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뇌졸증: 풍 이야기

 

이범은 몸살림연신내동호회(Daum 카페) 원장입니다. 동호회에 들어가시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방에서는 풍이라 하고 양방에서는 뇌졸중이라고 합니다. 어쩌다가 한 번씩 풍을 맞은 사람을 경험해 봅니다. 그런 경험과 해결책을 재작년에 나온 책 󰡔몸, 펴면 살고 굽으면 죽는다󰡕에서 정리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달쯤 전에 40대 중반 나이의 한 회원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풍을 맞았다고. 상태를 물어보니 자세한 것은 직접 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아주 경미하게 맞았더군요. 몸살림운동을 하는 회원 중에는 ‘입’으로만 운동을 하고 ‘몸’으로는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이 회원도 이런 ‘과’에 속하는 분이었습니다. 몸을 살리려면 몸으로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인데, 입으로만 운동을 하니 몸이 살아나겠습니까. 어쨌든 빨리 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마침 대청에 가서 장애인들과 함께 운동을 하는 날인데, 빨리 오지 않으면 늦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와서 보니 정말로 아주 경미하게 맞았더군요. 병원에 가서 진료 신청을 하는데, 글씨가 마음대로 쓰이지 않아 6번이나 고쳐 써서 겨우 신청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팔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은 것이겠지요. 발음은 아주 약간 꼬이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내려올 때 다리가 엉켜 넘어질 것 같아 난간을 붙잡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MRI를 찍어 보니 뇌출혈인데. 뇌의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에 출혈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수술이 어렵다고 하니, 그제야 제게 연락을 하고 찾아온 것 같습니다.

풍을 맞았을 때에는 온몸의 근육이 굳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온몸의 근육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세게 맞았을 때에는 근육을 풀어 주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본인이 꾸준하게 기본운동을 해서 몸을 바로 세워야 하겠지만, 이 회원처럼 약하게 맞았을 때에는 근육을 풀어 주는 것만으로도 해결이 됩니다. 그래도 어쨌든 세세하게 풀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힘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회원이 바로 오지 않고 좀 늦게 왔습니다. 대청에 빨리 가서 운동을 지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하는 급한 마음으로 이 회원과 한 시간 정도 씨름을 했습니다. 결국 다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대청에도 지각을 했지만, 그 푸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온몸풀기로 몸 전체를 풀었습니다. 이 회원은 다리가 엉킬 정도였기 때문에 온몸풀기 중에서도 손으로 하는 온몸풀기가 아니라 발로 하는 온몸풀기를 했습니다. 그래야 아래로 많이 처져 심하게 굳어 있는 다리 근육이 더 많이 위로 올라와 더 잘 풀리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다리를 돌리고 돌려 다리 근육을 더 풀어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발가락을 아래로 굽혀 엉덩이를 밟고 위로 올려 주는 과정을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가면서 해 주었습니다. 이것으로 하체에 관한 도움주기는 끝이 났습니다.

다음으로는 허리를 풀어 주었습니다. 특히 허리세움근이 후상장골극 바로 위부터 두개골 바로 밑까지 많이 굳어 있었습니다. 이 전체를 풀면 허리만 풀리는 것이 아니라 상체도 어느 정도 풀리게 됩니다. 어쨌든 허리가 아픈 케이스 10가지를 하나씩 짚어 보면서 굳어 있는 곳은 다 풀어 주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상체를 풀어 주었습니다. 상체 영역을 풀 때 저는 손가락부터 시작을 합니다. 손가락을 잡아 빼고, 힘을 약간 주어 옆으로 누르고, 위로 꺾어서 올리고, 손끝을 좀 세게 잡아 누르고 하면 손가락 풀기가 끝나는데, 이렇게 하고 나면 팔과 등, 어깨, 목까지 많이 풀려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손을 털어 주고 나면 상체 양역의 굳어 있던 근육이 50% 정도는 풀려 있습니다. 그 다음에 어깨 주변의 근육을 풀어 줍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어깨가 아프다고 바로 어깨를 풀려고 하면 엄청나게 아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 나면 이렇게 하지 않고 할 때보다 통증을 반밖에 느끼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어깨뼈 주변의 근육을 풀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어깨뼈 주변에서 아파하는 근육의 부위는 20군데 정도 되는데, 이 역시 하나하나 잡아서 풀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마지막 남는 것이 목과 흉추 극돌기 위의 근육입니다. 이곳까지 다 풀어 주고 끝을 냈습니다.

