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맥호벡Frank MacHovec의 『한 권으로 읽는 동양철학』(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한 권으로 읽는 동양철학』: 신도神道, 사무라이의 도와 무사시의 오륜

 

 

 

 

신도는 ‘신’과 ‘길’을 뜻하는 글자로 이루어지며 주로 ‘신들의 길’로 번 역된다. 동물, 새, 사람, 혹은 바위, 꽃, 물 등 만물에 거하는 영적인 힘 혹은 성 스러운 존재(가미kami, 신)를 뜻한다. 신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중 하나이며 자연에 바탕을 둔 일본 고유의 종교이다. 신도 신자들은 중국의 도 교 신자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지니고 있다.

신도의 유래는 아주 오래되어 알기 어렵지만, 기원전 천 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도는 서기 6세기에 등장했지만 한국, 만주, 시베리아의 토속신앙 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신도에 따르면 기원전 660년에 신무천황神武天皇(진 무덴노, 기원전 711~585)이 일본을 세웠다. 신무천황은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의 5대손으로 어머니는 어버지의 이모이기도 한 천조대어신天照大御神이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도와 불교 사이에 공통되는 영역이 늘어나 지금은 신사와 불교 사원이 때때로 연계되고 일본인 대부분은 신도 의식이나 불교 의식 둘 중 하나에 관습적으로 참여한다. 신도는 경사慶事, 불교는 사후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인은 보통 전통혼례는 신도에 따라 치르고, 전통 장례는 불교에 따라 거행한다.

8세기 말에 등장한 양부신도兩部神道(Ryobu Shinto, ‘두 가지’라는 뜻)는 신도에 불교와 유교의 윤리가 혼합된 것이다. 일본만의 특징 있는 종교에 대한 갈망 에 힘입어 신도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국교가 되었고 학교에서도 가르치게 되었다. 하지만 신성함이 승계된다는 믿음과 학교의 신도 교육은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막을 내렸다.

 

오늘날의 신도

일본인은 일반인에게 열린 큰 신사뿐만 아니라 집, 길가, 정원, 공원, 해변 에 있는 신사에서부터 축제 기간에 설치되는 신사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역 의 신사에서 참배하며 신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신자들은 신사에서 해 당 신사의 신kami spirit께 기도를 올리고 공물을 바친다. 일본에는 3백만 명이 넘는 신도 신자와 10만 명의 승려, 8만 개의 신사가 있다. 인생의 중요한 단계들과 자연적 사건을 기념하는 특별한 의식과 축제가 벌어지며 남자아이는 세 살과 다섯 살, 여자 아이는 세 살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신사로 데려가 건강 을 기원한다.* 모든 신사는 매년 자체 축제를 연다.

천만 명이 넘는 일본인이 신도 의식에 참여하지만, 그중 자신을 신도 신자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신도 의식에 참여하는 이유는 동류의식과 자연을 숭배하는 전통을 따르기 때문이다. 신도의 전형적인 기도문과 의례는 건강과 행복, 평화와 성공을 비는 것이다. 신도를 특징짓는 상징 은 신역神域으로 통하는 문인 도리이[鳥居]**로, 독특하게 휘어진 가로대가 있고 높게 솟은 이 나무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외부세계를 떠나 해당 신사에서 모 시는 신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과 마찬가지로 신사는 보통 언덕이나 바위, 잔잔한 물처럼 푸른 자연과 가까운 조용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도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가정에 차 려진 제단 혹은 사당인 가미다나[神棚]*이다. 가미다나는 노송나무로 만드는 것이 좋고 때때로 신의 거울[神鏡]이 함께 놓인다.

신도에는 전능한 유일신이 없으며 자연이 중심이자 주된 관심사이다. 지 진, 홍수, 화재를 신성한 가미가 지닌 힘의 양상으로 본다. 신도에는 유대교나 기독교의 성서, 이슬람교의 코란 같은 경전이 없다. 또한 교리문답서와 엄격 한 교리도 필요없지만,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중요한 서적 이 있다. 두 권 모두 일본의 역사적 사건들을 신도의 신화 및 전설과 결합하 여 기록한 책이다.

신도의 주요 종파들은 고대의 방식, 신앙요법, 정화의식, 유교윤리, 또는 자 연, 특히 산에 대한 숭배를 보존하는 특정한 사명에 초점을 맞춘다. 개인이 창설하여 신자들이 이어가는 소규모 종파들도 있다. 모든 신도 신자가 지켜 야 할 네 가지 기본 약속이 있는데 자연을 숭배하고 몸과 영혼을 깨끗이 하며 가족과 전통을 존중하고 의식과 축제에서처럼 다른 사람과 유대감을 나누는 것이다.

