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의 소년 시절

 

 


 

 

 

1886년 융은 열한 살이 되어 바젤의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비교적 자유롭고 부유한 환경을 접한 그는 자신의 경제적 빈곤을 깨닫고 “괴롭고 은밀한 부러움”을 느꼈다. 매일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교육을 통해 그의 본성의 다양한 측면들이 여러 방향으로 움직였다. 학교에서 그는 비판에 민감하고 남을 대하는 데 서툴렀으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소심하게 있다가도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는 자기방어적인 태도를 거침없이 보였다. 내적으로는 불안했지만 외적으로는 우월감에 차 자신만만했던 그의 대극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인기가 있지도 않았고 특이했던 융은 관심이 있을 때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경쟁을 싫어했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골치 아픈 아이”였다.
융의 마음속에 자신은 “외톨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의 따분함과 어느 날 우연히 쓰러진 일 때문에 신경증을 앓게 되어 집에 머물며 홀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쓰러지는 순간, “이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처음으로 신경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반년 동안 신경증을 앓았다. 하지만 그는 아들이 간질에 걸려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아버지가 걱정하는 것을 엿듣고 나서는 “아, 그렇다면 공부를 해야겠구나”라는 가책과 깨달음으로 성실하게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두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상상했다. 하나는 18세기의 권세가 노인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구멍 난 양말을 신은 20세기의 가난한 남학생으로, 대부분의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체육을 싫어하고 영감을 받을 때만 그림을 그리며 수학을 “고문”으로 여겼다. 그는 대수 명제 “A=B”가 해와 달이 같다는 말처럼 “완전한 거짓말 또는 사기”라고 생각했다. 그의 머리는 수학의 공식보다는 수학에 대한 그의 “도덕적 의심”을 잠재울 수 있는 더 깊이 있는 설명을 원하고 있었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접한 종교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과 교조주의를 피상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에게 신학 수업은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따분”했으며 “주 예수”는 배우고 나서도 여전히 모호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신이라는 개념은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신에게는 쉽게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움이 있으며 “정확한 개념을 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 고유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열두 살 무렵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결정적인 체험을 하면서 새로운 미지의 영역에 발을 내디뎠다.

 

 


푸른 하늘은 근사했고 해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성당의 지붕이 매끈하게 빛을 발하고 밝은 색 유약을 새로 입힌 타일이 햇빛에 반짝였다. 나는 아름다운 그 광경을 보고 감동하여“ 세상은 아름답고 대성당도 아름다우며 이 모든 것을 창조한 하나님이 푸른 하늘 위의 옥좌에 앉아 계시구나”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이와 함께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나는 멍해지며“ 더 이상 생각하지말아야 해! 끔찍한 어떤 일이 다가온다.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다가가고 싶지도 않은 무언가가 일어날 거야. 왜? 나는 가장 무시무시한 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집으로 오는 먼 길을 걸으며 …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아름다운 대성당과 옥좌에 앉아 계시는 신이 자꾸만 생각났다. 하지만 그 생각은 강한 전기충격을 받은 듯 다시 흩어져 버렸다. 나는“ 생각하지 말자. 생각을 말자!”라고 혼잣말을 반복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당시 나로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금지된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고 필사적으로 그것을 뿌리치려고 애썼다. 그다음 이틀 동안 나는 완전히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으며 어머니는 내게 병이 생겼다고 확신했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그 고통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고 더 이상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대성당과 신을 다시 떠올리는 나를 발견하며 괴로운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그 생각을 거의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항할 기운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공포에 질려 땀에 젖은 채 잠을 쫓아내기 위해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그것이 온다. 심각한 일이야! 나는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미리 생각해야 해. 왜 나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가? 신에게 맹세하건대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를 바라는 자는 누구인가? 그 누가 내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생각하도록 강요하는가? 이런 끔찍한 의지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신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고, 이를 즉시 알아야 한다.” …나는 이 절박한 문제의 당사자가 신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 내가 영원한 지옥살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신이 나의 도덕적 판단력과 종교의 가르침, 심지어 그의 계명을 거역하는 일, 아니면 내가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무언가를 하도록 특이한 명을 내림으로써 내가 순종하는지 시험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 … 나는 반복하여 생각했다 … 당장 지옥불에 뛰어들 태세로 모든 용기를 모아서 그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자 내 앞에 대성당과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신이 세상 위 저 높은 곳의 옥좌에 앉아 있고 그 밑으로 거대한 똥 덩어리가 떨어져서 반짝이는 성당의 지붕을 산산조각내고 벽면을 부숴 버렸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형용할 수 없는 큰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상상과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예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이 내려왔다. 나는 행복감과 감사한 마음에 흐느꼈다. 내가 신의 불변의 명령에 굴복하자 신의 지혜와 선의가 드러난 것이다. 깨달음을 경험한 것 같았다 …그 순간부터 … 나에게 진정한 책임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은 그의 대성당을 왜 더럽혔을까? 그것은 무서운 생각이었다. 신은 무시무시한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그때 흐릿하게 떠올랐다. 나는 어둡고 끔찍한 비밀을 경험했고 그것은 나의 삶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런 경험이나 꿈에서 본 지하 사원의 남근상, 내가 만든 나무 인형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았다 …이런 비밀은 나의 젊은 시절 전체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 그러던 사이 이미 세상과 나의 관계는 일정한 형태로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그때도 나는 외톨이였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거나 보통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들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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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외적으로 적응하기 위한 그의 인격을 제1인격으로 삼았다

