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거짓말과 기만의 차이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윤리적 기반을 잃은 정치야말로 국가와 국민의 공공선에 해악을 끼치는 가장 무서운 적이므로 공직자와 정치인의 도덕성은 일반인보다 높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통령의 기만과 관련하여 샌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린든 존슨의 전쟁 준비를 기만한 행위를 예로 듭니다. 루스벨트가 그랬던 것처럼 존슨은 1964년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베트남전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숨겼습니다. 루스벨트는 1940년 대선 기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도 말했고 앞으로도 거듭 밝힐 것이지만 여러분의 아들들이 해외의 그 어떤 전쟁터로도 보내질 일은 없을 겁니다.

루스벨트와 존슨 모두 대중을 속였는데, 루스벨트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 존슨은 부당한 목적을 위해 속였다고 샌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행한 기만의 도덕적 지위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존슨의 거짓말이 루스벨트보다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하는 이유는 진실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가치 없는 목적을 위해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관계에 대한 거짓말은 공무 수행이 아닌 사적인 잘못과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앞의 두 경우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샌델은 대통령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상스러운 비난을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공적 책임과 아무 관련이 없다면, 사생활과 예의를 내세우며 부인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공개적인 거짓말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그 거짓말이 그렇게 해서 감추려고 하는 죄를 더 무겁게 만드는 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대교 규율과 유대교 도덕 등에 대한 랍비의 이야기를 담은 책 『탈무드 Talmud』에서는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 가지 예외를 인정하는데, 지식, 환대, 성sex과 관련된 거짓말입니다. 예를 들면 『탈무드』의 특정 구절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은 학자는 지식 과시를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느 집의 손님 점대가 어떠했는지 질문을 받은 경우 “큰 환대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부의 성생활과 같은 내밀한 사안에 대해 질문을 받은 경우 거짓말 할 자격이 있습니다. 샌델은 이 마지막 조항이 클린턴의 경우에 단지 느슨하게 작용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샌델은 기만의 문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한층 복잡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클린턴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 외에도 자신을 비난하는 주장이 나오면 늘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고는 부인했음을 지적합니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거운동을 벌일 때 향락성 약물을 사용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클린턴은 “미연방이나 주의 마약류 금지법을 위반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훗날 영국 유학 시절 마리화나를 피웠다고 시인했습니다. ‘60분’이란 TV 프로그램에서 진행한 1992년 인터뷰를 살펴보면, 그가 제니퍼 플라워스Gennifer Flowers와의 혼외정사를 부인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클린턴과 12년 동안 관계를 맺었다는 플라워스의 타블로이드판 폭로에 대해 클린턴은 “그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성희롱으로 제소당한 폴라 존스Paula Jones 사건에 대한 비공개 증언에서 플라워스와의 성관계를 시인했기 때문입니다.

교묘한 얼버무림과 노골적인 거짓말 사이의 도덕적 차이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은 아무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묘한 얼버무림을 통한 진실 오도가 명백한 거짓말과 같은 목적을 가지며, 성공하는 경우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덕주의자 중 하나인 칸트는 거짓말과 진실한 발뺌, 즉 속임수나 기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칸트는 살인자가 찾아와 집에 숨어있는 사람을 찾을 때에도 거짓말을 하는 건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 도덕주의자입니다. 그에겐 진실을 말해야 할 위무는 결과에 관계없이 필요합니다. 동시대의 프랑스 철학자 뱅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이 칸트의 강경한 입장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콩스탕은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는 진실을 알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살인자에게는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칸트는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피해자에게 손해를 입히기 때문에 잘못이 아니라 올바름의 근본 원칙을 침해하며, 나아가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의 인간적 존엄성까지도 손상시키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응수했습니다. 칸트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언명에 있어 진실은 그 어떤 편의주의도 허용하지 않는다. 무조건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신성한 이성적 원칙이다.

거짓말에 대한 절대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허위가 아닌 진술’과 ‘거짓말’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그었습니다. 콩스탕과 공방을 주고받기 수년 전 그는 자신의 종교철학 저서로 인해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와 검열당국은 칸트에게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그 어떤 강연이나 저술도 삼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강연과 저술을 계속할 마음이 있던 칸트는 신중하게 약속했습니다.

