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는 미국인이 돈에 미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3월 9일 슈슈니크의 연설이 있고 얼마 뒤 미국이 프로이트를 돕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왔습니다. 프로이트는 1909년 융, 페렌치와 함께 뉴욕에 도착한 후 말했습니다. “우린 지금 이 사람들한테 역병을 옮기는 거야. 그런데도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어.” 프로이트는 미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처음으로 정신분석학의 성공을 맛보았지만, 미국에 대한 혐오감을 떨쳐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돈에 미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우아하지도 않고, 신비롭지도 않으며, 인생의 고차원적 쾌락을 향유할 능력도 없는 멍청이 유물론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전능한 달러를 숭배하고 달러를 벌기 위해 지독한 경쟁을 일삼는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정신분석학회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미국보다 정신분석학에 호의적이지 않다고 지적했을 때, 프로이트는 미국인은 사실상 정신분석학에 대해 아는 게 없다며 자신의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치가 빈을 위협하자 미국은 프로이트를 돕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3월 10일, 빈 주재 미국 대사관의 공사 존 윌리John Wiley가 프로이트를 방문했습니다. 윌리는 프로이트와 가족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윌리는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윌리엄 불리트William Bullitt의 절친한 동료였습니다.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세도가 출신으로 무척 예의 바른 불리트는 자신이 프로이트의 특별한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불리트는 1920년대 중반에 자살 충동을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 프로이트를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1930년에 프로젝트를 들고 다시 프로이트를 방문하고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관한 책을 프로이트와 공동 집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프로이트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프로이트에게 이런 식으로 함께 일하자며 접근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미국인이었습니다. 『시카고 트리뷴 Chicago Tribune』의 발행인은 프로이트에게 살인자 레오폴드Leopold와 로엡Loeb의 정신분석을 의뢰하면서 시카고로 오는 데 드는 경비 2만5천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제작자 새뮤얼 골드윈Damuel Goldwyn은 프로이트가 할리우드로 와서 영화 제작에 협력한다면 10만 달러를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언했습니다. 프로이트는 두 제안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불리트를 좋아한 그는 그의 제안만큼은 받아들였고, 윌슨에 관한 책은 제때에 출간되었습니다.

윌 리가 방문한 다음날인 1938년 3월 11일 금요일, 프로이트는 라디오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의 수상 슈슈니크가 국민 투표를 취소하고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슈슈니크는 대량 학살을 피하기 위해 독일 부대가 국경선을 넘어와도 오스트리아 군대는 대항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슈슈니크는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전 이제 오스트리아의 국정에서 물러납니다. 신이 오스트리아를 보호하시기를!

연설이 끝나자마자 빈에는 다시금 함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단일 국민, 단일 국가, 단일 지도자!” 현편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유대인에게 죽음을!” 미국인 기자 윌리엄 셔러는 젊은이들이 유대인 상점의 진열장에 포장용 벽돌을 던지는 걸 목격했습니다. 군중은 달걀 세례를 퍼부었고, 창문이 깨져 유리가 거리에 떨어지는 걸 보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여러 구호가 뒤섞인 빈의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을 타도하라! 하일 히틀러! 하일 히틀러! 지그 하일! 유대인의 씨를 말리자! 슈슈니크를 교수형에 처하라!

만자 십자장 완장을 찬 나치 당원들이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베를린에 최고사령부를 둔 나치는 오스트리아 정부에 새로 투입된 동료들에게 독일이 개입해서 질서를 바로잡도록 형식적 요청을 할 때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날 오후 9시 10분경, 독일의 원조를 요청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습니다. 10시 45분에는 히틀러의 대리인으로 이탈리아에 갔던 헤센의 필립 왕자가 총통에게 전화를 걸어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1883-1945)가 침략을 승인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3월 12일 오전 5시 30분, 바이에른Bayern 국경선에 집합한 독일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오스트리아로 들어갔습니다.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합병 안슐루스Anschluss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신문에는 침략을 정당화하는 히틀러의 선언문이 보도되었습니다. 선언문은 “독일-오스트리아의 국가사회주의 만세!”라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오스트리아로 입성한 나치 부대는 엄청난 환영 인파를 보았습니다. 거리에 몰려든 군중은 나치 부대가 가는 길에 꽃을 던졌습니다. 부대는 꽃에 눈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안경을 착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뮌헨에 있던 히틀러는 메르세데스 오프카를 타고 SS 부대의 보디가드를 대동한 채 오스트리아 국경선을 향했습니다. 오후 4시 10분 히틀러는 자신이 태어난 브라우나우Braunau에 도착했습니다.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네 시간 뒤 히틀러는 린츠에 있었습니다. 교회 종이 울리고 군중이 시청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구호를 외쳤습니다. “단일 국민! 단일 국가! 단일 지도자! 단일 국민! 단일 국가! 단일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시청 발코니에서 외쳤습니다. “국민을 분열시키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히틀러는 부모님의 무덤에 꽃을 놓았습니다. 고향을 방문한 그는 미래를 꿈꾸기 위해 호텔로 향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인이 독일에 권력을 이양하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동의해준 것으로 히틀러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인은 히틀러가 자신들의 구조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 경례했습니다. 그들은 히틀러가 자신들을 가난과 유약함에서 구제하고 유대인에게서 해방시킬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날 밤 호텔에서 히틀러는 동맹국 이상의 것을 기대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전체를 합병하여 그 나라의 자원과 국민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미국인 기자 셔러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오늘 아침의 빈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만자 십자장 깃발이 거의 모든 집 앞에 펄럭이고 있다. 어디서 그렇게 빨리 구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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