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는 미국인이 돈에 미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3월 9일 슈슈니크의 연설이 있고 얼마 뒤 미국이 프로이트를 돕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왔습니다. 프로이트는 1909년 융, 페렌치와 함께 뉴욕에 도착한 후 말했습니다. “우린 지금 이 사람들한테 역병을 옮기는 거야. 그런데도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어.” 프로이트는 미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처음으로 정신분석학의 성공을 맛보았지만, 미국에 대한 혐오감을 떨쳐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돈에 미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우아하지도 않고, 신비롭지도 않으며, 인생의 고차원적 쾌락을 향유할 능력도 없는 멍청이 유물론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전능한 달러를 숭배하고 달러를 벌기 위해 지독한 경쟁을 일삼는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정신분석학회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미국보다 정신분석학에 호의적이지 않다고 지적했을 때, 프로이트는 미국인은 사실상 정신분석학에 대해 아는 게 없다며 자신의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치가 빈을 위협하자 미국은 프로이트를 돕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3월 10일, 빈 주재 미국 대사관의 공사 존 윌리John Wiley가 프로이트를 방문했습니다. 윌리는 프로이트와 가족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윌리는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윌리엄 불리트William Bullitt의 절친한 동료였습니다.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세도가 출신으로 무척 예의 바른 불리트는 자신이 프로이트의 특별한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불리트는 1920년대 중반에 자살 충동을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 프로이트를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1930년에 프로젝트를 들고 다시 프로이트를 방문하고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관한 책을 프로이트와 공동 집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프로이트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프로이트에게 이런 식으로 함께 일하자며 접근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미국인이었습니다. 『시카고 트리뷴 Chicago Tribune』의 발행인은 프로이트에게 살인자 레오폴드Leopold와 로엡Loeb의 정신분석을 의뢰하면서 시카고로 오는 데 드는 경비 2만5천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제작자 새뮤얼 골드윈Damuel Goldwyn은 프로이트가 할리우드로 와서 영화 제작에 협력한다면 10만 달러를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언했습니다. 프로이트는 두 제안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불리트를 좋아한 그는 그의 제안만큼은 받아들였고, 윌슨에 관한 책은 제때에 출간되었습니다.

윌 리가 방문한 다음날인 1938년 3월 11일 금요일, 프로이트는 라디오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의 수상 슈슈니크가 국민 투표를 취소하고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슈슈니크는 대량 학살을 피하기 위해 독일 부대가 국경선을 넘어와도 오스트리아 군대는 대항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슈슈니크는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전 이제 오스트리아의 국정에서 물러납니다. 신이 오스트리아를 보호하시기를!

연설이 끝나자마자 빈에는 다시금 함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단일 국민, 단일 국가, 단일 지도자!” 현편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유대인에게 죽음을!” 미국인 기자 윌리엄 셔러는 젊은이들이 유대인 상점의 진열장에 포장용 벽돌을 던지는 걸 목격했습니다. 군중은 달걀 세례를 퍼부었고, 창문이 깨져 유리가 거리에 떨어지는 걸 보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여러 구호가 뒤섞인 빈의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을 타도하라! 하일 히틀러! 하일 히틀러! 지그 하일! 유대인의 씨를 말리자! 슈슈니크를 교수형에 처하라!