 

 

 

 

 

 

주로 학교에서 펼쳐지는 어린 융의 외적인 삶은 그의 본모습과 그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모습 간의 차이를 더욱 벌려 놓으면서 그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융은 외적으로 적응하기 위한 그의 인격을 제1인격으로, 내면의 본성을 제2인격으로 삼았다. 누구에게나 이렇게 대극들이 있긴 하지만 융에게 두 모습의 차이는 더욱 선명하고 의식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만족스러운 태도로 돌 위에 앉아서 자신이 돌인지, 돌이 자신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학교 친구들과 불을 피우면서도 불꽃에 비밀스러운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친구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점차 다른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나와 나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음을 알았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집에서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 장난을 치거나 집에서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새로운 장난을 떠올렸다. 혼자 있을 때도 모든 종류의 상상을 다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변화가 학교 친구들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어 그들이 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거나 내가 생각하는 나의 본모습에서 벗어나도록 강요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속한 더 넓은 세상이 전부 수상해보인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은 나에게 모호하게 보였으며 막연하긴 하지만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 나는 나 자신과 분리되고 있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은 나의 내적인 안정을 위협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사회가 그의 내면에 가하는 위협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남몰래 나무를 깎아 5센티미터 정도의 인형을 만들어 검은색으로 칠하고 모직 코트를 입힌 후 필통을 침대 삼아 그 인형을 눕혔다. 또한 아무도 모르게 매끈하고 길쭉하며 거무스레한 돌멩이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색을 입혀 “영혼의 돌”을 만들었다.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그것을 다락방에 숨겼다.

 

