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더욱 영롱하고 커진 수련



 



 

 

1912년 7월 모네의 큰아들 장이 두뇌에 손상을 입었는데 매독에 의해 세균이 머리에까지 침투한 것이었습니다. 항생제가 발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매독은 신에 대한 불경죄로 인식되었으며, 무서운 질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매독은 경우에 따라 사람을 미치게도 만듭니다. 모네는 장을 위해 1913년 지베르니에 집을 사서 블랑슈와 함께 살게 했습니다. 모네는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어 스위스로 두 주 동안 여행했으며, 이것은 그의 마지막 외국 여행이었습니다. 장은 1914년 2월 10일 마흔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임종을 지켜본 70대 노인 모네에게는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으며, 블랑슈가 그를 보살폈습니다.

 

모네가 전과 같이 열정을 가지고 수련을 그리기 시작한 건 1914년 4월부터였습니다. 6월 뒤랑-뤼엘에게 이 작업에 대해 편지에 적었습니다.

 

선생이 아시는 대로 저는 작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진지하게 작업에 임하고 있으며, 새벽 4시에 기상하기도 합니다. 저는 종일 작업에 몰두하는데 저녁이 되면 아주 지쳐버리고 맙니다.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모네는 종일 수련을 그리고 또 그려 수십 번 수백 번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작업에 대한 도취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징집되고, 지베르니에는 모네와 블랑슈만 남았습니다. 그는 대전 기간 동안 <님페아> 장식화 시리즈를 대작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천장 꼭대기에 전등을 단 화실을 손수 지으면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님페아’는 모네가 연못에 키운 변종 백수련을 일컫는 학명입니다. 그의 수련은 말년에 더욱 영롱한 빛을 발했고, 또한 커졌습니다. 1m가 넘는 것은 보통이더니 곧 2m가 넘도록 커졌습니다. 새로 지은 화실의 크기는 가로세로가 23×12m였으므로 그의 수련이 자리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습니다. 1915년 6월 한 그룹의 친구들과 콩쿠르 아카데미 멤버들이 모네를 방문했는데, 그때 예전의 화실에 커다란 그림들이 있었다고 그들이 증언했으므로 모네는 새 화실이 완성되기 전부터 이미 커다란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르보가 모네에게 대작을 그리는 데 얼마나 걸리겠냐고 물었는데, 모네는 5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새 화실이 완공된 건 1916년 봄이었습니다. 그가 이 시기에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의 화실에는 작품이 많지 않았다고 전하는 것으로 봐서 그가 작품을 칼로 찢었거나 불에 태워 없앴던 것 같습니다. 그는 미완성이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없애버렸는데, 자신에게 혹독했던 화가였음 알 수 있습니다.



 

 

 



사진: 1900년 9월의 모네 화실 코너

1899-1900년에 그린 <수련 연못>들이 보입니다.



 

 



사진: 1908년의 모네 화실



 

 



사진: 1917년 11월 11일 일요일에 찍은 모네의 화실 내부



 

 



모네의 <자화상 Self-Portrait>, 1917, 유화

 

 

방대한 수련 시리즈를 그릴 때의 모네의 자화상입니다. 수련을 그린 붓질로 그린 듯이 분방한 붓놀림을 봅니다. 수련을 그릴 때와는 달리 지극히 작은 그림으로 자신의 모습을 기록했지만, 거인의 품격이 나타났습니다. 단지 얼굴만 그린 이 자화상을 클레망소에게 선사했습니다. 클레망소는 이것을 모네가 타계한 이듬해인 1927년 루브르 뮤지엄에 기증했습니다.

 



모네가 말년에 커다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새 화실을 손수 지은 것으로 보아 남은 인생을 수련으로 장식하려고 계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련을 그린 연대와 작품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큰 기대와 정열로 작업에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17년 2월 모네를 방문한 뒤랑-뤼엘은 모네가 새 화실에서 커다란 그림을 그리는 걸 보고 “운반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작품을 팔 수 있을지 나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1918년 8월 조르주 베른하임과 르네 짐페가 방문했을 때 30점 가량의 커다란 수련화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베른하임이 그것들을 모두 사겠다고 하자 모네는 이미 팔렸다고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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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하는 블랙홀Rotating Black Hole


 

 

 

 