그리고 글씨를 써 보라고 했습니다. 글씨를 작게는 쓰는데, 크게 쓰지를 못했습니다. 팔이 아직 덜 풀린 것입니다. 오늘은 대충 이렇게 끝내고 다시 보자고 했습니다. 대청에 가야 하지 않았으면 좀 더 세밀하게 풀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영역별로 풀고 나서는 다시 더 세밀하게 들어가 부위별로 풀어야 좀 더 완벽하게 풀리는 것인데, 영역별 풀기로 끝을 낸 것입니다.

대청에서 돌아오니 아직 이상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장 다시 오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아까 했던 영역별 풀기는 대충 하고 특히 팔을 세밀하게 풀어 주었습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 시간 정도 씨름을 하고 나서 말을 해 보라고 했습니다. 약간 어눌하게 발음하던 것이 이제는 명확하게 발음이 됐습니다. 글씨를 써 보라고 했더니, 이제는 크게 글씨를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가볍게 맞은 풍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이 회원이 이제는 술을 한잔해도 되느냐고 제게 물어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원리적으로 보자면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해도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 생각해 보니 제가 신중하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풍이야 풀렸겠지만, 그래도 이 회원이 혹시 술을 마시고 부작용이나 생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습니다.

다음 주에 이 회원이 나왔을 때 물어보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1주일을 지냈는데, 이 회원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조금 더 걱정이 됐습니다.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 아닌가 조금 더 걱정이 된 것입니다. 다음 주에도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고민을 했는데, 마침 다음 주에 이 회원이 나타났습니다. 당연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저는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회원은 처음에 가볍게 풍을 맞았다는 사실을 부인에게 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하고 씨름하고 나서 술을 한잔하고 돌아가고 나서는 부인하고 얘기를 하다가 풍 맞은 사실을 토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부인의 입장에서는 남편한테 큰 병이 난 것이고, 따라서 부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남편이 당장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런 부인의 생각 때문에 부인의 강권에 의해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합니다. 5일간 입원해 있었는데, 그 동안 병원에서 한 것이라고는 링거 주사를 맞는 것 외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으니 퇴원했다고 합니다.

이때 생각난 것이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물만 마셔도 토하고 만다는 아줌마가 왔는데, 이 아줌마가 2주일 후에는 죽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그 다음 주에는 된밥은 먹지 못해도 진밥은 먹을 수 있게 됐다고, 그 다음 주에는 된밥까지 먹을 수 있게 됐다고 저한테 와서 자랑을 했습니다. 이 분의 병명은 크론씨병이었는데, 식도부터 항문까지 소화기계통 전체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서도 치료 불가능하다고 손을 든 상태였습니다. 특히 소장에 궤양이 있는데, 소장을 잘라내면 영양분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수술을 하지 못하고 손을 들고 만 상태였습니다. 여기에다 전신의 부종, 섬유근육통 등 온몸이 엉망이었습니다. 이 분에게 권한 운동은 상체펴기였는데, 이 분이 몸살림운동의 방법을 믿고 열심히 운동해 한 달 보름쯤 지나서는 이런 증세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몇 주간 안 오다가 어느 날 연락을 하고 왔습니다. 그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어머니와 함께 왔는데, 그 어머니가 제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이 30밖에 안 된 이 아줌마는 이제 몸이 좋아졌다고 방심하고 밤늦게 친구들과 만나 떡볶이에 튀김에 위에 안 좋은 음식을 실컷 먹고 한참 수다를 떨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속이 너무 아파 새벽에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몇 주 동안 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위가 안 좋은 사람에게 밀가루 음식이나 튀긴 음식은 금물인데, 친구들과 그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서 실컷 수다를 떨면서 논 것입니다. 일면 이해는 됐습니다. 이 나이라면 한참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면서 놀고 싶어 했을 텐데, 몇 년 동안 병 때문에 놀지 못하다가 이제 몸이 좀 괜찮아졌으니 얼마나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방심은 금물. 결과는 통증 때문에 몇 주 동안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권해야 할 회원한테 술 마셔도 괜찮다고 얘기해 놓고는 마음고생을 좀 했습니다. 몸이 많이 좋지 않았던 사람은 몸이 많이 좋아지더라도 계속 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 동안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입니다. 풍에 대해 얘기하다가 좀 이상한 결론으로 글을 마칩니다만, 방심은 금물이라는 게 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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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탈출: 중국 황산에 다녀왔습니다



 중국 황산에 다녀왔습니다.

여행 동호회 ‘일상탈출’에서 기획한 3박4일 황산 여행을 즐겁게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현지 가이드의 말로는 금강산에 1만2천 봉우리가 있다면, 황산에는 12만 봉우리가 있다고 합니다.

