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와 노르망디의 해안 푸르빌


 
1881년 12월 푸아시로 이주한 모네는 알리스와 새로 꾸민 가정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이주한 걸 후회했는데, 아무런 영감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초라한 푸아시가 싫다”고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1882년 5월 27일 뒤랑-뤼엘에게 이곳의 전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편지에 적었습니다.



 

 



모네의 <푸르빌의 벼랑에서, 맑은 날 Sur la Falaise de Pourville, Temps Claire>, 1882, 유화, 65-81cm.



 

 



모네의 <푸르빌 근처의 벼랑 Falaises pres de Pourville>, 1882, 유화, 60-81cm.



 

 



모네의 <푸르빌의 카베로 가는 오솔길 Le Chemin de la Caves a Pourville>, 1882, 유화, 60-81cm.



 

 



모네의 <푸르빌의 카베로 가는 오솔길 Le Chemin de la Caves a Pourville>, 1882, 유화, 73-60cm.



 

 



모네의 <바랑주빌의 오두막집 세관 La Cabane de Douanier a Varengeville>, 1882. 유화, 60-78cm.



 

 



모네의 <바랑주빌의 벼랑 Cliff at Varengeville>, 1882, 유화, 65-81cm.



 

 

모네는 2월부터 주로 노르망디 해안에서 작업했으며, 그것들을 집에 와서 완성했습니다. 그는 디에프를 근거지로 반경을 넓혔으며, 곧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푸르빌이 호텔 숙박료가 싸다는 걸 알고는 그곳에 묵으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알리스가 걱정할 정도로 그림에만 전념했습니다. 푸르빌의 바다와 해변 풍경이 그의 캔버스에 아름답게 담겼으며, 특히 바랑주빌의 강 언덕과 그 위의 집과 교회가 아름다운 장면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네는 가족을 여름에 푸르빌에서 지내게 하고 알리스가 무료하지 않도록 밖으로 나가는 걸 자제하며 근처의 강 언덕과 들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는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으므로 자신이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에는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르누아르가 이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1882년 뤼니옹 제네랄 은행이 파산했고, 뒤랑-뤼엘이 경제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는데,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을 속히 갚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뒤랑-뤼엘의 경제적 어려움은 모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는데, 그가 모네의 주고객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네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제7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적극 참여하기로 하고 35점이나 출품했습니다. 1882년 3월에 열린 이 전시회에는 드가가 불참했고,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베르테, 카이유보트 등이 참여했습니다. 제6회 전시회를 두고 혹평한 조리스 유이스망과 같은 일부 저널리스트들은 이번에도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풍과 극도로 독자적인 모네의 화풍 모두 비난했지만, 모네의 바다를 주제로 한 풍경화는 호평했습니다.



 

 

 



머네의 <바랑주빌의 교회, 석양 Eglise de Varengeville, Soleil Couchant>, 1882, 유화, 65-81cm.



 

 



모네의 <바랑주빌의 교회, 석양>, 1883, 유화, 30-42cm.



 

 



모네의 <바랑주빌의 교회, 구름 낀 날> 혹은 <벼랑에 있는 교회, 바랑주빌>, 1882, 유화, 65-81cm.



 

 

뒤랑-뤼엘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10월에 모네가 푸르빌에서 그린 그림 20점을 사주었습니다. 모네가 작품을 팔 때마다 장부에 가격과 구입자의 이름을 적어두었으므로 누가 언제 몇 점을 구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뒤랑-뤼엘은 이듬해 3월 파리에 마련한 자신의 화랑에서 모네의 작품 56점을 소개했지만, 별로 팔지 못하자 모네는 전시회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이었다고 오히려 뒤랑-뤼엘을 책망했습니다. 뒤랑-뤼엘은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를 위한 전시회를 열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만족할 만하지 못했습니다.



 

 

 



모네의 <에트레타의 상류 어귀 La Porte d'Amont, Etretat>, 1868-69, 유화, 81.3-100.3cm.

에트레타는 르아브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어촌입니다. 쿠르베가 1865년 이

곳에서 절경을 그렸고, 모네의 작품을 통해 이곳은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모네의 <에트레타의 상류 어귀>의 부분



 

 



사진: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암석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모네의 <에트레타의 벼랑 Falaise a Etretat>, 1885, 유화, 65-92cm.



 

 



모네의 <에트레타, 거친 바다 Etretat, Mer Agitee>, 또는 <에트레타의 벼랑>, 1883, 유화, 81-100cm.



 

 



모네의 <마네포르트, 에트레타 I La Manneporte pres d'Etretat>, 1883, 유화, 65-81cm.

 

모네는 르아브르에서 작업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일기가 나브면 에트레타에서 작업하는 것이 더 쉬웠습니다. 그는 이곳의 기암이 마음에 들어 1886년까지 종종 와서 그렸는데, 1847년경부터 이곳에는 작은 호텔이나 셋집이 생겨서 작가와 화가들이 찾아왔습니다.



 

 



사진: 에트레타의 절경



 

 



모네의 <에트레타의 거친 일기 Gros Temps a Etretat>, 1883, 유화, 65-81cm.



 

 



모네의 <에트레타의 벼랑 La Porte d'Aval, l'Aiguille d'Etretat>, 1886, 유화, 73-92cm.



 

 



모네의 <마네포르트, 에트레타 Il La Manneporte pres d'Etretat>, 1886, 유화, 81-65cm.

 



모네는 푸아시에서는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어 1883년 2월 에트레타로 가서 작업했습니다. 쿠르베와 부댕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다몽항, 이몽항, 아발항의 기암석을 그렸으며, 에귀유의 뾰족한 바위도 그렸습니다. 그는 1868-69년에도 이곳에 와서 바다와 어우러진 가파른 절벽과 동굴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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