뉴질랜드의 수학자 로이 커Roy Kerr(1934~)는 1963년에 회전하는 블랙홀에 대한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정확한 해를 구함으로써 큰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각운동량angular momentum은 보존되어야 하므로 중력으로 인해 별이 안으로 수축될수록 회전속도가 빨라집니다. 회전하는 별에서는 원심력과 중력이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내부의 중성자들이 원형 고리 모양으로 배열됩다. 이런 형태의 블랙홀을 ‘커 블랙홀 Kerr black hole’(운동량을 가지는 회전하는 블랙홀, 이에 반하는 정지한 블랙홀은 슈바르츠실트 블랙홀이라고 함)이라 하는데, 이 안으로 물체가 빨려 들어가면 다른 블랙홀의 경우처럼 처참하게 분해되지 않고 아인슈타인-로젠의 다리를 거쳐 다른 우주로 이동하게 됩니다. 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뒤 동료들에게 외쳤습니다. “이 마술고리를 통과하면 반지름과 질량이 음수인 이상한 우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나 커의 고리를 향해 떠나는 여행은 편도여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커의 고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건지평선을 통과할 때 여행자의 몸에 작용하는 중력은 여행자를 죽일 정도로 강력하진 않지만 여행자의 귀환을 막기에는 충분합니다. 커 블랙홀은 두 개의 사건지평선을 갖고 있는데, 두 번째 사건지평선을 적절히 이용하면 왕복여행이 가능하다고 믿는 물리학자들도 있습니다.



미치오 카쿠는 커 블랙홀을 고층건물의 내부의 승강기에 비유하면서 건물의 각층(각기 다른 우주)을 연결하는 승강기를 아인슈타인-로젠의 다리로 은유했습니다. 다중우주를 고층건물에 비유하여 무한히 많은 층으로 이루어진 초고층건물 속에 실내장식이 제각기인 무한히 많은 방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승강기는 위로 올라가기만 할 뿐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으므로 승강기를 탄 사람들은 사건지평선을 이미 넘어갔기 때문에 일단 승강기를 타고 출발했다면 두 번 다시 로비로 되돌아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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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는 방법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저자 릭 핸슨과 리처드 멘디우스는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요소들을 막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1.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몇 분을 할애하여 소리를 포함한 다른 자극이 무엇이 있는지 파악한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있는 생각도 파악한다. 산만해지는 원인을 받아들임으로서 오히려 이러한 원인을 몰아내기가 더 쉬워진다. 이러한 요소들에 저항하려는 두 번째 화살이 오히려 주의를 더 산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뇌는 일정한 자극에 적응하므로 이내 그 같은 자극을 잊게 된다.

 

2. 또한 완전히 열어놓은 상태에서는 잡념의 원인도 그저 마음을 스쳐 지나가기 쉬워진다. 이는 방문객이 문을 두드릴 때와 비슷하다. 무시하고 있으면 계속 문을 두드리겠지만 문을 열어주면 들어와서 용건을 말하고 대개는 다시 떠나게 마련이다. 어떤 대상이 충분히 의식으로 나오면 거기에 해당하는 신경 활동의 잠재적 패턴도 충분히 드러나게 된다. 이는 신경 연합체가 더 이상 억누르거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다툴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또한 상호 소통을 통해 강력한 사고과정인 작업기억을 형성하게 되는데, 작업기억은 새로운 신경 연합체 형성을 위해 주기적으로 대청소가 된다.

 

3. 잡념이 줄어들었음을 느끼면, 주의 집중의 대상에 다시 초점을 맞춘다. 주의가 산만해지면 다시 마음을 열고 몇 분간 기다린다.

 

4. 또는 잡념이 생기려는 초기 단계에서 잡념을 서서히 몰아내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온다. 이 경우에는 신경 연합체가 자리를 잡기 전에 파괴하는 것에 해당한다.

 

5. 나중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지금은 명상을 하기로 약속한 시간이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도 말해준다. 이를 통해 전전두피질의 하향적 지배 기능이 인지와 사고 영역에 걸쳐 작용하게 된다.

