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왕조의 혈통에 이란인의 피가 반은 섞여 있었다

 

 

 

 

 

 

안티오코스 1세는 아버지의 이런 접근방식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다음은 기원전 286년에 바빌론 부근의 보르시파Borsippa 유적의 에지다Ezida 사원에서 발견된 아카드어 비문이다. 안티오코스 1세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이 비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마케도니아인이자 셀레우코스 1세의 장남인 나는 위대한 왕 안티오코스 1세다. 뛰어난 국왕이자 온 세상의 왕인 나는 바빌론의 왕이자, 대지의 왕으로 에사길라와 에지다의 수호자이다. 나는 에사길라와 에지다, 두 신성한 사원의 재건을 결심하고 최상급 기름을 사용하여 나의 정결한 두 손으로 손수 벽돌을 빚었다.
안티오코스는 그리스어와 아카드어로 기록되는 모든 문서에 종전과는 다른 새로운 날짜를 기입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외세의 침략세력이 세운 왕조가 아니라 지역 신에 익숙할뿐더러, 지역 신 숭배를 장려하는 합법적 통치세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연장선상에 있는 국가란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체제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완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혈통에 이란인의 피가 반은 섞여 있었으니 말이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실용주의는 왕조의 오랜 번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주변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에 대적할 만한 강대국이 없었다. 인도 북서부에 대한 마우리아 왕조와의 영토분쟁을 협상으로 해결한 일도 있었다. 박트리아처럼 외진 지역의 영토가 다른 나라로 넘어간 일은 있었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는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렸다. 하지만 오랜 세월은 이 대제국을 현재 시리아의 영토보다 약간 더 넓은 땅을 차지한 나라로 전락시켰다. 게다가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파르티아와 로마의 세력은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로마와 갈등을 빚기 시작한 건 기원전 190년 무렵 안티오코스 3세의 주장 때문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트라키아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라는 해묵은 주장을 반복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왕답게 그는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며 반유목민족인 파르티아인을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비록 소아시아의 도시 마그네시아에서 맞닥뜨린 로마군과의 전쟁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말이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병사들에게 미늘로 뒤덮인 갑옷을 지급해야 했고, 말을 탄 궁수를반드시 대동해야 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3세의 뒤를 이은 왕들의 운명은 달랐다. 파르티아의 국력은 날로 융성했고 국내에서는 왕위찬탈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내전까지 발생했다. 시리아의 분열이 못내 기뻤던 로마는 두 손을 놓고 지켜보기만 했고, 이때를 틈타 파르티아가 현재의 이란에 해당하는 지역을 집어삼켰다. 이 전략적 요충지를 수복하려는 시리아의 시도는 실패했고 이는 국력의 급격한 쇠퇴로 이어졌다. 기원전 126년경 셀레우코스 왕조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까지 밀려났다. 국고가 바닥나 반격할 군사 양성조차 힘들었던 이 노쇠한 시리아 왕국은 결국 기원전 64년경에 그 오랜 역사의 막을 내린다.
바로 그해 로마가 시리아 왕국을 속주로 병합했고, 이는 두고두고 로마와 파르티아 간 반목의 씨앗이 되었다. 파르티아의 왕들은 끊임없이 이 이란 지역에 대한 수복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정확히 따지고 보자면 그들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예는 아니었다. 파르티아는 단 한 번도 세계 최강의 대제국 반열에 오르지 못한 나라였다. 오히려 사실상 자치지역이나 다름없는 영지들의 연합국으로 보는 것이 옳았다. 게다가 파르티아의 왕들은 그들의 후예인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왕들처럼 강력한 국가의 군주도 아니었다. 기원전 53년의 카레Carrhae 전투에서처럼 로마 제국에 압승을 거둔 일도 있었지만 말이다. 파르티아는 카레 전투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뒀고 10,000명의 로마제국 병사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이 포로들 중 일부는 파르티아의 동부에 정착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멀리 간 포로들은 중앙아시아 투루판Turufan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 병사들과 마주쳤던 것 같다. 중국의 고대문서에는 기원전 36년에 용병부대를 이끌고 중국에 투항한 한 야만족 족장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훈련방식에 대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이들은 로마 군단 출신의 병사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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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는 다방면에서 혁신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방면에서 혁신을 추진했다. 그 중 마케도니아인이 가장 꺼렸던 것은 바로 궁정에서 절을 하는 새 예법이었을 것이다. 사실 왕에게 절을 하는 데 전혀 반감이 없는 아시아인에게만 이 새 예법을 시행했어도 되는 일이었다. 마케도니아인에게는 기존의 예법을 고수하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새 예법을 굳이 모든 이에게 시행하려고 들었다. 자신의 만백성을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그의 통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화융합에 대한 알렉산드로스의 끝없는 갈구를 가로막은 건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모든 것을 가진 대왕은 33세의 나이로 바빌론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사인은 열병이었다. 기원전 323년 병상에서 마지막 전투에 한창이던 이 전무후무한 정복자에게 측근들이 물었다. “누구에게 왕위계승을 하시렵니까?” 알렉산드로스는 힘겹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가장 강한 자에게.” 그의 휘하에 있던 부장들의 복마전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말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세상을 뜨기가 무섭게 권력 실세들의 혈투가 벌어졌고, 대왕의 거대한 제국은 여러 갈래로 찢겨졌다. 새로 건립된 나라들 중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주창한 문화융합이라는 기조를 유지한 나라는 셀레우코스 1세가 서아시아에 창건한 시리아 왕국이 유일했다. 이 왕국의 수도는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하는 동부의 티그리스 강 유역에 있었다. 셀레우코스는 이 수도의 한 교외지역에 아시아인 아내 아파네아Apanea의 이름을 딴 명칭을 붙이기도 했다. 아파네아는 알렉산드로스의 동화정책에 따라 셀레우코스가 결혼한 정복국 박트리아 왕국의 공주였다. 아파네아 공주는 마케도니아 병사와 결혼한 다른 아시아 국가 여인들과는 달리 알렉산드로스 사후에도 원만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그녀가 낳은 셀레우코스의 장남이 왕위를 이은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바로 탁월한 국정운영능력으로 유명한 안티오코스 1세이다.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81년에 서거했다. 생전에 장남의 출중한 재능을 알아본 그는 왕세자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 혁신적인 결정 덕에 셀레우코스 왕조는 오랜 번영을 누리게 된다. 안티오코스 1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제국의 동부를 다스렸다. 단순히 왕을 대리하는 섭정으로서 이 지역을 책임진 것이 아니었다. 시리아 왕국에서 섭정 안티오코스는 셀레우코스와 동등한 권한을 지닌 군주의 대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는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섭정 왕세자에게 군주와 다름없는 결정권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의 창건 초기부터 셀레우코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내에 다양한 민족들이 한데 섞여 살고 있는 대제국을 통치하는 문제에 대해 고심했다. 그가 자신을 페르시아 왕의 현신으로 포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란 사실을 내세우기 바빴던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측근들과는 달리 말이다. 권력다툼에 열을 올리던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은 정통성을 알리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초상이 새겨진 주화를 통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왕조를 차별화했던 명민한 셀레우코스의 제국에서는 이런 주화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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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벤 알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해야 했다