 

 

사무라이의 도와 무사시의 오륜

 

신멘[新免] 무사시로 알려진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는 에도시대 초기의 무사이기도 한 이색적인 화가이다. 힘 있고 직선적이며 무사다운 패기가 있고 예리한 기백을 간직한 약필에 의한 수묵화, 특히 새 그림을 잘 그렸다. 쌍 검을 사용하는 검도인 니토류*를 개발하여 니텐이치류[二天一流]의 시조가 되 었다. 60여 차례의 결투에서 모두 승리한 전설적 검술가로서 검의 성인[剣�聖] 겐세이kensei라고 불렸다. 신도—선불교의 무사도와 검도의 엄격한 규율을 충 실히 지키는 사무라이들은 무사시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무도의 비법을 기록한 저서 『오륜서五輪書』에서 가르침을 배웠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많은 결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적을 죽이는 대신 나무 검을 선호했으며 적의 칼을 피하면서 번뜩이는 기지와 빠른 움직임으로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나이가 들면서 무사시는 칼싸움을 삼가고 명상, 그림, 목각, 금속세공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무사시는 쉰 살이 되어서야 전략을 참으로 이해했다고 말했다. 말년에는 혼자 동굴에서 살면서 1645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오륜 서』를 썼다. 무사시는 이 책을 ‘전략의 도’로 시작했다. 그는 전술을 선택할 때처럼 주의를 기울여 단어를 골랐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홀로 된 무사시는 자신의 인생이 끝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명상을 하며 시간 을 보내고 자신이 전하려는 말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무사시가 말한 ‘전략의 도’라는 용어는 오륜五輪이 노련한 무사의, 전쟁에 관한 조언인 동시에 명상 체계라는 것을 암시한다.

 

 

전략의 도

 

검술의 명수는 단순히 무사武士가 아니다. 전략의 도는 신에게서 나온다. 세상에

* 양손에 긴 칼과 짧은 칼을 들고 싸우는 쌍검법. 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각자의 방식대로 도를 이용한다. 농부는 농사를 계 획하여 작물을 심고 생산한다. 상인은 물건을 선택하여 비축하고 판매한다. 기 술자는 재료를 능숙하게 다루어 솜씨 있게 사용한다. 무사는 무기를 손에 익히 고 능숙하게 사용한다. 모든 부류의 사람은 먼저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하고 적 용할 기본원리를 파악하여 필요한 사람과 재료를 주의 깊게 선정한 뒤, 성공적 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한다. 전략의 도를 배우기 위해서는 이 모든 과정을 되새기고 이를 각자 자기 방식대 로 적용하라. 이는 한 가지 일을 극복하면 모든 일을 극복할 수 있음을 뜻한다. 한 가지 무기만 선호하지 말고 모든 무기에 대해 알아라. 자신만의 방식을 개발 하고 숙달하라. 다른 사람을 모방하거나 따라하지 마라. 시간과 적기適期가 중요 한데 여기에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내 전략의 도에는 모두 다섯 개의 고리가 있다. 전략은 얼마나 중요한 상황인지, 각자의 기지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다 양하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타이밍을 알고 이를 상대방의 예상에서 벗어 난 방식으로 사용하면 성공한다.

첫 번째 고리: 기초를 다져 뿌리내리기

그는 공식적인 교육, 직업훈련, 붓다, 공자, 혹은 자기가 믿는 종교의 도 덕적 가르침, ‘많은 기술과 기량’으로 성장의 기반을 면밀하게 다지라고 권 한다. 이 기반은 신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즉 ‘무사의 도(육체적)’와 ‘문 인의 도(정신적)’를 겸비해야 한다. 그는 아홉 가지 규칙을 제시하면서 이를 따르려고 굳게 마음먹고 부지런히 익히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1 정직하라.

2 도를 훈련하고 숙달하라. 능숙한 실력을 유지하라.

3 다른 모든 기술에 익숙해져라.

4 직업의 도에 익숙해져라.

5 이기고 지는 것,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을 분별하라.

6 직관을 기르고 인식을 높여라.

7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라.

8 세부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라(부수적인 것과 중요한 것).

9 불필요한 일을 하지 마라.

