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
독일 국경 근처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브라우나우에서 오스트리아의 하급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는 1903년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905년 실업학교를 퇴학하고 미술 대학에 진학했지만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907년 18세 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물려받은 유산과 그림엽서 등을 팔며 생활했습니다.
1909년 빈에서 활동한 유대인이며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는 53세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프로이트보다 어리지만 훗날 인류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히틀러는 1909년 늦가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빈으로 왔습니다. 그는 작은 아파트에서 친구와 함께 생활하면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상속받은 돈이 많지 않아 가능한 한 적게 먹고 약소한 임대료를 지불하며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오페라를 관람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빈에 와서 실망한 건 국립미술학교에 두 번 입학하려고 했지만, 낙방한 것입니다. 빈으로 향하기 전 히틀러는 스테파니Stefanie란 여자를 짝사랑했습니다. 그는 고향 린츠Linz에 갔을 때 산책하다가 스테파니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채 그녀만을 생각했습니다. 퇴폐적인 빈에 와서 그는 도덕적 삶을 견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창녀를 멀리 했고, 자신을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여자들과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오페라 공연장에서 그를 발견한 여자들이 연락을 바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자신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히틀러는 쉽게 화를 내거나 비탄에 빠져 우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는 동물을 사랑했으며, 동물에게 잔인한 행위를 하는 걸 참지 못했습니다. 그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담배가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시인의 자질이 있는 인도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빈에서 함께 살던 친구가 고향에 갔다 왔을 때, 그는 옮긴 집의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허름한 아파트를 떠난 뒤였습니다.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외로움에 빠졌습니다. 돈도 바닥이 났습니다. 그는 한동안 거리를 전전하며 남의 집 문 앞이나 공원 벤치에서 잤습니다. 그는 구걸하며 연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침내 그는 수도원만큼이나 엄격하게 운영되던 보호소에 거처를 마련했으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까지 단순한 삶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제공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그림엽서를 거리 매점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히틀러는 엄청난 양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보호소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휴게실에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해, 장차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위상을 높일 독일의 운명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때때로 동료 거주자 하나가 그의 코트를 의자에 몰래 묶어놓고 정치에 관한 질문을 불쑥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가슴이 요동치는 이 젊은이는 벌떡 일어나 의자를 질질 끌고 다니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를 본 사람들은 히틀러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세상을 뒤흔들 독재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히틀러가 노숙하던 1909년 가을, 프로이트는 기나긴 은둔의 세월을 마감하고 첫 저서 『꿈의 해석 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히틀러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런던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자아의 기저를 이루는 본능적 충동인 이드id(프로이트는 독일어로 Es라고 했음)와 자각하는 의식의 갈등 관계를 이해하고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이전의 정신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습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드는 본능적 에너지, 리비도libido의 저장고이며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함을 피하는 쾌감원리만을 따릅니다. 거기에는 도덕도 선악도 없고, 논리적 사고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관념도 없고 무의식적입니다. 어린이의 정신은 거의 전부 이드로 이루어졌는데, 뒤에 이 이드의 일부가 외계와 접촉 변화하여 자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외로움과 혼란에 빠진 채 빈 거리를 방황하던 1909년 가을, 프로이트는 미국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귀국했습니다. 가장 아끼는 제자 카를 융Carl Jung(1875-1961)과 산도르 페렌치Sándor Ferenczi(1873-1933), 어니스트 존스Ernst Jones를 대동한 프로이트는 일주일 동안 누욕 시가를 관광한 뒤 매사추세츠 주의 워스터Worcester로 향했습니다. 프로이트는 클라크 대학에서 미국의 걸출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와 소련 태생의 미국의 무정부주의자 에마 골드만Emma Goldman(1869-1940) 등을 앞에 두고 연설했습니다.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독일의 심리학자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1832-1920)와 더불어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는 1855년에 유럽으로 기서 학창시절을 보낸 후 1860년 돌아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1872년 서른 살의 나이로 모교의 강사가 되어 생리학을 가르치다가 1875년에 심리학 강의를 하기 시작했고, 그때 미국 최초로 실험적 심리학 연구소를 개설했습니다.
소련에서 극장 지배인의 딸로 태어난 에마 골드만은 188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활동을 하다 1893년 뉴욕에서 체포되어 1년간 투옥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1916년에 산아제한 운동을 하다 투옥되었으며, 1917년에는 반전활동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19년에 소련으로 강제 송환되었지만, 소련 정부에도 반대했으며, 그 후 영국,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살았습니다. 에마는 1936년 스페인 내란이 발발하자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을 도와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 다녀온 뒤 프로이트가 이전에 하던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는 무의식이나 욕망의 근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특히 노이로제와 꿈, 예술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성적 충동과 공격 본능을 인간 행동의 근간이라고 보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권위의 문제, 인간 심리를 중앙에서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초자아superego 혹은 상위자아의 중재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자아는 상위자아 외에도 인격의 사회가치, 양심, 이상의 영역 등을 말합니다. 대부분 무의식적인 초자아의 기능으로서 개인의 행동에 대해 내부로부터 선악의 판단을 내려 그 행동을 촉진하거나 제약하며, 또한 행동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기도 하고, ‘나쁜’ 행동을 했을 경우 죄악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착한’ 행동을 했을 경우 자존심을 높여주기도 합니다. 유아기에는 선악이 부모나 주위 사람들의 판단에 맡겨지지만, 이러한 가치가 점차 본인 자신 속으로 도입되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