 

6. 마음속을 스쳐가는 모든 것은 뮤지컬과 흡사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배우가 무대 위로 올라와서 잠시 공연을 하고 내려간다. 이내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될 것을 아는데 집착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7. 모든 방법이 실패했다면, 잡념 그 자체를 그 명상 시간의 주의 집중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마음을 위해서는 집중 대상에 깊이 몰입하여 의식을 하나로 모으기가 요구된다. 생각은 극도로 적어지고,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평정심이 점점 커지고 강렬한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이 상태는 수행이 깊은 명상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주파인 감마파와 관련이 있다. 명상이 깊어지면 감마파의 발생 범위와 강도가 모두 더 활성화되어 증가하는데 이는 공간감과 의식의 안정이 증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집중력은 향상시킬 수 있는데, 집중력은 근육과 같아서 사용할수록 강해진다. 마음은 필연적으로 어지러워지기 마련이므로 그럴 때 자신을 비난하지 말고 다음 호흡으로 의식을 돌린다. 이완되어 있으되 방만하지 않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언제든 주의를 호흡에 돌리고 유지할 수 있다. 언제든 환희와 기쁨에 마음을 열 수 있다. 또한 언제든 한마음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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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물 위의 정원: <수련> 시리즈



 



 

 

 

모네의 대성당 회화가 1895년 미국의 보스턴과 시카고, 런던에서 소개되었으며, 파리의 오르세이 뮤지엄에서도 다섯 점이 소개되었습니다. 1876년에 2백 프랑이었던 그의 작품 가격이 1890년대 초에는 3천 프랑, 1895년에는 다섯 배로 뛰어 1만 5천 프랑이 되었고, 1921년에는 20만 프랑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모네의 경제사정은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삶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는 지베르니 집에 딸린 과수원을 다섯 명의 정원사를 고용해 연못으로 개조하여 수련을 심고 연못 중앙에는 일본식 둥근 다리를 놓아 연못을 건널 수 있도록 했습니다. 수련은 파리에서 예술품 중개상 일을 하는 일본인 다마다 하야시로부터 구한 것들입니다.



 

 



사진: 이론식 다리 옆에 있는 클로드 모네



 

 



사진: 다리



 

 





 

 



모네의 <지벨흐니의 모네 정원 Le Jardin de Monet a Giverny>, 1900, 유화, 81-92cm.

 

 

옥타브 미르보의 소개로 알게 된 정원사 페리쿠스 부류가 정원을 가꿨습니다. 모네는 이 정원에서 찾은 많은 모티프로 화려한 자연의 경관을 그렸습니다. 모네는 부류를 신뢰했고, 수완이 좋은 부류는 정성껏 정원을 가꿨습니다. 자연과 물을 좋아한 모네는 정원을 산책하면서 모티프를 찾아냈습니다. 부류는 모네보다 장수했으며, 1949년 11월 아흔두 살 때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는 매년 거르지 않고 오랑제리 뮤지엄으로 가서 모네의 수련화를 감상했습니다. 그는 수련의 연못에 번식하기 쉬운 수초나 조류 그리고 때로는 수련을 건져냈고 낙엽 등의 침전물을 긁어내ai 연못을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그래서 아치형 다리는 거울과도 같은 연못에 말게 반영되었습니다.



 

 



사진: 모네와 귀스타브 제프루아



 

 



사진: 모네와 뒤랑-뤼엘의 가족, 1900년 9월



 

 



사진: 수련 연못



 

 

일본식 다리가 그의 그림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99년부터였습니다. 그는 연못을 “물 위의 정원”이라고 불렀습니다. 1901년에는 근처에 있는 가로세로 4km나 되는 땅을 더 구입하여 정원을 늘리면서 연못도 더욱 확장해서 연못이 네 배로 커졌습니다. 정원에는 대나무와 일본 사과나무 그리고 체리나무도 있었습니다.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꽃이다. 항상, 항상 꽃이 내게는 필요하다.

 

모네가 이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가 그린 많은 꽃 그림을 보아왔습니다. 그는 늙었고, 이제 밖으로 나갈 기력도 없어 갖가지 꽃으로 가꾼 정원에서 마지막 대작에 전념했습니다. 미르보가 지베르니로 그를 자주 방문해 수련이 있는 연못가를 함께 산책했습니다.



 

 



모네의 <수련 연못>, 1899, 유화, 81-100cm.



 

 



모네의 <수련 연못>, 1900, 유화, 89-100cm.