 

 

 

그의 가르침

“이 책은 영적 안내서이다. 한 자, 한 자 읽고 깊이 생각하라. 너 무 급하게 읽거나 생각 없이 읽으면 자신의 전술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읽되 받아들이지 못하면 가차 없이 실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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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 순수이성비판 』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접근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기술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며 그 역은 아니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칸트의 혁명적 사상은, 우리가 살고 있고 지각하는 세계는 단순히 우리와 독립해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지각자의 마음의 성질들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장밋빛 안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분홍색으로 보일 것이다. 칸트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은 우리는 대체로 세계에 관한 수동적인 정보 수용자라고 가정했다. 반대로 칸트는 세계의 지각자로서의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경험에 일정한 형태를 부과한다고 논증했다. 우리가 세계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적용시켜서,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지각 대상들의 공간적 관계에 따라 경험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원인과 결과 및 시간과 공간은 우리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저 바깥 세계에 존재하기보다는 지각하는 주관에 의해 부여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착용하는 ‘안경’이 우리의 모든 경험을 채색한다는 말이다. 이 유비를 더 끌고가면, 만일 우리가 그 ‘안경’을 벗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순수이성비판』은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우리가 이성만을 가지고 실재의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비판이다. 칸트의 결론은 지식은 감각경험과 지각자의 개념들 양자를 모두 요구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가 없는 어느 하나는 쓸모가 없다. 특히 현상의 세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은 이것이 경험에 근거하고 있지 않는 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순수이성은 초월적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접근할 열쇠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주의 깊게 고안된 ‘건축학적 체계’ 또는 구조에도 불구하고 매우 복잡하며 읽기 어렵다. 그 어려움의 일부는 주제 자체의 어려움, 즉 칸트가 인간지식의 한계를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어려움의 대부분은 그가 사용하는 전문용어와 그의 굴곡이 심한 문체의 직접적 결과이다. 그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특성은 부분들의 내적 연관성이다. 즉 이 저작의 온전한 이해는 그 모든 부분들에 대해, 그리고 이 부분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에 대해 알고 난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 저작의 주요 주제들 가운데 몇 가지만을 개괄할 만큼의 지면이 허용될 뿐이다.

선천적 종합 the synthetic a priori

데이비드 흄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지식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관념들의 관계와 사실 문제가 그것이다. 관념들의 관계는 정의에 의해 참이 되는 지식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모든 캥거루는 동물이다’와 같은 지식이 이에 속할 것이다. 우리는 캥거루에 관한 경험 없이도 이런 지식의 참을 확신할 수 있다. 이 지식은 단순히 ‘캥거루’에 대한 정의로부터 성립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동물이 아닌 캥거루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검토하기에 앞서 이미 이들이 ‘캥거루’의 의미에 대해 혼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는 ‘모든 캥거루는 동물이다’와 같은 진술을 ‘분석적’이라 불렀다.

흄이 구별한 다른 종류의 지식의 예는 ‘몇몇 총각은 동판화를 소장하고 있다’와 같은 것이다. 이 진술이 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길은 몇 가지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당신은 관찰과 독립해서 이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이 진술은 세계를 이루는 어떤 부분에 대한 진술인 것이다. 흄에게는 이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었다. 즉 진술들은 분석적이거나 경험적이어야 한다. 만일 진술들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인간의 지식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

흄의 저작을 읽음으로써 ‘독단의 잠’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한 칸트는 지식의 세 번째 유형을 인정한다. 칸트의 이른바 선천적 종합으로서의 지식이 그것이다. ‘종합적’이란 ‘분석적’에 대비되어 사용된다. 만일 한 진술이 정의에 의해 참이 아니라면 그것은 종합적이다. ‘선천적a priori’은 경험과 독립해서 참임이 알려지는 모든 지식을 지칭하여 칸트가 사용하는 라틴어원의 말이다.* 이 말은 경험으로부터 얻어짐을 의미하는 ‘후천적a posteriori’이라는 말과 대조된다. 흄과 같은 경험주의자에게 선천적 종합이라는 개념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만일 한 진술이 선천적이라면 그 진술은 반드시 분석적이어야 한다고 흄은 확신했다. 칸트는 생각이 달랐다.

몇 가지 예들을 좀 더 살펴봄으로써 칸트가 의미한 바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쉬울 것 같다. 흄이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을 인정한 반면에 칸트는 세 가지를 인정했다. 선천적 분석, 후천적 종합 그리고 선천적 종합이 그것이다. 선천적 종합은 ‘모든 캥거루는 동물이다’와 같은 판단들을 포함한다. 즉 이 판단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주지 않는다. 동물이라는 개념은 칸트가 말하듯이 캥거루라는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반면에 후천적 종합은 ‘모든 철학자들은 안경을 끼고 있다’와 같은 경험적 판단들의 영역이다. 이 판단을 검증하거나 반증하기 위해서는 관찰이 필요하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의 주요 관심사인 선천적 종합은 필연적으로 참인, 따라서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참임이 알려질 수 있는 판단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세계의 여러 면들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그런 판단이다. 이런 선천적 종합의 예는 대부분의 수학(예를 들어, 7+5=12와 같은 등식)과 ‘모든 사건은 반드시 원인을 가진다’를 포함한다. 우리는 ‘모든 사건은 반드시 원인을 가진다’와 ‘7+5=12’는 둘 다 필연적으로 참임을 안다고 칸트는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따라서 이 둘은 분석적이지 않다. 『순수이성비판』의 과제는 어떻게 그러한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한지를 검토하는 일이다.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결국 우리 또는 그 어느 다른 의식 존재가 무엇이든 경험을 하려면 과연 무엇이 반드시 참이어야만 하는가를 설명하는 일이 된다.

