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다리, 금사담, 암서재, 충주호, 사인암, 단양팔경

 

 


요즘 여행을 하느라 블로그를 잘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부산에서 1박하고, 수안보 온천에서 1박을 했습니다.

다녀온 곳 몇 군데를 사진으로 보고합니다.

기념사진도 한 장 올립니다.

 



 



농다리

 

 



농다리

 

 



금사담과 암서재

 

 



우암 송시열의 암서재

 

 



암서재

 

 



충주호, 유람선을 타고 본 풍경

 

 



 

 



 

 



유람선을 타고, 단양의 풍경

 

 



사인암

 

 



사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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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벨라스케스



 

 

 

 

 



마네의 <팔레트를 든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Oakatte>, 1879, 유화, 93-70cm.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 Las Meninas>, 1656, 유화, 318-276cm.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의 부분



 

 



마네의 <조르주 클레망소의 초상 Portrait de Georges Benjamin Clemenceau>, 1879, 유화, 94.5-74cm.

간결한 필법으로 클레망소의 정수만을 묘사했지만, 클레망소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정치가로 유명해지기 전인 서른여덟 살의 클레망소는 의지가 강한 남자로 어떤 공격이나 반격에도 대처하려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는 훗날 말했습니다. “나는 마네와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는 매우 정신적인 인간이다.” 프랑스 정부가 <올랭피아>를 구입할 때 클레망소의 노력이 적지 않았습니다.



 

<팔레트를 든 자화상>은 마네가 어떻게 그렸는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를 보여줍니다. 이 시기에 그의 자화상을 보면 얼굴이 수척해보이고 몸이 마른 상태입니다. 그는 무슨 영문인지 수잔을 그리던 캔버스 위에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그가 좋아한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에 묘사된 화가의 자화상을 상기시킵니다. 마네는 왼손잡이라서 벨라스케스의 모습과는 달리 붓과 팔레트가 각각 다른 손에 들려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우상 벨라스케스를 흉내 내면서 그처럼 그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습입니다.

 

마네는 인물을 그리는 데 유의할 점은 가장 어두운 부분과 가장 밝은 부분을 찾는 것이며,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초상화에 모든 모델이 만족한 건 아니었습니다. 1879년에 그린 <조르주 클레망소의 초상>은 정작 클레망소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클레망소는 불평했습니다.

 

마네가 그린 내 초상화 말입니까? 마음에 안 듭니다.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루브르에 있을 겁니다. 왜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레망소와 로슈포르를 마네에게 소개한 사람은 프루스트였으며, 두 사람 모두 마네가 그린 자신들의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마네의 <조지 무어의 초상 Portrait of George Moore>, 1879, 종이에 파스텔, 55-33.5cm.

무어는 마네를 “진짜 아카데미 프랑세즈”라고 불렀습니다.



 

 



마네의 <앙토냉 프루스트의 초상 Portrait of Antonin Proust>, 1880, 유화, 129.5-95.9cm.



마네는 친구들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는데 <조지 무어의 초상>과 <앙토냉 프루스트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프루스트는 마네의 30년지기 친구로 감베타 새 내각에 문화부 장관으로 발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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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마지막 화실

 

 



 

 

 



마네가 1878년 7월 생페테르스부르그 4번지의 화실을 폐쇄하고 암스테르담 77번지에 새로 얻은 화실이 그의 마지막 화실이었습니다. 그는 이 화실을 포함하여 생전에 일곱 개의 화실을 전전했습니다. 가장 중요했던 화실은 몽소 공원 뒤 귀요 가의 화실로 보들레르와 졸라가 드나들었던 곳입니다. 그 후에는 생라자르 근처 외로프 지역의 화실, 생페테르스부르그에서 51번지와 4번지로 주소를 달리 하며 1870년부터 1878년까지 작업했습니다. 새로 얻은 화실로 매일 오후 늦게 말라르메가 찾아왔습니다. 마네는 새 화실 내부를 전반적으로 개조하느라고 이듬해 4월이 되어서야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집 건너 70번지는 스웨덴 사람으로 백작 칭호를 가진 역사화가 요한 게오르그 오토가 화실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약 10개월 동안 비우게 되어서 새 화실을 단장하는 동안 그곳에 세 들었습니다. 오토의 화실은 기본적인 가구를 갖춘 보통 화실과는 달리 다양한 종류의 열대성·온대성 식물들이 많아 마치 온실과도 같았습니다. 마네는 피아노와 세우는 커다란 거울, 소파 등을 들여놓았고, 그곳에서 <온실>과 <온실에 있는 마네 부인> 등을 그렸습니다.