 

 

모네는 정원사들에게 온실을 만들도록 하고 꽃의 종류를 늘렸으며, 잡지와 백과사전을 통해 꽃에 대한 지식을 구했습니다. 그가 스케치한 꽃의 종류와 원예가들에게 주문한 목록만 보아도 꽃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알 수 있습니다. 모네는 원예잡지를 열렬히 애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요청으로 원예가의 주소를 알려 줄 정도였고, 장미의 이름들을 적어주며 자신의 집 앞에 있는 진홍색 덩굴장미의 이름은 ‘바라고’라고 하는 등 꽃에 대한 박식함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파리에는 여러 나라로부터 수입한 각종 희귀한 꽃이 많았습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카메이도 텐진 신사 내부>

 

 

모네의 연못에 만든 다리는 일본 화가의 그림에 나타난 모습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모네는 일본 회화에 관심이 많아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우타마로와 히로시게의 판화를 수년 동안 구입했습니다. 1893년에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최한 일본 컬러판화전을 보고 그는 감동받았습니다. 모네는 1899년부터 수련을 중점적으로 그리기 시작해서 1900년에 최소 20점 그렸으며, 2년 후부터는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캔버스의 사이즈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수련과 꽃을 그렸습니다. 1900년 말 모네의 최근작 25점이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소개되었으며, 절반가량이 연못에 있는 수련화였습니다.



 

 



모네의 <수련과 일본식 다리 Le Bassin aux Nympheas>, 1899, 유화, 90.5-89.7cm.

님페아Nympheas는 모네가 연못에 키운 변종 백수련입니다.



 

 



모네의 <수련 연못 Le Bassin aux Nymoheas>, 1899, 유화, 93-90cm.

 

 

모네는 연못 가장자리에 이젤을 세우고 다섯 가지 색이 찬란한 연못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1899-1900년 그가 주로 그린 것들은 정원과 연못이었습니다.

 



그의 수련화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연못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지베르니로 와서 모네의 연못을 직접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연못사진이 사람들에게 소개된 건 1901년부터였습니다. 모네의 작품은 프랑스 밖에서도 널리 알려졌고, 브뤼셀, 런던, 베를린, 스톡홀름, 드레스덴, 베니스 그리고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 이르기까지 해외 여러 전시장을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지베르니에 프랑스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왔으며, 그들은 성지를 방문하듯 모네의 집과 뜰을 둘러보았습니다. 지베르니로 모네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일본인 콜렉터, 러시아인 세르게이 슈추킨, 존 싱어 사전트, 시슬레, 피사로, 베르테, 말라르메, 로댕, 르누아르, 세잔, 제프루아, 미르보, 클레망소, 자크 에밀 블랑슈, 피에르 보나르 그리고 출판업자 폴 갈리마르, 콩쿠르 아카데미 회원 다수도 있었습니다.

 

모네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은 뤽상부르 뮤지엄이 모네의 작품 여러 점을 사들인 일입니다. 뮤지엄 측은 1896년 카이유보트가 수집한 모네의 그림 8점을 구입했고, 1906년에는 모로 넬라통이 수집한 작품을 추가로 구입했으며, 1907년에는 <루앙 대성당, 갈색의 조화>, 1921년에는 50년 전에 살롱에서 낙선작 <정원의 여인들>을 소장했습니다. <루앙 대성당, 갈색의 조화>와 <정원의 여인들>은 몇 년 후 프랑스 정부가 매입하여 루브르에 영원히 소장했습니다. 외국의 뮤지엄들도 다투어 모네의 작품을 소장했습니다.



 

 



모네의 <님페아 Les Nympheas>, 1903, 유화, 81-99cm.



 

 



모네의 <님페아 구름이 낀 날 Le Bassin aux Nympheas>, 1903, 유화, 74.3-106.7cm.

모네는 일기가 나쁜 날에도 그림을 그렸는데, 자신이 원하는 날씨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데서 자연을 더욱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일기가 나쁜 날 더욱 자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네의 <수련>, 1904, 유화, 90-92cm.



 

 



모네의 <수련>, 1905, 유화, 90-100cm.



 

 



모네의 <수련>, 1905, 유화, 90-100cm.



 

 



모네의 <수련>, 1907, 유화, 92-73cm.



 

 



모네의 <수련>, 1907, 유화, 100-81cm.