 

 

 

 

 

 

먼저 중동이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세계에 민주화 바람이 불던 역사 밖에 존재했었다는 점부터 짚어볼까 한다. 아랍국가들의 경우 권위주의 정권이 갖은 박해를 자행하며 통치하다가, 2011년 1월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튀니지 시디 부자이드에서 어느 노점상이 임의로 사업이 몰수된 데 대해 분신시위를 벌이자, 이것이 대규모 시위로 번지게 되어 10일 후 독재자 벤 알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해야 했다. 같은 달, 튀니지 주민들의 시위는 알제리와 요르단, 예멘 및 시리아로 퍼졌고, 중동의 중심지인 이집트까지 확산되었다. 18일간 지속된 군중 시위— 1월 25일부터 2월 11일까지— 는 결국 30년간 집권해온 무바라크 대통령의 축출로 이어졌다. 아랍의 봄은 이 장의 주제— 민주정치를 둘러싼 이슬람주의자들의 의지력— 를 완전히 판이하게 바꾸었다. 이를테면, 이슬람주의 당의 공직 선출이 이론적인 장래의 결과였다가 조만간 벌어질 전망이 된 것이다. 이슬람세계의 핵심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정치로 이행하려는 것이므로 이슬람주의 조직의 입지를 분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다음의 세 가지 요점이 분석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1989년 탈공산주의 유럽이 대부분 그랬듯이, 해체된 권위주의 정부가 민주정치를 발전시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란에서는 국왕이 폭정을 일삼다가 1979년 이후에는 이슬람주의자인 아야톨라٥가 이를 답습했다. 둘째는 이슬람주의가 다국적 조직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과 터키의 AKP는 서로 연줄이 닿은 것으로 알려졌고, 『뉴욕 타임스』지의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글로벌 에디션에 따르면, “에르도안 당은 이미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과 결연을 맺었다— 에르도안 전 총리가 중동에서 오랫동안 반이스라엘의 선동자로 나선 결과— 고 한다. …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원 중 셋은 … 터키의 후원을 받는 선박에 탑승했는데… 2010년 5월에 이스라엘 군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86 그리고 마지막은 중동의 권위주의 정권이 항시 이슬람주의의 세속적 보루를 자처했다는 것인데, 무바라크 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1년 서방세계는 민주화의 강력한 변수로서 이슬람주의를 미화하려는 추세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무슬림 형제단을 취재한 『뉴욕 타임스』지의 글로벌 에디션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무슬림 형제단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하다” 고 시인했고, 이 같은 불확실성은 “실권을 잡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편리한 허울임이 입증될지도 모를” 조직의 중도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중동에서 벌어진 동요가 이슬람주의자를 비롯한 그들의 지지자들이 촉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는 정치적 압제와 경제적 고난을 감내해온 국민이 자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한 것이었다. 예컨대, 튀니지 행상인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열악한 경제적 형편에 항의하기 위해 분신을 기도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각계각층에 관계된 저항세력에 가담했다.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폭동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치적 현실이 되어버린 폭동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기존의 이슬람주의 조직을 합류시키지 않는다면 이슬람세계의 아랍・중동에서 계획된 정책이 전무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민주적인 참여정부라도 이 조직을 제외시킨 채 민주적 원칙에 충실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록 비민주적인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나, 폭력을 버린 이슬람주의자를 가담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참여와 위임은 뚜렷이 구분되는 쟁점이다. 