누구도 나의 비밀을 찾아서 파괴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편해졌고 내가 자신과 충돌한다는 고통스러운 느낌이 사라졌다 …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 내 성격을 형성하는 데 매우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 작은 나무 인형과 돌은 의식적이지 않았으며, 유치하긴 했지만 나의 비밀을 형상화한 첫 번째 시도였다. 나는 늘 그것에 빠져 있었으며 그것을 파고들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후에 융은 영혼의 돌에 대한 그의 추억이 호주 원주민이나 아프리카 토착민과 같은 고대 종족의 전통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가 “영원히” 간직하고 있는 그 순간은 유년 시절의 “정점이며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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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를 다스리던 호스로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사산 왕조는 고대에서 종교적인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체계적인 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마련한 유일무이한 국가였다. 사산 왕조만큼 열성적이지는 않았지만 지중해 동부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었다. 콘스탄티노플이 기독교 제국의 수도가 된 후 유럽과 아시아의 오랜 반목이 깊은 종교갈등의 골을 만들어낸 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 제국을 기독교국가로 변모시킨 건 콘스탄티누스 대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현재의 이즈니크Iznik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의 니케아Nicaea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의 바람대로 새로운 신조가 채택되었다. 이 신조가 바로 니케아 신경이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신성이라는 민감한 사안에 대한 토론을 직접 주재하여 만장일치를 이끌어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교회 내에서의 분쟁은 다른 어떤 전쟁이나 갈등보다 위험하고 사악한 것이다.”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날선 긴장관계가 극에 달한 것은 사산 왕조 23대 왕 호스로 2세 집권기였다. 호스로는 619년까지 소아시아・시리아・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까지 점령했다. 예루살렘에서 성십자가를 빼앗아오기도 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서아시아가 일방적으로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 정주한 사산 왕조의 대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시시각각으로 위협을 가했고, 서쪽 해안에는 아바르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슬라브족과 불가리아족이 발칸 반도로 대거 유입되었고,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가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180도로 달라졌다. 이 새 황제의 등장으로 지중해 동부는 유례없는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동로마는 그간 엄청난 영토를 외세에 빼앗긴 탓에 군인들에게조차 급료를 제대로 지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재정난에 허덕이던 헤라클리우스는 교회에서 엄청난 금액을 빌려 해외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호스로를 제물로 삼은 거듭된 원정에서 헤라클리우스는 갖은 고초를 겪는다. 고대판 십자군원정이나 다름없는 이 일련의 침략행위는 기독교인의 광적인 믿음과 이교도에 대한 증오에서 시작된 것이다. 결국 이들은 예루살렘을 신성모독한 대가라며 조로아스터교의 신전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헤라클리우스와 호스로 2세의 피비린내 나는 악연이 동로마의 정치적 분쟁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590년에 사산 왕조를 다스리던 호스로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는 동로마의 황제 마우리키우스에게 의지하여 왕위를 회복을 시도한다. 마우리키우스는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을 헌납받는 조건으로 군대를 빌려
주었고, 호스로는 그 덕에 다시 권좌에 오르게 된다. 잦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마우리키우스에게 사산 왕조와 평화협정을 맺는 것은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일이었다. 마우리키우스가 선대 황제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곤 바닥난 국고와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국경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평화협정을 맺는 데는 성공했지만 재정난을 해결할 길은 요원했다. 여전히 돈에 쪼들리던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발칸 반도에 파병한 군인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배급을 끊어버리기로 결정한다. 병사들에게 알아서 겨울을 나라는 가당치 않은 명령이 하달되었고, 배고픈 군사들은 폭도로 돌변했다. 그러나 폭동이 끝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한 병사들은 마우리키우스를 시해하고 포카스라는 이름의 자신들의 지휘관을 새 황제로 추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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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정복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제국 동부의 골칫덩이 파르티아를 견디지 못한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마침내 파르티아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한 동방원정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출발한 이 원정길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로마의 영토가 최대에 이르렀던 시기인 117년에 트라야누스 황제는 명계의 강을 건넜다. 파르티아 정복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후임 황제는 선왕의 정책을 포기했고 로마는 유프라테스 강 동쪽지역에 대한 불개입의 원칙을 반세기 동안 고수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특히나 파르티아 멸망 후 226년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집권하면서부터 오랜 분쟁의 씨앗은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왕 중 왕”이라 칭했던 사산 왕조의 통치자들은 이후 두 대륙 간 분쟁의 핵으로 떠오른다. 이들은 이란 지역의 종주권을 두고 로마와 지루한 싸움을 벌였고, 로마 멸망 후에는 동로마 제국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황제들을 필두로 지중해 동부를 차지한 로마 제국의 후예들과 말이다.
파르티아인과 사산 왕조는 모두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했다. 하지만 파르티아와 달리 신정국가에 가까웠던 사산 왕조는 이교도에게 개종을 강요했다. 당연히 기독교를 믿는 유럽 대륙과 잦은 충돌을 빚게 되었고 이런 강경한 대응은 결국 십자군원정을 부르고 말았다. 226년 사산 왕조를 건국한 아르다시르 1세는 조로아스터교에 의한 통일을 꾀했으며, 많은 도시들을 건설했다. 사산 왕조 2대 왕 샤푸르 1세는 로마와 두 차례 전쟁을 벌였다. 첫번째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기념상을 이란 남부 낙쉐 로스탐Naqsh-e-Rostam에 건립하기도 했다. 로마와의 첫 번째 전쟁은 싱겁게 끝났다. 로마 황제 필리푸스는 권력을 잡은 후 샤푸르에게 무릎을 꿇고 평화를 애걸했다. 256년 다시 시작된 페르시아와 로마의 두 번째 전쟁에서 기독교박해정책으로 악명을 떨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260년에 생포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샤푸르가 말에 오를 때마다 무릎을 땅에 대고 등을 대어주는 전용 발판이 되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로마를 상대로 두 차례나 압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샤푸르는 로마의 영토를 사산 왕조로 복속시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마니의 급진적인 가르침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마니는 오늘날의 이라크 남부 바스라 부근의 금욕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 태어났으며 25세가 되던 해에 마니교를 창시했다.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마니교의 가르침은 조로아스터교사제들의 분노를 샀다. 인도를 방문해 불교를 접한 경험이 있는 마니는 마니교의 교리에 불교사상도 다수 가미했다. 마니의 이름을 따 마니교라 불린 이 종교는 사실 고대 서남아시아의 종교를 아우르는 단일 종교체계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마니는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샤푸르의 비호 아래 비교적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샤푸르의 사후에 조로아스터교사제들이 다시 사산 왕조의 궁정에서 득세했다. 오늘날의 아야톨라와 비슷한 신분의 대사제였던 카르티르가 새 국왕이 된 바흐람 1세에게 마니의 처형을 종용했고, 마니는 273년 ‘마니의 수난’이라 불리는 26일간의 재판을 받은 뒤 유명을 달리했다.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은 이후 수많은 유대인・기독교도・마니교도・불교도들을 박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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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아국가의 질서는 전통 이슬람교의 샤리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향후 진로를 두고는 누구도 진단을 내릴 수 없겠지만 이집트를 좀 더 안다면 분명한 가닥을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서방 언론의 논평과 기사 수십 건을 읽어 보니 『월스트리트 저널』지에 기고한 브레트 스티븐스의 글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무슬림 형제단이 제멋대로 군다면 이집트는 이란을 모델로 한 수니파의 신정국가가 될 것이다.
알다시피, 이슬람주의의 목표가 아직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스티븐스는 어느 정도 가능성을 점쳐봄직한 가상 시나리오를 그려봤다. 이를테면, “무슬림 형제단의 앞잡이이자, 군대 통수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약한 의회제도는… 특히 주도권을 예상하고 있는 엘바라데이가 형제단의 정치적 연대와 부딪친 이후에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무함마드 엘바라데이는 널리 존경받는 이집트인이자 뉴욕과 빈에서 주로 활동한 전 유엔 관리인데, 리더가 없는 야권의 리더를 자처하기 위해 카이로에 복귀했다. 그는 정치인도 아니고 숱한 경쟁조직을 포섭할 토대도 갖추지 않았다. 민주정치의 구호를 제외하면 그에게는 분명한 아젠다도 없다. 한편, 엘바라데이를 비롯한 야권세력과는 달리, 무슬림 형제단은 추종자와 아젠다를 모두 겸비했다. 조만간 형제단은 이집트에 민주정치를 세우는 데 참여할 것이나— 꼭 그래야 한다—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이 이슬람주의의 아젠다는 아니다. 나는 아얀 히르시 알리의 견해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이집트의 세속 민주정치 세력이 무슬림 형제단보다 훨씬 열세한 이유가 무엇” 이냐며문제를 제기한 데에는 공감한다. 대체로 비이슬람주의 야권은 무바라크를 축출하리는(현재는 성취되었지만) 당장의 목표를 넘어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었으나… 공통적인 이데올로기를 이룩할 접착제는 부족한” 실정이다.