 

 



마네의 <온실 The Conservatory>, 1878-79, 유화, 115-150cm.

배경에 가득한 아름다운 화초들이 여인을 더욱 우아한 모습으로 보이게 합니다. 산호빛 입술과 귀가 머리 뒤의 꽃의 색과 일치합니다. 두 사람의 결혼반지가 시선을 근느데, 남자의 손가락에 낀 시가가 반지를 양분시키듯 부부는 각각 다른 생각에 잠긴 모습입니다. 남자의 머리와 수염이 마네와 매우 닮아서 마네는 자신을 그린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온실>에 등장한 커플은 포부르 생오노르 가에 고급 드레스 가게를 갖고 있던 마네의 친구 줄 기유메 부부였고 부인은 미국인으로 수잔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옆에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앉아 있는 것처럼 포즈를 취했는데, 이런 당당한 모습은 부유층 여인들에게서 발견됩니다. <발코니>에서도 보았듯이 마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 독자적인 포즈를 취하는 것이 특색입니다.



 

 



마네의 <온실에 있는 마네 부인 Madame Edourard Manet Dans la Serre>, 1879, 유화, 81.5-100cm.

 

수잔은 남편의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화실에 오지 않았지만, 마네가 <온실>을 그릴 때에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화실에 종종 왔습니다. 마네의 친구들은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말했지만, 마네는 생생한 붓질을 남긴 채 마치려고 한 듯합니다. 수잔은 화면에서와 같이 실제로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남편에게 자기의 얼굴을 약간 푸르고 희게 그려달라고 주문했지만, 마네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온실에 있는 마네 부인>은 기유메의 아내가 앉았던 그 벤치에 앉은 수잔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두 여인의 드레스는 다르지만 같은 회색입니다. 기유메 부인의 드레스는 부드러운 회색에 좀 더 젊은 여성이 입는 드레스로 검정색 리본으로 목을 장식했으며, 노란색 모자와 장갑, 파라솔이 한껏 멋을 낸 여인으로 나타내고 드레스의 단춧구멍을 비롯하여 세세한 부분까지 정교하게 묘사했습니다. 반면 수잔의 모습은 덜 정교하게 묘사되었는데, 나이도 들어서인지 더 이상 매력적으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잔의 목 부분과 소매 끝 부분이 대충 스케치되었고, 손동작도 기유메 부인에 비하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대충 처리한 손에 결혼반지만이 유독 시선을 끕니다.



 

 



마네의 <카페 콘서트의 가수 Singer at a Cafe-Concert>, 1878-79, 유화, 73-92cm.

어두운 색의 붓질로 오케스트라와 많은 관객들을 묘사하여 가수의 밝은색 피부, 흰장갑, 푸른빛의 드레스와 대조되게 했습니다. 이런 식의 대조는 무대와 관람석의 거리, 배경의 나무들과의 원근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마네의 <웨이트레스 The Waitress>, 1879, 유화, 77.5-65cm.