황산의 규모는 과연 엄청났습니다.

함께 올라가던 어느 분이 계속 계단으로 정상을 향해 오르면서 힘이 드니까 “갈수록 태산이네”라고 말해, 제가 “갈수록 황산”이라고 말했습니다.

케이블카로 80미터까지는 쉽게 갈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계단으로 정상에 올라야 합니다.

황산에는 일 년 중 150일이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기 때문에 맑게 개인 날 황산에 오른 건 일종의 행운이었습니다.

황산 정상에 있는 소나무의 특징은 키가 작고 잎이 푸르다 못해 검습니다.

기암의 수없이 많은 봉우리들이 첩첩 산에 이어졌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구름바다(운해)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운해는 아니지만 구름이 발아래에 내려앉아 바다 비슷한 형상을 이뤘습니다.

바다 비슷하다고 한 건 원래 발아래에만 구름이 끼고 그 위로는 다시 투명한 공기 속으로 산을 볼 수 있어야 운해인데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약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저도 기념촬영을 했고, 체인에 자물쇠가 많이 달린 사진에 관해 말하면, 연인이 함께 와서 자물쇠에 두 사람의 이름을 새긴 뒤 열쇠를 골짜기에 던져 버리는 중국인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두 사람의 인연을 꽁꽁 묶어 누구도 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 중턱에 자물쇠에 이름을 새겨주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하산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강한 소나기가 되고 번개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케이블카로 내려와야 하는데, 번개가 치는 바람에 몇 시간 산 중턱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번개가 치면 케이블카가 운행하지 않습니다.

온몸이 젖은 채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마침 번개가 멎어 무사히 하산하여 발마사지를 받았습니다.

이튿날은 46개의 야외 온천탕이 있는 곳에서 온천수를 즐겼으며, 온몸 마사지를 받고 몸의 피곤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일상탈출의 즐거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탈출이었습니다.

내일부터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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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기 드 모파상을 만나다


 

 



 

 

 



모네의 <봄 Spring>, 1886, 유화, 65-81cm.



 

 



모네의 <에트레타 Etretat>, 1883, 유화



 

 



모네의 <지베르니 근처의 양귀비밭 Champ de Coquelicots, Environs de Giverny>, 1885, 유화, 65-81cm.



 

 



모네의 <지베르니로 가는 길, 겨울 The Road to Giverny>, 1885, 유화



1883-86년 모네는 르아브르 북쪽 에트레타로 정기적으로 가서 그곳의 절경을 그리면서 <봄>을 비롯한 지베르니의 풍경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사진: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1850-93)



 

 

에트레타는 모네만 즐겨 찾은 곳이 아니라 단편소설 작가 기 드 모파상도 자주 방문했습니다. 모파상도 모네와 마찬가지로 노르망디 사람으로 디에프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두 살 때 부모가 별거하자 어머니 밑에서 문학적 감화를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1869년부터 파리에서 법률공부를 시작했지만, 1870년에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지원 입대했습니다. 전후에 심한 염전사상(厭戰思想)에 사로잡혔고 이것이 문학지망의 결의를 굳히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1872년 아버지의 도움으로 해군성 ·문부성에 취직,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머니의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G.플로베르에게서 직접 문학 지도를 받았습니다. 1874년 플로베르의 소개로 에밀 졸라를 알게 되었고, 또 파리 교외에 있는 졸라의 저택에 자주 모여 문학을 논하던 당시의 젊은 문학가들과도 교류했습니다. 1880년 졸라는 모파상을 포함한 여섯 명의 젊은 작가들이 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취재한 단편집 『메당 야화 Les Soirées de Médan』를 간행했는데, 모파상은 여기에 『비곗덩어리 Boule de suif』를 실었습니다.

 

모파상은 27살 때부터 자신의 신경질환을 자각했으나, 이런 증세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불과 10년 동안의 문단생활에서 단편소설 약 300편, 기행문 3권, 시집 1권, 희곡 몇 편 외에 『벨아미 Bel-Ami』(1885) 『몽토리올 Mont-Oriol』(1887) 『피에르와 장 Pierre et Jean』(1888) 『죽음처럼 강하다 Fort comme la mort』(1889) 『우리들의 마음 Notre cœur』(1890) 등의 장편소설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 상당수가 에트레타 강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작품에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 어두운 염세주의적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그의 무감동적인 문체를 통해 작품 전체에 이상한 고독감을 감돌게 합니다. 이런 경향은 당시의 시대적인 영향도 있으나, 그보다도 그의 신경질환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작으로 인한 피로와 복잡한 여자관계로 병이 더욱 악화되어 1892년 1월 2일 니스에서 자살을 기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으나, 이듬해 7월 6일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네가 모파상을 만난 건 1885년 후반이었고, 두 사람은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모파상은 1866년 9월 28일 잡지 『질 브라 Gil-Blas』에 '풍경화가의 인생 The Life of Landscapist‘이란 제목으로 모네에 관한 글을 기고했습니다. 모파상은 모네가 대여섯 개의 캔버스를 들고 다니면서 동일한 주제를 다른 날 다른 시각에 그린다고 적었습니다.