현상과 물 자체 appearances and the thing-in-itself

칸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현상들phenomena’의 세계)와 이것 뒤에 놓여 있는 실재를 구분한다. 이 실재는 ‘본체들noumena’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에 접근할 통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에 대한 지식에만 접근이 허용된다. 본체들은 우리에게 영원히 신비로 남아 있다. 따라서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대부분의 형이상학적 사변은 길을 잘못 들었다. 그런 사변은 본체계의 특징들을 기술하고자 하지만, 우리의 운명은 전적으로 현상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세계에 대한 감각정보의 수동적 수용자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지각활동은 데이터를 수용하는 것 이상을 포함한다. 수용되는 어떤 것은 판별되고 조직될 필요가 있다. 칸트의 용어로 직관은 개념 아래에 놓인다. 개념 없는 경험은 무의미할 것이다. 즉 칸트가 말하듯이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나는 직관(감각 경험) 없이 내 앞에 있는 워드 프로세서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또한 그 직관내용을 그 어떤 것으로 판별하고 또 재판별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런 일은 그 직관내용을 개념 아래에 놓는 일을 포함한다. 직관을 다루는 마음의 능력이 감성이며, 개념을 다루는 능력은 오성(지적 능력: 옮긴이)이다. 지식이 가능한 것은 이렇듯 감성과 오성의 공동 작업에 의해서이다.

시간/공간 space/time

시간과 공간은 칸트의 용어로 표현하면 직관의 형식들이다. 이것들은 물 자체에서 발견되는 성질들이라기보다는, 우리 경험의 필연적 특성들이다. 시간과 공간은 지각자에 의해 부여된다. 달리 말하면 내가 창을 통해 아이들이 노는 것을 내다볼 때, 나에게는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공간이 내가 부여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실재의 특성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칸트의 논지에 따르면 그 사태에 대한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 나는 나의 지각들을 공간적으로 조직해야만 한다. 나는 공간을 떠난 지각을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사건들을 순서 짓는 일도 내가 직관들에 가하는 어떤 것이다. 내가 지각하고 있는 대상의 내적 성질이라기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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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맥호벡Frank MacHovec의 『한 권으로 읽는 동양철학』(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태극권太極拳, 파룬다파, 파룬궁, 곽암의 십우도

태극권太極拳

태극권은 중국 무술인 쿵푸나 우슈의 한 형태로 정, 기, 신의 내면 수련을 중시하는 내가권법內家拳法이다. 이것은 의식과 동작의 협조를 추구하고 노자의 기에 전념해 부드러움에 이르는 전기치유專氣致柔, 부드러움으로 굳센 것을 이기게 하는 이유극강以柔克剛, 그리고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압하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싸울 때만 태극권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수행이 나 느린 춤 형태로도 활용한다.

태극권이 언제 생겼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1000년에서 250년경 사이로 추정된다. 철학에서 태극은 음양 그리고 물, 나무, 불, 흙, 쇠라는 오행의 신비로운 화합을 추구한다. 음양 기호도 태극을 상징하지 만, 음양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원 주위에 기본적인 『주역』 8괘를 더하기도 한다.

태극권의 의식은 원래 대결에 사용되는 신체동작을 이용하며 체계적이고 일정한 양식의 운동 형태를 띠고 느린 동작으로 행해진다. 이가 창조 과정을 시작하여 그 결과로 물질[]이 나온다고 믿었다. 태극권의 의식에서는 이 과정을 반복하여 개인적으로 음양과 오행의 신비로운 화합을 이룬다. 태극권은 지금도 중국 전역에서 널리 수행되고 있다.

파룬다파wheel of law, 파룬궁

파룬다파(법륜공法輪功), 파룬궁(몸, 마음, 기의 길the way of body, mind, and spirit energy)은 다섯 동작을 바탕으로 한 고대 중국인의 수행법으로 보통 음악에 맞춰 손동작과 함께 특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수련동작 중 세 가지는 주 로 신체와 관련이 있고 나머지 두 가지는 명상과 관련 있다.

