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티아 정복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제국 동부의 골칫덩이 파르티아를 견디지 못한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마침내 파르티아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한 동방원정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출발한 이 원정길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로마의 영토가 최대에 이르렀던 시기인 117년에 트라야누스 황제는 명계의 강을 건넜다. 파르티아 정복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후임 황제는 선왕의 정책을 포기했고 로마는 유프라테스 강 동쪽지역에 대한 불개입의 원칙을 반세기 동안 고수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특히나 파르티아 멸망 후 226년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집권하면서부터 오랜 분쟁의 씨앗은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왕 중 왕”이라 칭했던 사산 왕조의 통치자들은 이후 두 대륙 간 분쟁의 핵으로 떠오른다. 이들은 이란 지역의 종주권을 두고 로마와 지루한 싸움을 벌였고, 로마 멸망 후에는 동로마 제국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황제들을 필두로 지중해 동부를 차지한 로마 제국의 후예들과 말이다.
파르티아인과 사산 왕조는 모두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했다. 하지만 파르티아와 달리 신정국가에 가까웠던 사산 왕조는 이교도에게 개종을 강요했다. 당연히 기독교를 믿는 유럽 대륙과 잦은 충돌을 빚게 되었고 이런 강경한 대응은 결국 십자군원정을 부르고 말았다. 226년 사산 왕조를 건국한 아르다시르 1세는 조로아스터교에 의한 통일을 꾀했으며, 많은 도시들을 건설했다. 사산 왕조 2대 왕 샤푸르 1세는 로마와 두 차례 전쟁을 벌였다. 첫번째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기념상을 이란 남부 낙쉐 로스탐Naqsh-e-Rostam에 건립하기도 했다. 로마와의 첫 번째 전쟁은 싱겁게 끝났다. 로마 황제 필리푸스는 권력을 잡은 후 샤푸르에게 무릎을 꿇고 평화를 애걸했다. 256년 다시 시작된 페르시아와 로마의 두 번째 전쟁에서 기독교박해정책으로 악명을 떨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260년에 생포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샤푸르가 말에 오를 때마다 무릎을 땅에 대고 등을 대어주는 전용 발판이 되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로마를 상대로 두 차례나 압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샤푸르는 로마의 영토를 사산 왕조로 복속시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마니의 급진적인 가르침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마니는 오늘날의 이라크 남부 바스라 부근의 금욕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 태어났으며 25세가 되던 해에 마니교를 창시했다.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마니교의 가르침은 조로아스터교사제들의 분노를 샀다. 인도를 방문해 불교를 접한 경험이 있는 마니는 마니교의 교리에 불교사상도 다수 가미했다. 마니의 이름을 따 마니교라 불린 이 종교는 사실 고대 서남아시아의 종교를 아우르는 단일 종교체계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마니는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샤푸르의 비호 아래 비교적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샤푸르의 사후에 조로아스터교사제들이 다시 사산 왕조의 궁정에서 득세했다. 오늘날의 아야톨라와 비슷한 신분의 대사제였던 카르티르가 새 국왕이 된 바흐람 1세에게 마니의 처형을 종용했고, 마니는 273년 ‘마니의 수난’이라 불리는 26일간의 재판을 받은 뒤 유명을 달리했다.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은 이후 수많은 유대인・기독교도・마니교도・불교도들을 박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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