만자 십자장 완장을 찬 나치 당원들이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베를린에 최고사령부를 둔 나치는 오스트리아 정부에 새로 투입된 동료들에게 독일이 개입해서 질서를 바로잡도록 형식적 요청을 할 때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날 오후 9시 10분경, 독일의 원조를 요청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습니다. 10시 45분에는 히틀러의 대리인으로 이탈리아에 갔던 헤센의 필립 왕자가 총통에게 전화를 걸어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1883-1945)가 침략을 승인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3월 12일 오전 5시 30분, 바이에른Bayern 국경선에 집합한 독일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오스트리아로 들어갔습니다.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합병 안슐루스Anschluss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신문에는 침략을 정당화하는 히틀러의 선언문이 보도되었습니다. 선언문은 “독일-오스트리아의 국가사회주의 만세!”라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오스트리아로 입성한 나치 부대는 엄청난 환영 인파를 보았습니다. 거리에 몰려든 군중은 나치 부대가 가는 길에 꽃을 던졌습니다. 부대는 꽃에 눈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안경을 착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뮌헨에 있던 히틀러는 메르세데스 오프카를 타고 SS 부대의 보디가드를 대동한 채 오스트리아 국경선을 향했습니다. 오후 4시 10분 히틀러는 자신이 태어난 브라우나우Braunau에 도착했습니다.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네 시간 뒤 히틀러는 린츠에 있었습니다. 교회 종이 울리고 군중이 시청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구호를 외쳤습니다. “단일 국민! 단일 국가! 단일 지도자! 단일 국민! 단일 국가! 단일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시청 발코니에서 외쳤습니다. “국민을 분열시키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히틀러는 부모님의 무덤에 꽃을 놓았습니다. 고향을 방문한 그는 미래를 꿈꾸기 위해 호텔로 향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인이 독일에 권력을 이양하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동의해준 것으로 히틀러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인은 히틀러가 자신들의 구조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 경례했습니다. 그들은 히틀러가 자신들을 가난과 유약함에서 구제하고 유대인에게서 해방시킬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날 밤 호텔에서 히틀러는 동맹국 이상의 것을 기대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전체를 합병하여 그 나라의 자원과 국민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미국인 기자 셔러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오늘 아침의 빈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만자 십자장 깃발이 거의 모든 집 앞에 펄럭이고 있다. 어디서 그렇게 빨리 구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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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쿼크Top Quark의 발견


 

 

 

 

입자물리학에서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입자 빔을 가속・충돌시켜 다른 물질을 만드는 입자가속기실험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고에너지입자충돌기high-energy particle collider에서는 가속시킨 입자 빔이 같은 식으로 가속된 반입자 빔과 말 그대로 정면충돌하는데, 이때 엄청난 에너지가 이 빔들이 충돌하는 작은 영역에서 발생한다. 이 에너지가 때때로 자연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무거운 입자로 바뀐다. 고에너지입자충돌기는 빅뱅 이후 가장 무거운 입자들이 생성되는 유일한 장소이다. 충돌기에서는 아인슈타인의 E=mc2에 따라 충분한 에너지만 있으면 원리적으로 어떤 종류의 입자-반입자쌍도 생성될 수 있다.



톱쿼크가 발견된 과정은 가속기로 입자를 찾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톱쿼크는 원자의 구성요소도, 기존 물질의 일부도 아니지만 톱쿼크가 없다면 표준모형의 정합성이 깨지기 때문에 1970년 이후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톱쿼크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표준모형에서 두 번째로 무거운 입자인 보텀쿼크(양성자 질량의 5배)는 1977년에 발견되었다. 톱쿼크는 1995년에야 발견되었는데 이것의 질량은 양성자 질량의 거의 200배에 달했다.



톱쿼크를 만들어낸 충돌기는 미국 시카고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일리노아주 버테이비아Batavia에 있는 페르미연구소(1972년에 설립)의 테바트론Tevatron이다. 테바트론이란 가속기의 명칭은 양성자와 반양성자를 1테라전자볼트의 에너지로 가속시키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1테라전자볼트는 1천기가전자볼트에 해당하며 이전의 어떤 가속기에서도 만들어내지 못한 최고의 에너지이다. 테바트론에서는 강력한 에너지를 띤 양성자, 반양성자의 빔이 고리모양으로 회전하면서 3.5마이크로초(백만분의 3.5초) 간격으로 두 곳의 충돌지점에서 부딪힌다. 두 실험 팀이 입자 빔과 반입자 빔의 충돌지점 두 곳에 탐지기를 설치하고 물리현상을 관측했다. 이 실험 중 하나에는 CDF(Collider Detecter at Fermilab, 페르미연구소 충돌탐지기), 다른 하나에는 D0(탐지기가 설치된 충돌지점을 뜻한다)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1990년대 초반까지 두 실험 팀의 목표는 톱쿼크였다. 두 팀 모두 톱쿼크를 발견한 첫 번째 팀이 되기를 바랐다.