국왕 전하의 충직한 신하로서 저는 앞으로 종교와 관련된 모든 공개강연과 저술활동을 완전히 중지할 것입니다.

몇 년 후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칸트는 자신의 약속을 철회했습니다. 그 약속은 현 국왕의 충직한 신하로서만 그를 구속한 것이었기 대문입니다. 칸트는 훗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그대 정말 신중하게 말을 골라 대답했다. 내 자유를 영구히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 단지 국왕의 생존 시에만 제한받기 위해서 말이다.

현명한 단어 선택 덕분에 칸트는 거짓말 하는 일 없이 검열당국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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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와 노르망디의 해안 푸르빌


 
1881년 12월 푸아시로 이주한 모네는 알리스와 새로 꾸민 가정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이주한 걸 후회했는데, 아무런 영감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초라한 푸아시가 싫다”고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1882년 5월 27일 뒤랑-뤼엘에게 이곳의 전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편지에 적었습니다.



 

 



모네의 <푸르빌의 벼랑에서, 맑은 날 Sur la Falaise de Pourville, Temps Claire>, 1882, 유화, 65-81cm.



 

 



모네의 <푸르빌 근처의 벼랑 Falaises pres de Pourville>, 1882, 유화, 60-81cm.



 

 



모네의 <푸르빌의 카베로 가는 오솔길 Le Chemin de la Caves a Pourville>, 1882, 유화, 60-81cm.



 

 



모네의 <푸르빌의 카베로 가는 오솔길 Le Chemin de la Caves a Pourville>, 1882, 유화, 73-60cm.



 

 



모네의 <바랑주빌의 오두막집 세관 La Cabane de Douanier a Varengeville>, 1882. 유화, 60-78cm.



 

 



모네의 <바랑주빌의 벼랑 Cliff at Varengeville>, 1882, 유화, 65-81cm.



 

 

모네는 2월부터 주로 노르망디 해안에서 작업했으며, 그것들을 집에 와서 완성했습니다. 그는 디에프를 근거지로 반경을 넓혔으며, 곧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푸르빌이 호텔 숙박료가 싸다는 걸 알고는 그곳에 묵으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알리스가 걱정할 정도로 그림에만 전념했습니다. 푸르빌의 바다와 해변 풍경이 그의 캔버스에 아름답게 담겼으며, 특히 바랑주빌의 강 언덕과 그 위의 집과 교회가 아름다운 장면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네는 가족을 여름에 푸르빌에서 지내게 하고 알리스가 무료하지 않도록 밖으로 나가는 걸 자제하며 근처의 강 언덕과 들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는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으므로 자신이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에는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르누아르가 이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1882년 뤼니옹 제네랄 은행이 파산했고, 뒤랑-뤼엘이 경제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는데,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을 속히 갚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뒤랑-뤼엘의 경제적 어려움은 모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는데, 그가 모네의 주고객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네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제7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적극 참여하기로 하고 35점이나 출품했습니다. 1882년 3월에 열린 이 전시회에는 드가가 불참했고,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베르테, 카이유보트 등이 참여했습니다. 제6회 전시회를 두고 혹평한 조리스 유이스망과 같은 일부 저널리스트들은 이번에도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풍과 극도로 독자적인 모네의 화풍 모두 비난했지만, 모네의 바다를 주제로 한 풍경화는 호평했습니다.



 

 

 



머네의 <바랑주빌의 교회, 석양 Eglise de Varengeville, Soleil Couchant>, 1882, 유화, 65-81cm.



 

 



모네의 <바랑주빌의 교회, 석양>, 1883, 유화, 30-42cm.



 

 



모네의 <바랑주빌의 교회, 구름 낀 날> 혹은 <벼랑에 있는 교회, 바랑주빌>, 1882, 유화, 65-81cm.



 

 

뒤랑-뤼엘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10월에 모네가 푸르빌에서 그린 그림 20점을 사주었습니다. 모네가 작품을 팔 때마다 장부에 가격과 구입자의 이름을 적어두었으므로 누가 언제 몇 점을 구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뒤랑-뤼엘은 이듬해 3월 파리에 마련한 자신의 화랑에서 모네의 작품 56점을 소개했지만, 별로 팔지 못하자 모네는 전시회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이었다고 오히려 뒤랑-뤼엘을 책망했습니다. 뒤랑-뤼엘은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를 위한 전시회를 열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만족할 만하지 못했습니다.