최근에 사범 리라고 불리는 이홍지洪志가 불교와 도교 원리에 기공氣功* 을 결합시켜 창시한 수련법인 법륜공의 지도자로 등장했지만, 많은 관련자들 은 지도자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법륜공은 불가의 상승수련대법인 법륜 대법法輪大法을 최고 수련방법으로 삼는다. 즉 진·선·인眞善忍을 근본 원리로 하는 법륜대법을 통해 몸과 마음을 함께 수련하되, 물질적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집착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이 지은 세세생생世世生生**의 업을 닦 는 데 목적이 있다. 법륜공이 1992년 5월에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총본산인 법륜대법연구회를 정점으로 39개의 수련총부, 1,900개의 지부, 2만 8천 개의 수련장이 세워지고 1억 명이 넘는 수련자들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 가 정확하다면 중국 공산당원의 수를 넘어서는 것이다. 법륜공 수련자가 폭발적으로 늘자 중국 당국은 1999년 7월, 법륜대법연구회와 산하 조직을 불법

* 기해단전氣海丹田의 공력이라는 뜻으로 단전호흡을 달리 이르는 말.

** 몇 번이든 다시 환생하는 일. 화하고,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는 한편, 단순한 사교집단으로 몰 아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법륜공 지지자들은 이 운동이 사교나 종교가 아 닌 삶의 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법륜공은 풍수, 불교, 도교의 요소들을 포함하는데 거기에 기공의 중요성 을 더한 것이다. 기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보편적 생명력이며 공은 이를 높이는 방법이다. 붓다가 요구했듯이 법륜공은 수행자들이 자유롭게 들어왔다 나가고 되돌아올 수 있는 자발적 활동이다. 급여를 받는 직원, 회비, 수수료가 없을 뿐 아니라 입문자격도 없다. 법륜공의 상징은 만*이지만, 히틀러의 나치즘과는 상관이 없다. 만 자는 인도, 중국, 중동, 게르만 유럽,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하기 전 북미에서 사용되던 고대 기호이다. 이 기호는 시계 방향 으로 회전하면 에너지를 흡수하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면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여겨진다.

곽암廓庵의 십우도十牛圖

곽암은 12세기 중국의 선사였다. 곽암 선사는 영적 깨달음을 소를 찾아 길 들이는 것에 비유했다. 십우도(혹은 심우도尋牛圖)는 연속되는 열 단계로 구성 되어 있으며 각 단계는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의 말로 시작해 곽암 선사의 충 고와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각 단계를 완전히 익히면 깨달음에 이른다.

* 붓다의 가슴에 있는 길상吉祥의 표시.

 

1. 소를 잃어버리다 The Bull Is Missing

삶은 높이 자란 수풀을 헤치고 소를 찾는 것과 비슷하구나.

미지의 강과 네거리, 먼 산들까지 뒤졌지만, 지쳐서 소를 찾을 수 없다.

 

곽암의 충고

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대의 진정한 자아와 초월적인 본 성에서 분리되어 그대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소를 찾지 못한 것은 그대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의 평범한 감각과 기술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힘을 빠지게 하고 당혹감과 외로움을 느껴 소를 잃어버렸다 고 믿게 된다. 깨달음이 없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2. 자취를 발견하라 Here, Tracks

여기 강둑에 발자국이 있구나!

여기 풀숲에는 더 많은 발자국이 있구나!

발자국이 내 얼굴의 코만큼이나 또렷하구나.

 

곽암의 충고

그대는 소를 본 것이 아니라 무언가 거기에 있었다는, 겉으로 드러난 흔적만을 본 것이다. 삶에는 그대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인식하면 소가 떠나고 남은 흔적뿐 아니라 소도 볼 수 있을 것 이다. 선택해야 한다. 그곳에 있는 것을 볼 것인가? 스스로 보기 원하는 것을 볼 것인가? 그대는 이렇게 곤경에 빠지게 된다.

3. 멈추고 경계하라 Stop, Be Alert!

소를 찾다 잠시 쉬니 새 지저귀는 소리 들리는구나.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부드러우며 나무가 푸르다.

아직도 소를 볼 수 없다. 소가 여기에 없다.

 

곽암의 충고

노력이 지나치지 않을 때,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을 것이다. 푸른 나무는 구하지 않아도 낮에 평온을 가져온다. 새 지저귀는 소리와 부드러운 산들바람은 밤을 더욱 고요하게 해준다. 이것들은 스스로 나타나서 말하며, 둘에 둘을 더하여 다섯이 되는 것처럼 각자 있는 것보다 함께 있을 때 더 욱 강해진다. 그대의 생각과 감각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라. 그러면 인식이 발달해 소에게 가는 길이 열릴 것이다.