 

이 시기에 카페, 레스토랑, 뮤직카페가 늘어났으며, 웨이트레스는 신종 직업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파리의 밤 모습을 보여주는데, 공간이 없도록 꽉 찬 사람들의 구성은 배경의 오른쪽 수직 무늬로 더욱 협소한 느낌을 주고, 왼쪽 가장자리에 왼팔과 드레스 일부만 보이는 인물로 인해 그곳에서 공연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네는 1878년 자연주의를 주제로 8점의 유화를 그렸으며, 카바레나 카페에서 많은 스케치를 그렸습니다. 그는 이것을 <카페에서>와 함께 하나의 대작을 위해 사용하려고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두 개의 별도 그림이 되게 했습니다. 하지만 각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의 주제가 둘로 나눠졌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다.



 

 



마네의 <카페에서 Au Cafe>, 1878, 유화, 77-83cm.

대리석 테이블에 앉아 앞을 바라보는 여인은 엘렌 앙드레이고, 그 옆에 높은 모자의 수염을 기른 남자는 1881년 마네의 제자 에바 곤잘레스와 결혼하게 될 판화가 게라르이며, 그 옆의 처녀는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샹젤리제의 나무 아래서 열린 콘서트 장면을 그린 것으로 <카페 콘서트의 가수>는 붓질이 빠르게 칠해져 있습니다. 마네는 1878년 8월부터 로슈슈아르 불바드와 클리쉬 광장 사이에 있는 뮤직 카페 레이슈쇼팡을 담은 대작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듬해 살롱에 출품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작품 제목을 <레이슈쇼팡의 카페 콘서트>로 하려고 했다가 작품이 완성될 즈음 그림의 오른쪽 부분을 <웨이트레스>, 왼쪽 부분을 <카페에서>라는 제목으로 둘로 만들었습니다. 그림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둘로 나눠 구성을 간결하게 다듬은 것 같습니다.



 

 



에드가 드가의 <카페 콘서트 Cafe-Concert: at les Ambassadeurs>, 1876-77, 종이에 파스텔, 36.8-29.5cm.

 

카페에서 콘서트를 연 건 1840년대부터였으며, 1860년대와 1880년대 사이에 이런 콘서트가 유행했고, 카페가 무대를 갖추는 등 규모가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870년대 파리는 유럽의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새로운 도로 포장 계획을 많이 세웠으며, 비대해지는 도시를 위해 근교에 정거장들을 만들어 교통이 원활하게 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거리에는 극장과 카페의 수도 부쩍 늘었습니다. 미국인 제임스 맥카베가 전한 바에 의하면 1867년 극장에 하루 출입하는 사람의 수가 대략 3만 명이었고, 카페와 서커스에 가는 사람의 수는 약 4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에 따르면 1886년 파리 인구는 약 234만5천 명으로 1831년의 인구에 비해 무려 세 배나 증가한 셈입니다.

 

18세기 중반부터 파리에 카페술집과 카페식당의 수가 늘었으며, 예술가들이 카페를 즐겨 찾았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 예사였습니다. 예술가들은 카페의 실내를 장식해주기도 했으며, 카페의 장면을 스케치하기도 했습니다. 커피가 서유럽에 소개된 건 17세기 후반이었고, 처음에는 항구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렸는데, 금새 여러 도시로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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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심은 뇌로서는 특이한 상태에 해당한다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평정심이란 완벽하고 흔들림 없는 조화를 이룬 마음 상태라고 말합니다. 평정심이란 말은 라틴어 어근인 ‘even’과 ‘마음’에서 유래했습니다. 평정심 하에서는 우리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이 여유롭게 흘러가므로 우리는 균형을 잃지 않고 차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뇌의 오래된 회로는 끊임없이 모든 것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반응하라고 충동질하지만, 평정심은 이런 회로를 파괴해버립니다. 평정심은 경험에 의한 느낌을 탐욕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느낌에 대한 반응을 중화시킴으로써 끊임없는 괴로움의 사슬을 부수어버립니다.

평정심은 매정함이나 무관심과는 다릅니다.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보지만, 세상에 의해 고통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사에 일희일비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정열, 사랑과 친절, 타인의 행복에 기뻐하는 마음 등을 가질 여유가 생겨납니다.