반면 아얀 히르시 알리가 지적한 대로, 무슬림 형제단은 “차기 선거뿐 아니라,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내세가 오기 전까지는 정치적 프로그램과 비전이 있을 것이다. … 샤리아를 확립하려는 무슬림 형제단은… “그들에게 던진 표는 알라 신의 법을 지지하는 표와 같다” 고 주장할 것이며… 유력한 조직이 없는 세속 민주정치 세력은 또 다른 독재자 앞에서는 쉽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이 같은 시나리오를 면하려면 1979년 이란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에는 아야톨라가 아닌 이란 국민이 독재자를 축출했음에도 이슬람주의자들이 공백을 채웠다. 독재정권에서 민주정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개입하긴 했으나 이는 민주정치 제도 수립을 일컫는 민주적인 조치로서 보호를 받아야 했다. 이집트의 민주정치는 민주적 정치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은 선거전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민주화 과정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집트의 미래를 둘러싼 그들의 비전만은 모든 민주정치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저지해야 마땅하다. 무슬림 형제단 사무총장인 후세인 마무드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와의 인터뷰에서 친민주정치 “신이슬람주의” 를 표방하며 이집트의 민주정치 제도를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이 시위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았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형제단이 다원주의적 민족 정부에 참여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히르시 알리의 의혹에 대해서는— “샤리아국가를 건설할 생각이냐” 는 질문에—“예, 이슬람의 샤리아가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니까요. … 샤리아는 국민의 안전을 강조하며… 국가에는 문명화된 행복한 사회를 위한 기틀을 마련해줄 겁니다. … 이집트는 무슬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국가로… 무슬림이 사는 도리를 규정한 샤리아를 두고 있습니다. … 이집트는 종교를 탈피한 국가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역사와 문명을 거스르는 작태이기 때문” 이라고 대꾸했다. 이 같은 견해는— 6장에서도 언급하겠지만—민주정치와 대립될 뿐 아니라, 이집트의 역사 및 전통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슬람주의가 강요하려는 샤리아국가의 질서는 전통 이슬람교의 샤리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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