톱쿼크는 보텀쿼크와 W보존(약력을 매개하는 대전된 게이지보존)으로 붕괴한다. 그리고 W보존은 경입자나 쿼크로 붕괴한다. 그래서 톱쿼크를 발견하는 실험은 다른 쿼크나 경입자와 함께 있는 보텀쿼크를 찾는 일이 된다. 톱쿼크의 발견은 D0와 CDF 공동의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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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민족이 고통 받고 그들의 이념이 무시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1938년 2월 20일, 프로이트가 수술을 받은 다음날 히틀러는 독일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문제에 대한 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연설은 독일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도 방송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가 자국 내 독일인들을 계속 학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독일 민족이 고통 받고 그들의 이념이 무시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연설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독일을 억압하는 이들에 대한 히틀러의 분노는 더욱 거세어졌습니다. 연설이 끝난 뒤 오스트리아의 나치 대원들은 빈 거리에 집결하여 일제히 외쳤습니다. “지크 하일! 지크 하일! 하일 히틀러! 하일 히틀러! 승리여 만세! 승리여, 만세! 만세 히틀러! 만세 히틀러!

소규모 단체에 불과하던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1930년대의 엄청난 경기 침체와 디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세를 확장했습니다. 1933년 7월, 기독교 사회주의자 총리 엘겔버트 돌푸스Engelbert Dolfuss(1892-1934)는 나치를 불법 단체로 명명했지만, 그 무렵 나치는 상인과 퇴역군인, 최근 대학을 졸업한 사람, 다수의 경찰관들까지 7천 명에 이르는 당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나치는 反(반)유대주의, 반성직주의, 반가톨릭주의, 독일과 합병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한데 묶여 있었습니다. 나치 금지령이 내려진 뒤에도 불과 몇 달 사이에 2만 명이 당원으로 등록했습니다.

1934년 여름, 나치 SS 대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단체는 오스트리아 군복 차림으로 총리 관저를 침입했습니다. 그들은 돌푸스 총리를 납치하고,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한 뒤 오스트리아 내각이 모두 물러났다고 전국에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당원들 대부분이 반란에 반대했습니다. 이를 승인한 히틀러는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말했습니다. 돌푸스 총리를 살해한 이들은 빈 법정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살해에 공모한 몇몇은 투옥되었습니다. 한동안 빈에서 나치의 만행이 잠잠해졌습니다.

베르히테스가덴Berchtesgaden 회담에서 히틀러가 침략 가능성으로 위협을 가하자 양순한 쿠르트 폰 슈슈니크는 투표를 통해 오스트리아 국민이 독일과 결합할 것이지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이 이길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나치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매달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슈슈니크는 3월 13일 일요일에 국민 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히틀러의 요구에 따랐지만, 거기엔 반전이 있었습니다. 국민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선 스물네 살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의 나치 당원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민 투표는 오스트리아의 독립 쪽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슈슈니크의 연설은 매우 역동적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우국지사들은 빈 곳곳을 돌며 일체히 외쳤습니다. “슈슈니크 만세! 자유 만세! 일요일은 선거일입니다. 모두 찬성 표를 던집시다!” 저녁 무렵, 니치당원들이 거리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4열 횡대로 빈 중심가를 가로지르며 구호를 외쳤습니다. “단일 국민! 단일 국가! 단일 지도자!” 곧 난투극이 벌어졌고, 나치의 편에 선 경찰이 끼어들어 애국주의자들을 구타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는 폭풍우처럼 몰아닥치는 기병들에게 장악되었습니다.