4. 싸워서 소를 잡이라 Fight It, Catch It

문이 열리자 소를 잡고 뒹군다.

힘세고 고집 센 소가 달아나는구나.

나는 깎아지른 낭떠러지 위의 구름보다 높이 있구나.

 

곽암의 충고

그대는 소를 만났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소는 본성에 따라 가고 싶은 곳으로 간다. 소는 그 지역을 그대보다 잘 알고 있다. 그대는 그대 본성 에 따라 돌아다닌다. 그대가 소를 만났다는 사실은 전보다 인식이 높아졌음 을 보여주지만, 소가 달아난 것은 인식을 더욱 발달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5. 소를 길들여라 Tame It

소를 찾아 길들였지만 여전히 소가 달아나는구나.

소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면 좀 더 길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소는 나와 함께 머물고 달아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곽암의 충고

좋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열어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놔두어라. 단순하게 살아라. 마음이 바쁘면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지나치면 너무 가득 차서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없다. 항 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 본성대로 놔두는 데서 시작하라. 무엇이든 억 지로 본성을 거스르면 악과 망상에 이르게 된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아라.

6. 소에 올라타라 Ride It

소 등에 올라타고 피리를 분다.

우리는 조화롭게 박자를 맞춘다.

들리는가? 와서 함께하자.

 

곽암의 충고

그대 자신, 소,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각자의 진정한 마음을 연다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면 더는 실패감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않아 힘들 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은 어디에서든 새, 동물, 물고기, 아이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7. 소를 초월하라 Transcend It

소와 내가 집에 도착했다.

우리는 함께 조용히 쉰다.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

 

곽암의 충고

모든 생물에게 공통된 하나의 본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마음 깊은 곳에 평화가 찾아든다. 그러면 방해물과 싸울 필요가 없다. 만물이 자기 본성대로 흘러가고 만사형통한다.

8. 자신을 바꾸어라 Transform Yourself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나누면 차이가 서서히 사라진다.

우주는 광대하고 놀라우며 자유롭다.

이러한 길을 따르는 것이 깨달음이다.

 

곽암의 충고

차이를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 갈등도 없어진다. 차이는 저절로, 그리고 스스로 나타난다. 차이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 할 필요도, 차이를 만들거나 고칠 필요도 없다.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면 누구와도 친해지기가 어렵다. 칭찬도, 경멸도 진정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 도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통찰은 명확하고 무한하며 앞과 위로 나가는 길을 밝혀준다.

9. 근원을 알라 Realize the Source

깨달음을 얻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눈과 귀가 머는 편이 쉬울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는 것은 꽃이 활짝 피는 것과도 같다.

 

곽암의 충고

진리와 지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 변치 않는다. 이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걸린다. 깨달음은 조용하다. 깨달음을 좇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신경 쓰지 않아도 깨달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산, 계곡, 바다, 강은 자체적인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파괴된다.

10. 초월하라! Transcend!

나는 모든 사람과 만물 앞에서 벌거벗은 것처럼 소통한다.

가난하지만 부유하고 행복하다. 더 오래 혹은 더 잘살기 위한

비법이란 필요 없다. 내게는 죽음조차도 사는 것이다.

 

곽암의 충고

이 단계에 이르렀다면 이제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비록 나에게만 아름답다 할지라도 내 정원은 아름답다.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찾을 필요가 없다. 나는 일하고 거리를 걸어서 귀가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누구와도 한껏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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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장-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도처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사회계약론』의 첫 줄을 장식하는 이 구절은 과거 200년 동안 많은 혁명적인 사람들의 가슴을 휘저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같은 책에 나오는 다른 견해, 즉 국가의 일반 선을 위해 행동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자유롭도록 강제되어야’한다는 다소 당혹스런 견해에 의해 상쇄된다. 이 견해는 마치 무엇이 진정으로 국가의 선을 위한 일인지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자행될 수 있는 직권남용에 대한 면죄부를 제공하는 듯이 보인다. 이 두 가지 사상은 루소 철학의 비타협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는 논란이 되는,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견해를 아무런 두려움 없이 표출한다. 그런 견해를 익명으로 출판하는 것이 관행이었던 시대에 루소는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썼다. 그 결과로 그의 많은 저작이 금지되었고, 그는 늘 박해의 두려움 속에서 살았으며, 수차례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말년에 그가 과대망상에 빠져 자신이 국제적 계략의 희생자라고 믿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의 중심 과제는 합법적 권력의 근원과 한계를 설명하는 일이다. 그는 국가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사회계약에서, 또는 그가 때때로 사용하는 표현인 사회조약social pact에서 온다고 믿는다. 이런 계약을 통해 여러 무리의 개인들이 하나의 정치체로, 즉 그 자체의 일반 의지를 ─ 이것이 반드시 구성원들의 개별적 의지들의 총합일 필요는 없다 ─ 갖춘 전체로 변모된다.