평정심은 가장 깊은 명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완전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정심의 상태는 침착함과 명료한 기분이 들고 마음이 평화로움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즐거움을 쫓거나 불쾌함을 피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경험하는 대상들 주변에 일종의 완충 공간이 생겨나서 스스로와 느낌 사이가 분리됩니다. 이런 상태는, 억제와 지시라는 변연계의 활동이지, 전전두엽에 의한 전형적인 정서 조절 상태와는 다릅니다. 그 대신 평정심 하에서 변연계는 무엇을 원하든 작동합니다. 평정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활성을 줄이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뇌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특이한 일로, 진화상 뇌는 변연계의 신호, 특히 유쾌, 불쾌의 느낌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평정심의 또 다른 측면으로 비상하게 확장된 의식의 광활한 작업 공간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의식하는 대상을 둘러싼 광활한 공간에 대한 정신적 감각을 신경이 보완하는 것입니다. 이는 뇌의 넓은 영역들 사이를 가로질러 수십 억 개의 뉴런들이 초당 30-80번 맥동하는, 안정되고 멀리 뻗어가는 감마파로 동기화되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런 독특한 뇌파 패턴은 명상 수련을 오래 해 오고, 그 결과 평정심을 쉽게 유지하는 티베트 승려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평정심이 깊어지면, 깊은 명상 상태의 두드러진 특징인 심오한 내적 고요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또한 일상생활에도 크나큰 혜택을 가져다줍니다. 느낌과 갈망 사이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면, 즐거워하나 즐거움을 갈구하며 쫓아다니지 않을 수 있다면, 대상을 무시하지 않고도 담담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괴로움의 사실을 잠시나마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축복이고 자유입니다.

고요는 느낌에 지반을 두어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즐거워 보인다는 이유로 무엇인가를 추구합니다. 중국 선종의 3조인 승찬 대사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단지 분별심을 버리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고요는 부교감신경계의 활성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평정심이란 자신의 반응이 어떠한 것이든 거기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평정심은 느낌과 경험 주변에 완충 공간을 만들어서 갈망으로 느낌과 경험에 반응하지 않도록 해줍니다. 평정심은 느낌에서 갈망으로, 갈망에서 집착으로, 집착에서 괴로움으로 이어지는 통상적인 경로를 차단하여 괴로움의 무한 반복 회로를 부수어버립니다.

평정심은 냉담함이나 무관심, 공감할 수 없음 등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세계로 인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평정심이 제공하는 공간은 연민, 친절, 그리고 타인의 행복에 대한 열린 기쁨의 크나큰 근거가 됩니다.

일상에서, 그리고 명상 중에서 느낌과 경험에 마음챙김을 행함으로써 미망으로부터 깨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느낌과 경험은 왔다가 사라집니다. 이러한 것은 추구하거나 거부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평정심은 뇌로서는 특이한 상태에 해당합니다. 이는 변연계에 전전두엽이 억제 기능을 해서 이뤄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변연계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정심은 네 가지 신경적 조건에 의존합니다. 이해와 의도, 고요한 마음 상태에 작용하는 전전두엽과 전방대상피질의 활성이 먼저인데, 이는 전방대상피질이 초기에 먼저 감독함에 따라 형성되고 이어 스스로 조절됩니다. 빠른 감마파가 뇌의 넓은 영역에서 동기화되면서 광활한 공간감의 정신적 경험을 일으킵니다. 또한 스트레스-반응 체계로 자기 반응에 다시 반응하며 고통스러운 사이클을 만드는 변연계, 교감신경계, 해마,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피드백을 부교감신경계가 완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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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림: 어머니 장(腸)이 좋아졌어요...이야~~~

 

 

몸살림연신내동호회(Daum 카페)에 들어가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전일반 운동하고 있는 남기환이라고 합니다. 별명은 "비홍- 날으는 기러기" 라고...

