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는 다방면에서 혁신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방면에서 혁신을 추진했다. 그 중 마케도니아인이 가장 꺼렸던 것은 바로 궁정에서 절을 하는 새 예법이었을 것이다. 사실 왕에게 절을 하는 데 전혀 반감이 없는 아시아인에게만 이 새 예법을 시행했어도 되는 일이었다. 마케도니아인에게는 기존의 예법을 고수하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새 예법을 굳이 모든 이에게 시행하려고 들었다. 자신의 만백성을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그의 통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화융합에 대한 알렉산드로스의 끝없는 갈구를 가로막은 건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모든 것을 가진 대왕은 33세의 나이로 바빌론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사인은 열병이었다. 기원전 323년 병상에서 마지막 전투에 한창이던 이 전무후무한 정복자에게 측근들이 물었다. “누구에게 왕위계승을 하시렵니까?” 알렉산드로스는 힘겹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가장 강한 자에게.” 그의 휘하에 있던 부장들의 복마전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말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세상을 뜨기가 무섭게 권력 실세들의 혈투가 벌어졌고, 대왕의 거대한 제국은 여러 갈래로 찢겨졌다. 새로 건립된 나라들 중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주창한 문화융합이라는 기조를 유지한 나라는 셀레우코스 1세가 서아시아에 창건한 시리아 왕국이 유일했다. 이 왕국의 수도는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하는 동부의 티그리스 강 유역에 있었다. 셀레우코스는 이 수도의 한 교외지역에 아시아인 아내 아파네아Apanea의 이름을 딴 명칭을 붙이기도 했다. 아파네아는 알렉산드로스의 동화정책에 따라 셀레우코스가 결혼한 정복국 박트리아 왕국의 공주였다. 아파네아 공주는 마케도니아 병사와 결혼한 다른 아시아 국가 여인들과는 달리 알렉산드로스 사후에도 원만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그녀가 낳은 셀레우코스의 장남이 왕위를 이은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바로 탁월한 국정운영능력으로 유명한 안티오코스 1세이다.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81년에 서거했다. 생전에 장남의 출중한 재능을 알아본 그는 왕세자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 혁신적인 결정 덕에 셀레우코스 왕조는 오랜 번영을 누리게 된다. 안티오코스 1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제국의 동부를 다스렸다. 단순히 왕을 대리하는 섭정으로서 이 지역을 책임진 것이 아니었다. 시리아 왕국에서 섭정 안티오코스는 셀레우코스와 동등한 권한을 지닌 군주의 대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는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섭정 왕세자에게 군주와 다름없는 결정권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의 창건 초기부터 셀레우코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내에 다양한 민족들이 한데 섞여 살고 있는 대제국을 통치하는 문제에 대해 고심했다. 그가 자신을 페르시아 왕의 현신으로 포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란 사실을 내세우기 바빴던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측근들과는 달리 말이다. 권력다툼에 열을 올리던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은 정통성을 알리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초상이 새겨진 주화를 통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왕조를 차별화했던 명민한 셀레우코스의 제국에서는 이런 주화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