사회계약 social contract

홉스와 로크를 포함한 사회계약의 전통에 있는 대부분의 저술가들처럼, 루소는 사회계약을 마치 역사적 사건인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그는 사회계약이란 개념을 가지고 실제의 국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하려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사회계약이란 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개념적 장치에 불과하다. 루소는 역사의 한 시점에 사람들이 실제로 모여 서로 계약을 행했던 적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국가의 관계는 그러한 연합이라는 가설적 근거를 고찰함으로써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의 구성원에 의해 이루어진 기본적 합의는, 그들이 자신들의 공공선을 위해 연합하리라는 의사를 포함한다. 혼자 살아가기보다는 사회의 일부로서 서로 협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 사회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들은 서로 합작하여 국가를 세울 강력한 동기를 가진다.

얼핏 보기에 루소는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이상을 즐기는 듯이 보인다. 그는 모든 인간이, 심지어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영유하는 자유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삶의 커다란 혜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적 자유는 인간성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전적으로 포기한다면, 즉 노예가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이 못된다. 만일 사회가 우리의 자유를 전부 앗아간다면 사회에 가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잃을 터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는,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희생함이 없이 국가를 세울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이 과제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당신이 보호의 혜택을 위해 당신의 자연적 자유의 대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사회적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소는 자신의 독특한 사회계약론이 진정한 자유와 사회의 결실을 결합시켜줄 처방을 제공해주리라고 믿는다. 이런 설명의 중심부에 그의 일반 의지론이 있다.

일반 의지 the general will

한 번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로 통합되면 이들은 공동의 목표에 의해 연합된다. 일반 의지란 전체로서의 국가의 바람을 말한다. 즉 일반 의지는 공공선을 추구할 것이다.

일반 의지라는 개념은 만인의 의지라는 개념과 비교할 때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함께 국가를 세운 개인들 모두는 어떤 특정한 결과를 바란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국가를 통해 무언가를 얻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인들 모두가 세금 삭감을 원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들 모두의 의지는 세금을 낮추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전체로서의 국가가 세금을 높게 유지함으로써 무언가 얻기를 기대한다면 이것은 일반 의지가 된다. 비록 개별적 이익을 노리는 개인들이 이 정책에 따르고 싶어 하지 않을 지라도 말이다. 공공선을 위해서 세금은 높게 책정되어야 하며, 이것에 저항하는 사람은 누구든 ‘자유롭도록 강제되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나 개인으로서는 신작로가 내 뒤뜰을 통과하지 않는 것이 기득권적 이익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새 도로가 공공선을 위해 최선임이 밝혀진다면 국가의 일원으로서 나는 반드시 이것을 의지해야 한다.

루소의 철학은 사적 이익과 욕구를 가진 대개는 이기적인 개인들과 국가의 일부로서의 개인들 사이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후자의 공중의 역할에 있어 일반 의지에 반대할 권한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 자신의 더 나은 자아에 등을 돌리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개인으로서 가지는 이기적 욕구는 언제나 일반 의지의 더 높은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 일반 의지는 공공선을 위해 존재하며, 국가의 존속은 그 구성원들이 사적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상충되는 곳에서 사적 이익을 보류하는 행위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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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데이비드 흄의 『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

 

 

 

플라톤을 제외하고 대화 형태의 글로 성공한 철학자는 거의 없지만, 가장 인상적인 예외에 속하는 사람이 흄이다. 흄의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이하 『대화』)는 철학적 논증에 있어서나 문학적 면모에 있어서 하나의 대작이다. 소크라테스에게만 주역을 맡겼던 플라톤과는 달리 흄은 세 명의 주요 대화자들, 즉 데미아, 클리안테스, 그리고 필로에게 골고루 좋은 논증을 나누어주었다. 비록 전체적으로는 마지막 인물에게 공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대화체의 효과는 독자를 논쟁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으며, 고대 로마의 작가 키케로에게서 빌어온 기술인 대화에서의 치고받기를 검토함으로써만 발견될 수 있다.