 

 

 



모네의 <에트레타의 상류 어귀 La Porte d'Amont, Etretat>, 1868-69, 유화, 81.3-100.3cm.

에트레타는 르아브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어촌입니다. 쿠르베가 1865년 이

곳에서 절경을 그렸고, 모네의 작품을 통해 이곳은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모네의 <에트레타의 상류 어귀>의 부분



 

 



사진: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암석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모네의 <에트레타의 벼랑 Falaise a Etretat>, 1885, 유화, 65-92cm.



 

 



모네의 <에트레타, 거친 바다 Etretat, Mer Agitee>, 또는 <에트레타의 벼랑>, 1883, 유화, 81-100cm.



 

 



모네의 <마네포르트, 에트레타 I La Manneporte pres d'Etretat>, 1883, 유화, 65-81cm.

 

모네는 르아브르에서 작업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일기가 나브면 에트레타에서 작업하는 것이 더 쉬웠습니다. 그는 이곳의 기암이 마음에 들어 1886년까지 종종 와서 그렸는데, 1847년경부터 이곳에는 작은 호텔이나 셋집이 생겨서 작가와 화가들이 찾아왔습니다.



 

 



사진: 에트레타의 절경



 

 



모네의 <에트레타의 거친 일기 Gros Temps a Etretat>, 1883, 유화, 65-81cm.



 

 



모네의 <에트레타의 벼랑 La Porte d'Aval, l'Aiguille d'Etretat>, 1886, 유화, 73-92cm.



 

 



모네의 <마네포르트, 에트레타 Il La Manneporte pres d'Etretat>, 1886, 유화, 81-65cm.

 



모네는 푸아시에서는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어 1883년 2월 에트레타로 가서 작업했습니다. 쿠르베와 부댕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다몽항, 이몽항, 아발항의 기암석을 그렸으며, 에귀유의 뾰족한 바위도 그렸습니다. 그는 1868-69년에도 이곳에 와서 바다와 어우러진 가파른 절벽과 동굴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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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처럼 침팬지도 웃고 웁니다


 

포유류의 최초 원형은 약 1억8천만 년 전에 살았으며, 그 후 3천만 년이 지나 시조새가 출현했습니다. 원시적인 포유류와 조류는 파충류와 어류 등의 굶주린 포식자와 험난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몸무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큰 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충류와 어류는 대체로 새끼를 돌보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의 새끼를 먹어치우기까지 합니다. 또한 평생을 정해진 짝이 없이 살아갑니다. 반면 포유류와 조류는 새끼를 돌보며, 많은 경우 평생, 또는 생의 특정 기간 동안 짝을 지어 살아갑니다.

진화 신경과학의 무미건조한 표현을 빌자면, 더 나은 짝을 고르고, 음식을 나누며 새끼를 돌보는 일의 ‘계산된 요구’에 의해 포유류와 조류의 신경 정보 처리 능력이 더욱 많이 요구되었습니다.

다람쥐나 참새는 도마뱀이나 상어보다 계획을 더 잘 세우며, 소통하고, 협상하는 능력이 탁월해야 합니다. 이러한 능력은 인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부모가 되고 부부가 되었을 때 필수적인 능력입니다.

뇌의 진화에 있어 중요한 다음 단계는 약 8천만 년 전에 처음 출현한 영장류에서 나타났습니다. 영장류의 뚜렷한 특성은 진화 초기에서부터 나타나는 공고한 사회성을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숭이와 유인원은 길게는 하루 중 1/6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여 무리의 다른 녀석의 털 고르기를 도와줍니다. 북아프리카의 꼬리 없는 원숭이에 대한 연구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털 고르기를 도와주는 녀석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진화에서 핵심은 바로 암컷이든 수컷이든, 사회적인 스킬이 더 좋은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영장류의 사회성은 짝짓기를 하는 무리의 크기, 털 고르기 짝의 개체수, 상하관계의 복잡함 등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사회성이 발달한 영장류일수록 두뇌 피질이 더욱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관계가 복잡해질수록 뇌도 더욱 복잡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핌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사람 등의 대형 유인원들만이 신경세포 중 두드러진 특징을 지닌 방추상 세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세포는 발달된 사회적 능력에 기여합니다. 예를 들어 대형 유인원은 흥분한 무리원을 달래주는 행동을 흔히 보이며, 다른 영장류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우리 인간처럼 침팬지도 웃고 웁니다.