 

 

이제 수련은 모네의 특허와도 같은 작품이 되어 어린 학생들도 수련 하면 모네를 말할 정도였습니다. 1904년 이후부터 그의 수련화에서 연못 밖의 배경이 점차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배경은 없고 수련들로만 캔버스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런 작품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수련이 화면에서 그토록 커다랗게 나타난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평론가는 그의 작품을 두고 ‘위아래가 뒤집힌 풍경화 Upside-Down Landscape’라고 했습니다. 1902년 파리에서 활약한 미국인 화가 메리 카삿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모네가 물에 반사된 것들을 시리즈로 그리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1903-4년 이후 모네는 제2의 시리즈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연못의 수면을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고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련을 근접해서 바라보며 또 다른 공간에 떠 있는 모습들로 그렸습니다. 뒤랑-뤼엘은 수련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좋자 모네에게 다음 전시회를 위해 더 그리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모네가 전시회를 자꾸 연기한 까닭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나빠진 시력 때문입니다. 1909년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다시 수련화를 소개할 때는 모네가 직접 전시회 명칭을 ‘수련, 수상풍경 연작’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1903-08년에 그린 수련을 48점 소개했는데 1903년의 것이 1점, 1904년의 것들이 5점, 1905년의 것들이 7점, 1907년의 것들이 21점, 1908년에 그린 것들이 9점이었습니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제프루아를 포함하여 로맹 롤랑, 르미 드 구르몽, 루시앙 데스카브, 로제 마르크스 등 프랑스의 내노라하는 평론가들이 일제히 격찬했습니다.



 

 



뒤랑-뤼엘의 그랜드 살롱 가구



 

 



롬 가 35번지에 소재한 폴 뒤랑-뤼엘의 그랜드 살롱을 모네가 장식했습니다.



 

 

세잔처럼 모네도 말년에 정물화를 그렸는데, 정물화는 화가가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는 장르라서 선호했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 정원에서 수련을 그릴 수 없을 때 집안에서 그릴 수 있는 그림이기도 했습니다. 뒤랑-뤼엘이 자신의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한 패널 그림을 의뢰했을 때 모네는 모두 36점을 그리면서 29점은 꽃을 주제로, 나머지는 과일을 주제로 그렸다. 그는 뒤랑-뤼엘을 위해 20-30점을 더 그린 것 같은데, 그것들은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1908년 가을에 모네는 알리스와 함께 베니스를 여행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여행에서 피로를 느꼈고 68세의 모네는 시력이 아주 나빠졌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베니스에서 많은 스케치를 한 후 집으로 가져와 완성했습니다.



 

 



모네의 <상 조르조 마지오레, 베니스 San Giorigio Marggiore, Venice>, 1908, 유화



 

 

베니스에 대한 추억을 남기고 알리스는 1911년 5월 19일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리스가 죽자 모네는 한동안 작업을 하지 못하고 무력감에 빠졌습니다. 그는 알리스와의 여행을 추억으로 되새기면서 베니스에서 그린 그림 29점을 완성시켜 1912년 5월에 베른하임 주느 화랑에서 소개했습니다. 폴 시냐크는 세부적인 묘사를 생략하고 감성만을 표현했다고 평하면서 모네의 베니스 그림들에 대단히 감동했다고 편지에 적었습니다. 모네는 베니스 풍경들을 완성시킨 후 다시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작업은 전과 같지 못했습니다. 1912년 7월 그는 오른쪽 눈이 실명되고 왼쪽 눈의 시력도 나빠지기 시작한 걸 알았습니다. 전문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수술을 거부했습니다. 얼마 후 오른쪽 눈의 시력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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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도덕


 

 

 

 

