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왕조를 다스리던 호스로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사산 왕조는 고대에서 종교적인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체계적인 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마련한 유일무이한 국가였다. 사산 왕조만큼 열성적이지는 않았지만 지중해 동부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었다. 콘스탄티노플이 기독교 제국의 수도가 된 후 유럽과 아시아의 오랜 반목이 깊은 종교갈등의 골을 만들어낸 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 제국을 기독교국가로 변모시킨 건 콘스탄티누스 대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현재의 이즈니크Iznik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의 니케아Nicaea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의 바람대로 새로운 신조가 채택되었다. 이 신조가 바로 니케아 신경이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신성이라는 민감한 사안에 대한 토론을 직접 주재하여 만장일치를 이끌어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교회 내에서의 분쟁은 다른 어떤 전쟁이나 갈등보다 위험하고 사악한 것이다.”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날선 긴장관계가 극에 달한 것은 사산 왕조 23대 왕 호스로 2세 집권기였다. 호스로는 619년까지 소아시아・시리아・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까지 점령했다. 예루살렘에서 성십자가를 빼앗아오기도 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서아시아가 일방적으로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 정주한 사산 왕조의 대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시시각각으로 위협을 가했고, 서쪽 해안에는 아바르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슬라브족과 불가리아족이 발칸 반도로 대거 유입되었고,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가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180도로 달라졌다. 이 새 황제의 등장으로 지중해 동부는 유례없는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동로마는 그간 엄청난 영토를 외세에 빼앗긴 탓에 군인들에게조차 급료를 제대로 지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재정난에 허덕이던 헤라클리우스는 교회에서 엄청난 금액을 빌려 해외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호스로를 제물로 삼은 거듭된 원정에서 헤라클리우스는 갖은 고초를 겪는다. 고대판 십자군원정이나 다름없는 이 일련의 침략행위는 기독교인의 광적인 믿음과 이교도에 대한 증오에서 시작된 것이다. 결국 이들은 예루살렘을 신성모독한 대가라며 조로아스터교의 신전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헤라클리우스와 호스로 2세의 피비린내 나는 악연이 동로마의 정치적 분쟁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590년에 사산 왕조를 다스리던 호스로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는 동로마의 황제 마우리키우스에게 의지하여 왕위를 회복을 시도한다. 마우리키우스는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을 헌납받는 조건으로 군대를 빌려
주었고, 호스로는 그 덕에 다시 권좌에 오르게 된다. 잦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마우리키우스에게 사산 왕조와 평화협정을 맺는 것은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일이었다. 마우리키우스가 선대 황제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곤 바닥난 국고와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국경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평화협정을 맺는 데는 성공했지만 재정난을 해결할 길은 요원했다. 여전히 돈에 쪼들리던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발칸 반도에 파병한 군인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배급을 끊어버리기로 결정한다. 병사들에게 알아서 겨울을 나라는 가당치 않은 명령이 하달되었고, 배고픈 군사들은 폭도로 돌변했다. 그러나 폭동이 끝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한 병사들은 마우리키우스를 시해하고 포카스라는 이름의 자신들의 지휘관을 새 황제로 추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