 

 

 



모네의 <린스베르그 풍차와 튤립 들판 Tulip Fields with Rujnsberg Windmill>, 1886, 유화



 

 

1886년 봄 모네는 네덜란드로 가서 며칠 지내면서 스케치한 레이덴과 하를렘 사이에 펼쳐진 튤립 벌판 다섯 점을 지베르니로 가져와 완성했습니다. 네덜란드의 광활한 벌판과 바람에 나부끼는 튤립의 파문을 묘사했습니다. 그해 6월 15일 조르주 프티의 화랑에서 열린 제5회 국제 회화, 조각전에 튤립 회화 두 점을 소개했습니다. 유이스망은 6월 28일 르동에게 보낸 편지에 “모네가 그린 네덜란드의 튤립 벌판은 압도적입니다. 참으로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모네는 베르테에게 출품한 작품들이 모두 훌륭한 분들에게 고가에 팔렸음을 알리며 만족해했습니다.

 

그해 뉴욕에서 개최된 ‘파리 인상주의 유화와 파스텔전’에 모네의 작품 40점이 소개되었습니다. 뒤랑-뤼엘이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기획한 이 전시는 미국인 화가 메리 카삿과 존 싱어 사전트의 도움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뒤랑-뤼엘이 뉴욕에서 인상주의 전시회를 열어 성공한 그때부터 미국인들은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으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경제적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평론가들은 미국인들의 열광적인 구매 대문에 유럽에는 작품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걱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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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이야기: 대칭성의 붕괴


 

우주의 초창기에 자발적인 대칭성의 붕괴가 무작위로 일어났다는 가정만 세우면 일단 다중우주이론multiverse theory은 성립합니다. 평행우주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면 이것들의 탄생과정, 특히 자발적인 붕괴가 일어나는 과정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우주가 탄생하여 자발적인 붕괴spontaneous symmetry breaking가 일어나면 기존의 이론에 포함되어 있는 대칭성도 함께 붕괴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네 종류의 힘들인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 아무런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는 것도 초기우주의 대칭성이 붕괴되면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지금 우리는 빅뱅에 의해 붕괴된 원시대칭의 잔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행우주를 이해하려면 빅뱅 직후에 발생한 대칭성의 붕괴과정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초창기의 우주가 완전한 대칭성을 보유한 채로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네 종류의 힘들도 하나의 힘으로 통합됩니다. 고도의 대칭성을 갖고 있던 초기의 우주는 아름답고 우아했지만 별로 유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생명체가 태어났다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주 안에서 생명활동이 가능하려면 온도가 내려가면서 대칭성이 붕괴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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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지베르니에 정착하다


 

 지베르니는 파리 서북쪽으로 80km 떨어진 에프트 강과 센 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센 강둑의 조그만 마을이었습니다, 지베르니에서 5km 가면 이웃 마을 베르농이 있고, 거기에 기차역이 있어 파리로 갈 수 있습니다.

 

푸아시의 집은 1883년 겨울에 계약이 만료되므로 모네는 절경을 찾아다니다가 지베르니에 이르렀고, 4월에 그곳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더 이상 옮겨 다니지 않고 이 마을에 뿌리를 내려 화려한 전성시대를 구가할 <수련>의 무대를 준비하게 됩니다. 열 식구가 살 농가를 세 얻어 이주할 때에도 이사비용을 대며 투자를 아끼지 않은 뒤랑-뤼엘에게 모네는 희망에 찬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모든 일로 전 선생에게 더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대작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시골이 제 맘에 꼭 들기 때문입니다.

 

센 강가에 조그만 창고를 지어 이젤이 부착된 보트와 캔버스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센 강과 강 중앙에 있는 작은 섬들 그리고 강 건너 수평선이 보이는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보트를 타고 강 건너편으로 가거나 베르농까지 내려가서 그리곤 했습니다. 르누아르가 새로운 주제를 찾아 그곳으로 모네를 자주 방문했습니다.