금요일 새벽 오전 5시 30분, 슈슈니크는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국경에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또 독일 부대가 뮌헨에 결집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10시에 베를린에서 슈슈니크에게 보내는 요구사항이 도착했습니다. 수상 직에서 사퇴하고 나치당원 한 사람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며, 국민 투표를 최소한 2주 미루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슈슈니크는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1869-1940)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공교롭게도 체임벌린은 다우닝 가에서 독일 대사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의 취임을 축하하는 오찬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빈에서 온 소식을 접한 리벤트로프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오스트리아의 위기 상황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그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말했습니다. 체임벌린은 자신과 영국이 해야 할 일을 결정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드 핼리팩스Lord Halifax 상원의원을 시켜 슈슈니크에게 전보를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성명서는 “영국 정부는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로 시작되었습니다. 리벤트로프는 오후 늦게까지 머무르며 독일에서 일이 잘 진행되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오찬에 함께 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1874-1965)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리벤트로프의 무리가 좀처럼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아 우리는 대부분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들은 아마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훗날 교수형에 처해진 리벤트로프를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다.

영국과 프랑스, 그 밖의 나라들에서 도움을 받지 못한 슈슈니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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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1차 세계대전 때에 조국으로 돌아온 히틀러는 독일군에서 파견병 역할을 맡고 용감무쌍하게 임무를 수행하여 철십자 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히틀러는 뮌헨에 소재한 당원의 수가 손으로 꼽을 만한 소규모 정당에 합류하여 그 정당을 강력한 동맹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923년에 일격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투옥되었습니다. 투옥된 동안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과 독일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제시한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에는 오스트리아의 하급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부터 빈 시절의 고난, 정치적 이념이 자리 잡힌 청소년기, 정치활동을 시작한 청년기, 활발히 투쟁을 벌이던 전성기까지 모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는 정책적으로 독일계 민족을 소외시켜 그들의 언어조차 지켜 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독일인의 통일 민족국가에 대한 염원이 어릴 때부터 타오른 히틀러는 민족에 대한 광적인 집념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10년 동안 프로이트는 엄청난 활약을 했으며, 틈틈이 집필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히틀러는 독일의 걸출한 인사로 부각되었습니다. 그가 가장 갈망한 건 오스트리아였습니다. 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1938년에 수천 명에 이르는 군사를 이끌고 자신에게 비참함과 굴욕감을 안겨준 빈으로 향했습니다. 『나의 투쟁』에 기록한 것처럼 그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빈을 완전히 파괴하고 무에서 새로 건설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1938년 겨울, 나치는 프로이트를 격렬하게 증오했습니다. 1933년 독일의 야외집회에서 나치는 프로이트의 책을 태우면서 집행자가 외쳤습니다. “본능적 삶의 영광을 파괴하고 영혼에 저항한다. 인간 영혼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글을 불 속에 던진다!” 자신의 책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절망스러울 정도로 노쇠한 여든한 살 등이 굽은 프로이트는 말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만드는 진보란 과연 무엇인가. 중세였다면 그들은 날 화형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나의 책을 태우는 걸로 만족해한다.” 하얗게 센 턱수염이 양 볼에 달라붙었고, 창백해진 피부에 수차례에 걸친 암 수술로 자리를 벗어난 치아와 뼈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턱에 넣은 인공 보철물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프로이트는 무기력한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올빼미 같은 인상을 주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침략과 프로이트 말년 2년 동안에 일어난 드라마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의 수상 쿠르트 폰 슈슈니크Kurt von Schuschnigg(1897-1977)를 소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국방장관과 외무장관을 겸임한 슈슈니크는 ‘애국전선’의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히틀러로부터 합병을 강요당하자 국민투표로 독립을 유지하려는 저항을 했으며, 이에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로 침공하여 합방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슈슈니크는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7년 동안 구금되고 1945년 5월 오스트리아의 연합군 점령으로 석방됩니다. 그는 1948년 미국에 이주하여 1948년부터 1968년까지 세인트루이스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게 됩니다. 냈다.

