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윤리관

 

 

 

 

 

 

 

두 번째로 약속에 관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약속에 무엇이 뒤따를까? 무엇을 하겠노라고 누군가에게 약속한다면, 내가 그 일을 할 작정이라는 예측도 아니고, 그것을 하려 한다는 의도도 아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일을 약속하거나 자신을 묶어 놓는 일이다. 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나를 놓아줄 때까지, 나는 약속한 것에서 벗어날 자유가 없다.
약속에 관한 관행에는 우리가 단순히 하나의 짧은 말(“내가 약속하지,” “내가 말했잖아”)을 하는 순간 그 말에 따를 의무를 져야 한다는 생각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급진적인 공리주의자는 여기서 눈을 치뜬다. 내가 화요일에 무슨 일을 하겠다는 이 정도의 약속 하나로 내가 어떻게 묶일 수 있어? 공리주의자에게는 이 일이 고작 하나의 괴이한 의식쯤으로 비칠 것이다(그리고 모든 의식이 그렇듯이, 이 의식이 현실적으로 이루어내는 건 전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공리주의자는 “화요일 저녁에 만나자”는 약속을 두고 코웃음을 칠 터이다. 이 공리주의자는 늘 해오던 대로 모든 행위의 대안과 각 대안에 따르는 비용과 효과를 늘어놓은 다음, 그 약속을 지키는 효용과 그것을 깨는 효용을 저울질할 것이다. 약속은 그것이 지켜지리라는 기대를 낳는다. 그 기대가 깨지면(특히 어떤 계획이 무너지면) 어떤 종류의 괴로움이 뒤따를 것이고, 결국 약속을 깬
데서 발생하는 비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공리주의자는 약속이란 것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듯 무시할 것이다. 공리주의자는 사회적 관습을 스쳐 지나간다. 여기서 사회적으로 공인된 규칙들에 대한 공리주의의 급진적 접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약속에 대하여 공리주의적인 태도를 보일 때 손해를 불러오는 사례도 있다. 무엇보다 공리주의자는 약속할 수가 없다. 내가 공리주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도 내가 약속을 지킬 것으로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은 제의를 받으면(효용을 증대하기에 더 나은 기회를 맞이하면), 나는 주저 없이 새로운 제의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사회적 교류나 상호관계 또는 법적 형태의 약속이라 할 계약을 포함하여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해보라. 나는 월말이 되면 월급을 받을 것이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달 동안 대학에서 근무한다. 대학이 필자에게 월급을 주리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대학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계약은 양쪽을 묶어 놓는다. 그런데 공리주의자가 대학을 운영한다면 어찌할까? 그가 자신의 편리에 따라 그날까지 일한 만큼만 지급하고 만다면 또 어찌할까? 한 달 동안의 일을 미리 하려는 생각이 들까? 또는 책 한 권을 여학생에게 빌려줬는데 내일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여학생이 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므로 나는 여학생이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여학생이 공리주의자라고 가상해보자. 그 여학생에게 책을 빌려줄 때 여학생이 오직 편리하다고 생각할 때에만 그 책을 돌려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학생이 자신이 편리한 대로 책을 돌려주거나 말거나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반드시 책을 돌려받아야 한다. 따라서 여학생이 정말 공리주의자라면 아예 그 학생과 협력 같은 것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여학생이 약속에 대하여 의무론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에 이르러 우리는 공리주의가 신뢰를 깨뜨린다는 골치 아픈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공리주의의 이런 문제점에 관하여는 다음 절에서 더 살펴볼 것이다. 공리주의는 자멸적self-defeating이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두 가지 세상이 있다고 가정하자. 하나는 여러 가지 사회적 협력이 잘 이루어져 약속과 계약을 믿을 만한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협력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라 하자. 첫 번째 사회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협력을 바탕으로 폭넓고 다양한 기획들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곳이기에 두 번째 사회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공리주의자들의 사회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믿기 어려운 곳이라면, 공리주의자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는 두 번째 사회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공리주의는 행복의 극대화를 목표로 삼는다고 부르짖는다. 결국, 공리주의는 본래 의도하던 방향으로 나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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