이슬람주의를 합류시키는 것은, 레바논과 가자지구, 이라크 및 터키에서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에 권한을 부여하거나, 민주정치라는 미명 하에 이슬람주의자들에게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진정한 민주정치 세력을 대변하는 평형추를 반대편에 세워야 좀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무바라크 정권 이후, 이집트에서 벌어질 사건은 1979년 국왕이 축출된 후 이란에서 벌어진 것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이란과 이집트는 각각 시아파와 수니파 이슬람교의 중심지다. 차이가 있다면, 수니파 무슬림은 전 세계 무슬림 공동체의 90%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집트의 소요사태가 극에 이르렀을 당시, 2011년 1월 31일자 『파이낸셜 타임스』지에 보도되었던 상반된 양상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CIA 정치적 이슬람세계 전략분석프로그램Political Islam Strategic Analysis Program의 국장을 지낸 에밀 나클레는 “새 정부가 수립되면 세속인과 이슬람주의자를 연합할 수 있을 것이다. … 무슬림 형제단은 이미 선거에 참여해온 데다 다른 집단과 공조할 의지가 있다” 고 밝혔다. 결론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당에서 기회를 노리는 아야톨라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88 수니파 이슬람교에는 아야톨라가 없으니 발언 자체는 허위가 아니다. 수니파 성직자는 카이로의 알아즈하르에 본거지를 두고 있으나, 무슬림 형제단의 발생지는 그곳이 아니다.— 이란 시아파의 성지인 쿰Qum에서 태동한 아야톨라와는 다르다. 수니파 이슬람주의 조직은 대개 일반 국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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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민주주의, 이슬람주의

 

 

 

 

 

 

2011년 봄과 여름, 이 책의 최종 편집 중에 벌어진 사태는 아직 종결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화두로 꺼내지 않을 수 없다. 2월 11일, 오바마 대통령이 사건의 “눈부신 속도” 를 적절히 거론했을 무렵 터키와 이란, 양국은 무바라크가 축출된 이집트의 본보기를 자처해왔다. 지금까지 “아랍의 봄” 운동은 튀니지(벤 알리)와 이집트(무바라크) 및 리
비아(카다피)의 통치자를 축출한 데다 현재는 시리아와 예멘 및 바레인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벌어진 난국과 리비아와 시리아에서 자행된 살육과 폭력은 권위주의가 민주정치로 급변하리라는, 순수한 서방세계의 기대를 완전히 무색케 했다. 귀감을 주는 논객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 같은 정황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큰 문젯거리가 하나 있다. 타리르 광장에서 벌어진 혁명은 대체로 자발적이자 상향식인 것이었다. 즉 특정 정당이나 지도자가 선동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현재 창당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선거가… 9월에 개최된다면 이집트에서 언제든 가동할 수 있는 당 네트워크를 갖춘 단체는 지금껏 암암리에 활동해온 데다 적법한 곳으로 금세 탈바꿈한 무슬림 형제단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이 혁명을 일으키고 무슬림 형제단이 그 덕을 볼까 우려하고 있다.
또 다른 서양 기자는 느지막한 여름, 세계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이 사태를 두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벌어진 시위의 이상주의는… 개혁을 기대해온 아랍세계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아직 막을 내리지 않은 리비아의 혁명은… 개혁이 어떤 파장을 가져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 이슬람주의자들의 의도와 영향력은 분명치 않다. … 리비아의 복잡다단한 난국은 새로운 질서로 진작 이행되었어야 할 아랍국가가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 불확실성은 권력의 공백기를 맞이한 오늘날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예멘에서는 강경한 이슬람주의자들이 도피처를 찾았고…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집트와 리비아 및 시리아 등에서 실세로 부상했다.
이 사태는 역사의 장을 넘겼으나 아직 이렇다 할 글은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를 쓸 것인가? 진보 이슬람주의 야권세력인가, 이슬람주의자들인가? 누구든 험난한 길을 가야 한다고 보면 된다. 이슬람문명의 중심인 중동 입장에서 2011년 2월 사태는 이 책의 주제와 관계가 깊은 세계사적 의미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역사적인 사건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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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윤리관