빈을 침공한 히틀러는 슈슈니크에게 나치당을 공인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치를 오스트리아 정부에 입각시키고 두 나라가 군사협정을 맺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한편 프로이트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는데, 1938년 1월 22일 그는 15년 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암 수술을 다시 받아야 했습니다. 턱에서 시작된 종양이 어느새 눈구멍까지 접근해 손도 대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프로이트는 이틀 정도 요양소에 머무르다가 통증이 너무 심해 주금이라도 편히 지내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암이 흡연의 결과란 사실을 알았지만, 담배를 끊으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시가를 사랑한 그는 하루에 20개비까지 피웠습니다.

혹독했던 1월의 수술 뒤 2월 19일에 또 다른 수술이 이어졌습니다. 수술을 집도한 한스 피흐러Hans Pichler는 암 부위에 위치한 의심스러운 혹을 제거했습니다. 다행히 새로 자라난 종양은 음성이었습니다. 수술은 이전의 수술보다 덜 고통스러웠지만, 이미 쇠약해진 프로이트로서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프로이트는 50년 가까이 아내와 처제, 딸과 함께 살아온 베르크가세Berggasse 19번지의 아파트 2층에서 지내며 회복을 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신분석을 위해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처럼 그는 많은 시간을 긴 의자에 누워서 보냈습니다. 그는 시가를 피우면서 정지된 시선을 유지한 채 환자의 말을 듣고 또 들어야 했다고 슬픔에 잠긴 듯이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날 빤히 쳐다보는 걸 참을 수 없었어. 하루에 여덟 시간, 아니 그 이상을 말이야. 긴 의자는 환자들을 위해 만든 거였어.

관습에 쉽게 매혹된 프로이트는 세속적인 성공과 돈, 명성, 권위 있는 평판을 얻는 것, 나무랄 데 없는 부르주아 가정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자식을 정신분석학 이론에 따라 키웠느냐는 질문에 프로이트는 자기 아이들을 보통 아이들처럼 키웠으며, 특별한 양육방식이 있는 건 아니라고 투덜거리며 대답했습니다. 그는 평생 전형적인 부르주아로 살았습니다. 옷차림이 늘 말쑥했으며, 머리와 턱수염은 단정했고, 채무관계와 시간 역속을 오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에로틱한 삶은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처제 민나 베르나이스Minna Bernays와 정사를 벌였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 추측일 뿐입니다.

프로이트는 부인했지만, 그는 상과 명예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지만, 종종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한다고 말했지만, 사진 속의 그는 매우 지적이며, 침착하고, 권위적이며, 당당한 인상을 줍니다. 그는 여느 시인처럼 자신의 생각에 대범했을 뿐만 아니라 명쾌하고, 예리하며, 눈에 띌 정도로 자기비판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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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

독일 국경 근처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브라우나우에서 오스트리아의 하급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는 1903년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905년 실업학교를 퇴학하고 미술 대학에 진학했지만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907년 18세 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물려받은 유산과 그림엽서 등을 팔며 생활했습니다. 