지난 10년 동안 철학의 영역에서 권리 기반 도덕이 공리주의 도덕보다 우세했습니다. 여기에는 존 롤스의 『정의론』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영국의 분석법리학자이며 형법학자로서 분석철학의 수법을 분석법리학에 도입하여 법 현실에 충실한 법 이론의 구축을 시도한 H.L.A. 허버트 하트Herbert Lionel Adolphus Hart(1907-92)는 “정치도덕의 핵심에는 공리주의가 자리해야 한다는 낡은 신념”이 오늘날 “진실은 기본적인 인권 원칙의 바탕이 되어야 하며 개인의 기본자유와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새로운 신념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트는 말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철학자들의 막대한 에너지와 엄청난 독창력이 공리주의를 연구하는 일에 집중되었지만, 최근에는 그러한 에너지와 독창력이 기본권을 표현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삶에서도 그렇듯 철학에서도 새로운 신념은 머잖아 낡은 통설이 되기 마련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권리 기반 도덕이 경쟁 상대인 공리주의를 이기고 널리 확산되었지만, 최근에 시민들과 공동체의 과도한 요구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공동체주의 비평가들은 현대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공동선을 정치를 옹호합니다. 그들은 칸트에 대한 헤겔의 반론을 상기시키면서 권리가 선에 우선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하는 그들은 공동의 목표와 목적을 배제하고는 그 어떤 정치제도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공동의 삶을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배제하고는 우리 자신들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공리주의자들은 우리의 다양한 욕구들을 단일한 욕구체계로 융합하지만, 칸트파는 개인의 분리를 주장합니다. 공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아는 단순히 욕구의 총합으로 정의되지만, 칸트파가 주장하는 자아는 욕구와 목적과는 별개의 존재입니다. 요컨대 선택하는 자아입니다. 존 롤스는 말했습니다.

자아는 그것이 지지하는 목적보다 우선한다. 가장 중요한 목적조차도 수많은 가능성들 가운데서 선택되어야 한다.

롤스가 말한 자아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 선택 능력을 가진 자아입니다. 권리 기반 도덕에서 우리가 중립적인 틀, 즉 서로 경쟁하는 갖가지 목표와 목적들 가운데서 사전에 선택하지 않은 중립적 틀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본질적으로 제각기 독립적인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샌델은 자아가 목적보다 우선한다면 권리는 선에 우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권리 기반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 비평가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이렇게 독립적인 존재로, 스스로가 추구하는 목적과는 완전히 분리된 자아를 가진 존재로 생각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역할 중에 정체성이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의해 정의된다면 우리는 그러한 공동체를 특징짓는 목표와 목적에 밀접하게 결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1929-)는 『덕의 상실 After Virtue』에서 “내게 이로운 것은 이러한 역할과 연관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동체는 가족, 도시, 민족, 국가가 될 수 있고, 특정 모임이나 운동도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주의 관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개인의 심리뿐 아니라 도덕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것들은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해주며 우리의 삶에 그들의 도덕을 부과합니다.

샌델은 무연고적 자아와 연고적 자아에 대한 이러한 논쟁이 정치와 관련하여 다른 주장을 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1960년대의 민권운동을 예로 들면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정당화하겠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국가라는 공동의 삶에서 부당하게 제외된 시민들의 자격을 완전히 인정해준 것이었다고 정당화할 것입니다.

공교육의 논쟁에서, 자유주의자들은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목적을 선택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자주적 개인으로 성장시킨다는 바람에서 공교육을 지지하는 반면, 공동체주의자들은 학생들이 공적 과제에 의미 있게 기여하는 바람직한 시민이 되게 하겠다는 희망에서 공교육을 지지합니다.

여타의 쟁점들과 관련해보더라도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의 도덕은 서로 다른 정책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와 자격의 확대를 무조건적인 도덕적, 정치적 진보로 간주합니다. 반면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 프로그램들이 정치를 비교적 작은 형태의 연합에서 보다 포괄적인 연합으로 바꿔놓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자들은 사경제를 옹호하고, 평등주의 자유주의자들은 복지국가를 옹호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기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와 관료국가에서 발생하는 힘의 집중을 우려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충성과 의무, 전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동선의 정치가 선입견과 편협한 태도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선을 기반으로 통치하려는 시도는 전체주의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 공동체주의자들은 편협한 태도는 삶의 형태가 혼란스럽고 근원이 불안정하며 전통이 완성되지 않은 곳에서 가장 창궐한다고 대응합니다. 샌델은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에 동감을 표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말했습니다.

대중사회를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건 그 구성원들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그들을 결집시키고 관계시키며 분리시키는 힘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샌델은 우리의 공공생활이 약해지고 공통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느낌이 희미해질 때, 전체주의적 해법을 제시하는 대중정치에 빠질 위험이 높다고 경고합니다. 공공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런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공공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다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도덕적, 정치적 과제는 바로 우리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샌델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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