 

 

 

 

 

 

 

두 번째로 약속에 관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약속에 무엇이 뒤따를까? 무엇을 하겠노라고 누군가에게 약속한다면, 내가 그 일을 할 작정이라는 예측도 아니고, 그것을 하려 한다는 의도도 아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일을 약속하거나 자신을 묶어 놓는 일이다. 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나를 놓아줄 때까지, 나는 약속한 것에서 벗어날 자유가 없다.
약속에 관한 관행에는 우리가 단순히 하나의 짧은 말(“내가 약속하지,” “내가 말했잖아”)을 하는 순간 그 말에 따를 의무를 져야 한다는 생각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급진적인 공리주의자는 여기서 눈을 치뜬다. 내가 화요일에 무슨 일을 하겠다는 이 정도의 약속 하나로 내가 어떻게 묶일 수 있어? 공리주의자에게는 이 일이 고작 하나의 괴이한 의식쯤으로 비칠 것이다(그리고 모든 의식이 그렇듯이, 이 의식이 현실적으로 이루어내는 건 전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공리주의자는 “화요일 저녁에 만나자”는 약속을 두고 코웃음을 칠 터이다. 이 공리주의자는 늘 해오던 대로 모든 행위의 대안과 각 대안에 따르는 비용과 효과를 늘어놓은 다음, 그 약속을 지키는 효용과 그것을 깨는 효용을 저울질할 것이다. 약속은 그것이 지켜지리라는 기대를 낳는다. 그 기대가 깨지면(특히 어떤 계획이 무너지면) 어떤 종류의 괴로움이 뒤따를 것이고, 결국 약속을 깬
데서 발생하는 비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공리주의자는 약속이란 것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듯 무시할 것이다. 공리주의자는 사회적 관습을 스쳐 지나간다. 여기서 사회적으로 공인된 규칙들에 대한 공리주의의 급진적 접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약속에 대하여 공리주의적인 태도를 보일 때 손해를 불러오는 사례도 있다. 무엇보다 공리주의자는 약속할 수가 없다. 내가 공리주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도 내가 약속을 지킬 것으로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은 제의를 받으면(효용을 증대하기에 더 나은 기회를 맞이하면), 나는 주저 없이 새로운 제의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사회적 교류나 상호관계 또는 법적 형태의 약속이라 할 계약을 포함하여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해보라. 나는 월말이 되면 월급을 받을 것이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달 동안 대학에서 근무한다. 대학이 필자에게 월급을 주리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대학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계약은 양쪽을 묶어 놓는다. 그런데 공리주의자가 대학을 운영한다면 어찌할까? 그가 자신의 편리에 따라 그날까지 일한 만큼만 지급하고 만다면 또 어찌할까? 한 달 동안의 일을 미리 하려는 생각이 들까? 또는 책 한 권을 여학생에게 빌려줬는데 내일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여학생이 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므로 나는 여학생이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여학생이 공리주의자라고 가상해보자. 그 여학생에게 책을 빌려줄 때 여학생이 오직 편리하다고 생각할 때에만 그 책을 돌려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학생이 자신이 편리한 대로 책을 돌려주거나 말거나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반드시 책을 돌려받아야 한다. 따라서 여학생이 정말 공리주의자라면 아예 그 학생과 협력 같은 것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여학생이 약속에 대하여 의무론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에 이르러 우리는 공리주의가 신뢰를 깨뜨린다는 골치 아픈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공리주의의 이런 문제점에 관하여는 다음 절에서 더 살펴볼 것이다. 공리주의는 자멸적self-defeating이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두 가지 세상이 있다고 가정하자. 하나는 여러 가지 사회적 협력이 잘 이루어져 약속과 계약을 믿을 만한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협력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라 하자. 첫 번째 사회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협력을 바탕으로 폭넓고 다양한 기획들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곳이기에 두 번째 사회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공리주의자들의 사회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믿기 어려운 곳이라면, 공리주의자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는 두 번째 사회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공리주의는 행복의 극대화를 목표로 삼는다고 부르짖는다. 결국, 공리주의는 본래 의도하던 방향으로 나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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