1909년 빈에서 활동한 유대인이며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는 53세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프로이트보다 어리지만 훗날 인류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히틀러는 1909년 늦가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빈으로 왔습니다. 그는 작은 아파트에서 친구와 함께 생활하면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상속받은 돈이 많지 않아 가능한 한 적게 먹고 약소한 임대료를 지불하며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오페라를 관람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빈에 와서 실망한 건 국립미술학교에 두 번 입학하려고 했지만, 낙방한 것입니다. 빈으로 향하기 전 히틀러는 스테파니Stefanie란 여자를 짝사랑했습니다. 그는 고향 린츠Linz에 갔을 때 산책하다가 스테파니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채 그녀만을 생각했습니다. 퇴폐적인 빈에 와서 그는 도덕적 삶을 견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창녀를 멀리 했고, 자신을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여자들과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오페라 공연장에서 그를 발견한 여자들이 연락을 바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자신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히틀러는 쉽게 화를 내거나 비탄에 빠져 우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는 동물을 사랑했으며, 동물에게 잔인한 행위를 하는 걸 참지 못했습니다. 그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담배가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시인의 자질이 있는 인도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빈에서 함께 살던 친구가 고향에 갔다 왔을 때, 그는 옮긴 집의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허름한 아파트를 떠난 뒤였습니다.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외로움에 빠졌습니다. 돈도 바닥이 났습니다. 그는 한동안 거리를 전전하며 남의 집 문 앞이나 공원 벤치에서 잤습니다. 그는 구걸하며 연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침내 그는 수도원만큼이나 엄격하게 운영되던 보호소에 거처를 마련했으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까지 단순한 삶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제공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그림엽서를 거리 매점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히틀러는 엄청난 양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보호소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휴게실에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해, 장차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위상을 높일 독일의 운명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때때로 동료 거주자 하나가 그의 코트를 의자에 몰래 묶어놓고 정치에 관한 질문을 불쑥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가슴이 요동치는 이 젊은이는 벌떡 일어나 의자를 질질 끌고 다니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를 본 사람들은 히틀러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세상을 뒤흔들 독재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히틀러가 노숙하던 1909년 가을, 프로이트는 기나긴 은둔의 세월을 마감하고 첫 저서 『꿈의 해석 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히틀러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런던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자아의 기저를 이루는 본능적 충동인 이드id(프로이트는 독일어로 Es라고 했음)와 자각하는 의식의 갈등 관계를 이해하고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이전의 정신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습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드는 본능적 에너지, 리비도libido의 저장고이며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함을 피하는 쾌감원리만을 따릅니다. 거기에는 도덕도 선악도 없고, 논리적 사고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관념도 없고 무의식적입니다. 어린이의 정신은 거의 전부 이드로 이루어졌는데, 뒤에 이 이드의 일부가 외계와 접촉 변화하여 자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외로움과 혼란에 빠진 채 빈 거리를 방황하던 1909년 가을, 프로이트는 미국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귀국했습니다. 가장 아끼는 제자 카를 융Carl Jung(1875-1961)과 산도르 페렌치Sándor Ferenczi(1873-1933), 어니스트 존스Ernst Jones를 대동한 프로이트는 일주일 동안 누욕 시가를 관광한 뒤 매사추세츠 주의 워스터Worcester로 향했습니다. 프로이트는 클라크 대학에서 미국의 걸출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와 소련 태생의 미국의 무정부주의자 에마 골드만Emma Goldman(1869-1940) 등을 앞에 두고 연설했습니다.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독일의 심리학자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1832-1920)와 더불어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는 1855년에 유럽으로 기서 학창시절을 보낸 후 1860년 돌아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1872년 서른 살의 나이로 모교의 강사가 되어 생리학을 가르치다가 1875년에 심리학 강의를 하기 시작했고, 그때 미국 최초로 실험적 심리학 연구소를 개설했습니다.

소련에서 극장 지배인의 딸로 태어난 에마 골드만은 188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활동을 하다 1893년 뉴욕에서 체포되어 1년간 투옥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1916년에 산아제한 운동을 하다 투옥되었으며, 1917년에는 반전활동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19년에 소련으로 강제 송환되었지만, 소련 정부에도 반대했으며, 그 후 영국,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살았습니다. 에마는 1936년 스페인 내란이 발발하자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을 도와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 다녀온 뒤 프로이트가 이전에 하던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는 무의식이나 욕망의 근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특히 노이로제와 꿈, 예술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성적 충동과 공격 본능을 인간 행동의 근간이라고 보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권위의 문제, 인간 심리를 중앙에서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초자아superego 혹은 상위자아의 중재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자아는 상위자아 외에도 인격의 사회가치, 양심, 이상의 영역 등을 말합니다. 대부분 무의식적인 초자아의 기능으로서 개인의 행동에 대해 내부로부터 선악의 판단을 내려 그 행동을 촉진하거나 제약하며, 또한 행동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기도 하고, ‘나쁜’ 행동을 했을 경우 죄악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착한’ 행동을 했을 경우 자존심을 높여주기도 합니다. 유아기에는 선악이 부모나 주위 사람들의 판단에 맡겨지지만, 이러한 가치가 점차 본인 자신 속으로 도입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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