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1차 세계대전 때에 조국으로 돌아온 히틀러는 독일군에서 파견병 역할을 맡고 용감무쌍하게 임무를 수행하여 철십자 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히틀러는 뮌헨에 소재한 당원의 수가 손으로 꼽을 만한 소규모 정당에 합류하여 그 정당을 강력한 동맹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923년에 일격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투옥되었습니다. 투옥된 동안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과 독일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제시한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에는 오스트리아의 하급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부터 빈 시절의 고난, 정치적 이념이 자리 잡힌 청소년기, 정치활동을 시작한 청년기, 활발히 투쟁을 벌이던 전성기까지 모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는 정책적으로 독일계 민족을 소외시켜 그들의 언어조차 지켜 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독일인의 통일 민족국가에 대한 염원이 어릴 때부터 타오른 히틀러는 민족에 대한 광적인 집념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10년 동안 프로이트는 엄청난 활약을 했으며, 틈틈이 집필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히틀러는 독일의 걸출한 인사로 부각되었습니다. 그가 가장 갈망한 건 오스트리아였습니다. 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1938년에 수천 명에 이르는 군사를 이끌고 자신에게 비참함과 굴욕감을 안겨준 빈으로 향했습니다. 『나의 투쟁』에 기록한 것처럼 그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빈을 완전히 파괴하고 무에서 새로 건설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1938년 겨울, 나치는 프로이트를 격렬하게 증오했습니다. 1933년 독일의 야외집회에서 나치는 프로이트의 책을 태우면서 집행자가 외쳤습니다. “본능적 삶의 영광을 파괴하고 영혼에 저항한다. 인간 영혼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글을 불 속에 던진다!” 자신의 책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절망스러울 정도로 노쇠한 여든한 살 등이 굽은 프로이트는 말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만드는 진보란 과연 무엇인가. 중세였다면 그들은 날 화형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나의 책을 태우는 걸로 만족해한다.” 하얗게 센 턱수염이 양 볼에 달라붙었고, 창백해진 피부에 수차례에 걸친 암 수술로 자리를 벗어난 치아와 뼈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턱에 넣은 인공 보철물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프로이트는 무기력한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올빼미 같은 인상을 주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침략과 프로이트 말년 2년 동안에 일어난 드라마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의 수상 쿠르트 폰 슈슈니크Kurt von Schuschnigg(1897-1977)를 소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국방장관과 외무장관을 겸임한 슈슈니크는 ‘애국전선’의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히틀러로부터 합병을 강요당하자 국민투표로 독립을 유지하려는 저항을 했으며, 이에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로 침공하여 합방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슈슈니크는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7년 동안 구금되고 1945년 5월 오스트리아의 연합군 점령으로 석방됩니다. 그는 1948년 미국에 이주하여 1948년부터 1968년까지 세인트루이스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게 됩니다. 냈다.

빈을 침공한 히틀러는 슈슈니크에게 나치당을 공인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치를 오스트리아 정부에 입각시키고 두 나라가 군사협정을 맺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한편 프로이트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는데, 1938년 1월 22일 그는 15년 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암 수술을 다시 받아야 했습니다. 턱에서 시작된 종양이 어느새 눈구멍까지 접근해 손도 대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프로이트는 이틀 정도 요양소에 머무르다가 통증이 너무 심해 주금이라도 편히 지내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암이 흡연의 결과란 사실을 알았지만, 담배를 끊으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시가를 사랑한 그는 하루에 20개비까지 피웠습니다.

혹독했던 1월의 수술 뒤 2월 19일에 또 다른 수술이 이어졌습니다. 수술을 집도한 한스 피흐러Hans Pichler는 암 부위에 위치한 의심스러운 혹을 제거했습니다. 다행히 새로 자라난 종양은 음성이었습니다. 수술은 이전의 수술보다 덜 고통스러웠지만, 이미 쇠약해진 프로이트로서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프로이트는 50년 가까이 아내와 처제, 딸과 함께 살아온 베르크가세Berggasse 19번지의 아파트 2층에서 지내며 회복을 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신분석을 위해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처럼 그는 많은 시간을 긴 의자에 누워서 보냈습니다. 그는 시가를 피우면서 정지된 시선을 유지한 채 환자의 말을 듣고 또 들어야 했다고 슬픔에 잠긴 듯이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날 빤히 쳐다보는 걸 참을 수 없었어. 하루에 여덟 시간, 아니 그 이상을 말이야. 긴 의자는 환자들을 위해 만든 거였어.

관습에 쉽게 매혹된 프로이트는 세속적인 성공과 돈, 명성, 권위 있는 평판을 얻는 것, 나무랄 데 없는 부르주아 가정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자식을 정신분석학 이론에 따라 키웠느냐는 질문에 프로이트는 자기 아이들을 보통 아이들처럼 키웠으며, 특별한 양육방식이 있는 건 아니라고 투덜거리며 대답했습니다. 그는 평생 전형적인 부르주아로 살았습니다. 옷차림이 늘 말쑥했으며, 머리와 턱수염은 단정했고, 채무관계와 시간 역속을 오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에로틱한 삶은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처제 민나 베르나이스Minna Bernays와 정사를 벌였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 추측일 뿐입니다.

프로이트는 부인했지만, 그는 상과 명예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지만, 종종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한다고 말했지만, 사진 속의 그는 매우 지적이며, 침착하고, 권위적이며, 당당한 인상을 줍니다. 그는 여느 시인처럼 자신의 생각에 대범했을 뿐만 아니라 명쾌하고, 예리하며, 눈에 띌 정도로 자기비판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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