가 상속받은 로탕부르그 저택 장식을 위해 네 점을 의뢰했는데 높이가 약 172cm, 폭 140-193cm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모네는 대연회장을 장식하기 위해 여름과 가을을 오슈드의 저택에 묵으면서 <칠면조>, <몽제롱의 연못>, <몽제롱의 정원 모퉁이>, <사냥>(또는 <몽제롱의 공원길>이라고 한다) 네 점을 그렸습니다. 그는 눈부신 꽃들로 화려한 자연의 경관과 연못에 비친 자연의 모습을 놀라운 효과가 나도록 표현했습니다. 그는 숲과 꽃 그리고 물을 주로 그려왔지만 <칠면조>는 매우 낯선 주제입니다. <칠면조> 배경의 건물이 로탕부르그 저택입니다. 이 작품 역시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대담한 원근법을 사용한 것이며, 앞에 칠면조가 잘린 것도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순간성을 느끼게 해주는 요소입니다.
모네는 오슈드 부부와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그해 오슈드는 마네도 그의 저택에 초대했습니다. 저택에 알리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장식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습니다. 마네가 <꽃밭 속의 젊은 여인>이란 제목으로 알리스를 그렸는데, 모네의 영향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윤곽을 흐리게 그렸으므로 알리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모네가 그곳에 머문 동안 이변이 발생했는데, 알리스와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알리스는 1877년 8월 20일에 여섯 번째 자식 장 피에르를 낳았으며, 모네의 아들로 추측됩니다. 훗날 모네에 관한 책을 쓴 장 피에르는 노년기의 자신의 모습이 모네와 닮았다는 내용을 적었으므로 이 부분을 놓고 그가 모네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되었습니다. 알리스는 후에 모네의 두 번째 아내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