 

저는 그 동안 10년 넘게 무예나 기공, 의료쪽의 경험이 있는데 이렇게 살아 온 이유는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중 가족에 대한 1차적 사랑의 실천이  가장 쉽고 의미있다고 생각하여 틈만 나면 가족들을 모아 놓고 실습(!)하는 우리가족의 사짜(!!) 입니다.

 

충남 서산에 계시는 저희 어머니는 낼 모래면 칠순을 바라보시는데 시골 어르신들이 그렇지만 5남매를 일하시면서 힘들게 키우시고고 평생을 꼬부리고 일만 하고 지금도 집안에서 쉬는 시간보다는 전답에서 땀 흘리시는 시간을 많게 보내고 계십니다.

 

원래 젊으셨을때도 별로 몸이 좋지 않았다 하시는데 13년 전에는 자궁에 혹이 있다고 하여 들어내는 수술을 하셨고 그후로 기력이 무척 쇄해 지시더니 4년전에는 허리를 꼼짝도 하지 못하여 서울로 올라오셔서 병원에 몇달을 입원하며 진통주사로만 유지하셨지만 효과가 없이 하향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족들 동의 하에  제가 있던 한의원으로 아예 모셔다가 한달가량 합숙훈련(!)을 통해 교정과 운동등을 하시면 겨우 기운을 차리셨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는 "일 많이 하면 아프고 덜 하면 좀 편하다" 며 뭐 그냥 그냥 지내시지만 허리통증 말고도 고질적인 배변문제에 무척 애로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희 고향은 저녁 9시면 동네 불이 다 꺼지고 새벽 3-4시면 집집마다  불이 다 켜집니다. 가끔 집에 내려가면 아버지가 깨우시는 소리를 하시는데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 하실때 시계를 보면 새벽 5시....

 

하여간 이런 이른 새벽에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 어머니는 일어나자 마자 멀고도 험한 푸세식 화장실(변소)을 서너번은 왕래

를 하셔야 겨우 몸이 하루를 준비하셨나 봅니다.

 

지금도 기억나는게 4년전 정형외과에서 어머니 허리 뼈사진을 찍어서 봤을때 그렇게 자유분방(!)한 조합이 생생합니다.

병원에서는 당연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저 나름대로 믿는바가 있어 사진만 들고 나왔지요..

 

어머니를 뵐때마다 그 사진이 함께 오버랩되며 "뼈가 이정도면 당연 속은 안좋지.."하는 생각에 그 후로도  집에 갈때 마다 만져도 드리고 그 동안 공력을 발휘하여 운동법도 알려드렸지만 "운동 할 시간에 누워 쉬는게 편하다" 하시는데 항상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난 주 방학을 이용하여 시골집에 갔을때 "상체 펴고 쉬기"  (쉬면서 운동이 된다고 말씀드림) 를 알려드렸더니

이틀만에 아침의 그 번거로운 배변이 좋아졌다하시며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또한 그 동안 참을 수 없이 허리가 아프고 하면 겨우 버스타고 시내에 나가 정형외과에서 뜨거운 물수건을 덮고 기계로 당기는 정도의 물리치료를 받으셨는데 왔다 갔다 고생에 비하면 너무 효과가 없었다고 합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집에서 쉬는게 낫다고 하시며.. 그 것도 일찍 가지 않으면 치료 받을 순번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대기 한다는군요. 

그렇게 여러모로 번거로웠던 것이 불과 하루 이틀만에 힘 하나 안들이고 쉬면서 효과를 보고 계시니 전 참으로 기쁨니다.

 

항상 저의 행(行)의 과제는  "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 었는데 이곳에서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몸살림에서의 운동법과 원리들이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실감이 덜 오고 있었는데 그 동안 지켜보던 어머니를 통해 효과를 느껴보니 어느덧 숙성되어지는 듯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어제 저녁도 전화를 드리니 침이 튀도록 좋아하시네요..

 

저는 지금 가슴이 뿌듯하고  기대되는 내일이 더욱 밝게 느껴집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붕~~~~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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