 

12월 중순에 르누아르와 함께 처음으로 지중해 해안으로 향했는데, 그곳을 다녀온 르누아르가 함께 가자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르누아르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베니스에서 성 마르코 성당과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렸습니다.



 

 

 



르누아르의 <성 마르코 성당, 베니스 St. Mark's, Venice>, 1881, 유화, 65.6-81.5cm.



 

 



르누아르의 <레스타크의 바위산 Rocky Crags at l'Estaque>, 1882, 유화, 66.5-81.9cm.



 

 



르누아르의 <세잔의 초상 Portrait of Cezanne>, 1880, 종이에 파스텔, 53-44cm.



 

 

두 사람은 두 주일 예정으로 마르새유에서 출발하여 몬테카를로를 경유해 제노아로 가기로 하고 도중에 엑상프로방스의 레스타크에 들러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폴 세잔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세잔은 번번이 살롱에 낙선하자 레스타크로 내려와 인상주의 이후의 회화를 조용히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린 레스타크 충경화는 훗날 조르주 브라크에 의해 발견되어 입체주의의 기원이 되는 회화로 인정받게 됩니다. 세잔은 카미유 피사로에게서 수학했고, 인상주의전에 참여한 적이 있어 두 사람과는 사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르누아르는 세잔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레스타크에서 그곳 풍경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걸음을 재촉하여 이탈리아 내륙으로 들어가 제노아로 갔습니다.

 

르누아르와의 여행에서 돌아온 모네는 1884년 1월에 혼자 이탈리아 국경 근처 보르디게라 바로 위에 있는 리비에라로 가서 석 달을 머물렀습니다. 그는 보르디게라에서 프란체스코 모레노를 알게 되었는데, 모레노는 커다란 별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네는 모레노의 별장에 기거하면서 야자수가 우거지고 레몬과 올리브나무, 포도넝쿨이 있고 알 수 없는 꽃들이 만개한 그곳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뒤랑-뤼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태까지 본 곳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자신의 여행을 르누아르가 모르기를 바랐습니다.

 

보르디게라는 우리가 여행하면서 본 곳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저는 새로운 풍경을 주제로 한 연작을 다시 그리고 싶습니다만, 이 여행에 관해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 혼자서 진행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 저는 저만의 느낌에 몰입하여 고독하게 작업할 때에 일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1884. 1. 12)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와 종려나무를 비롯하여 열대식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보르디게라를 모네는 지상의 낙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 그곳에 대한 감탄이 적여 있습니다.

 

오렌지며 레몬나무, 야자수, 멋들어진 올리브나무 아래로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오. ... 푸른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오렌지와 레몬나무를 그리려고 하오. ... 바다와 창공의 푸르름을 설명할 방법이 없구려.”(1884. 1. 26)

 

모네는 보르디게라 외에도 벤티미글리아와 멘톤 그리고 그 밖의 곳으로도 가서 그곳의 햇빛과 대기를 고스란히 캔버스에 담기 위해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던 색조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뒤랑-뤼엘에게 적었습니다.

 

푸른색이나 핑크색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비웃을지 모르지만 풍경 자체가 정확하게 이런 화사함과 신비스러운 햇살로 이뤄져 있으므로 그대로 그리려고 합니다. 모든 풍경이 비둘기가슴색이나 선명한 펀치색입니다.”(1884. 3. 11)



 

 

 



모네의 <보르디게라 Bordighera>, 1884, 유화, 73-92cm.



 

 



모네의 <사소의 계곡, 보르디게라 La Vallee de Sasso, Bordighera>, 1884, 유화, 65-92cm.



 

 



모네의 <보르디게라, 이탈리아 Bordighera Italy>, 1884, 유화



 

 



모네의 <올리브나무 습작, 보르디게라 Study of Olive Trees, Bordighera>, 1884, 유화



 

 



모네의 <보르디게라 Bordighera>, 1884, 유화

 

 

1883년 12월 르누아르와 함께 지중해를 여행한 후 모네는 지중해가 마음에 들어 이듬해 1월 혼자 석 달 동안 여행하기로 하고 보르디게라에 들렸습니다. 이 겨울 여행은 지난 해 초 노르망디에서 고생하며 그린 것과는 달리 종려잎이 무성하고, 소나무의 푸름이 그치지 않는 대지와 풀 그리고 바다와 하늘 사이의 하얗게 빛나는 광채와도 같은 마을을 그리는 데서 그는 흥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네는 그곳에서 <보르디게라>를 비롯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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