방추상fusiform 세포는 대상 피질과 뇌도insula에서만 발견되는데 이들 영역은 공감과 자각을 담당합니다. 뇌도는 축두엽의 측열에 깊게 놓여있는 삼각형의 뇌부분을 말합니다. 이 영역은 최근 수백만 년간 강한 진화적 압력을 받아왔습니다. 다시 말해 관계로 인한 혜택은 영장류의 뇌에 있어서 최근의 진화를 가속화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 260만 년 전에 원시 인류는 석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뇌는 세 배로 커졌으며, 같은 양의 근육에 비해 약 열 배나 더 많은 영양소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뇌가 성장함에 따라 여성의 신체 또한 큰 뇌를 가진 아기가 산도를 빠져나오도록 진화했습니다. 생물학적인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이같이 급격한 뇌의 성장은 생존에 심대한 혜택을 가져왔습니다. 확장된 뇌의 기능은 대부분 사회적, 정서적, 언어적 그리고 개념 처리에 할애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다른 대형 유인원보다 훨씬 많은 수의 방추상 뉴런을 가지고 있는데, 이 뉴런들은, 사회적, 정서적 지능을 결정하는 대상 피질 및 뇌도와 뇌의 다른 부분 사이에서 일종의 정보 고속도로를 형성합니다. 다 자란 침팬지가 두 살 난 어린아이보다 물리적 세계를 더 잘 인지하지만, 어린아이는 관계에 대해서는 훨씬 더 영리합니다.

이러한 신경 진화의 과정은 삭막하고 멀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매일 죽음과 맞서 싸우는 우리 같은 존재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되어왔습니다. 약 1만 년 전 농경이 시작되기 전까지 우리 조상은 많게는 150명 정도의 무리를 지어 사냥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들은 무리 내에서 짝짓기를 하고 먹을거리를 구하며, 포식자를 피하고, 소중한 자원을 두고 다른 무리와 경쟁해왔습니다. 이처럼 가혹한 환경 속에서 무리 내의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며 협력할 수 있는 개인은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자손을 두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팀워크가 더 좋은 무리는 그렇지 못한 무리들을 따돌리고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여 살아남아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 세대 내에서 발견되는 아주 작은 번식에서의 이점도 시간이 거듭되면 엄청난 결과를 야기합니다. 도구가 처음 만들어진 때로부터 10만 세대를 넘어선 오늘날, 안정된 관계를 형성하고 협동하는 능력을 가진 유전자는 인간의 유전자 속에 뿌리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그 결과를, 박애주의와 관용, 평판에 신경 쓰는 것, 공정, 언어, 용서 그리고 도덕과 종교 등 인간 본성의 여러 핵심을 형성하는 신경학적 지지대를 통해 읽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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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이야기: 지평선 문제Horizon problem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 빛이나 기타 신호가 밤하늘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전달되려면 우주의 나이보다 더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예를 들어 하늘의 한 특정방향에서 마이크로파배경복사microwave background radiation는 빅뱅 이후 약 130억 년 동안 공간을 표류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와 정반대방향에서 관측되는 배경복사도 130억 년 전에 생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의 온도가 수천분의 1도 이내로 동일하다는 것은 우주의 초창기 때 이 두 지역이 열역학적인 접촉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무슨 수로 수백억 광년이나 멀어질 수 있었을까? 우주의 나이는 130억 년에 불과하므로 이것들이 줄곧 빛의 속도로 멀어져왔다 해도 지금과 같은 거리만큼 멀어질 수는 없습니다.