흄은 이 저작을 그의 생존 시에 발간하지 않았다. 종교 권력자들로부터의 박해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뒤에는 반드시 출간되도록 하기 위해 무척 힘썼다. 이 책의 중심주제는 ‘기독교 신의 존재를 옹호하기 위한 설계 논증design argument’이다. 이 설계 논증은 자연종교 옹호자들, 즉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과학적 증거 위에 정초시켰던 사람들의 버팀줄 구실을 했다. 자연종교는 통상 계시와 대조되었다. 계시는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해 여러 복음서가 제공하는 입증인데,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들, 특히 부활에 대한 복음서들의 설명을 포함한다. 흄은 이미 (앞장에서 논의된)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에 실린 ‘기적에 관하여’라는 말썽 많은 논문에서 계시의 주장에 대해 집중공격을 시도한 바 있다. 『대화』에서 자연종교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공격당한다. 여기서의 논증들은 흄 자신의 말로써가 아니라 가공인물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는 말이다.

등장인물들 the characters

『대화』에서 실제로는 다섯 명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모든 논쟁은 세 사람의 주요 발언자들, 즉 클리안테스, 데미아 그리고 필로에 의해 진행된다. 전체의 대화는 팜필루스가 그의 친구인 헤르미푸스에게 보고하는 형식이지만 이들 중 아무도 철학적 토론에 참가하지는 않는다.

세 명의 주요 인물들 각자는 뚜렷한 입장을 보인다. 클리안테스는 설계 논증, 즉 우주에서 명백히 관찰되는 설계가 신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견해를 신봉한다. 그렇기에 그는 자연종교의 옹호자이다. 데미아는 신앙주의자이다. 그는 이성에 신뢰를 두지 않는다. 신은 존재하며 고유한 속성들을 가진다는 것을 신앙으로서 믿는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소위 제일원인 논증이 신 존재에 대한 결정적인 입증이 된다고 믿는다. 필로는 완화된 회의주의자로서 흄 자신이 기꺼이 사용했음직한 논증들을 (한 가지 예외가 가능하지만) 제시한다. 『대화』에서 필로의 기본 역할은 다른 두 인물들이 내놓는 입장들을 비판하여, 이성은 신의 속성들에 관해 그 어떤 중요한 것도 드러내주지 못함을 밝히는 일이다. 특히 설계 논증과 이 논증이 이끄는 결론들에 대한 그의 비판은 통렬할 정도다. 이 책의 대부분에서 필로는 쉽게 무신론자로 확인된다. 그러나 정작 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고 생각하며 중요한 물음은 그가 어떤 속성들을 가지느냐에 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발언이 권력자들이 그 저작을 무신론의 옹호라 하여 금지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흄이 덧칠한 아이러니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설계 논증 the design argument

클리안테스는 요즘은 ‘설계 논증’으로 더 잘 알려진 ‘후천적 논증argument a posteriori’을 제시한다. 후천적 논증이란 경험에 기초한 논증을 말한다. 이 논증은 자연세계를 고찰함으로써 전지·전능·자비의 신이 존재함을 입증할 수 있다고 하는 논증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변을 둘러본다면, 우리는 자연세계의 모든 측면이 명백한 설계의 징표들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기계처럼 서로 잘 맞추어져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눈은 보는 일에 기가 막히게 적합하다. 수정체와 각막, 망막은 어떤 우월한 지능체에 의해 면밀히 사려된 듯이 보이며, 눈의 설계와 제작은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진 그 어느 것보다도 정교하다. 이런 관찰로부터 클리안테스가 이끌어낸 결론은, 자연세계는 지적인 창조자에 의해 설계되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 창조자는 그의 작품의 위대함과 장엄함에 걸맞은 지성을 갖추었음에 틀림없다. 달리 말하면 클리안테스는 자연과 인공물 사이의 유비를 이끌어내고 있으며, 이 유비에 기초하여 신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신은 전능·전지하고 자비롭다고 결론짓는다.

이 논증을 더 뒷받침하기 위해 클리안테스는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예들을 사용한다. 만일 우리가 어둠 속에서 알아들을 만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지당하게 거기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뚜렷한 음성은 이런 결론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클리안테스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작품은 신의 존재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클리안테스가 사용하는 또 다른 예는 살아있는 도서관의 예이다. 책들이 식물들처럼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상상해보자. 만일 우리가 징표들(의미 있게 질서를 갖추어 배열된 단어들)로 가득한 어떤 책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정적인 증거로, 즉 그 책이 어떤 지성을 갖춘 존재에 의해 쓰였다는 증거로 삼을 것이다. 설령 책들이 스스로 재생산 활동을 한다 할지라도, 이런 사실이 그것들이 사유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는 증거를 약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연이라는 작품 안에서 지성과 설계를 읽을 수 있다고 클리안테스는 주장한다. 오직 눈먼 독단론자만이 자연이 제시하는 신의 존재와 속성들에 대한 증거를 부정할 것이며, 적어도 클리안테스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지만 『대화』의 많은 분량이 필로에게 그리고 일정 분량이 데미아에게 할당되어 이들이 클리안테스의 논증을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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