우주배경복사가 처음 생성된 무렵, 즉 빅뱅 후 38만 년이 지난 시점으로 되돌아가면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이 시기에 반대쪽 하늘을 바라봐도 배경복사는 거의 동일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빅뱅이론의 계산에 따르면 하늘의 대척점은 약 90억 광년의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태어난 지 38만 년밖에 안 된 우주에서 90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두 지점이 어떻게 같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구스는 이 문제 역시 인플레이션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그는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가 초창기에 있었던 불덩어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 무렵에 이 작은 부분의 온도와 밀도는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서 우주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1050배까지 팽창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여전히 균일한 분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구스의 이론을 대대적으로 환영했지만 천문학자들은 인플레이션이론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적한 결함이란 우주공간의 밀도(Ω)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Ω의 값이 거의 1에 근접하는 이유는 인플레이션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Ω가(혹은 Ω+Λ가) 정확하게 1.0임을 예견했습니다. 즉 구스의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완전히 평탄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무렵에 얻어진 관측데이터들은 암흑물질의 존재를 강하게 시사하면서 Ω의 값이 1.3까지 커야 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물리학자들은 10년 동안 인플레이션과 관련된 논문을 수천 편이나 발표했으나 천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의문스런 이론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러시아의 레베데프연구소(맥스웰의 ‘빛의 전자기이론’에 의해 존재가 이론적으로 제시된 빛의 압력을 1899년에 실험적으로 확인 발표한 러시아의 물리학자 레베데프Pyotr Nikolaevich Lebedev(1866~1921)의 이름을 딴 물리학연구소)의 러시아 이론물리학자 안드레이 린데Andrei Linde(1948~)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폴 스타인하르트Paul J. Steinhardt와 안드레아스 알브레히트Andreas Albrecht는 1981년에 이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즉 가짜진공상태에서 생성된 하나의 기포가 충분한 크기로 자라나면 그로부터 균일한 우주가 생성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주는 하나의 기포가 우주를 가득 채울 때까지 팽창되면서 만들어진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우주가 초창기 부피의 1050배까지 팽창되었다면 하나의 기포만으로 지평선문제와 평탄성문제 그리고 자기홀극문제 등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즉 뚫고 나오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충분히 지연되었다면 우주는 매우 긴 시간동안 팽창되었을 것이며 그 결과 우주는 평탄하면서 자기홀극이 거의 없는 공간으로 진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의문이 있는데, 초창기에 어떤 힘이 작용했기에 우주가 무려 1050배까지 팽창되었단 말일까? 이 문제에 ‘우아한 탈출문제’라는 이상한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50여 종의 해답이 제시되었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정답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구스의 인플레이션이론은 자기홀극과 지평선문제 그리고 평탄성문제를 해결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우주의 팽창을 유도하고 또 그것을 멈추는 요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렇다 할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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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에두아르 마네



 



 

 

 



마네의 <뤼엘의 빌라 Villa at Rueil>, 1882, 유화, 92-73cm.



 

 

마네는 친구들에게 1884년 살롱에 출품할 훌륭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말라르메와 나다르도 그가 한 말을 기억했습니다. 친구들은 그가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883년 3월 25일 화실에서 쓰러진 마네는 아파트로 옮겨져 12일 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4월 6일에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완전히 마비되고 열이 났습니다. 4월 14일 왼쪽 다리가 검게 썩어갔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열에 시달리다 4월 20일에 수술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고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주치의는 방문객의 수를 줄였는데, 말라르메와 나다르 그리고 몇몇 사람만이 방문했습니다.

 

마네는 4월 30일 오후 7시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51세가 되고나서 3개월7일 만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화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스무 해 남짓 되었습니다. 마네에게 빚을 가장 많이 진 사람은 모네였습니다. 4월 30일 마네의 사망소식을 들은 모네는 뒤랑-뤼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방금 가엾은 마네 선생이 사망했다는 끔찍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동생은 제가 관을 메어주기를 바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 파리로 가서 검정 양복을 한 벌 맞추어야겠습니다.

지베르니에서 모네올림”(1883.5. 1)

 

드가는 마네를 가리켜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마네는 차세대 화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통로를 열어주었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마네의 회화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네는 본능적으로 행동했고, 회화의 기교를 단순화했으며 … 그는 자신의 감각으로 긴급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표현했다.

 

마네가 타계한 이듬해 친구이자 평론가 에드몽 바지르는 『마네』를 출간했습니다. 시인 보들레르는 현대적 감각으로 그림의 주제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하며 우발적인 변화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화가들에게 권했는데, 마네가 그의 충고를 소중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현대적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주제를 전통주의와 접목하여 새로운 회화를 그린 사람이 바로 마네였고, 그런 시도가 모더니즘의 문을 활짝 열게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이 1886년 4월과 5월에 뉴욕에서 소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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